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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최근 수정 : 2019년 7월 31일 (수) 17:44
김대중

목차

개요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김대중에 대한 기록들

김대중에 대한 “전설적” 자료로서는 아마도 1986년 1월 30일에 발간된 이한두(李澣斗)의 저서 “유신공화국”의 36쪽부터 47쪽까지에서 언급된 내용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이한두씨는 1995년 9월에 발간된 “한림공론 (澣林公論)”에서도 김대중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다음 1980년 5월 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인 시바다 미노루(紫田 穗)가 일본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에 김대중에 대한 연재기사를 싣고 이를 기초로 하여 1981년 3월 “김대중의 좌절”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이외에도 김대중의 경호원 출신인 함윤식이 집필한 “동교동 24시” 조갑제가 쓴 “김대중의 정체”, 김진배(金珍培)의 “김대중 수난사-인동초의 새벽”, 손충무의 “김대중 X파일” 등이 있고 이 밖에도 이도형, 천봉재 등의 저작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충무의 “김대중 X파일”은 그 신빙성이 다소 의심스럽다는 견해가 있으니 이의 인용에는 주의를 요한다. 한편 김대중 자신의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도 있지만 자기 변명성 기술로 편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아 이를 참고함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최근에 출판된 저작으로는 전 국정원 직원인 김기삼씨의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가 있고 지금은 절판되어 찾기 어려운 정의순 저 “김대중 체미 775일”도 있다. 한편 김대중의 출생비화에 대하여는 손창식씨가 거의 10여년에 걸쳐 김대중 출생 현지 답사를 통하여 조사한 녹취록이 있다. 이 녹취록은 이 사이트에 별도의 항목으로 올려져 있다.


생년월일의 불확실성

김대중의 생년월일은 기록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3가지 다른 날자가 존재하는데 김대중은 필요에 따라 이 세가지 생연월일을 선택하여 사용해 왔다.

호적상, 김대중의 생년월일은 1925년 12월 3일로 되어있으나 이는 1943년 7월 10일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에 즈음하여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1924년 1월 16일이었던 출생일을 정정한 날자로서 그 정정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1923년 1월 6일 설이 있는데 이는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 선거당시 유세연설 과정에서 “박정희씨는 뱀띠(1917년생, 丁巳生) 이고 나는 돼지띠(1923년 癸亥生) 이므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박정희씨를 잡아 씹어먹어버리겠다” 고 말함으로서 자신을 돼지띠로 주장한데서 유래한다. 한편 김대중의 어린시절 동네 사람들도” 김대중은 돼지띠”라고 말하고 있다.[1]

김대중은 1987년 10월 30일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같이 자신의 연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金위원장의 나이, 연세문젠데 저희가 71년 선거 때 기억하기로 박정희씨와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 김 위원장은 나는 돼지띠요, 박정희씨는 뱀띠라 뱀이 돼지한테는 꼼짝 못한다, 그래서 이 선거는 필연코 내가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돼지띠로 계산하면 지금 예순 다섯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1925년 출생으로 되어 있어 어느 쪽이 맞는가를 말해 주십시오.

김대중 : 나이는 돼지띠입니다. 그런데 호적은 달라서 만으로 두 살 차이가 납니다. 우리 나이로는 12월 생이지만 65세입니다.

김대중이 돼지띠라면 1923년 생이 된다.

이 밖에도 김대중은 1997년 11월 18일, “5.18광주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에서 “호적 이전에,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1924년 1월 6일 생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김대중은 1988년 11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민정당 정동호 의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동호 위원 : 다음 증인께서는 출생신고시에 최초 생년월일인 1924년 1월 16일을 43년도에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하였습니다. 그 후 TV 기자회견시에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3년 1월 6일로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인의 3개의 생년월일 중 정확한 것은 어느 것이고, 생년월일을 두 번씩이나 수정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대중 : 이것은 정말로 광주하고 관계없는 일인데, 물으시니까 답변드리겠습니다. 세 번은 아니고 한번 고쳤는데, 호적 이전에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1924년 1월 6일생입니다. 그런데 호적은 1923년 12월 3일인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것을 1925년 12월 3일로 고쳤는데, 고친 때를 보면 알지만 그때 일본 군대에 걸려가지고 제가 1기생으로 군대에 가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24년 12월로 하면 한 기가 늘어지고 25년 12월로 하면 또 한 기가 늘어져요. 그래서 되도록 군대를 안 보내겠다는 가정의 생각에서 그렇게 호적을 바꾼 것입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김대중의 이 청문회 증언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제의 학병이나 자원병 제도에 김대중은 해당되지 않는다. 일제의 징병도 1944년 하반기부터였다. 이것도 무조건 징병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호적을 마음대로 고칠 수 없었다. 지금도 호적 정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대중은 1997년 10월 8일에 있었던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도 자신의 나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대중 : 제가 태어난 것은요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달이에요. 그런데 호적은 1925년 12월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느냐, 일제시대 때징병제도가 취해져 가지고 한국사람들을 군으로 끌어갔어요. 그런데 23년을 그대로 두면 일본병대 1기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런데 25년 12월로 해놓으면 2기 늦어져 가지고 11 월말까지 가니까 3기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나는 호적이 잘못되었지 나이는 더 많습니다. 이래 가지고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얘야 일본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걸 용납할 리가 없다. 지원병은 30세도 들어가지 않냐. 그러니까 오히려 너는 줄여 가지고 한 2기쯤 늦게 하면 그동안 전쟁이 끝날 수도 있지 않냐. 이렇게 판단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호적신청을 했더니 다행히 제 것만 통과가 되었어요. 그래서 1기는 모두 군대를 갔는데 2기도 일부 가고 저는 안 갔습니다. 그래서 생년월일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달이에요”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1923년 1월이 양력 생일이고 음력으로는 생일이 1922년 12월로 해석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 띠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김대중은 개띠가 된다.

김대중 비서실에서 펴낸 자료에는 김대중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김대중은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4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뒷날 그의 호를 후광이라 붙인 것도 동네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마을 이름을 자기의 호로 삼음으로써 이 마을 이름을 세계에 심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출생은 1925년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실제 나이는 1923년생이며, 돼지띠로 지금 우리 나이로 쳐서 67세이다. 대부분의 그 무렵 시골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자기가 난 지 몇 년 뒤에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김진배 지음, 김대중 비서실 편『인동초의 새벽』도서출판 동아, 1987)

김대중 자서전에는 김대중의 생년월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궁리 끝에 호적의 생년월일을 정정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50살 때도 입대시키는 시대였기 때문에 징병연령이 2년이나 3년이 지났다고해도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군대에 갈 수밖에 없다면 되도록 늦춰보려고 한 것이다. 나도 될 수 있으면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아서 호적정정을 찬성했다.아버지와 둘이서 머리를 짜낸 끝에 태어난 생년월일을 일년 늦춰서 1925년 12월 3일로 했다. 정확히는 처음 신고한대로 양력 1924년 1월 6일, 음력 1923년 12월 3일이었는데 그것을 바꾼 것이다.

그때 징병은 1924년 11월 말일까지 태어난 사람에게 해당되었기 때문에 1년 늦춰서 12월 3일생으로 신고하면 실제 징병연령에서 2년 늦춰지는 셈이었다.제대로 갔으면 1기였을 텐데 이렇게 해서 3기가 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도 정확하게 호적에 넣는 일이 거의 없었다.몇 년이나 신고를 하지 않기도 하고 종종 형과 아우의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있었다. 그래서 호적을 정정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에 본래대로 해놓으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1925년 12월 3일 생이다. 대통령 후보로서 정식으로 신청한 생년월일은 호적대로 1925년 생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호적상 스무살이 되던 1945년 봄에 나는 징병검사를 받았다. 본적지에서 검사받는 것이 규정이어서 어머니와 고향인 하의도로 갔다. 장소는 옛날에 다니던 초등학교였다.(『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P38~39)

김대중은 일본 제국주의가 50살이 된 사람도 입대시켰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이다. 일제시대는 호적 정정을 임의로 할 수 없었다. 김대중 말대로 호적을 정정하여 징병을 연기할 수 있었다면 전국적으로 그러한 일이 많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시에는 50살이 된 사람을 호적의 나이가 징집연령에 해당한다고 입대시킨 일이 있었다. 김대중 말대로라면 도대체 어느 시대를 살았는지가 의심이 된다.

김대중이 말한 생년월일 중 1923년 1월 6일이 있는데, 한국전 당시 정부는 1924년 출생 이후부터 징집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대중의 생일 중 1923년 1월 6일 생일은 군 징집기피용이라 해석하는 이도 있다. 한국전쟁에서는 나이가 많아 징집이 되지 않은 이들도 국민방위군으로 편입되었다.

유년기

복잡한 가정환경

김대중의 복잡한 가정환경을 살피기 전에 공식기록인 호적을 살펴보자.

먼저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의 호적은 다음과 같다. 1893년 6월6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현신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에서 부 장지숙(張之淑), 모 주귀심(朱貴心)의 장녀로 태어 났으며 1911년 3월 10일 제갈성조와 혼인신고하여 부 장지숙의 호적에서 제적되었다가 1925년 12월 8일 호주 장지숙의 신고로 장지숙의 호적에 재입적된다. 1934년 10월 10일 장지숙의 사망으로 호주상속을 하고 1960년 6월 5일 김운식과의 혼인신고로 본 호적에서 제적된다. 세 호적에서 장노도는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1번지, 김운식의 처로 입적되었다.

공식적인 호적에서와 같이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는 1911년 3월 제갈영범의 차남 제갈성조와 혼인하였다. 혼인후 거의10년간 장노도는 제갈 성조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다고 한다. 혹자는 이 사실이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의 호적초본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한다. 병사했다는 설도 있고 바다에 나갔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김대중의 호적에는 본적이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2번지”로 되어있고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 호주 장문숙(張文淑)의 장녀 장노도 (를 어머니로 하여)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서자출생 김대중((金大仲)이란 이름으로 부 신고, 1924년 7월 7일 접수, 입적 한것으로 되어 있다. 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부기(附記)가 있다 “출생년월일의 기재에 착오 있어도 호적정정의 신청을 하지 않이(아니)함으로 단기 4276년 *월 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에 인(因)하여 단기 4276년(1943년) 7월 10일 기(基)의 출생년월일 단기 4257년(1924년) 1월 16일을 단기4258(1925년)년 12월 3일로 정정함”

그렇지만 1925년이라는 김대중의 생년은 불가능하다. 그 결정적이유는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된 날자가 1924년 7월7일로 기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어나기 1년전에 출생신고를 했다는 꼴이니 아무리 국제사기꾼이라도 이것만은 속일 수가 없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이 호적의 기록과는 달리 김대중의 실제 생년(生年)은 1923년으로 그는 돼지띠임이 분명하고 생부 제갈성복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여 임신 수개월이 된 제수 장노도에게 자신이 살고 있던 오림리(五林里)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後廣里), 즉 장노도의 친정 근처에 주막집을 차려주면서 장노도를 친구인 윤창언에게 넘긴것은 역시 1923년 이전 그 어느 때 였을 것이다. 장노도의 나이 30세 혹은 31세 때였을 것이다.

그 후 석달만에 김대중이 태어나고 윤창언이는 그 아이에게 윤성만(혹은 윤대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윤창언의 조카로 경찰관을 하던 윤일만의 증언과 박정희 정권 당시 공화당 조사 팀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윤성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뻘이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윤창언은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보다 20년 연상이었다고 하는데 만일 김대중의 실제 생년월일이 1923년 1월 6일이 맞는다면 당시 50대인 윤창언과 장노도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 것은 이보다 서너달 전인 1922년 9월 말이거나 10월 초였을 것이다. 윤창언 은 1927년에 사망했으니 장노도가 윤창언의 사망전까지 동거했다면 윤창언과 장노도의 동거기간은 적어도 사,오년은 되겠다는 계산이 된다.

윤창언이 장노도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 1922년 말 전후에 장노도와 그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무식하고 게으른 탓도 있을 것이고 이미 세명의 부인들과 사별한 윤창언이 자신의 전처 세명으로부터 얻은 장성한 딸들의 만만치 않은 반대로 장노도와의 혼인신고를 미루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장노도의 부친인 장지숙은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시키는데 이것이 1925년이다. 김대중이 두살 때 였을 것이다.

한편 윤창언과 장노도 사이에서 다시 김대중의 씨다른 동생인 윤대의가 태어난다. 윤대의는 1927년 생이라니, 실제로는 1923년 생인 김대중보다 4살이 아래인 셈이다. 그리고 윤대의는 윤창언의 유복자일 수도 있다 . 이는 윤창언이 사망한 해가 1927년으로 윤대의의 생년과 같은즉 윤대의가 윤창언 사망 후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윤창언의 사망일자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분명하게 알수는 없다. 그리고 윤대의의 어릴적 이름은 윤대의가 아닐 것이나 윤창언이가 붙여주었을 윤대의의 어릴적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대의”란 이름은 김운식가(家)의 돌림자인 큰대(大)자를 따온 이름이니 윤대의의 생부인 윤창언이 지어준 이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만일 윤대의가 유복자였다면 윤대의는 처음부터 김대의로 이름지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별도의 윤아무개란 어릴적 이름은 처음부터 없었을 수 있겠다.

어쨋거나 김대중은 주막집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생활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생부가 아닌 계부의 비호아래서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다.

당시 하의도의 부자이며 난봉꾼인 김운식이 정확히 언제부터 장노도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윤대의가 태어나고 윤창언 이 사망한 1927년 이후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지만 위의 호적기록은 이와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그린다.

김대중의 호적기록을 보면 1924년 7월 7일 김운식의 신고로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김운식의 호적에 입적되었다고 하니 이 기록대로 한다면 장노도는 윤대의가 태어나기 2,3년전부터이미 김운식과 동거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이 기록은 장지숙이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시킨 것이 1925년이라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한편 장노도의 친부의 이름도 장지숙에서 장문숙으로 변조되어 있다.

김운식이 자신과 별 관계도 없는 장노도와 그녀의 아들들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하도록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니 장노도는 윤창언과 동거하면서도 김운식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말이 되거나 아니면 김운식의 첩이 된 후에도 2,3년간은 윤창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말이된다.

윤창언보다 거의 20년 연하로 젊은 김운식이 그의 젊음과 부(富)로서 장노도로부터 윤창언을 밀어낸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장노도에게 가장 마음쓰이는 일이 자신의 아들들을 호적에 입적시키는 것인 바 김운식은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장본인이 아닌가?

따라서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장노도는 윤창언과 동거 1,2년 이후에, 즉 1924년 중반이후부터 이미 김운식의 첩이 되었고 사실혼 관계에 있던 윤창언은 젊은 부자 김운식에게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정부(情婦)를 빼앗긴 꼴이 되었다는 말이고 그래도 이미 남의 첩이된 과거의 정부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아들을 얻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는 당시 관습에 비추어 너무 무리한 생각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김운식과 장노도가 동거를 시작한 것은 장노도가 윤창언의 아들을 잉태한 이후의 일 것이다. 장노도는 1927년 윤창언이 병사하기전 무능력한 윤창언이를 내 쫓아버렸을 가능성은 많다. 그러나 그 시점은 1926년 7월 이후일 것이다. 장노도가 김운식과 동거를 시작한 것은 1926년 7월 이후일 것이고 장노도가 김운식과 동거를 시작했을 때는 장노도에게 이미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니 더 확실한 것은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한 것이 김(윤)대의가 태어난 1927년 5월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러면 호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김대중이 호적을 엉망으로 고쳐놓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또 이 가정은 장지숙이 1925년에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 시켰다는 사실도 설명이 된다. 혹자는 김운식이 김대중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준 것은 김대중이 7살 때쯤으로 이때 자신의 자신의 庶子로 호적에 올려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하는 바 아마 이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김대중은 자신의 출생비밀을 가리기 위하여 호적에 적지 않은 손질을 해 놓았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모를 갈보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날조와 변조로 누더기가 된 김대중의 호적

앞서 지적한 대로 김운식이 김대중을 자신의 서자로 입적시킨 날자가 1924년 7월 7일이라하니 김대중의 생년은 그 이전일 수밖에 없다. 한편 김대중의 어린시절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돼지띠였다고 하니 그의 생년은 1923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운식이 김대중을 서자로 입적시킨 날자는 1924년 7월 7일이 될 수 없다. 이는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할 당시 이미 장노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니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28일)이후일 것이다. 이는 장노도의 두째아들 김(윤)대의가 태어난 것이 1927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대중의 서자 입적 날자 1924년 7월 7일은 소급해서 기록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의 호적등본이 완전날조라는 객관적 물증은 기재란의 내용들이 1924년 7월7일 서자 입적신고 부터 1960년 6월 6일 김운식의 2남으로 분가신고를 했을 때까지 무려 36년간의 기록이 한사람의 필적으로 되어 있으며 동일한 날인을 11회에 걸쳐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누가보아도 1960년 6월경에 김대중의 호적등본이 광범위하게 개작, 개편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하의면 면장은 장모씨였고 이 호적을 기록, 날인한 호적계 이모씨는 후에 면장으로 승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중의 호적중 가장 황당한 것은 김대중이 자신의 생부 제갈성복의 동생이며 자신의 생모인 장노도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의 호적을 완전히 말살시켜버렸다는 점이다.

장노도는 1911년 3월 10일 제갈성조와 결혼으로 친정아버지인 장지숙의 호적에서 제적되었다가 1925년 12월 8일 장지숙의 호적에 재입적된다. 약 15년간 제갈가의 며느리로 살다가 남편의 사망으로 친정 호적에 복귀한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장노도가 결혼해 간 무안군하의면 대리 204의 제갈영범의 차남 제갈성조의 호적이 멸실되었다는 점이다. 장노도는 제갈성조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 딸들의 행방도 찾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김대중의 호적에서는 많은 이름들이 변조되어 있다. 김대중의 와할아버지는 張之淑, 張文淑 두개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고 김대중의 첫 부인이름도 車容秀, 車容愛 들이 있다. 김대중의 씨다른 여동생 이름도 김찬진, 김진찬 김대중의 양부(養父)이름도 한자가 두가지가 존재한다. 金云式, 金云植으로. 김대중 자신의 이름도 끝의 한자가 두가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은 자신의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용례를 1960년 6월에 위장이혼시고 자신의 생모를 김운식과 위장결혼시키므로서 자신의 서자딱지를 떼어버린 바 있다.

김운식의 서자로 살다.

하여튼 하의도 실력자 김운식이 장노도의 주막에서 살다싶이 한 연유로 주막집은 손님이 들지 않아 장사가 되지않으니 문을 닫게된 모양인데 김운식은 장노도와 그 녀의 아이들을 위해 삼칸집을 지어준 모양이다.

이 후에 장노도와 그녀의 아이들은 김운식이 지어준 후광리의 삼칸집에서 살았다는데 김운식은 그의 본처와 함께 하의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대리(大里)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김운식 영감은 본처와 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이 당시 장노도는 자신의 아이들을(딸 둘, 아들 둘) 엄격히 통제하여 대리에 있는 큰집 (김운식의 본처가 사는집)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니까 김대중의 계부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김대중은 서당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해진다. 1934년, 김대중은 하의 공립 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고 1936년 김대중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장노도가는 하의도를 떠나 목포로 이사를 가게된다. 김대중의 나이 13살 때였을 것이다. 그 한해 전 장노도는 김운식의 아이를 낳는다. 이가 김대중의 씨다른 동생 김대현으로 1935년생이다. 이렇게 보면 김대현은 하의도 출생인 셈이다. 장노도 일가는 1936년 목포로 이주하였고 장노도는 여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장노도는 여기서 김운식의 딸 김진찬을 낳는다. 김진찬이는 1938년 생이라고 하는데 1963년 1월 25일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호적상 김대의로 되어 있는 윤대의는 동네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자랄 수록 윤창언이를 닮아갔다니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윤창언의 자식임이 분명한 것 같고 김대중은 제갈성복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장노도가 낳은 세 아들들은 모두 씨가 다르다. 첫째는 제갈씨요 둘째는 윤씨요 셋째는 김씨다. 이 중1927년 5월 3일에 출생한 윤대의 (호적상 이름 김대의)는 1997년 12월 17일에 사망하였다.

1939년 3월 24일 김대중은 목포소재 북교(北橋)국민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같은해 목포 상업중학교(이하 목포 상고)로 진학했다. 졸업식에서 김대중은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한다.

목포 상고에 입학해서 김대중은1학년때 성적은 111명중 1등을 하였으나 2학년때는 119명중 4등, 3학년때는 155명중 2등, 4학년 때는 149명중 8등 5학년때는 150명중 39등으로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김대중은 1,2학년에서 급장, 2,4학년때는 품행단정상 수상, 5학년때에는 수양위원 겸 문화반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학창시절부터 김대중은 웅변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고 하며 고교 학적부에는 “언변이 늘 정확하고 명료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한다.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연도에 대하여는 1943년이란 말도 있고 김대중 연보에는 1944년이라는 주장도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이 5학년에 진급할 당시 전쟁의 막바지에 있던 일제는 이들 졸업반을 서둘러 졸업시켰다 한다. 따라서 김대중은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된 모양인데 정상적으로는 1944년 3월에 졸업예정이었으나 당해에 한하여 졸업반으로 올라가자마자 졸업을 한 모양이다.

이런 연유로 김대중은 1943년에 목포상고를 졸업한다. 그의 실제나이 20세 때이다. 그는 유년기에 매우 영리하여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중학교 5년(지금의 고등학교 졸업반)시의 졸업성적은 중상정도 였다. 심리학자라면 김대중의 가정환경으로부터 그의 성격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유추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후일 모 외국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학력콤풀렉스가 있다는 고백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의 극심한 명예욕, 그의 극심한 집요함,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모함, 그의 동물적 생존본능, 그의 끝을 모르는 돈 욕심 등등의 성향은 아마도 어릴적 복잡한 가족 및 생활 환경에서 빚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던 그의 졸업성적도 그의 명예에의 욕구를 좌절시킨 한 작은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청년기

의문의 공백기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할 당시의 김대중은 도요다(豊田大仲)란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해방 2년전인 1943년 7월 8일, 김대중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4년 1월 16일에서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한다.

일제 시대에 호적을 정정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무슨 동기로 이 귀찮고 어려운 일을 감내했는지는 의문스러운 일 이었던 바, 이 문제에 대한 모 기자의 질문에 김대중 왈 당시 일제의 모병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년월일을 앞당겨 변경함으로서 모집연령을 초과시키는 방법을 쓰고자 했으나 호적당국이 이를 허락치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자신의 부친이 자신의 징집을 늦추기 위해 생년을 늦추어 변경하였다고 하였다. 김대중 왈, 자신의 부친(김운식)은 일제가 머지않아 망할 것을 예상하고 1,2년만 모병당하지 않고 버티면 군대를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설명하였다. 이로서 김대중의 호적상의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2년이 차이가 나게 되었다. 김대중은 수차례에 걸쳐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의 실제생년은 음력으로 1922년 12월 이며 양력으로 1923년 1월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1943년 상고 졸업후부터 1945년 4월의 해방 직전까지의 1, 2년여의 기간동안 김대중의 행방이 묘연하다.

혹자는 김대중이 만주에 있는 만주건국대학에 합격하였으나, 어쩐일인지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를 하였고 입사 후 해방이 이루어졌는데, 김대중이 속한 회사의 경영진들은 회사를 그냥둔채로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그 후 이 회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계속해서 그해 11월, 김대중이 목포상선회사의 정식 대표가 되었고. 사업이 승승장구면서 김대중이 엄청난 부를 손에 쥐게 되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다.

김대중이 1989년 5월 중앙정보부에 남긴 자술서에 의하면 김대중는 1944년 6~7월 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 회사인 전남기선주식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했다하며 해방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유일한 사무직원으로 남게 되어 일시 총무대표로 추대되었다고 주장한다. 1946년 2월경 상경하여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海司局)에 들려서 알아보니 서울 거주 손모씨에게 회사 관리권이 넘어갔다는 것을 인지하고 손씨로 부터 현 종업원을 게속해서 고용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했는데 종업원들의 반대에 접하여 1946년 말까지 이름만 걸어둔채 관여하지 않다가 회사와 결별하였다고 자술하고 있다. 그러니 사업에 성공하여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혹자의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김대중 자신의 진술대로 김대중이 1944년 6~7월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남기선 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있었다고 주장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하더라도 1943년 상고 졸업이후 44년 6,7월 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아있고 또한 이 기간중 그가 도요타로서 만주의 여순군항에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으니만큼 1년여의 공백기간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김대중의 소학교 동창으로 재일교포인 김종충(金鐘忠)은 김대중이 이 당시 만주 여순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일본인 하라다 시게오(原田重雄)도 김대중이 해방직전까지 만주 여순에 있었다는 내용의 증언을 하고 있다. 하라다씨는 김대중을 여순출신 일본인들의 모임에서 만났다고 증언한다. 하라다씨는 1932년 생으로 김대중씨 보다는 나이가 어리며 그는 동경 신주쿠에 있는 하라다 맨션의 소유주로 대단한 재산가다.

김대중은 자신의 학력에 대해 6대 국회때부터 건국대학 졸업이라고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니 한국의 건국대학이 아니고 만주의 건국대학이라고 말을 바꾼 적이 있었고. 그 이후 김대중은 국회 수첩등에 기록된 자신의 이력에서 건국대학 부분은 빼버렸다.

만주 “건국대”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하나의 기구로서 일본군 주둔군영 내에 분교가 있었다고 하며 주로 일본인을 학생으로 선발했지만 일부 한국인 학생들도 선발했으며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으로 채워졌다고 하니 상고 출신인데다가 졸업 성적이 중간 정도인 김대중은 아마도 자격미달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건국대 진학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만주 건국대 출신자들은 입학생 중 상고 출신은 전무하였다고 중언하고 있다.

당시 여순은 만주 침략을 위한 일본의 군사기지였고, 그때문에 군 정보기관이나 경찰의 특고(特高, 특별고등경찰관) 관계인을 제외한 민간인은 출입통제지역이었다. 하라다 씨는 김대중이 당시여순에서 “학교를 나왔다”고 하더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여순의 실태를 아는 사람들은 여순에 있었던 조선인은 100% 일본의 밀정이었다고 증언한다.

김대중이 목상 졸업에 즈음하여 다른 김씨성을 가진 사람들처럼 가네다(金田”)또는 가네야마(金田)로 창씨개명하는 대신 자신의 성씨를 순 일본식 이름인 도요타 다이쮸(豊田大仲)로 (그런데 이 이름도 분명치는 않다. '도요다 이찌로'일 가능성도 있다) 개명한 것만 보아도 이때에 그는 완전한 일본사람이 되고파 했고, 그의 신분상승을 위한 몸부림을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일본을 방문했을때에 목상 재학시절의 일본인 은사를 만나 “도요타 ”로 자신을 밝혀 김대중의 일본인 은사 자신도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대중이 이 당시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여순에 진출해 일제의 밀정으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여러 정황으로보아 무리한 추정이 아니며 당시 전황에 대한 상세한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면 일제 항복 직 전에 귀국을 감행했으리라는 가정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겠다.

김대중의 호적에 따르면 김대중은 1945년 4월 9일, 호적상 나이 20세, 실제나이 22세때에 목포의 재산가인 차보륜(車寶輪)의 딸 차용수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대중의 연보에 따르면 김대중은 1945년이 아닌 1946년 4월 9일에 결혼한 것으로 나온다. 어느것이 맞을까? 흔히 호적기록은 공적기록인 만큼 호적기록이 맞아야 마땅하겠으나 김대중의 호적은 개작의 흔적이 너무도 뚜렸해서 신빙성이 없다. 김대중의 혼인도 1946년이 맞을 것이다.

차용수는 혼인전에 정태묵(鄭泰默)이란 사람과 모종의 염문이 있었다는데 이 정태묵은 김대중의 목포상고 1년 선배로서 목포상고 재학시 차보륜가(家)에서 약 2년간 하숙을 한 일이 있어 차보륜가와는 상당히 친숙한 관계였다고 한다. 이런 연고로 차보륜의 딸인 차용수와 정태묵이 염문이 있었더라도 이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정태묵은 자신의 순애보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김대중이에게 정인(情人)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모양인 바, 정태묵은 후일 임자도(荏子島) 간첩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구로다 가쓰히로(黒田 勝弘, 1941년 10월 25일 ~ )

신민당과 남로당

김대중의 좌익 활동을 설명하기전 당시 김대중이 가입했다는 신민당의 배경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신민당은 백남운(白南雲)이라는 사람이 창립했는데 백남운은 1894년 생으로 전북 고창사람이며 일본 동경상과대학 출신이다. 대학졸업 후 백남운은 연희전문의 교수로 일했고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관점에서 조선역사를 강의하였으며 “조선사회 경제사”와 “조선 봉건사회경제사”를 썼다. 1938년 연희전문을 그만두고 해방후 정계에 진출, 좌익운동에 참여했다. 한때 그는 좌익의 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民戰)의 공동의장이 되기도 했다. 1946년 모스코바의정서에 의해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된 직후 백남운은 북한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김두봉(金枓奉)위원장을 만난다. 중국공산당과 가까운 김두봉이 조선독립동맹을 신민당으로 개편하자 백남운은 남조선신민당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김일성의 북조선 공산당과 김두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이 되었는데 남한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1946년 11월, 좌익3당, 즉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 약칭 남노당(南勞黨)을 만든다.

그런데 이 합당과정에서 여운형과 백남운이 왕따를 당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노동당을 창당했다가 해체하고 다시 근로인민당을 창당, 여운형이 위원장, 백남운은 부위원장이 된다. 그 후 여운형은 암살되고 백남훈은 1948년 5월 총선직전 자진 월북하여 북한에 눌러앉아버리고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한다. 백남운은 1979년에 85세로 죽었다.

좌익 활동기

결혼 5개월 후인 1945년 9월경부터 김대중은 건국(建國)준비위원회(이하 축약하여 建準)의 선전책이며 그 후 남로당 선전책으로 암약하던 임영춘(林永春)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이 당시 결성된 목포 (공산)청년동맹에도 가입 활동 한다.

이해 하반기에 김대중은 동생 김(윤)대의와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기 미 군정 경찰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일도 있다한다.

김대중은 그의 자술서에서, 한달 후인 1945년 10월경에 건준과 목포 (공산)청년 동맹이 해체되면서 다시 한달 후인1945년 11월 경 건준(建準)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후 여기에 참여하여 약 두달간 활동하다가 지진 사퇴하였다고 하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편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新民黨(당수 白南雲)이 출범하였는데 김대중은 당시 신민당 목포시당 위원장이며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실종된 이채현(李彩鉉)의 추천으로 신민당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 행동 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민청) 목포시 위원회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맹원(盟員) 장금성(9.28수복 후 사망) 등과 당원 서득균(徐得均, 6.25당시 월북)등에게 공산주의 이론 및 정치학습 등을 교양했다 한다.

안기부의 기록에 따르면 1946년 10월 31일 일단의 좌익들이 목포 경찰서 남교동(南橋洞) 파출소 등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파출소를 방화 소실케한 소위 “목포시민 항쟁의 날”이라는 폭동사건이 발발하였는데 김대중은 민청 부위원장 지위에서 이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목포경찰서에 체포되어 10여일간 구속 수사를 받는다. 이에 대해 당시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었던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훈계방면되었다 한다. 이때 김대중의 나이는 23세 전후 였다. 반면 이 사건에 대하여 김대중 본인은 밀고자에 의한 근거없는 고발로 20일간 경찰에 구금되었었지만 무혐의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은 1949년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는바 전남 신안군 임자면(荏子面) 출신으로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지하에서 암약중이던 유재식(兪在植)에게 당 연락 활동과 관련한 여비등 활동자금을 제공하여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된다.

10여일간 구속수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 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목포헌병대장이던 박성철(朴성哲)소위의 신원보증으로 방면되고서도 목포시내 세포조직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는데 오세동은 6.25 전쟁중에 전사하고 박성철은 해병 소장으로 예편한 후 김대중의 대통령 후보 비서실 차장 및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된다.

1947년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여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한편으로는 화물선 한척을 구입하여 연안을 운행하는 해운업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 경험은 후일 6.25 사변당시 김대중이 해상방위대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대중은 해상방위대 참여로 군 복무를 대체한 듯 주장하지만 김대중이 국민의 의무인 군복무를 필했다는 기록은 없다. 1948년10월 부터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으로 재직하였다고 하지만 사업상 성공한 것은 아닌모양이다.

6.25 사변중 김대중의 행적

6.25 사변을 전후한 김대중의 행적은 이에 대한 정보기관의 기록과 김대중 자신의 주장 사이에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대중 자신은 1949년 봄 부산에서 창설된 건국대학교(동아대학과 합병) 정치과에 편입했으나 그 이듬해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50년초에 조직된 대한청년단 목포 해상방위대 부단장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은 또한 이 당시 자신이 경영하던 해운회사가 서울 소재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구 수송을 전담하는 하청을 받아서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었다는 주장을 편다. 1950년 6월 15일 6.25가 발발하기 열흘전에 김대중은 자신의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운임을 받기위해 상경중에 6.25사변을 당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6.25당시 김대중은 경기여고 뒤쪽에 있던 모 여관에 투숙하면서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으며 그 후 목포까지는 도보로 남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기부 기록은 김대중의 술회와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1950년 6.25직후 김대중은 보도연맹원으로 피검(被檢)되어 미국 CIC에 의해 사살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김진하(金眞夏)의 호명착오로 구사일생으로 구명되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목포인민위원회를 창설하여 활동하다가 부채 및 체불, 노임횡령 사건으로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9.28 수복 때 목포 교도소를 탈출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김진하는 김대중의 목포상고 선배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또한 “호명착오로 구사일생을 했다”는 정황은 확실히 알려진바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좌익에서 전향한 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했던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있었다. 젊은 시절 좌익운동을 활발하게 했던 김대중도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한다. 그런데 당시 전향한 전 좌익활동가들의 집단인 보도연맹들 중 실제 전향을 하지 않고 전향을 가장한 사람들이 많아 6.25사변이 터지자 이들을 구속, 일제 처형하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김대중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어 왔다.

보도연맹원들의 일제 처형시 어느 창고에 갇혀있던 김대중에게 당시 영어교사이던 김진하가 찾아가 “김대중을 호명할 때 나서지 말고 이 명찰(김진하)을 보이면서 사람을 잘못 끌고 왔다고 이야기 하라”고 하여 김대중을 구명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도 확인할 길은 없는 이야기다.

한편 6.25직후 김대중이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것은 김대중 본인의 주장이기도 한 바 김대중이 국군에 의해서 구속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인민군에 의해 구속되었던 것인지가 명확치 않다. 김대중의 목포 인민위원회 창설이 구속 이유였다면 김대중은 국군에 의한 구속일 것이지만 김대중의 주장대로 인민군에 의한 구속이라면 김대중이 우익활동을 했다는 말이 될 수 있겠는데 김대중은 일생동안 우익활동을 한 적이 없다. 안기부의 기록에 따르면 김대중의 구속 이유가 부채 및 체불(滯拂), 노임횡령으로 되어 있는데 하여튼 이 모든 가능성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가릴 수 있는 길은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

또 김대중이 남로당원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이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대중이 남로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당의 목포지구당에서 간부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남로당은 1946년 가을에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합당하여 출범했는데 김대중이 이 새로운 정당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확실한 것은 당시 젊은 김대중이 매우 활발하게 좌익 운동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1년 목포해운회사(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동시에 전남해운조합 조합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했다한다. 김대중은 6.25사변이 끝나는 즈음 1954년 제 3대 민의원(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

간첩 정태묵(鄭泰默)과의 인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정태묵은 김대중의 목상 1년 선배로 목상 재학시에 김대중의 장인인 차보륜 가에서 2년간 하숙생활을 했다하며 이 당시 차보륜의 딸 차용수와 연인관계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김대중은 8.15해방 후 1945년 9월경에 결성된 목포 공산청년동맹에 정태묵과 같은 동맹요원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정태묵은 194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서울지법에서 재판에 계류중이었고 6.25 사변중 북괴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러나 1953년 3월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이 확정되어 1960년 5월 30일 만기출소하였다.

정태묵은 1965년 4월 25일 월북하여 평양시 교외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한 후 같은 해 4월 30일 귀환하였다. 그의 포섭대상자 명단에는 김대중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4년, 김대중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다. 정권 연장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게릴라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대혼란이 빚어진 이 사건을 계기로 김대중은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1954년 어느땐가 김대중은 李承晩정권의 여당인 자유당에 입당하려 했으나 당시 자유당에서 공산당의 전력이 있는 김대중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유당 입당을 포기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3대 국회의원 선거 전인지 아니면 그 후인지는 알수 없다.

첫 국회의원 출마

3년에 걸친 한국전쟁으로 전국은 폐허가 되었고 한국인들은 하루하루 연명하기에 급급했다.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지는 절량농가(絶糧農家)가 속출했다. 1953년에는 남한 농가 호수 220만호의 절반인 110만호가 절량농가였다. 다음은 1953년 봄의 상황에 대한 서술 가운데 하나이다.

절량농가들은 초근목피로 살아간다지만, 1953년 5월 국회의원들의 조사에는 불에 볶은 왕겨가루와 나무를 썰어 만든 나무 죽과 누르스름한 백토가루 등의 음식물이 나와 있었다. 쑥이나 나물로 만든 죽은 상등 음식이었다. 의원들은 부황병이 든 얼굴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고 그저 살게 해 달라는 애소를 받고 돌아왔다. 전북 옥구에서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도맡아다가 물을 끓여 한 그릇에 30환씩 받았다. 이러한 목불인견의 정황인데도 충남도에서는 4만 5천여 석의 양곡을 극빈자 긴급구호로 가장하여 극소수 특권층이 차지했고, 전남도에서는 1만 2천 700석을 공문서에는 춘궁기 긴급 타개용이니 절대 유용치 말라고 지시해 놓고는 몰래 특배를 지시하여 양곡을 처분했다. 전북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서중석,『조봉암과 1950년대(하)』서울: 역사비평사, 1999, P546)

남한 경제는 미국 원조로 유지되었다. 원조의 대부분은 소비재였다.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한국 기업들은 원자재를 수입하여 단순가공 후 판매하는 사업에 몰두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5월 20일 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김대중은 재력을 믿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간의 일을 김대중은 설명한다.

그 무렵 나는 목포에 신문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목포일보사’였다. 목포일보는 일본 통치시대에 일본어로 발간되던 신문이었다. 한반도의 지방지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도 하는데 해방 후에는 경영자없이 종업원만으로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형무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이 신문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목포일보사 운영에도 사업적 수완을 마음껏 발휘하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언제나 한 식구처럼 지내던 그들과 끝내 함께 하지는 못했다. 종업원들마다 끝까지 함께 일하자고 졸랐고 다른 사업은 아예 넘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붙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 때문이었다. ‘정치’라는 보다 큰 경영을 목표로 그들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서서히 떠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민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 것은 1954년 목포에서였다. 해방 후 세 번째 치러진 민의원 선거였다. 내가 아직은 만 서른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물론 나는 당선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있었다. 당시는 노동조합의 동향이 목포의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 전의 총선에서도 노동조합 출신이 당선됐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모두 내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내가 노동자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고 또 하나는 내가 경영자로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던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노조는 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또 조직의 이름으로 천거하기도 했다. 그들이 제시한 조건이 있다면 당시의 보수 야당인 민주국민당에 가입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었다. 나로서도 민주국민당에 입당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 할 조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론 여당자유당에 입당하는 것도 싫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에 반대해서 정치가가 된 이상 도저히 그럴 수 는 없었다. 결국 나는 무소속을 선택했다.

선거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조의 힘을 등에 업고 선거를 치른다면 땅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이 경찰에 압력을 가해 노조 간부들을 전원 체포해 버린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면 국가 기간단체인데 여당이 아닌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는 게 그 죄목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노조간부들로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내 지지를 철회하고 대신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 나왔다. 그리고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조합원들을 모아 집회를 열고 다니면서 조합의 방침이 바뀌어 자유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소가 자다 깨어나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의 얼토당토 않는 부정선거는 그 뒤로도 오래오래 끈질기게 계속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내 자신의 기록은 한국 부정선거 약사(略史)나 부정선거 피해자 기록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최초의 선거에서 졌다. 8명의 입후보자 중에서 4위였는지 5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참담한 패배였다.(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78~80에서)

노조를 믿고 출마한 것이 아니라 재력과 신문사 사장이라는 것을 믿고 나왔다는 것이 상식에 맞다(재력으로 노조를 매수했을 수도 있다).

김대중이 떠드는 대로라면 김대중이 낙선한 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는 강력한 야당세를 바탕으로 조직을 키워온 정계의 중진 정중섭(鄭重燮, 제 1야당인 民主國民黨 소속)씨가 8,710표를 얻어 당선되었고, 차점자는 자유당의 유정두 후보였다(득표수 5,806). 김대중은 3,392표를 얻어 5위였다. 목포는 전남의 제2 선거구였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무소속 대한노동총연맹 무소속 무소속 민국당 자유당 무소속 무소속 대한노동총연맹
이숙노 임기봉 홍익선 안길호 정중섭 유정두 박희정 김대중 신유돈
552 2,472 3,838 4,388 8,710 5,806 1,715 3,392 3,092

자유당부정선거를 저질렀다면 유정두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부정선거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유권자에 대한 금품공세 등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부정과 투개표 단계에서의 부정이 있다. 자유당 후보가 낙선한 것을 보아 부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투개표 부정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대중의 부정선거 주장이 거짓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 자유당부정선거 전략은 자유당 후보의 표를 많이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김대중표를 깎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자유당은 현역 의원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의 정중섭 후보보다는 무소속으로 처음 출마하는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판단하여(그 이유는 아마도 김대중의 엄청난 재력과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김대중을 집중 목표로 하여 부정선거를 했다. 그래서 김대중을 5위로 낙선시켰지만 정중섭 후보 등 다른 후보에 대한 부정선거를 소홀히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아서 정중섭 후보의 당선은 막지 못했다.
  • 자유당도 부정선거를 했지만 정중섭 후보측이 더 심한 부정선거를 하여 당선했다.
  • 자유당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유권자가 정당한 선거운동을 한 정중섭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노동조합 간부들은 겉으로는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정중섭 후보를 지지했다(왜 지지 후보를 김대중에서 자유당의 유정두 후보도 아닌 민국당의 정중섭 후보로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부정선거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였다.

1954년 총선 때 목포 지역구에서 여당이 부정 선거했다는 것은 김대중의 주장이고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김대중이 말하는 양심을 ‘良心’이 아니라 ‘兩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 따르면 김대중 반대자들은 모두 해석을 잘못해 쓸데없이 김대중을 경멸한다고 한다).

1999년 초에 도서 출판 인동에서 나온 김대중 자서전에도 위의 인용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자서전은 일본 독자를 상대로 일본에서 먼저 나온 것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인이면 자유당의 유정두 후보가 낙선했다는 것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나 그 당시의 신문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일본 독자는 당선한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일본어 개정판에서는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아닌 제 1야당후보가 당선되었다’는 부가설명을 꼭해서 일본인들이 사실이 아닌 그릇된 지식을 갖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독자들이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대중이 쓴 모든 글에는 제대로 된 주석을 많이 달아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김대중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출판한 출판사들의 잘못이 크다.

김대중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정선거’로 떨어졌어도 나라 체면을 위해 일본에 책으로 알리는 것은 삼가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든다. 조병옥 박사 같은 이는 해외에 나가면 이승만 정권 비난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 이는 초기 야당 지도자가 보여준 미덕이었다.

김대중이 낙선한 1954년의 5․20 총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선거 결과는 총 202석 중 자유당 114석, 민국당 15석, 무소속 66석, 군소 정당 7석(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제헌동지회 1석)으로 야당세가 현저히 위축되었다. 이후 자유당은 무소속 의원을 영입하여 개헌이 가능한 137석을 확보하였다. 제2 당이면서 유일한 야당인 민국당이 10%도 못되는 득표를 하였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민국당은 정치인들의 사교클럽 수준에 머무르는 모습을 보이며 정당이라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하여튼 김대중은 1954년 5월20일 목포에서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300표 정도를 얻어 9명중 5위로 낙방한다. “서자새끼”란 소문도 김대중의 낙선에 일조를 했다고 전해진다. 가망없는 선거를 치렀지만 선거자금은 필요했고 이 선거자금 충당을 위해 김대중은 상당한 금액의 처갓집 재산을 탕진했다는 소문도 있다.

낙선이후 김대중은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1955년경 상경하여 서대문구 대현동(大峴洞)으로 이사하였고 당장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 그 방편으로 지금의 명동 어디엔가에 “대한 웅변협회”란 간판을 걸고 자신이 회장이 되고 후에 국회의원이 된 김상현(金相賢)을 사무총장으로 앉혔다. 이 웅변학원의 운영과정에서는 주로 김상현이 뛰어다니며. 학생들을 모집하였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 “태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1955년 10월에는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당시 김대중은 김철(金哲) 등 정치인들과 접촉에 성공, 장택상(張澤相) 전 총리를 소개받고 일시적으로 장택상의 참모로서 활동한 적도 있다한다.

민주당 입당

그 이듬해인 1955년 소설가 박화성(朴花城)의 소개로 박순천(朴順天), 조재천(曺在千)등 야당의원들을 만난 김대중은 이들과 교유한다.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박사에 대한 저격사건이 있엇다. 일설에 의하면 김대중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최서면(崔書勉)의 소개로 장면(張勉) 박사를 만났다고 하는데 김대중이 당시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인 장면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56년 서울 소공동에 있던 경향신문사 고문실에서 였다. 김대중의 “신언서판”에 반한 장면 박사는 이후 김대중의 든든한 후견인이 된다. 참고로 최서면이란 사람은 극우(?)의 우익활동가로 알려져 있으며 김대중을 장면박사에게 소개시켜 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1956년 어느땐가 김대중은 급히 강원도로 도망을 간다. 이는 해운회사의 부사장인 나상수가 김대중을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으로 김대중은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강원도 인제 지구는 군 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된 지역으로 김대중이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이 19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19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19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 떨어진다. 김대중이 민주당에 입당한 것과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1956년에 일어난 일이다.

장면박사의 적극적인 지지로 김대중은 같은해 민주당 상무위원에 기용되었고 그 이듬해인 1957년에 김대중은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방에서 김철규(金哲珪)신부로부터 영세를 받는다. 이 때 김대중의 대부는 장면박사가 맡았다.

1957년 8월 김대중은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및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 당시 민주당 당사는 인사동에 있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김대중을 손가락질하며 “빨갱이”라고 불러서 당원이며 상임위원인 김대중은 당사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서울에 사무실 공간이 충분치 않아 집권당이었던 자유당 조차도 반도호텔의 빈 방을 몇 개 빌려쓰는 형편이었고 장면이 총리가 되었을 때도 사무실을 반도호텔 방을 빌려쓴 적이 있는데 많은 정치인들이 다방을 회합장소로 활용했다고 한다.

원로 기자 이동복(李東馥) 전 의원의 회고에 의하면 많은 정치인들이 종로와 무교동 일대의 다방을 근거지로 해서 모였다고 하는데 그 중 무교동의 “상록수”란 다방에 기자들과 함께 김대중도 자주 들락거렸다 한다.

이 당시 김대중은 빈털털이였던 모양으로 신문기자들과 어울려 다닐때도 차 한잔 , 점심한끼 내는 법이 없고 주로 기자들에게 얻어먹으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김대중의 일상을 보면 아마 “건달’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게 그를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국회의원이 돼보겠다는 허망한 꿈에 사로잡혀 일정한 직업도 없고 일정한 수입도 없이 건들대면서 마누라가 경영하는 미장원의 수입에 의존하여 생활을 했다니 영락없는 건달이었다하겠고 . 부인인 차용애 (차용수와 동일인)로서도 한심한 생각이 들었었을 것이다.

3,4대 국회의원 선거때만 해도 김대중의 고향인 목포는 야당세가 강한 곳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당 구파에 속한 정중섭(鄭重燮) 의원의 아성이 되어있어, 정중섭이 물러나지 않는 한 이미 “서자새끼”란 낙인이 찍힌 김대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보여진다.

1956년 당시 33세(혹은 34세)인 김대중은 목포해운 회사의 부사장인 나상수로부터 돈 문제로 고발을 당하자 강원도 인제로 피신을 하면서 민주당에 입당한다. 당시 인제는 행정력이 가장 취약한 최일선 수복지구로서 군 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된 상태로 김대중의 잠적 장소로 가장 적당한 장소라 한다.

김대중은 1959년5월 2일, 제 4대 국회의원 선거때 인제에서 출마하였지만 수많은 신문기자들의 호의에 찬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매청 총회꾼 출신으로 반 사기꾼 같은 자유당 후보 나상근에게 밀려 떨어지게 된다. 이때 자유당 정권의 방해로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당시 강원도 인제는 21사단 주둔지였고 이 21사단은 대다수가 호남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한다. 이들 호남 출신 군인들 이외에도 상당수의 호남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자유당 정권의 치하에서는 김대중이 아무리 날고긴다 해도 선거에 당선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는데, 그 이유인 즉슨 21사단장으로 있던 오덕준 소장이 사병들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여 야당출신 입후보자들의 근접을 철저히 막았을 뿐 아니라 당시 투표기구로 사용되던 붓뚜껑에 끈을 매달아 두고 사병들이 이 붓뚜겅을 인주에 뭍혀 엉뚱한 곳에 동그라미를 찍으려 하면 이를 감시하고 있던 방첩대 상사가 끈을 위로 잡아당겨 자유당 후보 쪽에 동그라미를 찍도록 유도했다하는데 이런 정도의 부정선거가 횡행하던 시절이니 김대중이 당선될 기회는 처음부터 배제되었던 셈이다. 한편 사단장 오덕준 소장은 나상근의 사위였다는 설도 있으니 이래저래 김대중에게는 가망없는 선거였다.

조의금 착복 사건

1959년도 선거기간 중 특이한 사건은 김대중의 조의금 착복 사건이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하자,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당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을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한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했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궁지에 몰린 김대중은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한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을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지만 그 후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한다.

1959년 7월 김대중은 민주당 강원도 지구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에는 민주당 임시 대변인이 되었다.

바로 이 당시 김대중은 환갑이 훨씬(67세) 지난 자신의 양부 김운식 부부를 위장이혼시키고 김운식을 자신의 생모 장노도와 위장 결혼 시킴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서자”에서 “적자”로 둔갑시킨다. 동시에 자신의 호적을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하며 전적한다.

이 당시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필두로 하는 구파와 신파로 그 세력이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철승 지지세력이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 실력자로 데뷰하자 김대중도 장면을 따라 민주당 신파로 정치적 인연을 깊게하였다. 1960년 4월 6일에 김대중은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

민주당 공천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이 몰락하고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하고 장면을 총리로 하는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이해 제5대 국회의원선거인 7.29 총선에서 김대중은 당시 집권이 예상되던 장면박사의 민주당 공천으로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다시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였으나 인제 경찰서장 출신인 자유당 공천 전형산(全亨山)에 밀려 또다시 낙방하는 쓴 경험을 하게된다.

그런데 이 때에야 말로 민주당 장면의 집권이 확실시 되던 시기인 만큼 관권이 선거에 개입되었다는 흔적은 사실상 없었다고 하는데 김대중의 주장은 자신을 지지하던 대부분의 군인들의 투표를 부재자 투표로 바꿔서 출신지 지역의 투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지만 어쨋건 선거는 공정하게 이루어졌고 당시 이지역은 아직도 자유당 강세의 지역이었다 한다. 그러니 김대중의 낙선은 순리의 결과 였다고보여진다.

인제선거때 김대중의 선거운동 일화

흔히 빨갱이들이 선전, 선동에 능한 경우가 많고 기상천외한 음모와 술수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인제 국회의원 선거때 김대중이 구사한 선거운동 술책도 이에 못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몇몇 일화들이 전해진다.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자신의 선거운동 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이를 상대당원이 테러를 한 것으로 역선전을 펴기도 하고 상대당원을 가장,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했다가 헛탕을 치게해서 상대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조장하기도 했다 전해진다. 김대중은 또한 자신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들에게 일정액의 금품을 제공함으로서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그 중 에서도 압권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선거운동원들로 하여금 상대당원의 완장을 두르게 한 후 시골 구석구석마다 고무신짝을 돌렸다고 한다. 김대중이 이로써 이적행위를 하고 있는것 아니냐는 의문이 일듯 하지만 이런 의문은 다음 순간 쉽게 해소되는데 김대중은 이 삼일 후 같은 운동원들을 동원하여 이미 분배된 고무신짝들을 회수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무신짝을 얻어가졌다가 다시 빼앗긴 순진한 시골사람들은 김대중의 경쟁후보에 대하여 매우 괘씸한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렇듯 김대중의 선거전략은 “저비용 고효율”의 매우 효과적인 선거전략이라 전해진다.

김대중의 난동사건

그러나 이렇게 야비한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낙선한다. 분을 풀길이 없었던 김대중은 경쟁자인 전형산을 “반 혁명분자”라고 선동하면서 자신의 선거운동원들을 포함한 400여명으로 데모대를 조직하고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함 22개중 15개를 강탈하여 그 속에 있던 유효투표지 27,000여 매를 소각하는 난동을 부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형산은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형산의 당선은 보장되었다.

조강지처의 의문사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빚을지며 생활고에 허덕였던 모양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김대중의 처 차용애의 계까지 깨졌다고 한다.

이런 경황에서 김대중은 본처인 차용애의 자살을 맞게 된다. 차용애로 개명한 차용수는 1927년 10월 26일 생으로 김대중과의 사이에서 김홍일, 김홍업 형제를 두었으나 1960년 5월 27일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목포 갑부 차보륜의 딸이고 차 모 목사의 동생이며 명문 목포여고 출신 (일본 고교에 유학했었다는 설도 있다)인 재원이었다.

김대중의 본처 차용애의 죽음과 관련하여 김대중 자신은 “생활고로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병사”라고 주장하고 있고 혹자는 차용애가 남편의 낙선과 함께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지는 바람에 세상을 비관한 음독자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차용애는 사망전이미 김대중의 국회의원 출마 노름에 상당한 친정집의 재산을 탕진 했음은 물론 미장원등을 경영하는 등 힘겹게 살면서도 이미 두번에 걸친 김대중의 낙선을 경험하며 살아온 여자다.

차용애의 자살 을 택한 진정한 동기로는 당시 이미 수년 전부터 통정해 왔던 신여성 이희호(李姬鎬)의 귀국과 더불어 자신의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이희호와의 결혼을 노린 김대중의 지속적 구박을 이기지 못한 차용애가 양잿물을 들이킴으로서 시도된 자살이라는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이때 차보륜가는 한 때 좌익운동을 하던 사위의 구명운동에 상당한 재산을 탕진한 결과로 몰락중이었고 이희호는 잘 나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이희호는 한때 야당 정치인 계훈제의 정인(情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폐렴으로 건강을 상한 계훈제가 마산의 결핵요양원에서 지병을 치료받고 있었는데 정인을 따라 마산까지 내려 온 이희호의 간호를 받게된다. 당시 김대중은 사업관계의 불미스러운 일로 부산에 피신중이었다 한다. 이 와중에서 김대중이 야당 정치인 계훈제를 방문하면서 이호희와 김대중의 첫 대면이 이루어 졌다는 말이 있다. 그 후 김대중과 이희호는 통정(通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격분한 계훈제가 이희호를 떠나 보낸 모양이다. 과년한 딸이 사실혼 관계에 있던 사실상의 사위로 부터 내처짐을 받게되자 이호희 가(家)에서는 이희호를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전해진다.

이희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7년 8월에 귀국한다. 귀국 후 이희호는 이화여대 강사, YWCA 총무로 활동하면서 당시 신여성으로서 뭇 남성의 우상이 되었다.

이희호는 집안이 좋은데다 부자였고, 차용애는 예전엔 부자였으나 당시엔 빈털터리였다. 좌익 활동을 한 남편을 구하려다 탕진한 결과였다. 김대중에게 유학에서 돌아온 이희호는 자신의 출세에 조강지처인 차용애보다 훨씬 유용한 존재로 부각 되었고 이미 이용가치가 떨어진 조강지처 차용애는 출세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처가 양잿물 복용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기별을 받은 김대중은 자신의 처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다고 하는데 가까운 병원은 놔두고 영등포쪽 먼 병원으로 향했다는데 시간적으로 급박한 이런 경황에서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서 차용수는 차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여러 정황으로보아 차용애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병사했다는 김대중의 설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아내 사망 2년후인 1962년 10원 16일, 김대중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신여성 이희호와 재혼하고 1963년 아들 홍걸이를 낳았다. 겉은로는 이 결혼이 정일형/이태영 박사부부의 중매라고는 하지만 이는 허울뿐이요 아무리 노처녀라 하더러도 명색이 처녀요 잘 나가는 부잣집 딸이 자식이 둘이나 딸린 3년 연하의 빈털털이 홀애비와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안이었으니 모종의 감추어진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조금만 찬찬히 생각하면 의심을 해 볼만한 이야기임을 인지할 것이다.

김대중의 첫부인 차용애는 병사한 것이아니라 의문의 사망을 했을 것이라는 정황적인 증거는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의 어릴적 행동으로부터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차용애의사망당시 김홍일은 열두살이었고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나이였다. 여기에 더하여 아버지가 재혼 후 1년 후 배다른 동생 김홍걸이 태어나면서 김홍일은 반항아가 되었다.

김홍일은 부모와 같이 살지 않고 서울 영등포의 외삼촌 집에서 살았다. 김홍일은 가끔 동교동 본가에 찾아와 계모 이희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렸지만. 그럴 때마다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병으로 자연사 했다면 이런 패륜아적인 행패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1980년대 김대중의 자금을 관리했던 한 측근은 출생 신분이 천해 국회의원이 되기 힘들었던 김대중이 신분상승의 기회를 이희호로 부터 찾았다고 증언한다.

이희호는 김대중보다 1년 연상(호적 나이로는 3년)이다. 애까지 딸린 남자가 연상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대중은 이희호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 차용애를 심하게 구박했고 남편의 구박을 견디다 못한 차용애는 결국 양잿물을 들이키고 말았는데, 근처 병원에 바로 데려갔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서 김대중은 택시안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것이 이 측근의 증언이다.

이런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시 김대중씨 집에서 일했던 민모라는 여자라고 한다. 차용애가 죽은 후 이 여자는 대현동 집을 떠났다. 하지만 그후 1년에 한번씩 동교동을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김대중은 측근을 시켜 그녀에게 1년치 생활비로 몇 천 만원씩 주었다. 입막음용 돈이었다. 이 여자는 서울 모 대학 앞에서 미장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철저한 조사를 통하여 밝혀져야 할 사안이지만 자신의 출세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김대중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한 비극적 사례가 될 것이라고 본다.

계훈제와 이희호

여기서 잠간 계훈제와 이희호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계훈제(桂薰梯)는 평안북도 선천출신으로 1921년12월 31일 에 출생하여 1999년 3월 14일에 사망한 정치인이다.

1943년에는경성제국대학 재학도중 학병으로의 징병을 거부한다. 1945년8·15 광복후 경성제대가 서울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후 복학하여 문리대학생회장을 지내면서 반탁운동에 앞장섰고, 미군정에 의한 서울대학교의 국립화에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서울대학교는 국립대학이 되었다. 이후, 교육자로 일하기도 하고 언론인으로서 사상계 편집장과 씨알의소리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이후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등과 함께 박정희의 군사정권과 유신에 반대하였고, 전두환집권 이후에도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고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1970년대와 1980년대 수차례 투옥당하기도 한다.

1987년 9월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의 경선에서 김영삼에게 패하고, 10월후보 단일화 협상을 거부하면서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김대중의 지지자이자 미국의 경제학자로 있던 최기일 박사가 계훈제를 찾아와 김대중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김대중을 지지해 달라는 최기일에게 계훈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자네는 머리가 돌았나?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기나 하나? ” 계훈제는 계속해서 김대중의 부정적인 면모를 설명하며 김대중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서 성명 까지 바꿨다는 말을 한다. 최기일은 계훈제가 김대중은 나쁜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자신이 폐렴으로 투병하고 있는 틈에 자신의 연인을 가로채간 김대중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계훈제는 이미 김대중의 진면목을 직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노태우 정부시절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다고 한다 1999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사망직전, 계훈제는 평소 알고지내던 손창식을 불러 과거 젊은 시절 이희호와의 순애보를 토로하며 3시간여의 육성녹음을 남겼다하는데 여기서 자신을 배신한 이희호와 김대중에 대한 회한을 토로했다 한다.

한편 이희호(李姬鎬)는 1922년9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2012년 6월 20일에 사망한 김대중의 부인이다. 이호희가 서울 출생이라고는 하지만 이호희가의 원적은 충청남도 청양/홍성 지방으로 전해진다. 이호희는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문과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 1950년에 졸업한다.

이희호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이희호는 김대중을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면서 대한여자청년단 회식 자리에서 김정례씨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당시 김대중은 20대 중반의 잘생긴 멋쟁이로 사업 근거지를 고향인 목포에서 임시수도 부산으로 옮겨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해운업을 하는 그의 배로 피란민을 소개시키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희호는 이후 그를 연우회 모임에서 또 만났다고 술회한다.

이희호는 1953년경에 도미하여 미국의 렘버스대학교 사회학과와 스카릿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였고 4년 후인 1957년에 귀국한다. 여기서 램버스 대학이란 아마도 Tennessee 주, Jackson시에 있는 Lambuth University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이 대학은 미 감리교 계통의 학교이니 아마도 이희호가 다닌 대학이 맞을 것이다. 스카릿 대학교란 학교도 Tennessee 주 Nashville시에 있는 Sacrritt College for Christian Workers 란 학교인데 미 감리교 계통의 학교로서 아마도 이희호가 다녔던 학교가 맞을 것이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오지 않아 학교문을 닫고 현재는 없어진 학교이다. 그런데 이희호가 왜 학교를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4년동안 별 유명 대학도 아닌 두 대학을 전전하면서 겨우 석사학위만을 받고 귀국한 것을 고려하면 이희호는 상당히 공부를 게을리 했던 모양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희호의 유학은 다분히 도피성 유학처럼 보인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 시점에서 몇가지 짚고 넘어가자. 김대중이 1951년 당시 부산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한 원로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대중은 사업관계의 불미스러운 금전문제로 부산으로 도피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금전문제로 문제를 일으킨 사례가 한두껀이 아닌 것을 상기한다면 아마도 이 증언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한편 이희호가 김대중을 부산에서 처음만났건 혹은 마산에서 처음 만났건 관계없이 이미 이 당시부터 김대중과는 육체적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희호가 별 준비도 없이 급히 유학길에 오른 것은 이희호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계훈제가 김대중과의 육체적 관계를 인지한 후 격노하여 이희호를 내쳐버리자 딸자식의 장래를 걱정한 이희호의 부모들이 서둘러 유학을 보냈다는 것이 이 원로기자의 증언이다. 이 이야기는 계훈제가 사망직전 토로한 육성녹음에서도 비쳐진다. 사실관계를 따져볼 때 좀 더 설득력있는 설명이라 할 것이다.

이런 추론을 뒷바침할 만한 사례는 김대중 자신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62년 5월 10일에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지금껏 내 반려가 되어주고 또한 정치적 동지이며 친구이기도 한 이희호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사업상 부산에 이주해 살고 있을 때, 독서서클에서 만나 알게 된 여성이기도 했다.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녀는 부산에서 대한여자청년단의 국제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업가였지만(실상은 건달) 뜻있는 젊은이들의 모임에 나가 독서한 내용을 주제로 토론하기도 하고 전쟁상황이나 국가장래 등에 대해 활발히 의견교환을 하곤 했다.

그녀와는 의견일치가 되는 때가 많아서 더 가까이 지냈던 게 사실이다. 더러는 얘기에 취해서 부산 교외의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휴전 직후 그녀는 미국에서 4년간 유학하고 귀국해서 YWCA 전국연합회의 총무이사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는 우연히 다시 만나 무척 자연스럽게 지내다가 그해 5월에 결혼했다.

“부산 교외의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걸었다”는 술회를 보면 연인을 담은 한폭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하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사람이 이미 이 당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통상적으로 생각해도 동거까지 하고 있는 애인을 둔 여자가 친밀하지도 않은 다른 남자와 “오솔길을 함께 걷곤하는”행위를 한다면 무언가 일이 잘 못되고 있다는 증상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이호희는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1962년에 40세의 나이로 정일형/이태영 부부를 들러리로 세워 사실상의 나이로1년 년하인 김대중과 결혼한다. 결혼 당시에 김대중에게는 전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김홍일과 김홍업이 있었고, 결혼 후인 1963년에 김대중과의 사이에서 김홍걸을 낳는다. 당시 사회적 통념에서 볼때, 아무리 노쳐녀라 하지만 부잣집 딸에 사회적으로도 잘 나가며 미국물까지 먹은 신여성이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연하의 빈털털이 홀애비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라 할 것인바,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알고 나면 별 이상한 일도 아니라 할 것이다.


국회의원이 못 된 당선자

그런데 민주당이 절대 다수인 5대 국회에서 제정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이 통과됨에따라 자유당 출신 인제 국회의원 전형산은 국회의원 신분을 잃게되고 1961년 5월 14일 인제에서는 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결연한 마음으로 이 보궐선거에 재 출마한 김대중은 북한 김일성 대학출신으로(?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인제에 내려와 그곳 약사와 결혼하여 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엄창록이라는 자를 자신의 선거참모로서 들여 앉혔다는데 이 엄창록은 조직의 귀신으로 알려진 자로서 한국 선거사상 최초로 소위 점조직 선거운동 개념을 도입했다고 전해진다. 이 엄창록은 한동안 김대중의 비서로서 “엄비서”로 불려지고 있었으나 정통 동교동계 비서들과는 잘 융화되지 못하였다고 하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이 엄창록이란 자는 빠짝 마른체구에 얼굴부터 빨갱이 냄새가 풍기는 전형적 빨갱이 처럼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다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김대중과 엄창록을 엮어준 제3의 세력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제3세력이 어던 존재인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여튼 이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은 생애 처음으로 선거에 당선한다. 자신의 당선에 너무도 감격한 김대중은 자신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하여 인제군의 6개면에서 하루에 한 면씩 면민들을 대상으로 축하연을 열게된다. 그러나 3번째 면에서의 축하연을 베풀 바로 그날 아침에 김대중은 5.16군사혁명의 발발과 더불어 국회가 해산되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황급히 그 험했던 강원도 지방도로를 7시간 30분동안 운전한 끝에 김대중은 가까스로 국회정문에 도착하였으나 그를 맞은 것은 국회의사당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두 대의 탱크였다.

국회의원 당선증을 꺼내 흔들고 의원등록을 호소하며 탱크의 그 두꺼운 철판을 주먹으로 두들겨 대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그의 국회에의 진출은 국회의사당의 문앞에도 가 보지도 못한 채 물거품이 되었다. 당시에는 후보자가 당선되어 당선증을 교부 받았더라도 국회 사무처에 등록을 한 연후에라야 국회의원 신분이 되는 그런 때였다한다. 따라서 김대중은 당선이 되었으면서도 국회의원 신분이 되지 못한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되었다.

장년기

민주당 임시대변인 김대중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장면총리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당 대변인 이었던 조재천이 법무장관으로 입각하자 원외 지구당 위원장이었던 김대중이 민주당 임시대변인이 된다.

얼굴 멀쩡하고 달변인 김대중이 이 즈음 부터 자신의 이름석자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서자새끼” 딱지를 떼다

그런데 이때 그를 괴롭히던 “서자새끼”란 딱지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김대중이 1960년 6월 1일자로 자신의 의부 김운식을 본처 김순례로부터 강제이혼 시키고 자신의 생모 장노도를 호적상 결혼시킴으로서 자신을 호적상 적자로 만들면서 “서자”의 딱지를 떼어던져버렸던 것이다. 장노도의 나이 67세때였고, 의부와 생모가 동갑인 것을 생각하면 의부 김운식은 그의 나이 67세에 조강지처인 김순레와 이혼한 셈이 된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종류의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김대중의 배다른 형 김대봉의 비극이다. 자신의 어미가 강제 이혼 당하고 자신의 적자신분을 순식간에 강탈 당하면서 적자의 신분에서 서자의 신분으로 떨어져 버린것을 면사무소 호적계 직원으로부터 귀뜸받은 김대봉은 자신의 생부에게 행패를 부리고 난동을 부렸지만 김대중의 술수에 말려 김대중이 제공하는 술과 여자, 용돈과 기타 향응에 빠져 건강을 크게 해치면서 요절하게 된다. 성경의창세기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 이야기에서 자신의 장자권을 팟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에서는 그래도 부자로 잘 살았지만 자신의 적자신분을 자신도 모르게 강탈당한 김대봉은 김대중의 술수에 말려 술과 계집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나머지 건강을 크게 해쳐 요절해 버리는 참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다.

그 신빙성이 매우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김대중의 제 6대 국회의원 당선을 위하여 북괴의 김일성(金日成)이 막대한 자금과 함께 세명의 간첩을 김대중에게 파견했다는 것이다. 이 간첩들은 선전, 선동술의 전문가들로 김대중의 목포 선거서무소의 사무장, 홍보실장, 재정부장에 배치되어 지니고 온 막대한 자금으로 김대중의 선거를 돕고 김대중의 당선이 확정되자 북한으로 귀대하여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를 하사받은 후 막대한 자금과 함께 재 남파되어 통일혁명당을 창건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래서 소위 “통혁당 사건”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신빙성이 크지 않은 정보원으로부터의 전언인 만큼 낭설일 수도 있고 현재로서는 확인 불가능한 전설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의 김일성의 교시와 합치한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가로되 “남조선은 민주투사가 집권하도록 해야한다” 면서 “그래야 대남공작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김대중의 6대 국회의원 당선을 남조선 적화의 교두보로 삼았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확인 불가능한 소문의 배경에는 김대중이 사상적으로 빨갱이라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는 점이고 또 실제로 김대중이 김일성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정황적 증거들이 끊임없이 노출되어 왔다는 점이다.

정태묵과 접선시도

한가지 주목할 만한 일은 제 6대 국회의원 선거시 김대중은 정 아무개(현재 사망)를 시켜 정태묵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2년전 재회시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데 대하여 감정이 상한 정태묵은 김대중과의 접촉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김대중이 무슨 연유로 정태묵과의 접촉을 시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선거자금 조달이 아닐까하는 추측은 할 수 있겠다.

그 후 1967년 5월 김대중은 전남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여관에서 정태묵을 만나고 선거전략지원을 요청하였다고 전해진다. 정태묵은 두 차례에 걸쳐 선거전략을 일러주었다는데 김대중은 정태묵에게 직접 선거운동에 임해줄 것을 요청하였는 바 정태묵은 이를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정태묵이 제시한 선거전략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여당의 금력(金力)공세를 막으려 애쓰지 말고 그대로 방임하면 효력이 감소한다” “선거 유세시 관(官)을 자극시켜 탄압을 유인함으로써 동정표를 흡수할 것” “선거운동은 도심지보다 변두리에 집중할 것” “지방 발전만을 외치는 여당전략에 말려들지 말것”

이 선거전략을 교도받은 이외로 김대중은 정태묵으로부터 목포 산정국민학교 교사로 종사하던 정태묵의 처의 동료교사인 임자도 출신 성명미상을 운동원으로 소개 받았다 전해진다.


5.16 직후의 또 다른 횡령사건?!

1961년 7월부터 김대중은 민주당 선전부장이 된다. 김대중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 부패혐의로 구속 조사받고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아마도 김대중이 연루된 또 다른 횡령사건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당시 김대중은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자금 3천7백만원중 7백7십만원을 횡령한 협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된다.

그 이듬해, 1962년 5월 20일에는 반혁명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한달 후 석방되기도 했다 한다.

김대중의 금전문제

앞에서도 여러군데에서 언급했지만 김대중은 일생을 통하여 깨끗하지 못한 금전관계 사례가 많았는데 김대중 자서전에도 금전에 관한 스캔들을 시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1950년대 후반 잇단 낙선으로 생활고를 겪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지만 다분히 아전인수격으로 미화한 냄새가 난다. 아래는 김대중 본인의 진술이다.

빈곤한 생활 속에 이런 일도 있었다. 경상남도 마산에서 고물상을 하는 분과 알게 되어 자금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동료와 사업을 할 생각이었다. 즉, 내가 벌이고자 하는 사업에 그 사람이 투자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탓인지 나의 동료가 그 돈을 갖고 도망간 것이다. 정말 곤란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그 돈의 일부를 사업을 위해 조금이나마 사용했던 상태였다.

나는 그 마산 사람에게 솔직히 사정을 털어놨다. “이러이러해서 그 돈은 이렇게 됐다. 그러나 증거가 없다. 내 말을 믿어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 돈을 가지고 동료가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가 없다”고 말하며 사정했다. 그리고 나는 적은 액수이긴 하지만, 내가 그 돈의 일부를 사용했다는 것도 솔직히 말했다. 내가 돈을 사용한 것을 그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법률상 횡령이 되며 형사상 처벌을 받게 될 처지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사람은 적으나마 그 돈을 사용했다는 나의 말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당신을 사귀어 보니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당신은 전도가 유망한 사람이니, 이런 사소한 문제로 앞날을 그르치고 싶지 않다. 좋다, 돈은 내가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으로 나는 한시름 놓게 되었다. 그때 그 사람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때 내가 만약 횡령죄로 입건되었다면 지금의 김대중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에 이른 것은 이처럼 실로 많은 분들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내가 국회의원이 됐을 때 그 사람을 찾아봤다. 그렇지만 그는 벌써 고인이 된 뒤였고, 그의 부인과 아들만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두 모자를 초대해서 고인께서 내게 관대하게 대해 주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얼마의 돈을 주었고, 이들은 내 밑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위의 이야기는 김대중의 평소의 행태를 고려할 때 액면그대로 믿기에는 너무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 든다.


1961년 어느 땐가 김대중은 서울 무교동 2층 다방에서 15년 만에 정태묵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때 정태묵이 별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매우 냉담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전해진다.

국회의원 당선

5.16이후 이철승등 일부 정치인들이 정치정화법에 묶여 있을 때 김대중은 민주당 선전부장, 당 대변인등을 역임한다.

1963년초 야당의 정치활동이 재개되고 난 지 약 6개월 후인 1963년 7월 18일 민주당은 창당대회를 열고 박순천(朴順天)을 당총재로 추대한다. 이는 5·16군사혁명으로 해산된 민주당이 재건된 것으로 반독재와 민주주의 수호 및 군정의 종식을 내걸었으나, 민주당은 1963년 11월 26일의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3명의 당선자밖에 내지 못한다.

제2공화국시대의 실정(失政)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 민주당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은 국민의 당, 자유민주당과 함께 삼민회(三民會)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어 원내활동을 벌린다. 삼민회는 자유민주당 9명, 국민의당2명 민주당 13명 으로 교섭단체를 만든것이다. 1964년 9월 17일 국민의 당을 흡수, 대표최고위원에 박순천, 최고위원에 허정(許政)을 선출하였다.

그 뒤 민주당은 효율적인 행정부 견제와 공화당(共和黨)의 원내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야당 통합밖에 없다는 국민의 여론에 좇아 민정당(民政黨)과 합당교섭에 나서서, 1965년 5월 3일 민중당으로 발전적 해체를 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정당 활동을 끝마치게 되었다.

1963년에 제 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될 즈음에서는 김대중은 어느 덧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민주당 임시 대변인이었기는 하지만 김대중의 달변이 그의 큰 자산이었던 모양이다. 하여튼 김대중은 이 선거에서 생애 처음으로 금뺏지를 달았다. 그의 실제 나이 마흔살 때였다.

국회의원 김대중은 1963년 12월21일 국회의원으로서 본회의에서 첫 발언을 한다. 국회의원으로서 김대중이 마지막으로 발언을 한 것은 제14대 국회때인 1992년 10월14일로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이었다 한다.

김대중의 첫 본회의 발언은 당시 현안이었던 한일어업협상 등 한일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초선의원이던 삼민회 소속 김대중은 당시 일본 사절로 내한한 오노 반모쿠(大野伴睦) 일본 자민당 부총재의 망언으로 정국이 어수선하자 본회의 자유발언을 통해 정부 여당에 한일 문제를 설명하는 성의있는 자세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김대중은 일본이 일제시대 과오를 한국에게 사과하지 않은 점을 거론하면서 한일문제를 다루는 관계자들이 “미국 등 우방에 대해서는 정도 이상으로 대항적인 자세를 취한 것 같은데 반해 일본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저자세를 취해온 것이 사실”이라고 질타한다.

김대중은 특히 박정희 정부가 어업보호선으로 설정된 ’평화선’을 지키겠다는 약속하에 ’40해리 전관수역’을 고수했으나 오노가 양보를 촉구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며 “우리들은 중대한 충격을 받고, 깊은 우려와 의심을 안가질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대중은 한일문제의 신속한 타결을 강조하면서도 “목적이 빠르게 타결하는데 있는게 아니라 목적을 정당하게, 우리 민족의 이익을 바르게 지키면서 타결하는데 있다”는 말로 발언을 마친다.

김대중의 인상적인 의정활동중 하나는 1964년의 필리버스터(의사진행 지연) 발언이다.

1964년 당시 야당중 하나인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공화당”정권이 한.일협상과정에서 1억3천만불을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폭로를 하자 국회의장 이효상은 회기 마지막날인 4월 20일 김준연 체포동의안을 전격상정한다. 이에 대하여 야당 초선위원인 김대중이 회기 마감시간인 오후 6시까지에 이르는 장장 5시간 19분에 걸친 원고 없는 연설을 하여 구속동의안 처리를 무산시킨다.

신민당 창당에 참여

1967년 2월 김대중은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이 된다. 1967년 6월 8일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 1968년 6월 3일 당시 신민당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로 지명을 받는다. 총재가 원내 총무를 지명하면 의원 총회에서 박수를 치고 넘어가는 게 관행이었던 시절인데도 김대중은 원내 총무가 못되었다. 이 때 김대중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김대중은 “정말 쓴맛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자기가 원내 총무를 못한 것은 원내를 좌지우지 했던 김영삼이 배후에서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원내총무 인준안은 의원 총회에서 재석 41명중 가 16, 부 23으로 부결되면서 원내총무자리는 김영삼에게 넘어가고 만다. 1968년 김대중은 신민당 정무위원에 선출된다.

제 7대 국회의원 당선

하여튼 김대중은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 7대 국회의원시절 김대중은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미끼로 박종태로부터 500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8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00만원등 총 4,450만원을 사취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 후에도 국회의원 지위를 악용하여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 농산, 삼양수산 등의 기업체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갈취한 사실도 밝혀졌다고 한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특별히 미워했던 것 같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 정치자금 조달은 차관을 지정받은 대기업체로부터의 일종의 리베이트 형식으로 차관알선에 대한 킥백으로 비자금을 조성하여 조달했다고 볼 수 있는바 야당인 김대중은 이 과정에서 당연히 소외된 존재였다. 돈에대한 욕망이 특별히 강했던 김대중으로서는 이 틈을 타서 국회 재정경제위원이라는 신분을 십분 악용하여 특혜를 받은 기업체로부터 빙땅을 뜯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빙땅을 뜯긴 기업체들은 자신들의 빙땅뜯긴 금액을 과대하게 보고 한 모양이니 이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대노했다고 전해진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박정희는 정치자금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치부수단으로 삼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김대중은 이를 십분 개인적 치부수단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런데 김대중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 후인 1968년 2월경 정태묵은 자신의 위장 사업체인 삼창산업(三創産業) 운영 공작금을 조달하기 위해 김대중에게 전화를 걸어 300만원의 은행융자를 요청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2,3개월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연락을 끊어버린다.

정태묵 등 16명은 임자도 간첩사건으로 1968년 7월에 구속되고 주범인 정태묵은 1972년 7월 28일에 사형당하고 만다. 여기서 김대중이 정태묵이 간첩이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일성은 남로당 출신인 정태묵을 통해 김대중을 포섭하려 했다는 점이다.

대통령 후보가 되다.

이런 상황에서 40대의 재선의원에 불과한 김대중이 감히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나선데에는 역설적이게도 라이발인 김영삼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1970년김영삼은 난데없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며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이에 대하여 김대중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김대중은 동년배인 김영삼에게만은 지지 않겠다는 극한적인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국회 진출은 김영삼이 먼저 했지만 같은 40대이고 김대중은 김영삼보다 세살이 많았다. 40대 기수론이 없었더라면 김대중 본인도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원내 활동을 열심히 하고 야당 의원으로서 열심히 투쟁하면 자기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판에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하자 김대중은 “김영삼이가 나오는데 내가 못나갈 이유가 뭐냐”며 전격적으로 출마를 선언한다. 그러나 김영삼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을 제치고 후보가 된다.

1970년 9월 29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에 출마한 사람은 이철승, 김영삼, 김대중 세 명이었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1위를 차지했지만 표가 과반수에 약간 부족했고, 김대중이 2위, 이철승이 3위였다. 1등과 2등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은 김상현 의원의 초인적인 뒤집기 노력에 힘입어 김영삼을 제친다.

자금력이나 조직력에 있어서 김대중은 김영삼을 당할 수 없었지만 김상현 의원은 서울에 올라온 지방 대의원들을 밤새 찾아다니며 설득한다. 김상현 의원은 “힘센 사람만 대통령 후보를 해야 하느냐, 아무것도 없고 설움 받는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하면서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설득한다. 한편 김대중은 자신의 명함 뒤에 “내가 후보가 되면 당 총재는 당신에게 주겠다”는 글을 써 이철승씨에게 건네 주었다 한다. 이 바람에 이철승씨 지지표의 상당수가 김대중씨에게 넘어가긴 했지만 그 당시 이철승과 김대중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하여튼 김대중은 이철승, 김재광 등과 제휴하여 김영삼을 40표 차이로 꺽고 대통령 후보가 된다.

모든 변수들을 고려할 때, 예컨대 이철승을 지지한 호남 대의원 표가 같은 호남출신인 김대중에게 간다 하더라도 김영삼씨가 승리한다는 게 정가의 지배적 분석이었다. 언론에서도 다 그렇게 예측했다. 1등과 2등간의 결선 투표가 신문 제작 마감시간과 거의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결과가 너무나 뻔하므로 개표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김영삼 대통령 후보”라고 보도한다. 결과적으로 대오보(大誤報)였지만 동아일보에 대한 김대중의 좋지 않은 감정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71년 대통령선거 이후 신민당은 유진산파와 김대중이 지지하는 김홍일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1972년9월 20일 유진산 이 이끄는 소위 진산계만으로 시민회관에서 전당대회가 강행되어 유진산을 당수로 선출하자, 반 진산연합계는 효창동의 김홍일(김대중의 큰 아들이 아닌 동명이인) 자택에서 단독 전당대회를 열고 김홍일을 당수로 선출함으로써 두 개로 쪼개졌다. 그런 분당 상태에서 유신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신민당은 충격을 받고 재통합하면서 유진산을 당수로 추대하였으며, 유진산은 선거 실시 전에 잠시 사임하였다가 선거 후 다시 당수로 복귀하게 되었다.

대선 출마, 낙선

여러 곡절 끝에 김대중은 1971년 4월 27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서 대선에 출마한다. 이 선거에서 총 539만 표를 얻은 김대중은 총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에 밀려 패배한다. 선거운동 기간중 1971년 4월 18일 장충단 유세에서는 당시 서울 인구 500만중 100만에 가까운 인파가 운집했었다 전해진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정보부와 국세청등 모든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야당탄압, 금픔살포, 흑색선전, 등등과 관권개입으로 부정선거를 했다는 평가도 있고 김대중 자신은 “나는 국민의 지지를 도둑맞았다”고 말했다한다. 이 당시 박정희는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최대 정적인 짐대중에게 위기감을 느낀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선거 후 한달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의문의 교통사고”에 대하여 김대중은 이것이 박정희 측이 꾸며낸 암살기도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지속적으로 선동의 자료로 써 먹었으나 이는 단순교통사고에 불과하다.


암살기도가 된 단순 교통사고

1971년 5월 24일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를 마치고 귀경하기 위하여 자동차 편으로 광주 비행장으로 향하여 가던 김대중은 마즌편에서 오던 14톤 트럭과 접촉사고를 내게 된다. 이 사고로 김대중은 약간의 부상을 당한 다.

그런데 모든 일을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 내지는 도구로 간주하는 김대중에게 이 단순 교통사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에게는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는 관심 밖이고 다만 자신이 당한 교통사고를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가 만이 그의 관심사다.

이 교통사고를 그는 두고두고 선동의 자료서 써 먹었다. 김대중은 자신의 대통령취임 1주년을 기념하면서 1999년 2월 25일에 출간한 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란 책에서도 그는 위의 교통사고를 박정희 정권에 의한 “암살기도”로 몰아부쳤다.

김대중은 그의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도 자신이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 다섯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언급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이 사건 역시 자신을 대상으로 한 독재자들의 암살미수사건으로 몰아부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보아 이 사고는 단순교통사고 였을 뿐 아니라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는 다름아닌 김대중 자신의 차였다. 이날 김대중은 목포유세를 마치고 목포 공항에서 비행기로 상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목포의 비행기가 결항되자 공항시설이 좋은 광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로 예약을 바꾸게 된다. 그래서 자동차로 목포에서 광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이동 중 사고를 만난 것이다.

사고 경위는 이렇다. 김대중은 자신이 탄 차 이외에 2대의 경호차량과 함께 이동중에 있었다 당시 김대중이 탄 1호차가 선두에 있었고 경호원 함윤식 등이 탄 2호차와 주치의 이경호등이 탄 3호차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때 이들의 뒤를 따르고 있던 한대의 택시가 3호차, 2호차를 번갈아 추월하며 김대중이 탄 1호차 마저 추월하려고 시도 하였다. 그런데 1호차는 이 택시의 추월을 허용하지 않고 추월을 시도할 때마다 이를 방해하였다. 2호차에 타고 있던 경호원 함윤식은 김대중이 탄 1호차 운전수에게 손짓으로 추월을 허용해 주라는 손짓을 하였으나 이 운전수는 이 수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추월 방해공작을 하였는 바 이 과정에서 이 두대의차량은 중앙선을 범하며 역방향 차선을 들락거리게 된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 택시에 타고 있던 상인들도 광주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광주로 향한 일행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여튼 김대중의 1호차와 이 상인들이 찬 택시가 서로 추월경쟁을 하면서 역방향 차선을 들락거리고 있을때 역방향에서 14톤 트럭 한대가 오고 있었다. 당시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어 노면이 미끄러웠고 사고 지점은 평지였지만 광주에서 목포로 가는 쪽, 즉 트럭이 오는 방향으로는 오르막 길이 막 끝난후의 평지였고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택시와 1호차는 내리막길이 끝난지점의 평지였다. 문제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승용차는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아래에 펼쳐있는 오르막길이 잘 보이지만 거의 평지에 이를 때는 올라오는 차량을 잘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의 뒤를 따르던 2호차에 타고 있던 함윤식의 중언에 따르면 상인들이 탄 택시가 1호차를 추월하기 위하여 역방향 차선으로 들어가서 추월을 시도하니까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1호차 역시 역방향 차선으로 들어가서 추월 을 시도하는 차의 앞을 가로 막았다는 것인데 바로 그 순간 반대방향에서 트럭이 왔다는 것이다. 당연히 트럭운전사는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노면이 미끄러운 관계로 차가 미끄러지면서 급히 충돌을 피한 김대중의 1호차의 후미를 받으면서 바로 뒤를 따르던 택시와는 정면충돌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고로 택시에 있던 3명이 사망하고 김대중의 차는 자신의 차선을 넘어 논두렁에 쳐박혔다고 전해진다. 트럭운전사는 자신의 차선을 침범한 김대중의 승용차를 피하기 위하여 브레이크도 밟았고, 운전중 졸았던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사고후 인명구조에도 앞장섰건만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힘없는 자가 억울함을 당하는 일에는 눈꼽만큼도 개의치 않는 김대중으로 인해 억울한 옥살이를 8개월간 했다 전해진다.

김대중은 이 사건을 독재자에 의한 암살기도로 몰아가면서 30년 동안 줄기차게 이 사건을 이용해 먹었다. 김대중은 문제의 트럭운전사가 독재자들이 입막음을 하기 위하여 암살당했다고 떠들고 다녔다는데 정작 그 운전자인 권중억(權重億)씨는 살아 있었지만 그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생계가 막막한 그의 아내는 집을 나갔고 감옥을 나온 그는 두 딸을 홀애비로 키우면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 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자그마한 이득을 위해 한 약자의 운명을 너무나도 처참하게 짖밟아 놓은 김대중의 행적이 잘 들어나는 일화라 하겠다.

김대중의 경호원 함윤식은 사고후 김대중이 탔던 1호차 운전수에게 왜 자기의 수신호를 무시하고 추월하려는 차에 양보를 안해주었느냐 면서 그 운전수를 혼내주었다고 하면서 아마도 그 운전사가 김대중 같은 유명인사를 태웠기 때문에 우쭐한 기분에서 그렇게 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당시 김대중이 탔턴 차는 렌트한 승용차 였고 운전수도 차와 함께 고용한 운전수 였다고 전해진다.


진산파동과 김대중의 음모

김대중의 음흉함을 보이는 또다른 사태는 흔히 진산파동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진산파동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대중이 당권 장악을 위하여 꾸며낸 음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수 유진산의 효과적인 반격으로 김대중은 당권장악에는 실패하고 만다.

1971년 5월, 대통령 선거는 끝났지만 5월 25일 실시될 총선거로 정치권은 여전히 분주했다. 그런데 선거를 눈앞에 두고 신민당에서 심각한 내분이 발생한다. 1971년 5월 6일 오후 4시 50분 경 서울 종로 4가에 있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긴장감에 싸여 있었다. 10여 분이 지나면 총선거에 입후보할 전국구 후보등록 마감시간인 오후 5시였기 때문이다. 1백여 명의 보도진이 붐비는 가운데 전국구 인선과 관련해 떠도는 소문에 흥분한 비주류계 신민당원 1백여 명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소문인 즉 신민당 당수인유진산 총재가 자신의 영등포 갑구에서의 출마를 포기하는 대가로 경쟁자인 공화당 후보인 장덕진(張德鎭.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 사위)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고 자신의 지역구 출마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기동경찰을 요청, 이들로 하여금 정문에 도열케하여 삼엄하게 경계를 한다.

오후 4시 55분에 도착한 유진산 신민당 총재는 마감시간에 겨우 맞춰 전국구 후보등록을 마쳤다. 곧 이어 후보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 후보 등록에서 쟁점이 된 것은 소문대로 유진산 총재가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 갑구를 버리고 전국구 후보가 된 것이었다. 신민당원들의 난동으로 유진산 총재는 1시간 이상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떠나지 못했다. 이들은 “진산 개새끼 나오라, 가만 안두겠다”고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이른바 ‘5․6파동’ 또는 ‘제1차 진산 파동’이라 불리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6시 20분 겨우 선관위를 빠져 나온 유진산은 7시 10분쯤 상도동 자택에 도착한다. 3백여 명의 비주류계 청년당원들이 “당을 팔아먹은 자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이중에는 김대중의 경호 책임자였던 이윤수도 있었다. 이들은 제지하는 유진산계 청년당원들과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난투극을 벌였다. 화분이 날아가고 유리창과 문이 부서지는 등 진산의 자택은 난장판이 되었다. 유진산은 자파 청년당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봉변을 모면하였으나 불만을 품은 당내 소장층과 영등포 갑구 당원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당수직 사퇴를 요구하는 사태로 벌어졌다.

이에 대해 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

반면 유진산은 71년 5월 8일 성명을 통해 "나는 이미 당수직 사퇴 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 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 취임 기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사태는 제3자에 의한 중재를 통한 수습을 하게 되었다. 이에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은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당수직에 대한 다음 승계권자인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의 사퇴,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한다. 는 중재안을 제시한다.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의 별다른 수습안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신민당은 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유진산과 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

김대중의 음해 술책

여기까지가 1차 진산파동의 대강이다. 그런데 진산 파동에서 유의할 점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진산이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로 간 것을 여당에 매수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유진산을 매도한 김대중의 선동이 주된 원인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김대중 계보 의원인 김원만(金元萬)은 “진산이 지역구와 전국구를 판 돈으로 수억 원을 챙겨 외국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누군가 공항에 나가 이를 막아야 합니다.” 라고 선동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상 김대중은 이전부터 유진산에게 전국구로 갈 것을 건의했으며 전국구 인선과정에서도 김대중 스스로 유진산을 전국구 2번에 올려놓았었다. 유진산은 전국구 인선과정을 김대중과 양일동에게 위임하였으나 양자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가운데 이 일은 등록 마감 날 아침에 당 총재인 유진산에 떠맡겨 졌었다. 유진산은 당수인 자신을 전국구 2번에 배당하고 김대중 자신을 전국구 1번에 배당한 인선을 관례대로 당수인 자신을 1번으로 변경한 것 뿐이었고 유진산이 김대중이 주장하는대로 비밀리에 자신을 전국구에 배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상 전국구 1번이냐 2번이냐의 문제는 상징적 의미는 있겠으나 실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김대중은 “ 柳珍山당수가 의혹에 찬 지역구 포기로 黨을 死地로 몰아 넣고 그것이 黨內파쟁의 소산인양 돌리려함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로 柳당수는 물러서야 하며 나는 국민과 黨을 위해 모든 투쟁을 다하겠다”고 선동한다.

신민당은 진산 파동에도 불구하고 89석이라는 당시로서는 초유의 야당의석을 확보한다. 이에 대해 진산 파동이 없었으면 신민당이 더 많은 의석을 얻었을 것이라는 견해와 진산 파동으로 야당이 수세에 몰리자 유권자들의 견제심리가 발동하여 덕을 본 것이라는 엇갈린 분석이 있었다.

6월 8일 총선 이후 처음으로 신민당의 정무회의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유진산은 진산 파동의 진상 규명을 요구한다. 유진산은 자신이 여당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을 비롯한 모든 사건 진행이 폭력으로 당권을 탈취하려는 김대중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

유진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간 선거 도중이라 근신하고 있었지만 선거가 끝났으므로 전국구 파동에 대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합니다. 폭력으로 당권을 잡으려는 정치풍토를 시정해야 하며 당원들 간에 당수가 당을 팔아먹었다는 불평과 의문이 가시지 않는 한 전당대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하거니와 전국구 공천을 계기로 당을 팔거나 해당행위를 한 일이 없습니다.”

이에 따라 김형일을 위원장으로 하는 7인으로 구성된 선거사후처리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된다. 특별조사위원회는 6월 9일부터 조사에 착수, 자료수집에 나섰고 14일에는 전국구 공천에 관한 첫”당내의 정치재판”이 열리게 된다.

총재실은 임시로 재판석으로 바뀌었다. 심문하는 7인 위원석과 마주하여 증언석에는 유진산 양일동 홍익표 김대중 고흥문 정일형 순서로 앉아 심문을 받았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유진산 김대중의 두 차례에 걸친 대질증언을 포함, 관계자의 증언을 청취하고 조사했다.

6월 24일 특별조사위원회는 6개항의 처리 내용을 발표했다. 1) 유진산의 지역구 포기에 따른 금전수수설은 근거가 없고 다만 유진산이 단독으로 지역구를 포기해서 당원과 국민의 공분을 산 데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2) 김대중은 이날(5월 6일) 오후 1시쯤 이 같은 사실을 진산으로부터 미리 통고받고도 만류하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 3) 전국구의 무원칙한 공천은 유진산이 단독으로 처리했지만 김대중도 공천심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 4) 5월 7일 김대중 집에서 6인위 멤버 중 김대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4명이 모여 유진산을 제명하고 김대중을 당수 권한 대행으로 결의한 것은 불법적인 처사로 유감된 일이다. 5) 중앙당사의 난동 및 폭행사태에 대하여는 서울 중구(정일형) 동대문구(송원영) 서대문 을구(김상현) 성동 갑구(양일동) 등 관계지구당 간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신민당은 정무회의를 열어 이 같은 특별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유진산은 정무회의의 결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진산은 유진산 계보가 다수인 중앙상무위원회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6월 30일 중앙상무위원회가 열리자 김대중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격론을 벌였고 회의는 3일을 끌었다. 7월 3일 자정에 이르러 양측은 다음과 같은 3개항의 결의안에 동의했다. 5․6파동을 처리하고 다음 전당대회를 단합된 모습으로 치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1) 5월 6일 하오 9시경 유진산 당수 宅에서 야기된 지역구 포기에 대하여 항의하는 지구당원에게 사실무근한 금전수수설을 고의로 유포시켜 난동을 확대시키고 전 국민을 공분케한 주모자는 즉각 제명할 것을 요구한다. 2) 김대중 전대통령후보는 5․6파동으로부터 국회의원 선거기간 중을 통하여 이 파동의 확대를 막고 수습할 지도적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습과정에서 여러 가지 점에서 확대시켰고 유 당수에 대하여 너무도 과도한 정치적 비난을 함으로써 이와 같은 혼란을 초래한 그 진의를 국민과 당수에 밝히고 유 당수와 전 당원에 대하여는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3) 이 동의는 정기 전당대회 이전에 완전히 처리되어야 한다.

김대중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공개 사과했다 “나의 수양이 부족한 탓으로 유진산 前당수의 명예를 훼손한 데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김대중은 앞자리에 앉은 유진산에게 악수를 청했다. 유진산은 김대중의 선봉장으로 유진산의 정계은퇴를 강력 주장했던 김상현에게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자네는 종아리를 좀 맞아야 해.” 김상현도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년 뒤 신민당은 유진산과 김대중의 대립으로 2개의 전당대회를 치러 결국 분당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공천문제로 야당인 민주당이 이기택계와 김대중계의 격심한 내분에 휩싸였다가 선거에서는 대승을 했으나 김대중이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분당한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김대중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진산파동의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 진산파동의 전후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 처지에 있던 김대중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김대중은 그의 자서전에서 진산 파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에 갑자기 당치도 않은 일이 또 발생했다. 5월 6일 국회의원 후보자 등록 마감일에 유진산 총재가 자기 선거구인 서울 영등포구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그 대신 유총재는 비례대표제의 신민당 전국구 당선 순위 1위로 등록했다. 그리고 영등포구에는 자기대신 무명의 청년을 입후보시켰다. 이 선거구는 육영수 여사 언니의 사위(장덕진)가 입후보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주목을 끌었던 선거구였다.

유진산씨가 이 영등포 선거구에서 입후보하면 틀림없는 당선이었다. 그래서 이 갑작스런 사퇴는 여러 의혹을 낳았고, 여당과 유총재간에 뒷거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이날 5월 6일 오전, 나는 비례대표제에 대해서 유총재와 막 의논을 끝냈었다. 유 총재는 그 자리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후에 자기 대신 청년을 영등포에 입후보시키고, 자신은 접수가 거의 끝나가는 오후 5시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국구로 등록을 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총재가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우리 당은 선거전을 앞두고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진산씨 자택에는 그날 영등포구의 신민당원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몰려와서 총재의 배신을 거세게 규탄했다. 다음날 모든 신문이 유진산씨를 일제히 비난하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지금까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선거였다. 야당에서 입후보한 내가 정면 대결에서 패하고 박 대통령이 뽑힌 이상, 야당이 개헌을 저지할 69의석 이상을 확보하는 일이 당시의 절실한 과제였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여당은 맘대로 국정을 움직여서 헌법을 고치고 4선, 5선, 결국은 총통제나 종신 대통령제를 도입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영원히 독재 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 중요한 선거를 앞둔 당총재의 행동은 앞날을 캄캄하게 했다.

다음날 5월 7일 우리 집에 당의 원로와 간사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당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총재대행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나는 수락을 보류했다. 반대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총재대행으로 한다는 제안은 당내의 지도자 몇 명의 반대로 성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대로였다.

나도 이 사태를 보고 총재대행 얘기는 없던 것으로 했다. 결국 당 원로인 전당대회의장 김홍일씨를 총재대행으로 정하고, 신민당은 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위의 김대중 자신의 진술이 담긴 자서전은 일본에서 먼저 출판된 것이라고 한다. 김대중은 이 글에서 스스로 유진산 당수에게 전국구를 권유했으며, 전국구 인선에서도 김대중 자신을 1순위로, 유진산을 2순위로 결정하고 그 명단을 유진산에게 넘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또한 유진산의 사퇴를 강력히 주장하고 스스로 당수 권한대행이 되려 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은 당수대행이 되기를 보류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의 집에서 열린 4인 회의에서 유진산 총재를 제명하고 자신이 총재 권한대행이 되기로 결정했고 이를 공식 발표했다. 단순한 제안이었다면 당내 중진들이 그토록 성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거 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한 사실도, 유진산에게 공개 사과한 사실도 일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김대중이 쓴 여러 글을 읽어보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 유진산의 증언 위에서는 진산파동에 대한 김대중의 진술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진산파동의 장본인인 유진산의 진술을 살펴보자.

유진산은 1년 후인 1972년 4월에 출간된 회고록 “해뜨는 지평선”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다음날 5월 5일이었다. 이튿날로 당의 공천후보등록 마감이 다가오므로 전국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밤 여덟 시에 양일동․김대중 양씨와 함께 나는 시내 앰버서더 호텔로 갔다. 전국구 공천문제를 조정하면서 순위에 대한 대체적인 원칙에도 합의를 보았다.

전국구 후보들의 헌금(獻金)문제에 있어서는 2개월여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느 정도 윤곽을 세워 놓았다. 1번부터 17번까지는 3천만원의 헌금을 당에 내게 하되 신축성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양의원은 18번부터 2천만원의 헌금을 받자고 했으나 나는 여기에 반대해서 당직자는 물론 정치분야에서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사회계층의 대표들에겐 돈을 받지 않고 공천하자는 주장을 했다. 예컨대 4․19세대나 6․3세대, 그리고 재일 교포 70만을 대표하는 인사 등을 흡수하자는 제의였다. (중략)

그러던 차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5월 1일이 되자 전격적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공고되었다. 더욱이 선거운동 기간은 앞으로 고작 20여 일을 넘지 못했다. 그런 사정으로 전국구를 공천하는 일에 있어서 당의 법규에 따라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 의원과 정무위원회 부의장인 양일동 의원 양인에게 내가 그 권한을 위임했던 터였다.

나는 5일 밤 양․김 양씨에게 전국구 공천 후보 결정을 맡기고 밤 열한 시 경에야 집으로 향했다. 그 때 나는 앰버서더 호텔을 떠나면서 「두 분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일로 박두한 등록 마감에 지장이 없도록 수고들을 해주시오. 밤샘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국구 문제에 일단 매듭을 짓고 내일 아침 일찍까지 내게 그 명단을 넘겨주시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당수가 사인만 하고 곧 수속을 밟게 하겠소. 내일 오후 두 시 비행기로 나는 동경엘 다녀올 일이 있으니 그리들 아시오.」 라는 말을 남겼다.

1971년 5월 6일. 날이 밝았다. 나는 7시반 경에 앰버서더 호텔로 전화를 했으나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8시 반경에 다시 했으나 종업원은 똑 같은 내용의 대답을 하였다. 9시에 다시 전화를 하니 양일동 의원이 받았다. 두 사람은 전국구 문제로 밤샘을 하고 늦잠을 잤다고 말하면서 곧 상도동으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납득할 만한 선에서 이 문제를 정리해 오면 나로서는 사인만 하고 일본으로 간다고 말해 둔 바 있었다. 그 날로 아침 일찍부터 내용은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세 차례의 재촉에 10시 경이 되어서야 양․김 양씨가 찾아왔다. 전국구(全國區) 1번 김대중, 2번 류진산으로 된 명단을 보니 모두 54명이 막연한 순서로 적혀 있었고 당 원로인 박순천 여사는 35번째 기록되어 있었다. 실로 아찔했다.

5월 6일은 마감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암담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무질서한 명단을 보고「이것이 어떻게 된 거요?」한즉 양일동씨는 「우리로선 이 이상 합의를 볼 수 없으니 이제는 당수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는 대답이 아닌가.

마감 시간은 임박해 오고 나는 그만 눈앞이 캄캄했다. 그럴 때 김대중 의원이 나를 단독으로 만나자고 말하자 양일동 의원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때 김대중 씨는 나에게 모 사업부서에서 국장을 지낸 퇴직관리인 김모씨를 꼭 전국구 당선권에 넣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청탁하는 김의원의 요청에 난색(難色)을 표했다. 약 30분이 지나자 김의원은 가고 양의원이 다시 들어왔다. 나는 양의원에게 「이 시간까지 전국구 후보가 정리되지 않았으니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걱정스럽소.」라고 한탄을 했다.

이러한 신념에서 박군을 영등포 갑구로 나가게 하고 나는 전국구로 나설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마는 梁․金 양씨는 당수인 나를 2번으로 기록해 왔었다. 이 2번 문제는 당의 조사위원회와 중앙상위에서 김대중은 당수를 전국구로 공천하자는 뜻이 아니고 당수가 추천한 사람의 뜻이라고 해명하여 사람들의 실소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 구차한 얘기는 길게 되풀이 하지 않겠다. 과거 윤보선씨의 경우도 당수가 전국구 1번이었고 또한 내가 전국구로 나서는 한 당수가 1번으로 등록하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 아닌가. ”

“사꾸라” 유진산과 “민주투사” 김대중

1971년 제1차 진산파동으로 총재직에서 물러났던 유진산은 얼마 안가 제2차 진산파동으로 다시 총재직에서 내려왔지만 역시 얼마 뒤에 다시 당선되었다. 1973년 가을에는 박정희와 박정희/유진산 양자회담을 갖는다. 1974년 초에는 유신헌법 개헌 투쟁을 선언하고 투쟁에 나섰으나 1974년 4월 28일에 결장암으로 사망한다. 5월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된다.

유진산이 작고후 남긴재산이라고는 달랑 서울 상도동에 집 한 채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나마도 2천만원 가까운 부채로 은행에 저당잡힌 상태였다. 이를 딱하게 여긴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집안이 거의 폐가가 됐으니 정치인의 말로가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며 모금을 주선한다 . 전경련 등 3개 경제 단체와 여,야 의원들이 모금한 돈은 총 3천만원에 이르렀는데, 당시 국회부의장 김진만은 돈을 전달하면서 모금자들의 뜻에 따라 저당잡힌 집을 찾고, 남은 돈은 미망인 생계 기금으로 써 달라고 하였다.

유진산은 민주당 구파로서 민주당 신파였던 장면등과 갈등관계에 있었으나, 후에는 같은 구파였던 윤보선과도 야당 내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 생전에는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하여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평도 들었고, 같은 민주당 구파계열 인사 중에서도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는 윤보선과 대조되어 '사쿠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진산은 그의 사후에 재평가를 받음으로서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찾게된 것 같다. 그는”정치란 타협이다”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정적(政敵)과의 타협을 어렵게 만들지 않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주의자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덮어 씌워진 자신의 지역구를 돈을 받고 팔아먹었다는 누명은 그의 사후에 남긴 재산이 증명하듯이 근거없음이 들어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일부 극렬 추종자들로부터 김대중이 듣는 “민주투사”란 평가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대중의 일본 인맥 구축

김대중은 후일 일본에서 반정부 운동을 하게 되는데 그를 후원한 재 일본 한국인간의 인맥은 상당 오랜기간에 걸쳐형성 되었을 것이나 구체적으로는 1971년부터 잡아볼 수 있겠다.

1971년 1월 하순경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은 후 정계시찰을 핑계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한다. 일본에 도착한 김대중은 동경소재 데이코쿠 호텔에 머물렀다고하는데 여기서 당시 일본을 방문중인 유진산, 양일동등을 만난다.

양일동씨의 소개로 후일 한민통의 요원이 될 배동호란 인물을 소개받았다 한다. 김대중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배동호는 김대중의 숙박비 일화 약 30만엔을 대불해 주었으며 양일동씨의 동생 양삼영씨로부터 미화 3000불을 여비쪼로 받았다한다. 또 다른 정보에 의하면 김대중에게 배동호를 소개한 사람은 고양일이란 사람이고 미화 3000불도 배동호가 제공한 것이란 설도 있다 하여튼 배동호는 김대중 도일시마다 김대중과의 접촉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그 예로서 1971년 11월에는 도쿄 신주쿠 소재 옥호 미상 통닭집에서 배동호는 민단 동경 지부 단장으로 있던 정재준과, 조활준, 곽동의,양상기, 유석준, 김은택, 김군부 등과 더불어 체일(滯日)중이던 김대중을 초청하여 대통령 낙선 위로 파티를 열어주면서 김대중의 반정부 투쟁을 격려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김대중의 자술에 의하면 김대중은 이 자리에서 곽동의란 인물을 처음 만났지만 김대중은 이미 1971년 8월경, 김상현의원으로부터 곽동의가 조총련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란 사전 정보를 받았다고 하는바 곽동의 장인인 김재화는 이를 부인했지만 조활준은 이를 부분적으로 수긍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도망가다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직전 김대중은 정일형, 이태영 박사 부부로 부터 유신에 대한 귀뜸을 받는다. 유신이 발표되고 김상현등 많은 김대중계 정친인들이 구속되기 일주일 전 즉 1972년 10월 11일 김대중은 신병치료를 핑계로 동지들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을 가 버린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당시에는 김대중뿐 아니라 양일동(梁一東), 정일형(鄭一亨) 송원영(宋元英) 의원들이 도일해 있었으며 김대중이 머물던 동경 소재 데이코쿠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다 한다.

김대중은 도일 직후, 1972년 10월 12일에 케이오 (慶應)대학 병원에 갔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중의 실제 도일 목적은 신병치료보다는 피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일본에서 왕성한 반정부 운동을 시작 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1972년 10월 17일 오전중 그는 후꾸다 다께오(福田赳夫) 전 일본수상과 면담하고 오후에는 고노 겐조(河野謙三) 참의원 의장과 면담시간을 가졌다. 케이오 대학 병원에 갔던 것이 12일 이었으니 꼭 5일후에 일본 정치계 거물급들과 면담을 가진것이다. 그의 도일 목적이 신병치료가 아니고 도피였다는 직접적 증거다.

1972년 10월 18일, 김대중은 동경에서 계엄령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27일에는 개헌안 반대성명을 발표한다.

1972년 11월 17일 김대중은 도미한다.

일본에서의 반정부 활동

김대중은 73년 1월 5일 일본으로 돌아온다. 두달이 채 못되는 시간을 미국에서 보낸 셈이다.

민단 사람들

당시 일본에는 친 남한정부의 교포단체인 재일 거류민단(약칭 민단)과 친북단체인 조선인 총 연맹(약칭 조총련)이 있었다. 70년대 초 이전에는 남한 보다 높은 GNP를 과시하던 북한정권이 대 재일교포 정책에서도 한수 위의 정책을 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총련이 민단보다 규모도 컸고 조총련계 인물들 중 상당한 재력가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민단은 박정희 정권 초기에만해도 대 재일교포 정책이 미미했었던 모양이고 민단 내에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있어 민단에 대한 중정의 간섭에 저항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던 모양이다.

긴 역사적인 관점에서보면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한국의 산업화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고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본다면 자유시장경제의 민주체제를 택한 이승만과 개발독재의 길을 택한 박정희의 결정이 옳았다는 판단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식자층에서도 이 역사의 큰 흐름안에서 사태를 판단한 사람은 매우 드믈다. 대부분의 식자들이 박정희의 독재에 반대하였고 어용이 아닌 민단사람들이 반 박정희파가 된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민통 결성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한민통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정재준(鄭在俊)이란 인물은 재일교포로서 원래는 경북 경산사람인데. 빠징꼬 사업으로 돈을 번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재일교포 북송문제가 터졌을때 당시 민단의 동경지부 단장으로서 그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라 전해진다. 그는 북송열차 저지를 위해 철로위에 가로눕기까지 하면서 북송저지 운동을 했다고 한다. 물론 재일교포 북송은 강행되었지만 정재준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박정희가 삼선개헌에 10월 유신을 발표하자 실망한 나머지 자신이 받은 훈장을 자신이 집에서 기르는 개의 개 목거리로 걸고 다니게 했다고 한다. 후에 한민통 일본본부 부의장의 감투를 썼다.

김종충은 김대중과 동향사람으로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동기생이기도 하다. 나이는 김대중보다는 두살이 많다. 일본 明治대 상학부 출신으로 한때 만주에서 교편생활을 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이 사람은 해방후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물렀다고 하며 누마다란 일본이름으로 거의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는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한때 인쇄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지나 김대중이 일본 망명시절, 김종충은 거의 건달 같은 생활을 하면서 생계는 부인이 하는 허름한 음식점의 수입에 의존했다한다. 이 한국인 부인이 새벽 3시까지 여는 음식점 수입으로 김종충은 자신의 일본인 본처 및 그 가족의 생계까지 해결했다고 하니 그의 생활이 어떠했겠는가는 짐작이 갈 것이다. 김종충은 한민통 일본본부 국제국장이라는 감투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배동호는 8.15해방후 경남 진주에서 남로당의 전신인 신민당에 가입 활동하던 사람인 모양인데 이 사람이 남로당에 가입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이 사람은 1949년 초에 밀항, 도일하여 조총련과 연계했다는 설이 있다. 이 사람은 한때 김재화 밑에서 민단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고 유석준(兪石濬)을 민단 중앙본부 단장으로 당선시키려 애썼으나 실패하여 민단 비주류로 활동했다 전해진다. 김대중 망명당시 이 사람도 부인이 경영하는 조그만 야끼니꾸집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이었다. 북한을 왕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신체가 허약하여 이북을 들락거릴 처지는 못되었을 것이란 관찰도 있다. 소위 “베트콩파”라는 말은 중정요원들이 배동호란 이름에서 붙여준 별명이기도 했다.

김재화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상당한 인격자로 간주되었던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한민통 사람들 가운데 최연장자로 1903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1925년 일본 上智대학을 1년 중퇴하였다고 한다. 1950년부터 3년간은 민단 단장으로 있었고 1971년 5월 7대 국회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도 역임한 사람이다. 1967년 조총련계 자금 국내 반입혐의로 입건되었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1980년 3월 1일 김대중이 복권되어 정치활동을 재개하게 되자 동년 3월24일 임시중앙대회를 개최하고 김대중을 대신하여 한민통 의장직에 취임했다. 한민통의 조직책임자인 곽동의는 김재화의 사위이다.


조활준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 1948년 밀항, 도일하여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1969년 당시 모 언론인의 소개로 김대중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당시에 그는 동경 아라카와 지구 민단 단장이었다. 그는 김대중의 일본 체재기간중 김대중을 위해 매주 1,2회의 회합을 주선하였고 1971년 11월 도쿄 신주쿠 소재 통닭집에서 김대중 대통령낙선 위로연을 주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한민통 일본본부 사무총장의 중책을 맡았다.


곽동의는 광복직후 좌익정당이던 신민당에 가입 활동했다하는데 후에 신민당이 3당합당으로 남로당에 흡수되었을 때 남로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설도 있고1948년 12월 남해군 인민위원장 박종환의 지령에 의하여 도일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리츠메이칸 대학에 재학중이던 1950년 9월경 조총련에 포섭되어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작전 방해 공작 후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대하였다고 정보기관은 파악 한다. 그는 부평소재 미군 탄약중대에 배치되어 복무중 기회를 잡지 못해 부대를 탈영하여 재 밀항, 도일했다고 전해진다. 김군부는 와세다 대학 출신이다.

곽동의, 배동호등은 비교적으로 과격분자들로 분류할 수 있으나 정재준 , 조활준등은 비교적 온건한 인물들로 후에는 이들 정치적 모임에서 자퇴하였다.

73년 초, 김대중은 한청(韓靑) 관계자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는다. 김대중은 즉시 이를 수락하였으나 한청이 친북단체에 가깝다는 전언을 듣고 자신이 빨갱이로 몰리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강연수락을 번복하기에 이른다. 너 댓차례에 걸쳐 수락과 거부를 반복하던 김대중은 결국 강연수락으로 결정을 내렸다. 김대중은 73년 2월 18일 한청(韓靑) 동기(冬期) 강습회에서 강연하였고 이때 정재준(鄭在俊), 조활준(趙活俊)이 동행하였다.

김대중의 달변과 뛰어난 선동술에 힘입어 이 강연은 대성공이었고 김대중은 재일교포 청년사회에서 일약 스타로떠오르게 된다.

1973년 3월 21일 김대중은 조활준의 동석아래 김재화(金載華)와 면담을 가진다.

김대중은 그 다음날인 3월 22일에는 “재일민주화운동전국활동가집회”로 열린 箱根橋旅館 大講演會에서 약 200여명의 청중을 상대로 강연을 가졌고 그 다음날에는 외인기자 클럽에서 강연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인 3월 25일에 다시 도미하였다.

미국에서 김대중은 1973년 4월 하버드 대학의 코헨 교수를 방문하고 한국의 박정희 정권 타도를 위해서 미국의 대 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 미군 철수를 촉구하도록 미 의회를 대상으로 로비를 해 줄것을 호소한다.

김대중이 언제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1973년 4월 25일 ***대학에서 강연했고 4월 27일에는 **신학교에서 “한국**민주주의의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김대중이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구체화 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 7월 8일 미국에서 한민통 미국본부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김종충의 주선으로 동경 신주쿠 도쓰카 초 2-105소재 하라다 맨션 809호실에 사단법인 한국 민주제도 통일연구소라는 명칭으로 김대중 개인 사무실을 마련한 이후라고 전해진다.

좀 더 구체적인 논의는 1973년 7월 13일 김대중이 묵고있던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서 중정 요인들이 베트콩파 로 지칭한 6개 단체를 대표한 배동호, 김재화, 조활준, 김군부(金君夫) 김종충등이 참석한 회합에서 논의되었다고 한다.

물론 한민통의 결성은 김대중의 복안이었으나 정재준 등의 통일에의 갈구에 대한 그 어떤 필요성과 김대중의 야심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여튼 이 이후 일련의 회합에서 한민통 결성이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바 이들과 김대중간에는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었다고한다. 본국에서의 집권이 궁극적 목적인 김대중에게는 한국의 민주화가 최 우선이었고 통일문제는 민주화 이후, 즉 자신의 집권이후에 생각할 수 있는 제2의 목표였다면 이들 교포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통일이 궁극의 가장 우선적 목표였고 민주화는 그 다음의 목표였다.

따라서 “선 민주화, 후 통일”을 주장한 김대중은 모임의 이름을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약하여 “한민통”이라고 하자고 주장하는 반면 “선 통일, 후 민주화”를 주장한 정재준 이하 사람들은 “한국 통일촉진 민주회복국민회의”, 약하여 “한통민”으로 하자는 주장을 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끝에 결국 김대중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민통이 되었는데 실상을 알고보면 김대중은 이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한민통” 미국지부의 결성을 끝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당시 소위 민주화 투사들 간에는 “선 통일”의 주장은 보안당국의 오해를 받을 소지가 많아 “선 민주화”의 기치를 앞에 내 걸었다고하며 “선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조총련등의 지배를 받는 불순세력이 많았다 전해진다.

김대중이 “선 민주화”의 주장을 편 것이 당시의 공감에 맞추자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집권목적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당시 민단 비주류둘 중 불순세력이 있어 “선 통일”을 주장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여튼 단체명의 문제는 “선 민주, 후 통일”로 결판이 나게 되었다.

1973년 8월 4일 소위 5자회담이 열렸는데 참석자는 김대중, 김재화(金載華) 배동호(裴東湖), 정재준(鄭在俊), 조활준(趙活俊)이었다 여기서 5대 슬로간을 합의하였다. 이 5대 슬로간은

  1. 박정희 독재 타도 민주국가 수립
  2. 해외동포 단결 국내동포 구출
  3. 조국의 영구분단음모 분쇄
  4. 일본의 독재정권 지원 봉쇄
  5. 일본에서의 KCIA추방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

김대중이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반정부 운동을 시작하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는 상당수의 거물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김대중을 설득하기에 나선다 이 중 유진산, 김종필 등 거물급들이 도일하게 되는데 눈치빠른 김대중은 이들과의 회합을 요리조리피해서 그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사람들 중 하나가 양일동(梁一東)씨다. 양일동 씨는 일제시대부터 무정부 주의자로서 정치운동을 해온 정치계의 원로로 직선적인 성격의 투사형 정치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당시 그는 통일당을 조직, 그 당수로 있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에서 성동구인가 어딘가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한다.

정당의 총재로서 원내 진출에 실패하여 체면이 깍인 양일동씨는 자신이 낙선한 이유가 부정선거 때문이라는 주장과 함께 법원에 선거소송을 제기하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의 서슬퍼런 압력으로 법원에서는 선거소송 진행을 차일피일 지연시켰던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국회의원 임기내에 자신의 선거소송은 사실심리도 못해보고 끝날 것 같으니 초조해진 양일동씨는 결국 중정과 일종의 묵계를 하게 된다. 자신만이 김대중을 설득할수 있고 그렇하게 하면 중정이 압력을 풀어 대법원에 계류중이던 자신의 선거소송을 조속한 시일내에 진행시키자는 것이다.

양일동씨는 이런 목적으로 도일하게 된다. 양일동 씨도 김대중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을 하고 도일하여 순천당(順天堂)병원에 입원부터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알고지내던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중인 Y씨에게 김대중과의 회동을 부탁한다.

그런데 김대중으로서는 당시 자신의 계파 정치인들이 모두 박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자신의 국내 세력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형편이었으니. 그로서도 국내에 새로운 세력기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필요성 때문에 김대중은 그나름대로 양일동씨를 만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양일동씨의 통일당이 그에게 국내세력기반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던 모양이다. Y씨의 연락을 받은 김대중은 양일동씨의 거취만 묻고 아무 대답도 않했다고 하는데 결국 김대중은 양일동씨를 병원으로 방문하여 일차 접촉을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양측이 2차 회합을 약속하게 되는데 의기 양양해진 양일동씨는 주일 한국대사관의 중정 파견 김재권(金在權) 공사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한국에서 날아온 정치인들 중에 자신만이 김대중과 만날수 있다는 단순한 자기 자랑의 수준이었던 모양새다. 이차 회합도 약속이 되어 있다고도 했다한다.

그러나 양일동씨가 전혀 짐작도 못한 사실은 이미 중정에서는 김대중 납치계획을 착착 진행중에 있어서 김대중의 거취를 추적하고 있었고 양일동씨의 전화 제보는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결국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양일동씨가 투숙중이던 동경소재 그랜드 파레스호텔 2210호실 바로 양일동씨의 면전에서 납치되었다. 1973년 8월 15일 한민통 출범행사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이 당시 김대중의 비서겸 경호인인 김군부외1인은 호텔 로비에서 대기중이었다고 한다. 이후로 양일동씨는 국회진출에 실패했음은 물론 중정의 앞잡이로 낙인이 찍혀 정계에서 매장을 당하다싶이 되었다. 양일동씨는 이로 인한 한을 가슴에 묻은채 작고하게 된다.

다섯번의 죽을 고비

김대중은 그의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자신이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 다섯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언급한 일이 있는데 이 납치사건도 그 중 하나이다.

김대중은 자신이 납치되어서 납치범들의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는 동안 미 정부 소속 헬기가 자신이 탄 배의 상공을 선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손을 포박하고 포박한 밧줄 끝에 큰 돌맹이를 매달아 자신을 바다속에 수장하려던 납치범들의 암살기도가 좌절되었음은 물론 배에 타고있던 경상도 출신의 선원이 자신을 돌보아 주었다고 술회해 왔었다.

물론 김대중의 이런 주장은 생각없이 들으면 그럴듯 할 뿐만이나라 다분히 김대중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할 것이나 이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김대중을 돌보아 주었다는 청년은 경상도 출신이 아닌 여수사람이었고 미 정부에서 헬기를 동원한 일은 물론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암살할 의도가 처음부터 없었다. 이는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일 박정권이 처음부터 김대중을 살해할 계획이 있었다면 일본 국내에서 살해했을 것이다. 당시 김대중은 마취되어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살해할 의사만 있었다면 독침을 써서 그자리에서 살해해 버렸을 것이다. 산 사람을 납치하는 일은 죽은 시체를 운반하는 일보다 열배, 아니 백배가 더 힘들 것이다. 시체야 부대자루속에 쳐 넣고 승용차의 트렁크에 넣어서 운반이 가능하지만 산 사람을 그의 의사에 반해서 산채로 납치하는 것은 너무도 번거로운 일일 것이다. 일본에는 우거진 숲이 허다한데 김대중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동경에서 오사까 까지 차에 싣고 옮겨 배에 태워 현해탄을 건너야 하는 번거로운 수고를 했을 이유가 없었던 것 아닌가 말이다.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의 호텔 그랜드팰리스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김대중 자택 앞에서 발견된다.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 귀환과 즉시 가택연금과 동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게 된다.

한 일본기자의 통곡

가택연금 기간동안 김대중의 거주지는 철통같은 보안속에 개미새끼 한마리라도 근접이 어려운 환경이 된다.

그러나 김대중은 연금기간동안의 생활비를 재일본 한민통 관계자들로부터 모금된 송금에 의존하였다 전해진다.

외부와의 통신도 거의 단절되어 있던 상황에서 김대중은 사신(私信)을 통하여 재일본 한민통 관계자들과 교신하였다 전해진다. 사신이 틀림없이 검열을 거칠것을 예상한 김대중은 필요한 메세지를 암호화 한다. 예를 들어 “먹 세개와 붓 두자루를 사서 보내주시오” 란 메세지는 돈 3,200만원을 보내 달라는 메세지가 된다는 식이다. 자금이 마련 되면 운반책이 문제 였다. 동교동에 자금을 전달하다가 중정에 발각되면 여지없이 “북괴자금 운반책”으로 조작되어 형무소로 직행, 자금의 출처를 대라는 고문에 시달릴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험까지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자금을 보낼 때 마다 운반문제로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이 문제를 풀어준 사람중의 한나가 당시 현역 일본인 기자였던 “N”씨였다. 이 기자는 발각되는 경우 직장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 생명에의 위험을 무릅쓰고 70년대 말 벌써 여러 차례 현해탄을 건너곤 했다. 80년 초 서울의 봄이 왔을 때의 일이다. N기자는 일본의 지지자들이 모금한 마지막 모금분을 전달하면서 이제 정치활동도 풀렸고 재 일본 한인 사회에서의 모금도 한계에 봉착해서 더 이상의 송금은 없을 것이라는 전언과 함께 지니고 온 비자금을 전달했다 하는데 돈 봉투를 받아든 김대중은 만면에 지긋한 미소를 지으며 이 자금 운반책을 김대중의 안방으로 인도 하였다고 한다.

이 김대중 집의 안방은 매우 제한된 사람들만이 들어 가 본 방이라는데 하여튼 김대중은 이 일본인을 좌정시킨후 방안에 있던 설합장으로부터 큰 설합을 하나 빼내어 설합채 들고오더니 그 설합을 이 일본인 앞에 내려 놓는다. 설합안에는 고액 현찰이 꽉 차 있었다고 하는데 김대중 왈, 나는 이제 넘쳐 날 만큼 자금이 있으니 일본의 동지들에게 돈 걱정은 더 이상 하지 말라 전해달라 했다 한다. 이를 목격한 이 일본인은 일본에 돌아가자 대성통곡. 자신이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 까지 돈 심부름을 해준 당사자인 이 정치인이 정치를 시작하기도 전에 돈 뭉치를 자랑하는 썩은 모습을 보게되매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일이 한갖 사기꾼에 속아넘어간 기분이 들어 너무 허무한 마음에서 촉발된 울음이었다 한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거액의 현찰은 이후락으로부터 온 돈이라한다. 박통이 저격당하여 사망한 후 차기 대권이 김대중에게 넘어갈 것을 예상한 이후락이 보험금으로 지불한 돈이라는 것이다. 이후락으로서는 납치극을 지휘한 책임도 있을 테니 사태가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았음을 느꼈던 모양인가 미리 손을 써놓은 모양 이다. 이 이야기는 신빙성있는 정보원으로부터 나온 이야기지만 현재로서는 증명이 불가하니 단지 “카더라”의 수준에서 말할 수 밖에 없음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한가지 거의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김대중은 이 당시 자신에게 줄서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자 박정희 이후의 차기 대권은 자신의 몫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5.18 광주사태라는 불행의 씨앗이 이때 벌써 심어져서 자라나기 시작했고 1년도 채 되지않아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김영삼 신민당권 장악, 김대중의 지원?

1974년4월 28일 유진산 신민당 총재가사망하자 신민당은 8월 22일과 23일 이틀 동안 명동 예술 극장에서 임시 전당대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당권 경쟁에 나서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김영삼, 김의택, 정해영·고흥문·이철승 등 5명중에서 2차 투표 끝에 김영삼을 당총재로 선출한다. 김영삼의 당권 장악은 「선명야당」을 향한 많은 대의원들의 성향이 투영된 것으로 풀이됐다. 김영삼 총재는 전당대회 결의문을 통해 김대중의 정치활동 보장을 요구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앞장 설 것」을 다짐했으며 그 후 첫 기자 회견에서 「개헌」을 주장, 그후 9월 정기국회에서도 개헌 투쟁을 벌렸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의 당선을 적극 지지하였다고 하는데 일생 라이발 의식을 지녔던 두사람의 관계를 고려할 때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민주회복 국민회의

1974년 11월 27일, 정계, 천주교, 기독교, 불교, 언론계, 학계, 문인, 법조인, 여성계 등 각계 인사 71명은기독교회관에서 “국민선언”을 발표하고, “민주회복 국민회의”결성을 공표한다.

윤보선, 함석헌, 김재준 등이 서명한 “국민선언”은 (1)현행 헌법을 합리적 절차를 거쳐 민주헌법으로 대체 (2)복역·구속·연금 중인 모든 인사에 대한 석방과 정치적 권리 회복, 언론자유 보장 (3)국민의 최저 생활 보장 (4)민주체제의 재건 확립을 통한 민족통일 성취 등 6개 항을 천명하였다. ‘민주회복 국민회의’는 1974년 12월 25일 서울 YMCA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지고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윤형중(상임대표위원)·이병린·이태영·양일동·김철· 김영남·김정한·천관우·강원룡·함석헌 등 10인을 대표위원으로, 홍성우·한승헌·함세웅(대변인)·김병걸·김정례·임재경 등 6인을 운영위원으로 하여 체제를 갖추었다.

‘민주회복 국민회의’는“범국민단체로서 비정치단체이며, 그 활동은 정치활동이 아닌 국민운동”으로 자신의 성격을 규정한 뒤, “자주, 평화, 양심”을 행동강령으로,“민주 회복”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민주회복 국민회의’는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민주수호협의회 등 이전의 연합운동체와는 달리 상당한 조직적 운동체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지역지부의 대부분이 저명한 인사들의 임의적 결합체의 성격이 강하여 조직으로서는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의 조직 역량이 그만큼 성숙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전국적으로 호응을 받자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1974년 11월 30일 「국민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김병걸 교수가 권고 사직된 데 이어, 같이 서명한 안병무·문동환·박봉랑·서남동·이우정 교수 등에게도 경고조치가 내려졌다. 12월 9일에는 서울대 백낙청 교수가 문교부 특별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파면이 결정되었다.

‘민주회복 국민회의’의 주요 임원들에 대한 연행과 감시가 계속되고 각 지역지부 결성에도 온갖 탄압이 자행되는 가운데, 1975년 1월 17일에는 대표위원의 한 사람인 63세의 이병린 변호사가 구속되고, 3월 22일에는 운영위원인 한승헌 변호사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이 가택연금 속에서도 이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나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긴급조치 9호

1975년 5월 13일 오후 3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반정부 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도 금지됐다. 긴급조치 9호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게 했다. 이 조치를 비방하는 사람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했다. 긴급조치는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에 규정되어 있던 헌법적 효력을 지닌 특별조치였다.

긴급조치 9호는 이전의 긴급조치와 좀 달랐다. 이전의 긴급조치는 반유신 활동을 한 사람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나 긴급조치 9호는 일반 재판에 회부하도록 했다. 사형과 무기징역 등의 형량을 1년 이상의 형량으로 현실화했다.

하지만 이것은 처벌의 완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감시하고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으니, 정치적 억압이 일상화된 것이다.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그 위세에 눌려 학생운동 등 민주화를 향한 움직임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대학의 학생회는 해체되었고 학도호국단이 조직됐다. 대학 캠퍼스엔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들어왔다.


1975년 12월 13일 김대중은 서울 형사지법에서 대통령(6,7대)선거법 및 국회의원(7,8대) 선거법 위반으로 금고 1년 (벌금 5만원 선고유예)선고 받고 항소, 1988년 2월 5일 서울 고법에서 공소시효 완성(15년)으로 면소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명동사건

1976년 3.1절에 김대중은 이른바 “명동사건” 에 연루된다. 명동사건이란 76년 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20여 명의 사제가 공동으로 집전하는 가운데 3ㆍ1절 미사를 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장덕필 신부의 사회와 김승훈신부의 강론으로 진행된 미사를 마치고 기도회가 속행되었는데 이 기도회에서 소위 “3.1 구국선언문”이 낭독된다. 김대중은, 윤보선, 함석헌, 함세웅, 이우정,정일형, 윤반웅,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문정현, 문동환,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은명기 등과 함께 이 구국선언문에 서명했다 한다. 선언문을 발표한 재야인사들과 신자들은 명동성당을 내려오면서 시위에 들어가려 했으나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그날부터 1주일 사이에 선언문에 서명한 전원이 연행된다.

이 기도회 사건은 많은 사람이 모인 대규모 집회가 아닌 3·1절 기도회에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한 것이 전부였다고 하지만 정부는 이 기도회에 대해 즉각 수사에 착수하여, 선언문을 낭독한 이우정을 당일 저녁에 자택에서 연행하고 다음 날에는 문동환, 윤반웅 목사, 3일에는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해동, 이종옥, 문호근, 김석중 등을 차례로 연행했다. 3월 5일에는 이태영, 6일에는 함세웅, 김승훈, 8일에는 김대중, 이희호, 정일형이 각각연행되었다.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이란 예우였는지 9일 자택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후 김대중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고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5년에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김대중의 투옥에 대한 국내비판이 고조되자 1978년 12월 박정희는 그를 형 집행정지로 석발한 후 가택연금으로 전환했다.

국민연합

197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억압과 침묵을 딛고 소위 민주화 시위가 되살아났다 1979년 3월 1일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 의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재야활동을 재개한다.

일부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이 소위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회의’와 함께 박정희군사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반파쇼민주전선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을 “파쇼”라고 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대중을 포함한 이들 소위 “민주투사”라는 사람들이 민주화에 앞장선 것은 자기 자신들의 권력욕이 그 주된 동기임이 분명하고 이들은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김대중은 다분히 권위주의자요 기회주의자이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서울의 봄

1979년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에 의해 갑자기 시해되자, 당시 국무총리 최규하는 자동적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직무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받게 된다.

최규하는 박정희가 이끌던 내각을 소집하고 1979년10월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부구성을 명령하여 육군대장 정승화를 계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같은 날 아침 9시에는 최규하 대통령권한 대행이 직접 나서서 “국가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다. 최규하는 박정희 피살사건의 조속한 수사를 명령하면서, 육군소장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10월 26일자로 소급해임한다.

동년11월 3일는 암살된 박정희의 빈소에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명칭 변경)을 추서하고, 국장(國葬)을 결정, 박정희대통령국장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국장을 주관한다.

12월 6일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대회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최규하의 선출은 어디까지나 유신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선출된 대통령이 군부가 아닌 민간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독재체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최규하는 다음 날인 12월 7일 오후 12시,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다음날인 1979년 12월 8일 김대중을 가택연금에서 해제시킨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그 시점에서 국민들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북한의 남침이었고, 간첩들의 준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해 12월, 최규하 정부는 “1980년 초에 북괴가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를 미국으로부터 입수했고, 같은 시기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도 “1980년1월에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당황한 최규하 대통령은 12월25일 크리스마스 날, 긴급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고, 여기에서 두 가지 대책을 도출한다. 하나는 대규모 육군 기동훈련을 벌여 북한에 무력을 과시하기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지도층에게 북한의 남침 위협을 알려 사회안정을 위한 협조를 당부하기로 한 것이었다.


1980년1월21일, 최규하 대통령은 ‘대간첩대책중앙회의’를 주재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은 공작간첩을 통한 정치선동과 무장간첩 남파에 의한 사회불안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으니 특히 대공관계자는 불순분자 개입을 사전 방지해 달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어서 동년 1월26일부터 31일까지 경기도 파주에서 보병 2개 사단과 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하고, 1월30일에는 김종필, 김영삼 등의 정계인사들과 언론계 및 대학생간부 등 798명에 기동훈련을 참관케 하여 훈련의 목적을 설명해준다.

미국 역시 북한의 오판을 경계하여 1980년 4월3일, 군사정전위 제400차 대회의에서 UN군측 대표 '호스테트리' 소장은 북한의 잇따른 대량 무장간첩침투 행위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한다. 최규하 정부는 5월17일에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비상근무령을 내렸으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위컴 사령관을 방문하여 일본내각으로부터 접수한 남침첩보 및 우려사항을 전달했다.

이처럼 1980년 봄은 남침위기와 대량간첩으로 대표되는 매우 불안한 안보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재야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권력의 공백기를 국가전복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국민과 대학생들을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주도함으로써 한국사회에는 그야말로 무질서한 리더십 진공상태가 형성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0·26 사태 수사 종결 이후 윤보선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대통령 최규하에게 유신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였는데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최규하 대통령은1980년 2월 29일 김대중을 포함한 모든 시국사범들에게 사면복권을 선언한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으며 이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불안한 안보상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위 “민주화 운동”이란 기치아래 권력쟁취운동이 벌어진다. 3김을 포함하는 정치꾼들과 박정희 정권을 전복하고 싶어 했던 이른바 재야세력들이 저마다 일어나 국민들을 대상으로 선명성 경쟁을 벌이면서 사회혼란을 획책함으로써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최규하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민주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재야세력은 일방적으로 최규하 정부를 유신잔재세력으로 규정하고, 최규하 정부는 북으로부터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며 대학생들을 선동해 최규하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소위 김대중은 비롯한 재야세력들의 주장은 과도정부를 즉각 해체하고 전국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최규하 정부는 유신체제를 계승할 자세를 보였는가? 그런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최규하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발생했던 시국사범들에 대해 일제히 사면복권을 단행했다. 동시에 최규하 정부는 재야세력이 퍼트린 무수한 유언비어가 나돌 때마다 “헌법을 빨리 고치고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거가 최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거듭 다짐하였다. 이렇듯 민주화 요구에 적극 호응하던 최규하 정부를 놓고 유신체제의 후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부를 즉각 해체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자는 재야세력의 주장은 타당하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사실상 당시 물렁하기로 이름나 있던 최규하 정부가 독재정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당시의 시국사범들은 이 당시를 “서울의 봄”이라 칭하면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1979년말, 12.12 사태라 불리는 일종의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1980년 5월 초부터 정권을 장악할 의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명도 있으나 우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정황도 있어 확실한 것은 아니다.

12.12 사태

1979년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 연행한다. 이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은 군부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하여 5·17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 '비상기구 설치'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제시한다. 신군부는 1980년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여러 조치를 내려 소위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개시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사태가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12,12 사태의 전개과정

10·26 사건 이후 각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 시해 당시 정승화가 현장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국가 안위를 책임지는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증폭되었다.

10·26 사건을 조사하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979년 11월 6일에 “10·26 사건은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발표한다. 또한 전두환은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될 것이지만 정총장이 육군 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발표한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을 기점으로 합수부장인 자신의 명의로 정승화를 연행수사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1979년 12월 12일 19시경 제9사단장 노태우 육군 소장 등 영남출신 고급장교들로 이루어진 군부내 비밀사조직 '하나회를 동원하여 박희도 1공수여단장에게 총장 공관에 있던 정승화계엄사령관을 연행하라고 지시한다.

신군부는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1979년 10월 26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해현장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근처인 별관에 있었음에 불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것은 정승화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신군부 세력은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중장 이건영,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장태완, 특전사령관 소장 정병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하소곤 등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한다. 신군부 세력은 국방부,육군본부,수도경비사령부 등 주요 군시설을 점령하여 군부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결국 사태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었고, 13일 노재현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대통령 시해에 관련해 정승화를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되었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 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이 임명되었음을 발표하였다. 12.12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권력 공백기에 있어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1980년 1월 군장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공석이나 사석에서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등, 군부를 정권장악의 도구로 이용할 준비가 갖추어진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는 신군부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 장군이 군사 반란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도 들렸고. 사태가 발생하자 리처드 홀브루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김용식 당시 주미 대사를 불러 우려를 표명한다. 카터 대통령의 우려란 그가 한국상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고 민주 발전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될 것을 희망한다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서울에 있던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 군부가 극도의 불만을 품고 있다며 강경한 분위기를 전달하기도 했다. 한국군이 미국과의 협조를 완전히 무시했고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위반과 위계질서 문란은 놀라울 정도라는 것이다. 이에 앞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12월 13일 전문에서 12.12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했다가 다음날 자신이 신중하지 못했다고 자인하는 등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 사실이 미국측 문서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이 당시의 외교문서는 글라이스틴 대사가 12월 28일 다시 한번 태도를 변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박동진 장관과의 면담에서 미국이 한국 군부를 배척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당시 미국 정부 외교현안이던 이란 인질 사태와 관련해 미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신군부가 통제하는 한국 정부를 용인한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한미관계는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한 차례 더 심각한 위기를 겪지만 미국은 신군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는다.

한편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한다. 그러나 신군부는 1980년5월 17일의 군사 쿠데타 이후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18일 새벽 광주 사태가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 5월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다.

12.12는 쿠데타로 불리지만 실상은 숙군 목적을 띤 군내부의 반란이라 볼 수 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 5월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 사태에 이르는 과정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규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1980년 5월 30일에는 김재규 등 박정희 피살 관련자들을 즉결심판으로 처형하였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하였고 1980년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 일명 (장충)체육관선거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로써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출범한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인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은 제 12대 대통령에 민정당 전두환 후보를 선출한다. 1981년 2월 25일 오전 8시부터 전국 77개 선거구에서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후보는 재적 선거인단 5277명 중 4755표(전체 유효투표의 90.2%)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이 확정됐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서울의 봄 이래로 김대중은 김영삼, 김종필과 더불어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서며 3김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광분한다.

김대중은 마침내 자신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을 가졌던 모양이다. 아래의 일화를 보면 이 당시 김대중의 마음가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979년 12.12 사태이후 12월 14일 아침, 김대중은 강원룡 목사를 만났다고 하는데 강원룡은 김대중에게 당신은 이번에 대통령 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말고 김영삼에게 양보하라는 요구를 노골적으로 했다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김대중이 아니다. 김대중은 강원룡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이미 끝났다. 강 목사님이 군이란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씀인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거기에 충성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12.12사태 이후 사태의 전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감을 보며 자신의 집권기회가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따라서 정상적인 수단으로는 자신이 집권할 가능성이 사라지게됨을 염려한 나머지 강제적 내지는 초법적 수단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 수단이란 다름아닌 무력 폭동과 소요 책동이다

김대중은 특히 학원소요의 위력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당시 한국사회를 위협했던 학원소요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많은 정황적인 증거를 남긴다. 김대중은 당시 구심점을 잃고 있던 과도정부의 취약점을 악용하여 한국사회를 무정부상태로 만듬으로서 정권을 잡아보려 했던것 같다.

따라서 김대중은 과도정부를 전격적으로 붕괴시킨 후 정권을 잡으려는 뜻을 품고 자신을 추종하는 반체제 집단인‘국민연합’ 의 조직을 자신의 의도에 따를 수 있도록 개편 강화하면서 그들에게 사무실 임대료, 활동비 등을 주어 그 활동을 고무하였고, 예춘호, 김동완 등에게는 ‘민주헌정동지회’ 를 정비,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의 장남인 김홍일에게 ‘민주연합청년동지회’를 정비,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의 측근인 김상현에게 지시하여 ‘한국정치문제연구소’ 를 정비 강화하도록 지시함과 동시에 신민당 자파의원들에게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및 지구당 위원장들의 성분을 분석, 포섭하도록 공작비를 주고 긴급조치 위반 전과자인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비를 주는 등 거금을 살포하며 유신체제에서 제적된 복학생 등을 조직하여 학생소요를 선동한다. 결국 1980년 5월 화염병을 무기로 한 대규모 극렬시위는 다분히 김대중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를 따르는 세력은 이를 ‘5월의 봄’이라 불렀다는데 이는 신바람 난다는 뜻이란다.

국민회의 지도부 인물들인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은 북악파크호텔에서 수차 회동하여 장기표와 심재권으로부터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민중의 호응을 얻어가지고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여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를 만들어 김대중의 집권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추인했다.

김대중은 1980년 5월17일 자정 직전에 전격 체포된다. 체포당시 당시 그의 집안에서는 소위 “예비내각명단”과 3000만원이 넘는 현금과 수표가 발견된다

1980년5월14일 및 15일에 발생한 소요는 극렬함의 정도로 보나 양적으로 보아 경찰력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이 양일간의 학생소요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 산하인 “민주청년협의회”의(장기표 등 복학생 조직) 사주에 따라 전국 33개 대학총학생회장들에 의해 유도됐다. 5월 22일로 계획돼 있던 전국규모의 소요는 국민연합 등 재야정치 단체들과 전국 59개 총학생회장단회의와의 연대 하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민중봉기였기 때문에 군에 의한 대대적인 대책이 요구되었다.

5월 16일, 국방장관은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에서 열린 시국대책간담회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다. 5.17계엄령은 이렇게 해서 선포됐고, 이 선포에 모든 지역이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광주만은 당시 개념으로 ‘반역구역’이 됐다.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당시37세)은 김대중으로부터 김상현을 통해 자금 500만원을 받아 광주시위를 계획했다. 대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이들은“민주화운동”을 구실로 국민연합과 국민연합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단체인 민주청년협의회 등 지지 세력을 동원하여 학생시위를 폭력시위로 변질시키고 이에 일반국민을 가세시켜 폭력으로 국헌을 문란하여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불법적 행동을 저질렀다.

1980년 5월17일 19시경 김대중 등에 대한 수사가 착수되면서 김대중은 당일 자정 직전에 그의 자택에서 전격 체포된다. 체포당시 그의 집안에서는 소위 “예비내각명단”과 3000만원이 넘는 현금과 수표가 발견된다. 중앙정보부 김근수 안전조사국장은 수사내용을 수시로 이학봉 합동 수사단장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했고 5월20일경 중간수사결과 발표 문안을 작성하여 이학봉과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계엄사는 5월22일 중간 수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김대중이 학생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 선동하여 온 확정을 잡고 연행 조사 중이다. 김대중은 정상적인 정당활동을 통해서는 정권획득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변칙적인 혁명사태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계기를 마련하기로 하고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하여 5월중순 대학의 교내 및 교외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예춘호, 문익환, 조성우, 장기표등과 회동하여 5월22일 정오를 기해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함으로서 일제히 봉기를 획책하는 등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

계엄사는 위 발표에서 김대중의 선동 사례로 1980년3월초 서울대생 심재철에게 100만원을 제공하고 심재철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시위를 주동한 사실, 복학생 박계동의 소개로 만난 고대생 박일남에게 45만원을 제공하고 박일남이 고대 총학생회장 심계륜을 조종하여 시위를 벌인 사실, 1980년5월 부산대 복학생 조태원에게 34만원을 제공한 사실,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결성하여 일본본부 의장으로 취임한 사실들을 적시했다. 그리고 5월 하순 이학봉 합동수사 단장은 한민통 관련 부분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입건하여 수사할 것을 김근수 국장에게 지시했다.

1980년5월31일, 계엄사는 광주사태의 발단이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으나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간 데에는 간첩과 간첩에 협력하는 불순분자들에 책동이 있었고 이와 동시에 학생소요를 배후조종해온 김대중이 전남대 및 조선대의 추종학생들 중 주로 복학생들을 선동하여 온 것이 소요사태의 발단이 되었으며, 사태악화 과정에서 광주시내 골수 추종자들이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여기에서 김대중을 면담하고 그로부터 시위를 일으키도록 조종 받은 복학생 정동년(500백만원 수수)과 조선대생 김인원이 5.18 학생 배후를 조종한 사실, 10.26이후 김대중과 6회에 걸쳐 접촉한 홍남순 변호사가 조선대 교내 시위를 조종하고, 5.23과 5.26사이에 전남도청을 출입하면서 폭도들에게 100만원을 주며 조종 격려한 사실들이 적시됐다.

7월4일, 계엄사는 5.22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사태를 유발하여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하려한 내란음모 사실이 드러났기에 김대중과 그 추종 세력 37명을 계엄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2][3] 계엄사는 또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조직-구성하여 북괴노선을 지지 동조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사용한 혐의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합수부 합동수사단은 연행 53일 만인 7월9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구속 영장을 발부받은 다음 7월12일 김대중 등 24명은 육본 계엄 보통군법회의로, 나머지 계엄법 위반13명은 수경사 계엄법 보통 군법회의로 송치했고 군검찰부는 8월14일부로 전원을 구속기소했다. 육본 계엄군법회의는 기소 당일인 8월14일 제1회 공판을 시작으로 9월17일까지 17회 공판을 열었다. 8월14일 오전10시에 개정된 제1회 공판에서는 13만 여자로 작성된 피고인 24명에 대한 공소장 낭독이 있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참고 자료


월간조선 뉴스룸(2019년 7월 1일) [문갑식의 진짜 TV] : 13분 30초 부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이야기가 나옴.
金大中(김대중)등 37명 軍裁(군재) 회부키로 — 戒嚴司(계엄사) 발표 1980.07.04 동아일보 1면
戒嚴司(계엄사) 발표 金大中(김대중) 內亂陰謀事件(내란음모사건) 수사결과 全文(전문) 1980.07.04 동아일보 3면
金大中(김대중)등 24명 内亂陰謀(내란음모)등 事件(사건) 公訴事實(공소사실) 1980-08-14 동아일보 2면
公判(공판)과정서 드러난「出生(출생)서 親北傀(친북괴)활동까지」 解放(해방)후 左翼(좌익)에 加入(가입) 共産(공산)활동 벌여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下) "미국 교포들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 거부" pennmike 2018.11.29

김대중에 대한 전두환의 시각

1980년 9월 11일 군 검찰관인 육군 중령 鄭基用은 제 16회 공판에서 김대중에 사형을 구형한다. 그의 논고는 김대중에 대한 전두환의 시각이 어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래 정기용의 논고를 보자:

피고인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그곳에서 10월 유신을 맞이하자 정치적 망명을 이유로 귀국을 단념하고 유신정권 타도를 빙자하여 한국을 통렬히 비난, 한국을 국제적 으로 고립시키려는 한편 고국의 실정에 어두운 해외교포들에게 반한, 반정부적인 선동강연으로 한국에 대하여 불신감, 나아가서는 혐오감까지 갖도록 하였으며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라는 단체 밑에 반한․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반한 용공인사 및 반정부 인사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계획적인 활동을 획책하였으며,…

동년 8월 귀국 후에도 계속 정부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 연락을 하는 일방 기회만 있으면 반정부 선동을 일삼아 오다가 10․26 사태로 인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정권욕의 화신이 되어 측근인 上 피고인 김상현으로 하여금 한국 정치문화연구소를 조직하도록 하고 上 피고인 예춘호, 同 김동완에게는 민주헌정동지회를 정비 강화하도록 지시 하도록 하였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에게까지도 청년 비밀결사를 조직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국민연합의 조직을 자신의 의도에 따를 수 있도록 개편 강화하면서 그들에게 사무실 임대료, 활동비 등을 주어 그 활동을 고무하였고 신민당 자파의원 들에게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및 지구당 위원장들의 성분을 분석, 포섭하도록 공작비를 주고 긴급조치 위반 전과자인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비를 주는 등 거금을 살포함은 물론 자식들에게 아파트와 승용차까지 사주는 등 금권정치 타락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또한 비상계엄령 하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사조직을 통하여 강연 선전전단을 배포하고 강연장에 많은 청중을 모아놓고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켜 강연을 빙자하여 반정부선동을 일삼아 오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의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녹음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는 등 기회주의적 선동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하게 한 행위는 학업에만 열중하여야 할 순수한 학생들 그리고 선량한 시민들을 자신의 정권탈취를 위한 제물로 바치려는 작태를 연출하였던 것입니다.

피고인의 이와 같은 행위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선동정치가는 이 땅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사건이 우리나라 역사상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두환과 5.18광주사태

5.18사태가 12.12사태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당시 전두환이 실세라고는 하나 대통령은 어디까지나 최규하 였고 5.18봉기군의 대부분은 전두환이 누군지도 모르고 광주 시청 직원쯤으로 여긴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전해진다. 실상 12.12사태란 용어 자체도 1987년 12월 이후에나 등장한 용어라는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시위 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였으며 김대중의의 전국적 민중봉기 일정에 따르면 “전두환 물러가라”란 구호는 5월 19일 이후부터 외치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15일 서울력 집회때 잠시동안 “전두환 물러가라”란 구호가 나오기는 했지만 본래 일정은 5월 19일을 기하여 전국 대학교 대자보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 대한 흑색선전 문구 즉,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를 올림과 동시에 외치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전두환은 육군 보안부대 사령관으로서 실세라고는 하지만 대통령도 아니고 계엄사령관도 아니어서 일반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으니 “전두환 물러가라”란 구호는 많은 시위군중들에게는 별 의미없는 구호란 것이다. 전두환 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으며, 얼굴도 모르고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물러가란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두환과 5.18사태에 대한 일부 불온세력의 고의적 왜곡사실 중에는 마치 1980년5월 17일 김대중의 연행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관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김대중의 연행은 전두환의 보안사와는 관계없는 치안본부 소관이었으며, 김대중의 연행 사유는 김대중이 "민주회복국민회의" 명의로 만일 최규하 대통령이 5월 20일까지 하야하지 않으면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을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즉 강제로 최규하 대통령의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최후 통첩을 공언하였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바로 이것이 5월 19일 광주 시민군 무장이 시작된 다음날인 5월 20일 신현확 총리 내각이 총사퇴하였던 배경이기도 하였다.

이 사실은 5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5월 22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의 내란, 즉 김대중 주도의 전국적 민중봉기를 “전국대학교총학생회장단연석회의”라는 명의로 준비하던 학생들 중 일부가 그 사실을 그 날 경찰에 알려줌으로 분명하게 재확인되었다. 따라서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김대중의 요구대로 정부를 해산할 것인지 아니면 헌정을 수호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했으며, 그것이 5.17비상국무회의와 김대중 연행의 배경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연행되자마자 김대중의 최측근이었던 윤상원이란 인물이 김대중은 전두환이 연행하였다는 거짓을 퍼뜨렸으며, 김대중은 내란 준비를 한 사실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김대중 가문 가신이었던 이기동은 김대중이 5월 22일로 예정된 내란과 더불어 집권하기 위해 예비내각 명단까지 짜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실제 이 예비내각명단은 김대중이 체포될 당시 김대중의 자택에서 압수되었다.

"윤상원 평전"의 저자 박노해 시인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 탈취 등 광주사태는 전남대에서 주동하엿던 것이 아니라 "민주회복국민회의"라는 재야단체 관계자들이 주동하였던바, 그 의장이 김대중이었고, 전남지부 실무자가 바로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이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이 의장으로 있었던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선거를 거치지 않고 쿠데타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김대중 내란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광주 시민군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무장함에 따라 정부는 무기 반납을 한주간 호소해 왔으며, 5월 25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직접 광주에 방문하여 정부의 선처 방침을 전하고 무기 반납을 호소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의 대광주시민군 호소문이 낭독되자마자 김대중의 최측근인 윤상원의 항쟁지도부는 정부에 요구하는 7개항의 '80만 광주시민의 결의'를 채택하여 광주 시내 곳곳에 벽보를 부착하고 투사회보라는 유인물을 광주시민들에게 돌렸다. 그 요지는 무기반납 조건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정부가 물러나고, 정권을 항쟁지도부측 인사들에게 넘기라는 것이었으니, 이는 김대중의 "민주회복국민회의" 요구사항과 일관된 것이었다.

광주 시민군 증언록[광주민중항쟁일지 제 3 절 항쟁지도부의 탄생과 활동] 에 따르면 김대중측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2) 무력탄압만 계속하는 명분없는 계엄령은 즉각 해제하라. 3)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XXX는 공개 처단하라. 4) 구속중인 민주인사를 즉각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이 김대중의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남지부 총책이었으며, 5월 9일부터 이미 예비군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고 있었으며, 예비내각 명단까지 확보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핵심 인사들이 공유하고 있었으며, 윤상원 명의로 발행된 투사회보에서 최규하 대통령 정부 퇴진을 요구하였다는 사실이 김대중 내란 음모의 실체를 명확하게 증언한다. 즉, 시민군 증언록의 기록들이 바로 김대중 내란 음모의 증거물이다.

김대중과 광주사태의 연관성, 또 다른 견해: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

1980년 4월 10일 김대중은 기자 회견을 통하여 신민당 입당 대신 국민연합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날 오후 8시 경에 북악파크호텔(북악스카이파크 호텔) 501호실에서는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국민연합 10 여명의 간부들이 대권경쟁에서 김대중이 김영삼을 이기는 방법을 논의한다. 여기서 광주운동권의 윤상원이 사무국장에 내정된데 이어 그날 국민연합은 신속하게 김대중의 홍위병들을, 즉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복학생 장기표를 조직국장, 복학생 심재권을 홍보국장, 복학생 조성우를 중앙위원에 각각 임명한다.

국민연합은 1980년5월 3일에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7일에는 '민주화촉진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선언문에서 "노동자, 청년, 학생들의 민주-민권 운동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각계각층의 민주 애국시민은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등의 문구는 김대중의 말이 아니라, 광주운동권 윤한봉의 전용어구들이었다.

그런데, 폭력시위를하면 남북통일이 되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는 것인가? 국민연합 중앙위원 조성우는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 윤한봉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 선언문은 국민연합 중앙상임위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실무자인 조성우의 손을 거쳐 작성된 선언문에는 윤한봉 특유의 표현들이 박혀있다.

국민연합과 윤한봉의 관계는 훗날 1993년 윤한봉이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였을 때 국민연합이 서울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준 환영식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정용화는 그의 증언록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에서 자신이 광주사태 당시 갑자기 현대문화연구소장직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직을 겸직하여 맡게 되었던 경위를 이렇게 서술한다: "당시 청년층의 맥을 이루는 한봉이 형은 각계의 민주인사 단체들과 지방의 반체제 인사들을 지역별로 규합한, 지방조직을 아울러 갖춘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바빴다. 그래서 내가 현대문화연구소장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중앙위상임위원장 문익환 목사와 윤한봉은 운동권 동지의 관계였다. 그리고, 국민연합을 전국적인 규모로 키울 수 있는 조직망을 갖춘 인물은 윤한봉 뿐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김대중이 윤보선 및 함석헌과 더불어 공동의장이었으나, 실제로 손발이 되어 일을 하는 인물은 윤한봉이었다.

윤한봉이 김대중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국민연합을 키우려 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1982년 12월 미국에 온 김대중을 이듬해 여름에 만난 후 윤한봉은 "김대중은 과대망상증 환자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마당에서 1996년 발행한 그의 회고록 『운동화와 똥가방』 138~139 쪽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회고한다:

1982년 12월 DJ가 미국으로 나왔다. 동포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몇 군데의 강연회를 마친 DJ는 83년 여름에 LA에서도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박정희 피살에서 5.18까지의 기간에 보여준 DJ의 처신에 대해 불만이 많았었지만 5.18이후 겪은 고난을 통해 많이 변화되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강연회 준비를 열심히 도왔다. 강연회 직전에 열린 동포 사회 축제 때 강연회 홍보 전단을 동포들에게 배포하고 다니고,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강연회장에 걸 플래카드를 만들고, 강연 당일에는 신변 경호를 위한 강연장 주변의 경계 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협조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DJ가 연설중에 “5.18은 내가 잡혀가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분개한 우리들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강연장에서 나와 버렸다.

“변하지 않았구나. 과대망상증이 심하구나. 5월 영령들이 자신을 위해, 자신의 석방을 위해

그렇게 싸우다 가셨다는 말인가. 5.18의 의의와 정신을 왜곡하고 모독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윤한봉의 회고록은 광주사태의 내막에 대한 회고록이다. 그러나 책머리에 윤한봉이 쓴 글은 김대중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회고록 집필의 이유를 "DJ의 중상모략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나를 경계하고 있는 분들에게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도 윤한봉은 늘 김대중과 앙숙 관계였다. 윤한봉은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지는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망자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1980년 봄 김대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로 알려졌던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소외받는 인물이었다.

윤한봉뿐 아니라, 박효선 등 다른 광주운동권들도 김대중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광주사태에 대한 강연을 했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김대중과 그의 광주 동지들 사이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분명한 시각차가 있다. 김대중과 윤한봉의 경우 처음부터 동상이몽이 있었다. 그래서 1993년 미국에서 만나자마자 갈라졌고 앙숙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1980년 5월 초에 김대중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폭력시위 동맹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김대중과 광주운동권간의 가장 큰 연결고리는 국민연합 중앙위였다. 중앙위 상임위원장 문익환 목사의 결정이 바로 김대중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의 손발이 조성우 중앙위원이었다. 조성우는 1980년 5월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민주청년협의회는 유령단체이고, 그 실제 명칭은 ‘전남민주청년협의회’였다. 이 사실을 보면 왜 1980년 5월 17일 오후 10시부로 실행된 치안본부의 예비검속 대상에 김상윤 등의 광주운동권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광주사태 당시에는 '학원소요 배후조종'이란 명칭으로 일컬어졌었다. 즉, 국민연합과 민주청년협의회가 그 배후조종 세력이었으며, 그 핵심인사들이 예비검속 대상이었다. 그리고 광주운동권은 민주청년협의회 핵심인사 예비검속을 '전두환의 쿠데타'라 부르며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것이다. 광주사태를 광주항쟁이라고 부르는 쪽에서는 민주청년협의회 간부 예비검속을 쿠데타와 동일시한다.

따라서 민주청년협의회가 어떤 단체였는지를 알면 광주사태의 내막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나 이것이 쉽지않다. 그 이유는 민주청년협의회란 단체가 유령단체였기 때문이다. 그 시대 사람들 중 그런 단체 이름을 들었거나 기억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운동권에서조차 그런 단체가 언제 생겼으며 언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민주청년협의회'란 이름은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방한일이 가까울 무렵인 1979년 5월 11일의 운동권 성명서「카터의 방한을 반대한다」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그후 '11.24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 재등장하였으며, 이어 12월 9일 조성우가 민주청년협의회 위원장 명의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유령단체답게 조성우는 어떤 때는 회장, 어떤 때는 위원장 명의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그 고문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민주청년협의회 결성이 시도되었다가 흐지부지되었으며, 실제로 존속한 단체는 아니었다. 그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속빈 강정이요, 유명무실한 단체였다.

그런데 이 유령단체가 1980년 5월 8일 다시 등장하여 김대중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폭력시위 동맹을 맺게 하였다. 여기서 그 내막이 중요한 것이다. 윤한봉의 여성동지였던 고경희는 월간중앙 1988년 5월호에 기고한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 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에서 민주청년협의회는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 산하 부서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또한 현대문화연구소는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면서 비교회운동과 현장운동에 대한 접근을 꾀하였고 산하 부서 안에 양서조합, 민주청년협의회, 여성들의 송백회, 그리고 근로여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들불야학」 과 문화패「광대」(당시 대표 김정희)를 두고 있었다." 김성 광주일보사회부기자도 월간지 예향 1988년 11월호에 "광주ㆍ전남‘의식권’탄생주역 윤한봉"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1978년 출옥한 윤한봉이 "공개적으로 민주청년협의회를 구성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1980년 봄에 민주청년협의회의 실체는‘전남민주청년협의회’였다. ‘전남민주청년협의회’라는 거대 지하조직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5월 8일 민주청년협의회라는 명칭이 재등장할 근거가 있었다.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은 조성우였으나 그 윗선의 실제 지도자는 윤한봉이었다. 1993년 윤한봉이 귀국하였을 때 국민연합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한 것은 그의 옛 동지 조성우 등이 주선한 것이었는데, 민주청년협의회 회장 직함을 사용하던 조성우가 국민연합 중앙위원이었다. 그리고 민주청년협의회 간부들이 조성우 외에는 광주운동권뿐이었으므로 광주사태 당시의 예비검속 대상에 광주운동권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후관계에서 윤한봉의 동지 조성우가 5월 8일 국민연합 중앙상임위원장인 문익환 목사의 지시를 받고,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폭력시위 행동지침을 결의한 사실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여기서 확대회의란 서경원 카톨릭농민회 회장과 노금노 총무도 참석하는 회의를 말한다. 당시 전남 운동권으로 구성된 농민회 명칭이 카톨릭농민회였으며 그 약칭이 카농 혹은 가농이었다. 그리고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 대부분이 카톨릭농민회 회원들이었다. 서경원 카농회장이 누구인가? 9년후 밀입북하여 김일성에게 공작금을 받았던 간첩 서경원이었다. 서경원은 함평 사람이면서도 광주 운동권의 거물이었다. 광주 운동권 중에는 해남의 남민전 간부 이강도 있었기에 광주운동권을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혹은 약칭으로 전남민청협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서울에서 하려는 시위 행동지침을 전남민청협, 즉 광주운동권이 마련하였는지 실로 이상한 일 아닌가! 그리고 "조속한 시일 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각 대학은 학교별로 출발하여 광화문 네 거리를 점령하고 중앙청을 비롯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한다. 데모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각 대학별로 각목, 돌멩이, 화염병을 준비한다"는 이 지침은 데모 저지선을 폭력시위로 돌파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하라는 지침이었다.

5월 8일의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에는 조성우뿐만 아니라, 장기표 등 여러 명의 김대중의 홍위병도 참석하였는데, 그 회의에서 결의한 폭력시위 지침은 5월 15일 그대로 적용되었다. "최규하 물러나라!" "신현확 물러나라!" "최규하 하야!" "신현확 퇴진!" "신현확내각 퇴진!" 등의 시위 구호를 외치던 십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차량 3대를 방화했고, 시민버스 등 민간차량 4대를 탈취하여 한 줄로 선 경찰 저지선을 향에 돌진하여 여러 경찰관이 사상케 하였다. 아직 전경 수가 적었던 때라 수적 열세에 몰린 경찰은 오직 청와대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로 배치됐고, 정말로 광화문 네거리를 시위대가 점령하였다. 석유위기로 최규하 대통령은 중동 순방 중이었는데, 날이 저물 무렵 시위대는 금방이라도 청와대로 쳐들어갈 기세였고, 실로 국가가 언제 전복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운동권은 이 시위를 "1980년5월15일 서울역회군"이라 명명한다. 국가를 전복시킬 절호의 기회를 변절자 심재철 때문에 아깝게 놓쳤다는 뜻이란다.

운동권의 해설에 따르면 그 날 5월 15일의 시위 지도부는 대학생 지도부였던 매파 유시민과 비둘기파 심재철의 주장으로 갈라진다. 유시민은 그날 청와대를 점령하자는 주장을 지지하였으나, 심재철은 그 와중에 김종환 내무장관과 통화하고 이미 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일단 시위대를 귀가시키기로 결정한다. 심재철은 지휘차량인 마이크로 버스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혼란이 올 수 있다. 밤이 깊어가고 내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학생회장단 연석회의가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자." 그날 김대중은 경호원들까지 한 명도 안 남기고 동교동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시위를 선동하였으나, 심재철의 이 한마디가 청와대 진군론에서 해산론으로 기울어지게 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돌이켜보건대, 심재철은 그날의 시위 주동자였으나, 배후세력의 과격한 주장에 떠밀려 가지않고 순발적인 기지를 발하여 우리나라가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운동권의 시각에서는 심재철은 변절자로 보이므로 지금껏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는 갑자기 돌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5월 15일 사건이 전개된 사건이었다. 서울의 5월 15일 사건 배후에 광주운동권이 있었다. 5월 15일 청와대를 접수하려 했던 운동권의 계획과 5월 21일 광주운동권이 전남도청을 접수한 사건은 동일선상에 놓여있던 사건이었다. 시민군 지도부는 5월 15일 서울에서 있었던 사건이 곧 광주에서처럼 무장봉기로 격상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청 점령 후에 "5일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라는 말을 종종했었던 것이다.

남한에서는 잊혀져가고 있는 5월 15일 사건의 중요성을 북한은 인식하고 있기에 1982년도의 5.18도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67쪽에서 그 날의 시위를 이렇게 서술한다:

<<시위에서는 과감한 육박에 의한 경찰저지선의 정면돌파와 경찰의 포위를 역포위로 전환시켜 앞을 열어나가는 돌파, 분산과 집합, 큰 대렬과 작은 대렬의 겹합, 속도행진에 의한 빠른 기동과 바리케이드에 의한 완강한 방어등으로 주도권을 틀어쥐고 적을 파동에 몰아넣었다.>>

흔히 사람들의생각은 "누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몰고가 순경들을 깔아죽였을까?" 하는 질문에서 맴돌았는데, 북한의 분석은 정확하다. 남대문 저지선이 그런 방법으로 뚫린 후 겁에 질린 경찰은 여기저기서 역포위당한채 무력해졌으며, 김종환 내무장관은 만약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군하면 청와대를 사수할 여력이 없었다. 오죽하면 그가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 군의 개입을 호소하였겠는가. 그러면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이 폭력시위 동맹을 맺은 것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민주청년협의회 회의에는 조성우와 장기표와 심재권 등 세 명 이상의 국민연합 임원들이 참석하고 있었으니 정치권에 속한 국민연합 간부가 운동권에 속한 청년 단체 간부를 겸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위원, 총무국장, 조직국장, 및 홍보국장 등의 실무 간부직인 조성우와 이현배와 장기표와 심재권 등은 당시로서는 거액의 월급을 김대중으로부터 받고 있던 김대중의 홍위병들이었다. 김대중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운동권 대학생들만으로 국민연합 실무임원직을 채워놓은 것이다. 한편 문익환 목사 등 중앙상임위원 전원은 머리 속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생각만 가득찬 자들이요, 실무 간부들 전원이 김대중의 홍위병들이니 이 단체는 이미 김대중 일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시국을 올바로 판단하기에는 아직 미숙했던 대학생들을 김대중이 홍위병으로 고용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과연 이런 단체가 객관성 있고 공정하게 시국을 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국민연합 실무직 간부 전원이 전라도 운동권 지하조직 전남민청련 간부직을 겸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전남민청련이었던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가 끝난 후 장기표 국민연합 조직국장과 심재권 국민연합 홍보국장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12일에 제출했다: "5월8일,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동시에 폭력시위를 벌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거할 계획이며 이렇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어 차기정권까지 장악할 수 있다."

이때 장기표는 김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김대중 선생을 사태수습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장악이 가능하고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선생께서는 이문영에게 지시, 과도정부 구상을 미리 해 두시기 바랍니다”.

홍위병 장기표의 이런 보고를 들은 김대중은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장기표가 보고한 폭력시위 방법을 보충 설명하면 이러하다.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란 말은 학생들을 교문밖으로 유도하여 폭력시위를 벌이면 경찰 저지선도 뚫고 폭력시위를 민중봉기로 격상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란 말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면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란 말은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민중봉기로 전복시킨 다음 사후 수습 명분으로 김대중이 과도정부를 이끌면 김영삼씨와 대권 경쟁할 필요 없이 5공화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4.19” 20주년에 즈음하여 제2의 4.19 상황을 만들자는 이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논리는 폭력시위로 도저히 군경이 발포하지 않을 수 없는 함정을 파놓자는 전략을 깔아놓고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든 군경이 발포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하면 전국적으로 폭동이 일어나 관공서를 점령하고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21일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과 시민군 장갑차로 여러 명의 경찰과 군인들을 압사시킨 사건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주동자들의 고의의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오전 11시경, 광주시 일원에 전남민주학생총연맹 명의로 "4·19 의거로 연결하자"라는 제목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그 유인물이 뿌려진 직후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을 깔아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군경이 살기 위해 공포를 쏘지 않을 수 없는 함정을 파놓으려는 고의성 범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폭력시위로 제2의 4.19 상황을 연출하자던 김대중과 그의 홍위병들의 도시 게릴라 방법이 남한에서 전민봉기가 일어나길 학수고대하던 북한이 노리고 있던 것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남파되어 6개월간 광주사태 일으킬 공작을 하였던 북한군 특수부대 안창식 대위와 내연의 부부관계였던 탈북여성은 광주사태를 배후조정했던 북한이 노렸던 두가지 목적을 이렇게 서술한다:

”특히 1980년 5월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적인 규모에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북한정권의 대남작전에 활력을 주고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1980년 5월 12일 민주청년협의회(약칭, 민청협) 회의에서 결의한 내용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정한 국민연합은 16일에 최규하 대통령께 최후통첩을 보냈다.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국무총리의 퇴진, 정부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 등에 대해 5월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의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국민연합은 5월22일부터 이 요구를 관철하는 민주화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이 경우에 발생되는 모든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5월 22일부터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20일부터 일으키겠다던 민중봉기가 이날 이틀 연기되었다. 국민연합 편에서 너무 시간이 촉박하였기 때문에 김대중이 이틀 늦추었다. 따라서, 22일부터의 전국적 민중봉기는 공개적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주운동권 윤상원과 전라도 운동권 서경원이 비밀리에 추진하였던 무장봉기 거사계획은그보다 사흘 빠른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무장봉기 거사계획은 5.18 비밀문건 "자유노트" 13쪽에 다음과 같이기록되어 있다: "농촌 파급효과를 위해 공용 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14시부터 18시 사이에 [카농]조직을 이용하여 죽창 [밧데리]등을 준비해서 폭동을 일으킨 후 방송국과 공공건물 및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한다." 여기서 [카농]이란 서경원이 당시 회장이던 카톨릭농민회의 약칭이다. 함평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서경원이 1988년 김대중의 평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의 동지들이 남민전 간부들이었는데, 그해 12월 그의 동지들이 출옥하고 광주청문회가 김일성 입맛대로 진행되자 김일성은 문익환 목사를 평양으로 불러들인다. 문익환이 누구인가? 1980년 5월 8일 조성우에게 폭력시위 방법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던 인물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기 앞서, 서경원이 방북하여 김일성이 주는 만 불 단위의 거액 하사금 혹은 공작금을 받아 그 일부를 김대중에게 전달하였다. 서경원이 누구였던가? 1980년 5월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준비를 지휘하던 자였다. 왜 김일성은 1980년 5월의 폭력시위 동맹의 두 축인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두 대표자였던 문익환과 서경원을 광주청문회 직전과 직후였던 1988과 1989년에 평양으로 불러들였는가? 이것이 5.18 광주사태와 김대중과 김일성을 묶어주는 실마리는 아닐까?

김대중의 한민통 조직및 내란음모 사건

2004년김대중은 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를 선고받는다. 재판부는 “79년 12.12 사태와 80년 5.18광주사태를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임으로 형법 제 20조의 정당방위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미국망명

9월11일 결심 공판에서 군검찰은 김대중 피고인에게 사형을 다른 피고인에게는 7년에서 20년 사이를 구형했다. 9월17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에게는 내란 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국환 관리법위반죄를 적용 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징역2년에서 20년을 선고했다. 11월7일 김대중 등 12명은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81년1월23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한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 화합 및 국내외의 김대중 구명압력을 의식하여 1981년 1월 23일 당일 김대중을 무기 징역으로 감형하고 피고인 12명 전원에 감형조치를 취한다.

국내에서는 김대중을 즉각 사형시키자는 여론과 재야세력의 끈질긴 구명운동이 한동안 팽팽히 맞섰지만 사형시키자는 쪽이 매우 우세했다. 김대중은 최후진술에서 그의 일생을 통하여 최상의 달변으로 그의 구명줄을 잡아당긴다. 김대중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한다. 이 법정 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로부터의 압력이 거세졌다고 하지만 김대중은 합법적 정부에 대한 전복행위를 저질렀고 이에 대한 정당한 법적 처벌이 어찌 정치보복이 되겠는가 하는 측면도 있으니 한번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의 탄원서.jpg

전두환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다는 조건으로 그를 사형하지 않기로 미국과 약속했다. 그 결과 그는 82년2월에 20년으로 감형되었고 82년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옥중에 있던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최고의 존칭을 써가면서 다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국가안보를 허무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니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 달라 앙청하는 자필 편지를 보낸다. 아래는 그 편지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증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 가서 2 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치안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12월13일 김대중.

미국망명, 귀국

1982년 12월 16일 복역중인 김대중은 서울대학 병원으로 이송되고 며칠 후인 12월 13일에는 2년7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한다.

일단 감옥에서 풀려나자 그가 항상 해 왔던 대로 김대중은 그가 한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린다. 1983년 7월 소위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차려서 반정부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1984년 12월 김대중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귀국의사를 밝힌 서한을 보내면서 자신을 포함한 전두환, 김영삼, 김종필의 4자회담을 제의한다. 김대중은 1985년 2월 귀국하지만 귀국 즉시 가택연금된다. 1985년 3월에 김대중은 가택연금상태에서도 “민주화 추진협의회”란 것을 만들어 김영삼과 함께 공동의장의 감투를 쓴다.

제5공화국 출범 당시에는 민주화 운동을 해온 야당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인 공화당 인사들조차 정치활동이 금지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재야 인사들이 제1야당인 민한당 소속으로 활동했지만, 민한당은 당시 신군부가 주도하여 만든 관제 야당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지 못했다.


1983년 2월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정치활동을 규제받고 있던 대상자 555명 가운데 250명을 금지조치에서 해제한다. 이날 해금된 인사 250명 가운데 전직 의원은 68명이었고 정당 당원 및 간부가 88명 이었다. 또 대학교수 12명, 공무원 9명, 언론계, 종교계, 문화계 등 인사 73명이 포함됐다.

1985년 3월 6일 전두환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포함한 정치활동 규제자 16명에 대한 추가 해금을 실시한다. 하지만 김대중은 사면 복권이 안된 상태로 정치활동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신당 창당을 둘러싸고 민추협에서는 치열한 논란이 일었다. 일부는 전두환 체제에서 원내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5공 정권을 인정하게 된다는 ‘순결파’와,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어쨌던 원내에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파’의 대립이었다. 논란 끝에 다수의 민추협 간부들이 신당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자파 인사들의 신당 참여 문제를 ‘자율’에 맡겼다. 정치적 진로는 자신의 신념과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순수 재야 출신들은 총선참여를 거부하고, 정치인 출신들은 신당에 참여했다. 민추협의 산모 역할을 했던 문동환ㆍ이문영ㆍ윤혁표 등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신민당은 창당 20여일 만에 신생 정당으로 총선에 참여하여 ‘신당돌풍’을 일으켰다. 총의석수 260석 중 민정당 148석, 신민당 67석, 민한당 35석, 국민당 20석을 차지하여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한편 서울ㆍ부산ㆍ광주ㆍ인천ㆍ대전 등 5대 도시에서 전원 당선되고, 득표율도 29.26% (민정당 32.25%)를 얻었다.

그야말로 ‘선거돌풍’이었다. 서울 등 대도시와 중소도시에서 의석을 석권하여 국민의 뜻이 5공 정권을 심판하는 ‘선거혁명’임을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 김대중의 사활을 건 귀국이 침체되었던 선거분위기를 일거에 ‘민주화의 열풍’으로 몰아갔다. 여기에 그동안 5공 폭압에 짓눌렸던 민심이 가세하여 2ㆍ12선거혁명을 가져왔다. 전두환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새로운 민주화의 물꼬를 트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선거가 끝나자 전두환정부와 민정당은 김대중을 음해 비방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각급 공무원과 산하단체ㆍ교사들에게 배포하고, 교사들에게는 악선전 유인물을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낭독하게 하면서 독후감을 쓰도록 강요했다. 김대중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정권 차원의 음해공작이었다. 민추협 상임운영위원회는 2월 26일 “김대중 의장에 대한 흑색선전을 중단하라”는 특별성명을 냈다. 다음은 요지.

우리는 이러한 작태가 2ㆍ12총선 과정에서 치솟아오른 민주화 열망의 민심을 두려워한데서 연유된 것으로 보며 김대중 선생 귀국 즉시 국민과의 대면을 차단시키고 그를 자택에 연금시켜 놓고도 불안하여 이렇게 발악하지 않을 수 없는 현 정권과 민정당의 무능에 일말의 동정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세계 어느 독재체제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같은 만행이 앞으로도 계속될 경우, 우리들의 분노와 세계 양식의 폭발로 하여 수습할 수 없는 일대 불행이 초래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향해 다음과 같이 우리의 요구와 주장을 밝힌다.

  1. 우리의 민주지도자 김대중 선생에 대한 흑색선동을 즉각 중단하고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라.
  2. 국민과 민주세력에 대한 흑색선동을 즉각 중단하고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라.
  3. 정치활동 규제법의 철폐와 전면 해금을 지체없이 단행하라.
  4. 김대중 선생에 대한 가택연금을 즉시 해제하라.

김대중은 3월 1일 김영삼과 함께 민추협 공동의장 이름으로 3ㆍ1절 기념담화를 발표하고, 3월 15일에는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 자택에서 김영삼과 함께 신민당 중심의 야당통합, 민추협의 지방조직확대에 합의했으며, 공동의장 취임을 수락했다.

2.12총선은 정계에 큰 변화의 회오리바람을 몰고왔다.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민한당은 붕괴되어 자동으로 야권통합의 계기가 되고, 신민당은 민한당 의원과 무소속 의원들이 속속 입당하여 일거에 109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취임 4주년을 맞는 1984년 3월 6일 제3차 정치활동규제자에 대한 해금조치를 실시한다. 김대중은 김영삼ㆍ김종필 등 16명과 함께 규제가 풀린다. 하지만 유일하게 사면ㆍ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마지막까지 그가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채운 족쇄를 풀지 않았다. 김대중은 3월 18일 종로구 관철동 민추협사무실에서 공동의장에 취임식을 갖고, 김영삼과 함께 민추협을 이끌게 되었다. 민추협은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참여에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이때까지는 김대중의 연금 상태가 심하지 않아서 1984년 3월 22일, 김대중은 상도동으로 김영삼을 방문하여 경제대책 등 5개항의 합의내용을 발표하고, 28일에는 김영삼과 신민당사를 방문, 2.12총선 승리를 축하하며 격려사를 통해 기본적 자유선택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공동대표는 5월 18일 광주항쟁 5주년을 맞아 광주학살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성명에 이어, 25일에는 서울 미문화원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농성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두 김씨가 손을 잡고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서 민추협은 창립 이래 가장 활기 넘친 전성시기가 되었다.

김영삼계의 비서ㆍ브레인 중 상당수가 원내에 진출한 데 비해 김대중계는 거의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가에서는 “김영삼 비서는 국회에 들어가고, 김대중 비서는 감옥에 들어간다”는 말이 나돌았다.

1984년 11월30일 정치활동 규제자 3차 해금이 시행된다. 2, 3차 해금과 신당 태동 2월25일 2차 해금(2백2명)에 이어 11월30일에는 3차해금(84명)조치가 단행됐다. 특히 3차 해금 직후부터는 구야권을 중심으로「신한태동」이 본격화됐고「신한민주당」(가칭)의 결성을 보게 됐다. 그러다가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인사들이 1984년 12월 정치활동금지에서 해제되면서, 선명성을 지닌 정통 야당이 되살아나 전두환 정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해금 인사들과 일부 민한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신당 창당을 결의, 새로운 야당 신한민주당이 1985년 1월 18일 창당되었다. 당시 김영삼은 옛 신민당 5선 의원 출신의 이민우에게 종로.중구 선거구에 출마할 것을 제의했다. 신당의 원로인 이민우가 정치 1번지인 종로.중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다면 야당 돌풍의 핵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민우는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 제의를 고사하였으나, 총재직을 제의하는 김영삼의 간곡한 설득에 출마를 결심하고 총재직과 종로.중구 출마를 수락하였다.


2.12 총선 돌풍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12대 총선 투표 날짜를 예년과 달리 겨울인 1985년 2월 12일로 정했다. 이는 신한민주당의 창당 날짜와 최대한 가까운 시기에 총선을 치러서 야당 돌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당시의 선거제도 자체가 여당에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어 과반수 의석 확보는 크게 어렵지 않았으나, 명목상의 야당이었던 민한당과 국민당이 밀리고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이 될 경우에는 정국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안기부의 분석 결과, 신한민주당은 최대한 좋은 여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12~13석을 얻는데 그치고 특히 종로.중구 선거구에서는 민정당이종찬과 민한당정대철이 각각 1위와 2위로 당선,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3위로 낙선할 것으로 예상되어 전두환은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결과는 단순한 이변을 넘어선 '돌풍' 그 자체였다. 창당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된 신생 정당 신한민주당이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는 돌풍을 일으키며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고, 특히 종로.중구에서 예상을 깨고 이민우가 2위로 당선된 것이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지역구에서 제1당이었던 민정당에 전국구 의석중 2/3을 배분한 결과로 사실상 민정당이 패배한 선거였고 전두환이 우려한대로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 급부상하였다. 이에 전두환은 격노하였고 잘못된 선거 분석을 내놓은 노신영안기부장을 질책한 후 사실상 경질하였다. 한편 이후 민한당에서 이탈한 의원들이 신한민주당에 가세하면서 의석수가 103석으로 늘어났고, 명실상부한 제1 야당으로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두환정권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이민우 구상과 분당 사태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먼저 단행할 경우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DJ.YS 양김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파가 이민우 구상에 대해 반발하였고, 이철승/이택돈 등의 내각제 개헌파가 이에 반박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결국 1987년 4월 양김이 자파 의원 74명을 이끌고 집단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야당 돌풍의 주인공인 신한민주당은 존립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몰락

이후 1988년4월 26일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철승등의 일부 인사들이 분전했지만 결국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고, 정당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되었다.


대선불출마 선언과 번복

1986년 11월 5일 13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다.

통일민주당

당시 제1야당이던 신한민주당이 이른바 "이민우 구상"과 이철승 등의 내각제 개헌 주장으로 내분에 빠지자, 김영삼과 김대중이 새로운 야당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자신의 지지파 의원(상도동계, 동교동계)들을 신한민주당으로부터 탈당시켜 창당하였다. 양김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하기도했다. 통일민주당은 출범부터 순조롭지 못하였다. 1987년4월 '용팔이'로 불리던 김용남씨가 깡패들을 동원해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정체불명의 20대 청년 150여명이 도끼로 지구당 출입문을 부수고 난입해 당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사무실 집기를 불태운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김용남 등은 징역2년6월을 선고받았다. 통일민주당은 개헌논의의 중지를 선언한 전두환대통령의 4·13조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5월 27일비제도권 사회단체들과 합동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 대통령직선제개헌 관철을 위한 집회·시위 등 장외투쟁을 강화하였다.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 된다.


87년 6월 항쟁

6월 항쟁은 1987년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2007년6월 10일 정부 차원의 첫 기념식이 열렸다.


1987년 7월 9일 사면복권이 되었다. 그 다음날인 7월 10일에는 이중재, 노승환, 이용희, 정대철 등이 함께한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 되는데 관심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하루만에 이 불출마 선언을 번복한다.

1987년 7월 11일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4.13호헌 선언으로 이미 내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약속에 내가 묶여있어야 하느냐는 논리가 나온다”고 하였다.

그 며칠후인 7월 17일 김대중의 산하단체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백지화를 결의함으로서 불출마 선언 무효를 공식화한다. 한편 통일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의 입당을 요청하였는데 김대중계파의 사람들은 그이 입당문제를 놓고 의견이 양분된다.

이중재등의 원내세력들은 “김대중은 자신이 만든 당에 조속한 시일내에 입당하는 것이 순리이고 그 안에서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 하는 것이 국민적 바람이다. 두 김씨의 정면대결은 민주화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이며 김대중의 입당지연이 이러한 정면대결의 전조가 아니가 하여 불안요소가 되고있다”는 논리로 김대중의 조기입당을 주장한다.

반면 한화갑등 비서진과 김종완 등을 중심으로한 민헌연 등 원외인사들은 “아무런 보장없이 입당할 경우 민주당 테두리 안에 갇혀 행동반경이 좁아질 뿐 아니라 일단 칼자루를 쥔 김영삼총재가 후보를 고집할 경우 당내에서는 다른 방벙이 없게된다” 고 하면서 조기입당을 반대한다.

김대중은 반대주장을 물리치고 1987년 8월 6일 김영삼과 만나 입당문제를 합의한 후 1987년 8월 8일 통일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한다. 1987년 8월 11일 김영삼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협의했으나 김영삼의 조기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후 조정주장이 맞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

김대중의 대선 낙선과 정계은퇴

1987년 9월 9일 김대중은 목포를 방문한다. 광주, 목포지방의 순방이 기대이상의 열기를 보였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9월 14일 김영삼과 만나 36개 미 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다분히 자신의 지지세력 확장을 위한 포석일 것이다. 이 에 대해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라는 논리로 김대중의 요구를 일축한다. 김영삼도 바보가 아니니 김대중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김은 토론을 계속했지만 의견일치를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1987년 9월 29일에는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간의 후보단일화 문제에 대한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다음날인 9월 30일 다시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로 협상을 계속하였지만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된다. 당시 재야인사들과 국민들의 압도적 통합요청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결렬되자 이를 두고 국민들 간에는 군사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앞에두고 야당진영의 “적전분열”이라는 비판이 비등했었다

1987년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김대중은 10월 18일자로 통일민주당을 탈당한다.

통일 민주당을 탈당한 김대중은 1987년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겸 대통령 후보로 선출 된 후 1987년 12월 16일에 제 1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611만표를 얻고3위로 낙선한다. 그 이듬해인 1988년 김대중은 제 13대 국회의원이 된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개인적 야심의 충돌로 어부지리를 본 노태우가 제 13대 대통령이 되는 이변을 낳았다.

1990년 김대중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 때 3당 야합 반대투쟁을 선언하며 이를 규탄한다.

1991년 4월 15일에는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재 창당한 후 총재로 취임하였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을 출범시킨다.

1992년 5월 1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 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2월 18일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804만표를 획득하였으나 190여만 표로 민정당 후보인 김영삼에게 패배한다. 김영삼이 대권을 잡은 후에 자신에게 돌아올 모종의 가능성을 염려한 김대중은 1992년 12월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1991년 1월 영국으로 도피성 출국을 한다.

2년 후 자신에 대한 정치적 환경이 완화되었다는 판단을 하였는지 김대중은 1993년 7월 귀국한다. 1994년 12월에는 소위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를 설립하고 상임 공동의장에 취임한다. 3당 합당이라는 태생적 한게와 김영삼 정권의 철학과 비젼의 부족은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수월하게 하였으며 김대중의 은퇴선언을 번복하게 하는 빌미를 준다.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정치 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13번까지만 당선되어 김대중은 낙선한다.

1997년 10월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등과 연대한다. 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1033만표를 얻어 상대후보인 이회창을 40만표차로 누르고 당선된다.


김대중, 노태우로부터 비자금 수금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관리자, 예치내용과 형태, 차명계좌를 위해 빌린 이름, 심지어 계좌번호까지 폭로한다. 결국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 착수를 지시한다.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 전대통령은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노태우 전대통령 측의 사과문 발표를 앞두고 같은 날 오전 중국을 방문 중이었던 김대중이 느닷없이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는다. 아마도 “도둑놈 제발이 저렸던 모양”이다.

이 기자 간담회에서 김대중은 "지난 92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은 바 있다"고 고백한다. 나아가 "당시 노씨가 한 의원을 통해 김영삼 후보에게 수천억 원을 제공했다는 유력한 정보가 있다"고 물타기를 시도한다. 돈받은 이유에 대하여는 "노씨의 한 비서관이 순전한 인사의 뜻(陣中問安)이라면서 가지고 왔다"며 " 돈을 받은 이유는 돈의 성격이 위로의 명목이고 어떠한 조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돈의 액수가 20억원이 아닌 200억원이라는 설도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진위를 밝히기 힘든 문제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김대중이 노태우의 돈을 20억 원이나 받았다’는 사실에 매우 놀란다. 당시 민자당 부대변인은 "김대중이가 5.18 광주학살 조역이라고 했던 노씨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헌병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고 했고, 민주당 대변인은 "이제 김대중씨의 좌우명은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라 행동하는 兩心(두마음)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했다. 당시 국민회의 박지원 대변인은 "오늘은 전국적으로 전기가 나가 TV도 꺼지고 신문 윤전기도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곤혹스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한다.

그야말로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가장 수치스럽고 더러운 돈거래였다고 하겠는데 이 돈의 행방은 김대중의 사후에도 끝내 밝혀지지 않고 있다한다.

김대중은 정권을 잡은 후 당시 노태우의 돈심부름을 했던 김중권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앉힌다. 그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제 15대 대통령 선거

1997년 10월 김대중은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등과 연대한다.

15대 대통령 선거일 하루전,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한 이인제는 대선자금의 부족으로 거의 파산지경에 이른다. 이에 이인제는투표일 하루 전 후보사퇴를 선언할 준비를 한다. 이인제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이 정보를 전해들은 이해찬은 즉시 이 사실을 김대중에게 보고한다. 이 당시 이해찬은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선거기획본부 부본부장이었다. 김대중은 이해찬과 그 지인을 통하여 이인제 캠프와 접촉하여 이인제의 모든 선거비용을 대납해 주고 동시에 상당금액의 “알파” 즉 비자금 공여를 제의하고 그 대가로 이인제가 끝까지 후보사퇴를 하지 말것을 종용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알파”가 수백억원에 달한다 하는데 이는 이인제의 지지표가 이인제 후보 사퇴후 이회창에게 전이되는 것을 막자는 계산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1997년 12월 18일의 대선에서 이인제는500여만표를 얻었고 김대중은 이회창을 55만여 표의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해찬은 12월 다시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선거기획본부 부본부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12월 이해찬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간사에도 임명되었다. 1998년 2월까지 이해찬은 15대 대선기획본부 부본부장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담당 간사로 활동했다. 다분히 김대중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세계적 석학도 감격시킨 김대중의 집요함

김대중의 집요함을 확연히 드러내는 일화 한토막은 이러하다. 이회창,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 경합때의 일이다. 당시 세계적 미래학자 알빈 토풀러가 방한하는 계기가 있었는데 앨빈 토풀러를 미국에서부터 수행했던 분은 두 대통령 후보와 , 알빈 토풀러간의 인터뷰를 주선했던바 이회창 후보에게 좀 더 호의를 베풀어 이회창, 알빈토풀러 간의 회합은 저녁시간으로 잡아주고 김대중 , 알빈토풀러간의 회합은 점심시간으로 잡아주었는데 이회창 캠프에서는 자기들을 먼저 만나게 하지 않고 김대중을 먼저 만나게 했다는 점에 반발하여 이회창, 알빈 토풀러간의 회합을 거절 했다고 전해 진다. 실상은 넉넉한 저녁시간을 잡아준 것은 이회창 후보에게 좀 더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이었는데 아마도 모종의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초점은 이회창씨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약속된 점심시간에 김대중은 상당수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약속장소에 나타나 알빈토풀러를 매우 반갑게 맞이하였을 뿐만아니라 점심식사도중 환담시간에 왈 자신이 옥중에서 알빈토풀러의 저서를 탐독하는 과정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고 하면서 알빈토풀러의 저서중 한 부분을 그 떠듬거리는 영어로 암송하였다는 것이다.

알빈토풀러는 여간 감격한 것이 아니었다한다. 알빈 토풀러왈, “내가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을 만나보았지만 김대중, 당신같은 사람은 처음이오”라고 하면서 내가 쓴 책이지만 나도 그 부분을 암송하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 부분을 암송할 수 있느냐면서 “정말 놀랍다”고 했다 한다.

실상은 김대중이 알빈토풀러와 회합날자 이 삼일 전에 측근을 시켜서 교보문고에서 알빈토풀러의 저서를 구입토록한 후 주요부분 한 구절을 골라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원서의 해당부분을 전날 저녁 달달 외워가지고 알빈토풀러와 회합한날 생쑈를 벌렸던 것이라고 한다.

알빈토풀러에게 자기를 각인시키기위하여 김대중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 열심등은 배월둘 만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의 집요함이 돗보인 일화였다.

또 한편으로 엿볼 수 있는 점은 김대중이 다독을 해서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은 위의 일화에서 엿볼 수 있는 대로 얕은 수의 쇼맨쉽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NHK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자신이 학력 콤풀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는데 북측의 김일성(日成赤蟲)과 마찬가지로 김대중의 정규학력은 목포상고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주장대로 그가 만주 여순에서 만주건국대에서 수학을 했다면 아마도 대학 중퇴가 그의 정규 최종학력일 것이다.

그가 독서를 통한 독학을 했다지만 많은 단편적 지식보다는 사고능력이 더 중요한 것인 바 박사학위의 소지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좁은 분야에서 조차도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원래 박사란 자기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연구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자격증에 불과한 것이다.

김대중 같은 독학자 중에는 단편적인 지식에서 박사학위 소지자를 능가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체계적인 사고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가 할 수 있는일은 죠파디 쇼에나가는 일이 고작일 것이리라.


대통령으로서의 김대중

집권기: 매명(買名)을 위한 반역

제 15대 대통령 당선

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1033만표를 얻어 상대후보인 이회창을 40만표차로 누르고 당선된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은 제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대통령에 취임하고서도 2000년 1월 김대중은 새천년 민주당 총재에 취임한다. 200년 6월 북한을 방문 북의 김일성 후계자인 김정일을 만나고 6.15선언을 채택한다.


국민의 정부, 제2건국 망발

한나라당은 99년 벽두부터 국회 529호실이 '정치사찰을 위한 안기부 분실'이라며 이 곳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얼마 안 가서 이번에는 고관집 절도사건이 터졌다. 한나라당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 529호실이 정치사찰을 위한 도청시설을 갖춘 안기부 분실이라는 한나라당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으며, 김강룡이 주장한 내용들도 일부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들은 개혁을 추진한 김대중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로서는 국정쇄신을 통한 민심 회복이 필요했다. 김대중은 5월 24일 17개부처 각료 중 11명을 교체하는 대폭 개각을 단행했다. 신임 장관 가운데는 검찰총장 재임중 국회의 탄핵소추 대상이 된 김태정 법무장관도 포함돼 있었다. 야당은 반발했다.

그런데 5·24 개각이 있던 바로 그 날,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순영 대한생명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는 98년 말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의 부인 배정숙씨와 김태정 법무장관(당시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씨가 옷값 수천만원의 대금결제를 자기에게 요구했으나 액수가 너무 커 거절했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당초 이 사건은 이형자씨가 "배씨를 통해 연씨의 옷값 등 2400만원어치의 대납을 요구받았다"고 주장한 반면 연씨는 이를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해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의 '진실게임' 정도로 전개되었다.

또 이씨는 남편의 구속을 막기 위해 검찰총장 부인과 장관 부인들에게 수억원대의 옷을 선물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이미 청와대 사직동팀(경찰청 특수수사과)으로부터 내사를 받은 뒤였다.

그러나 사직동팀을 지휘하는 박주선 법무비서관이 내사결과 보고서를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보여주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옷을 구입한 시점과 장소 그리고 옷값 등을 둘러싸고 이씨와 고위층 부인들의 말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잇단 말바꾸기로 서로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는 행태에 대한 국민여론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정권의 도덕성 문제와 신뢰의 위기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고관집 절도사건

김대중 정권의 부패상은 이 당시 ‘도풍’(盜風), ‘제2의 대도’ 등으로 불리우며 숱한 화제를 일으키고 정가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고관집 도둑’ 사건에서 잘 볼 수 있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고 2년여가 지난 1999년 3월16일 김강용이라는 30대가 절도행각을 벌이다 붙잡힌다. 김강용은 인천구치소에 수감 중에 한나라당 안양시 만안지구당(위원장 박종근)에 편지를 보내 ‘고관집 절도’ 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김강용은 편지와 면담을 한 한나라당 의원과 변호인을 통해 크게 4가지 사실을 폭로했다. 그동안 자신은

▲유종근 전북지사 집에서 현금 3천5백만원과 12만달러를 훔쳤고

▲배경환 안양경찰서장 집에서 5천8백만원을 58개의 봉투와 함께 훔쳤고

▲김성훈 농림부장관 집에서 운보와 남농의 그림을 훔쳤으며

▲현직 장관 3명의 집에서 12㎏의 금괴와 물방울다이아몬드 등을 훔쳤다는 것이다.

김씨 주장에 대한 수사결과 ‘유종근지사 집에서 3천2백만원 현금과 패물을 훔친 것’이 사실로 드러난 반면 김성훈 농림부장관 집에서의 그림 절도는 거짓으로 판명됐다. 안양서장 집에서 돈봉투 58개와 5천8백만원을 훔쳤다는 것은 일부만이 사실로 밝혀진다.

아직 미해결 의혹으로 남아 있는 것은

▲유지사집 12만달러 절도

▲7만달러 ‘민희엄마’에게서 환전

▲남농 그림 안양공무원에게 선물

▲현직장관집에서 금괴 12㎏ 절도

▲검찰과 경찰 고관집 절도 사실 은폐의혹 등이다.

검경, 사건 축소·은폐 의혹

김강용은 진정서와 한나라당과의 1·2차 접견을 통해 검·경이 사건을 축소·은폐했다고 줄곧 주장했다. 3월16일 절도 중 경찰에 붙잡힌 김강룡은 18일 오전 부평경찰서에서 “대한민국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으니 TV기자들을 모두 불러달라”고 소리를 쳤다. 형사들이 뭘 폭로할 것이냐고 묻자 그의 입에선 유종근 전북지사, 김성훈 농림부장관, 배경환 안양경찰서장의 이름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김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축소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유종근 지사의 이름을 빼고 피해자로 박영석 비서관 이름을 적어넣는가 하면 김성훈 농림부장관의 경우는 나이와 직업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 신분을 파악하기 어렵게 했다. 또 김강용이 안양 배서장 관사에서 5천8백만원을 털었다고 주장했는데 막상 진술서에는 8백만원만 기록돼 있었다. 3월23일 부평서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실제 기소건수 17건 중 단순 절도미수 1건만 기소하였다. 고위 공직자 관련 건은 아예 공소제기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검찰은 “피의자·피해자 진술이 엇갈려 사건을 분리, 일단 절도죄 부분만 기소하고 나머지 혐의는 5월초 쯤 추가 기소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이 경찰 조사에서 피의자가 자백하고 피해 사실이 인정된 범죄혐의를 기소하지 않은 것은 상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김의 진술이 있은 뒤 부평서는 진술의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아연 긴장했다. 곧바로 김광식 경찰청장에게 그같은 사실이 보고됐고, 다음날 인천지검을 통해 검찰 수뇌부에 이 사실이 전해졌다. 경찰청이 이 사건을 김대중 청와대에 직보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김강용 절도 사건은 인천지검 차철순 차장검사가 지휘를 하게 됐다. 단순 절도미수 사건으로 기소된 것에 비해 너무 비중있는 검사가 사건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검찰도 이미 사건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 차철순 차장검사는 “송치 3일전에 내부보고를 통해 알게됐다”고 말했다. 공소장에 유지사 대신 비서실장이 피해자로 적혀있는 것에 대해 차 차장검사는 “피해자 진술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경찰의 사건 축소·은폐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검찰 또한 재조사를 통한 원칙적인 기소를 소홀히 한 점에 대해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검찰과 경찰이 3월30일 보궐선거를 의식해 의도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12만달러의 정체

김강용은 4월17일 한나라당 인권위 소속 변호사들과의 면담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유지사 사택 서재에 있는 007 가방을 여니까 12만달러가 나왔다. 1만달러씩 12뭉치였다. 그때가 3월7일 오후 7시30분쯤이었다. ”김은 12만달러중 5만달러는 함께 범행을 한 조직원에 주고, 나머지 7만달러는 남대문 ‘민희엄마’를 통해 환전해 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종근 전북지사는 김의 주장에 대해 “도난당한 것은 3천5백만원과 보석 5점으로, 아파트엔 1달러의 미화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현당시 김강용이 G호텔과 B술집에서 달러를 사용한 것은 확인됐지만 그것이 유지사 집에서 훔친 12만달러의 일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98년 한해만 유지사가 경제·투자 설명회를 위해 15차례 가량 외국을 다녀왔다”며 “집에 1달러도 없었다는 유지사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 직후 유종근 지사가 사택을 갑자기 폐쇄시킨 것에 대해서도 ‘현장검증’을 어렵게하는 처사라며 조속한 원상회복을 촉구했다.

유지사와 배서장의 돈은 어디서 나왔나?

유종근 전북지사는 김강룡이 자신의 서울 사택에서 3천2백만원을 훔쳤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돈의 출처에 대해 해명했다. 1천5백만원은 ‘정치인으로서 필요할 때 쓰기 위한 것”이었고, 2천만원은 사업을 시작하려는 처남에게 빌려주려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유지사의 처남이 유지사 사무실이 있는 같은 건물에서 사는데 처남에게 빌려줄 돈을 굳이 자신이 보관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또 3천5백만원의 돈을 장롱서랍과 화장대에 따로 분리하여 보관했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편 안양경찰서 배경환 서장의 경우 김은 “방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아 응접실 구석에 있는 김치냉장고를 열어보니 5천7백여만원이 봉투에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봉투에는 세무서장, 회사대표 등의 이름과 직위가 씌어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배서장은 “평소 하던대로 안쓰는 냉장고에 돈을 보관한 것이고, 직책수당 등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들의 기묘한 돈관리 방법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의문스러운 구석이다. 이와 관련, 대도 조세형(55)은 “꽃병이나 냉장고에 돈을 넣는 것은 돈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돈은 뇌물이나 다른 부정한 돈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결국 떳떳하지 못한 돈이라는게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 사건에서 황당한 것은 도둑맞은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도둑을 맞고도 쉬쉬하니 야릇한 냄새가 나는 것이다.

옷 로비 사건

1999년 5월 24일, 당시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는 신동아그룹 최순영회장의 부인 이형자가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에게 고급 옷을 선물했다는 신문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언론에 밝힌 인물이 이형자씨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형자씨는 자술서에서 당시 검찰총장 부인 등이 고가의 옷을 사면서 자신에게 옷 값을 대신 지불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폭로했다. 언론보도가 있은 사흘 후인 28일 연정희는 이형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였다.

. 이 사건의 조사를 위해 대한민국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됐다.

결국 1999년 6월 2일 검찰은 수사를 발표하게 된다. 옷로비 사건 비롯 4대 의혹 사건 관련 다툼 일지

  • 1999년 6월 11일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검찰이 축소.은폐한 의혹이 있는 "파업유도" 사건을 비롯해 "옷 로비" "3.30재보선 50억 사용설" "고관집 절도사건" 4대 의혹사건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제 도입을 거듭 요구했다.
  • 1999년 6월 13일 여야가 합의를 위한 협상에 돌입하게 되지만 결렬되고 국회가 파행된다. 한나라당은 특검을 실시 하라며 공세의 수위를 높혀갔지만 새정치국민회의는 안된다는 입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 1999년 6월 16일 국민회의가 "파업유도" 의혹에 대해 한시적으로 특검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한나라당은 4대 의혹 모두를 특검하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 1999년 6월 22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2~3년 한시적 특검제를 제안하고 특검제를 한시적으로 운용하더라도 검찰의 파업유도의혹과 옷로비의혹은 반드시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1999년 7월 4일 특검제 대상등 핵심사안 절충 실패하였지만 국민의회는 대야 협상카드로 "옷 로비"의혹에도 특검제를 수용한다는 마지노 노선을 깔고 있다.
  • 1999년 7월 15일 국민회의는 "파업유도" 및 "옷로비"의혹에 대한 한정적인 특검제와 파업유도의혹에 대한 국정조사를 제시했지만, 야당측은 대선자금을 여야 모두 조사해야 하며 한시적 특검제 도입과 2개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등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 1999년 7월 29일 특검법에 관한 국민회의,자민련-한나라당의 협상이 계속되고 있지만 서로의 견해차만 확인한 채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옷로비 의혹사건과 관련, 최순영 신동아회장의 부인인 이형자가 전통일부장관의 부인을 통해 전검찰총장의 부인에게 의류를 제공했다는 의혹에 한정해서만 특검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했지만 한나라당은 이 부분 뿐만 아니라 이형자가 다른 고위층 부인에게 고급 옷과 그림 등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혐의가 있는 만큼 이에 대해서도 특별검사의 수사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 1999년 8월 26일 국회 법사위의 옷로비 사건에 대한 청문회가 진상 규명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여야는 26일 특검제 조기 도입을 통해 재수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 1999년 9월 7일 3당총무들은 이날 여야간 쟁점이 됐던 특별검사법안은 법사위 3당간사회담에서 의견을 조율한 뒤 늦어도 20일까지 본회의를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여야간 이견이 남아있는 부분은 특별검사의 수사범위 수사기간 특별수사관수 등이다.한나라당은 특별검사가 "옷로비"와 "파업유도"와 관련된 범죄까지 수사해야 한다는 종전의 입장을 고수하고 수사기간과 특별수사관수를 각각 60일(30+30일)과 15명으로 늘려야 한다는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수사대상을 "옷로비"와 "파업유도"의혹에만 국한시키고수사기간은 50일(30+20일)로 하며 특별검사가 임용할 수 있는 특별수사관수는7~8명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 1999년 9월 15일 여야는 15일 3당 총무회담을 열어 특별검사의 수사기간을 준비기간 10일, 본조사 30일, 추가조사 30일 등 70일로 하는 등 특별검사제 법안 주요내용에 대해 합의했다.

옷로비 사건 청문회

1999년 8월 23일 옷로비 사건에 대해 청문회가 열렸지만 청문회는 처음부터 사건 증인들의 연이은 거짓말과 질의 의원들의 준비부족으로 의혹만 커졌다.

첫째날

강인덕 당시 통일부 장관 부인인 배정숙은 옷값 대납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자기만 죄인으로 몰아붙였다고 억울함을 주장했다. 옷값을 놓고 이형자와 다투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삼자 대면을 요구했다. 라스포사 종업원이 호피코트를 김태정 당시 법무장관 부인인 연정희의 트렁크에 넣는 장면을 봤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배정숙은 검찰이 자신을 속죄양으로 만들었다며 강한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의 호피무늬 코트가 로비와 연관된 것에 대해서는 일부 시인하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여야 의원들이 새롭게 얻어낸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배씨의 주장에 대해 검찰은 위증이라고 하였다. 정일순의 호프무늬 코트가 로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옷이 배달된 시점은 작년 12월 26일이었는데 그보다 닷새 전에 이미 이형자가 옷값을 못 내겠다고 라스포사 사장에게 통보했다는 게 그 근거였다. 그러나 배정숙은 검찰의 발표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연정희와 라스포 사에서 옷을 입어본 시점은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검찰은 지난 1월 5일이라고 밝혔지만 배정숙은 1월 7일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배정숙의 증언을 종합하면, 연정희가 코트를 보관했던 기간은 당초 알려진 열흘이 아니라 19일까지 늘어난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배정숙이 옷 로비 사건의 주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청문회에서도 계속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검찰은 또 작년 12월 18일 배정숙이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 씨와 옷값 대납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배정숙이 이같은 기초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배 씨의 증언 내용에 신빙성이 더욱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둘째날

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부인 연정희는 옷 로비를 유도한 적도 없고, 로비를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호피무늬 밍크코트를 입어 본 날짜는 지난해 12월 19일이었다고, 당초의 주장을 번복했지만 코트가 트렁크에 실려온 날은 1주일 뒤인 26일이었다면서 검찰에서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코트가 실려온 것을 뒤늦게 알고 올해 1월 5일 돌려줬다는 해명도 되풀이했다. 조사 때마다 진술이 달라진 점에 대해서 날짜를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정희는 결백을 주장할 때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연정희는 또 검소하고 조심하는 생활을 해왔다고 항변하다가 물의를 일으킨 것 자체가 문제 아니냐는 추궁에 깊이 반성한다면서 흐느꼈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배정숙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여야 의원들은 누구 말이 맞는지, 이걸 확인할 만한 어떠한 증거나 정황도 내놓지 못했다. 배정숙은 라스포 사에서 연정희과 옷을 입어본 시점이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었다고 어제 증언했다. 그러나 연정희 씨는 19일에는 옷을 한 벌도 사지 않았고, 26일에 옷이 배달됐다고 거듭 밝혔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배정숙은 지난 1월 7일이라고 했지만 연정희는 1월 5일이 맞다며 증거도 있다고 반박했다. 최순영 신동아 회장 수사에 대한 언급도 배 씨와 정반대였다. 배정숙은 구속 가능성을 직접 이야기 했다고 했지만, 연정희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고 했다. 기도원에 갔을 때도 호피무늬 코트를 입지 않고 걸쳤을 뿐이라며 배씨의 증언과 차이를 보였다. 이에 대해 연정희는, 배정숙에 대해 괘씸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진실을 알고 싶어서 마지못해 병원에 갔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의 증언에 공통점은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다고 진실을 주장한 점이 유일했다.

셋째날

옷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국회청문회는 이 날 핵심증인 4명을 나란히 앉혀놓고 대질신문까지 했지만 쳇바퀴 돌듯 서로 엇갈리는 증언만 반복됐다. 옷값을 대신 내라는 요구가 있었느냐는 부분에서는 이형자는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배정숙은 없다고 하였다. 최순영 회장의 구속 사실을 연정희가 흘렸다는 대목에서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공방이 오고 갔다. 특히, 배정숙이 라스포사에 장관 부인들을 데려올 테니 좋은 옷을 준비하라고 했다는 부분도 역시 정일순은 있었다, 배정숙은 없었다고 못박았다. 정일순이 자신에게 전화해 옷값을 요구했다고 이형자가 주장하자 정일순은 거짓말이라고 외쳤다. 정일순은 그러면서, 이형자 씨 자매가 최 회장 수사에 대한 보복으로 검찰총장 부인을 모함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호피코트가 배달된 시점에 대해서는 연정희 씨와 정일순 씨의 증언이 일치했다. 사흘간에 걸친 청문회 끝에 한꺼번에 불려 나온 네 명의 여자는 얼굴을 마주한 채 서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결국 알아낸 것은 '앙드레 김씨의 본명' 뿐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낳았다. 옷로비 사건 과정

• 1994년 10월 연정희와 배정숙이 할렐루야 교회에서 첫 대면.
• 1997년 5월 8일 김태정 검찰총장 취임. 당시 연정희는 수요봉사회 멤버로 활동.
• 1998년 3월 3일 강인덕 통일부 장관 취임. 강 전장관 부인 배정숙 수요봉사회 멤버로 활동.
• 1998년 4월 검찰, 최 회장 외화밀반출 혐의 내사 착수.
• 1998년 9월 연정희,이형자 이화여고 바자회에서 만남.이형자가 "그림이 마음에 드는게 있느냐"고 묻자 연정희가 "괜찮다"고 대답.
• 1998년 10월 연정희,배정숙 이대바자회 참석후 라스포사에 들림.
• 1998년 12월 9일 ~ 12월 12일 연정희, 라스포사에서 50만원짜리 투피스와 20만원짜리 원피스구입. 연정희는 당시 손윗동서가 선물한 100만원짜리 쿠폰사용.연정희,앙드레김 의상실에서 80만원짜리 투피스와 40만원짜리 블라우스 구입하고 수표로 지불.
• 1998년 12월 16일~12월 18일 배정숙,앙드레김에서 연정희에게 30만원짜리 블라우스 선물.연정희 등,앙드레김 의상실 등에서 2천400만원 어치 의류 구입 의혹.이형자,배정숙으로 부터 옷값 대납요구 받음
• 1998년 12월 28일 연정희과 배정숙 등 5명 라스포사에 들림.연정희,40만원짜리 재킷과 10만원짜리 스카프 구입.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 연정희 차트렁크에 700만원짜리 호피반코트를 넣어둠.
• 1998년 12월 연정희, 나나부티크에서 250만원 상당 코트 구입 의혹.
• 1999년 1월 4일 연정희, 포천기도원에 가면서 코트를 가져감.
• 1999년 1월 5일 연정희, 라스포사에 코트 반납.
• 1999년 1월 15일 사직동팀, 옷로비 의혹 내사 시작.
• 1999년 1월 18일 배정숙, 진술서 작성.
• 1999년 2월 12일 최회장 구속.
• 1999년 5월 24일 옷로비 의혹 사건 표면화
• 1999년 5월 26일 청와대, 옷로비 의혹 관련 해명.
• 1999년 5월 28일 배정숙,이형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 검찰,수사착수.
• 1999년6월 2일검찰,수사 발표.

언론의 마녀사냥?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순방 중에 옷로비 파문이 시끄럽자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태정 장관이 로비를 받아 죄가 될 일을 했냐"고 물었다. 김 실장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답했다. 김 대통령은 "이 사람, 저 사람 다 나가라고 하는 것은 나를 무장해제시키려는 것이다"고 말해 사실상 이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당시 해외순방을 수행한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인데 정상외교 소식은 뒷전에 밀리고 국내 신문에는 연일 옷로비 파문이 대서특필되자 김대중은 심기가 불편했다.

해외순방 중에는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말아달라는 사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현지 기자회견에서는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그러자 김대중은 낯빛을 바꾸며 다른 이야기를 했다. 불쾌감의 표시였다. 그리고 마침내 6월 1일 귀국 공항 기자회견에서 불쾌감이 폭발했다. 김 대통령은 옷로비 의혹 제기에 대해 '언론의 마녀사냥'이라고 일갈했다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은 재직 15일만에 전격 경질되는 불행을 맞이했다. 김태정 전 장관이 경질된 배경에는 부인 연정희씨의 ‘고급 옷로비 의혹’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불거진 `고급 옷로비 의혹’사건은 DJ정권 실세 장관급 인사의 부인들이 연루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갖가지 의혹이 제기됐고,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히면서 파장이 번져나갔다.


의혹이 확산되자 정부와 여당은 민심수습책으로 김 전 장관의 사퇴가 거론되기 시작했고, 시민단체들도 ‘도덕적 책임’ 등을 들어 김 전 장관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검찰 조사결과 부인 연정희씨가 연루된 ‘고가옷 로비 의혹’사건이 무혐의로 판명나 김 전 장관은 회생의 기미를 보였으나 뒤이어 진형구 대검 전 공안부장의 발언파문으로 김태정 전 장관은 39년간의 파란만장했던 검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옷로비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옷 뇌물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온갖 거짓을 계속해서 꾸며내는 데 있다. 은폐조작을 통해 사건은 국민에게 DJ정부에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이러한 것은 대통령의 지지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옷로비 사건', '조페공사 파업유도 사건' 등 악재들이 본격적으로 이어지며서 99년 6월 70.8%, 99년 8월에 이르러서는 63.4%로 떨어지게 된다. 이후 한 동안 김대통령의 지지도는 연말까지 60%안팎의 지지도 수준에 머물게 된다

아무튼 해방이후 특별검사가 겨우 3사람인데, 모두 김대중 정부하에서 임명된 것입니다.

김태정법무장관부인등 옷로비사건의 특별검사였던 최병모 변호사(판사출신). 조페공사 파업유도사건의 특별검사였던 강원일 변호사(대검 중수부장출신) 지금 이용호씨 사건을 맡고 있는 차정일 특별검사 이렇게 단 세사람 밖에 없죠.


옷로비 사건은 김대중과 측근들의 신동아 그룹 탈취과정에서 불거진 곁가지

김대중 정권 때인 1999년 2월 구속되고, 정권 실세들에게 회사까지 통째로 빼앗긴 최순영(崔淳永) 신동아 그룹 회장이 이명박 정부 때 사면받아 출옥한 후 10년간 가슴 속에 묻어뒀던 신동아그룹 해체 진상을 털어놓았다.

지난 10년간 가슴 속에 묻어뒀던 신동아그룹 해체 진상을 털어놓다!
예금보험공사 문건 단독 입수: 대한생명 돈(3조5500억원)을 공적자금으로 둔갑시켜 최순영 회장의 경영권 박탈.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기사에 의하면 김대중 본인이 1999년 12월 19일 당선 2주년 기념 KBS 특별대담에서 대담자로 나선 소설가 김주영의 물음에 답하는 중에 자신이 직접 대한생명을 빼앗아라 지시했다고 말했고, 정권실세들은 한술 더 떠 신동아그룹 전체를 빼앗아 갔다.[4][5]

“이 사건의 큰 줄기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옷로비 사건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심각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대통령님께까지 거짓이 보고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짓이 보고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국민들이 상당히 분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담자가 언급한 ‘거짓보고’란 옷로비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 사직동팀과 검찰 등이 사건의 진실과 다르게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을 말한다. 김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건에는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씨가 자기 남편의 구속을 피하고 검찰총장을 음해하려고 자작극을 벌였다. 구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김 대통령의 재가가 난 다음날 최순영 회장은 검찰에 연행·구속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담자의 ‘거짓보고’라는 말에 약간 흥분한 듯 질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답했다. 김 대통령은 대한생명의 해체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쑥 말을 꺼냈다. 김 대통령의 말이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서 저도 알고 있고, 또 만일 거짓이 보고되었다면 그것은 아주 큰일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니까. 지금은 수사 중이니까 곧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큰 줄거리를 말하자면, 대한생명에 대한 여러 가지 비리, 그리고 이것을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구속방침, 그리고 대한생명은 완전히 이것이 부실화되었기 때문에 퇴출시켜서 새로이, 말하자면, 옛 소유자로부터 빼~, 이것을 뺏어 가지고 새로이 살려 나가야 한다, 이런 줄거리는 전부 보고가 되어 있고, 또 그것도 전부 내 결정·승낙을 받아서 실천한 것입니다. 그중의 상당부분은, 그래서 큰 줄거리는 다 보고가 된 겁니다. (하략)(09분 57초)>

김대중평화센터에 올라 있는 당시 대담 녹취록에는 실제 방송과 달리 "말하자면, 옛 소유자로부터 빼~, 이것을 뺏어 가지고" 부분은 삭제되어 있다.[6]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가 주도했다는 옷로비 사건은 이런 와중에 터졌는데, 최병모 특별검사팀은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가 호피무늬 반코트를 받았고 신동아그룹 로비스트 박시언에게 수사기밀을 알린 위법사실을 밝혀냈다. 또 검찰과 청와대 사직동 팀이 연정희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999년 12월 특별검사팀은 옷로비 사건이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부인들에게 시도한 실패한 로비’라고 결론 냈다. 그러나 1999년 12월 연말 당시 검찰은 이형자의 자작극으로 촉발된 ‘실체 없는 로비’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2001년 대법원은 “이형자의 로비는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연정희에 대해서는 위증죄로 처벌했다.[7]

월간조선 2009년 9월호에 실린 최순영의 인터뷰는 8월 18일 김대중이 사망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병상의 김대중의 쾌유를 빌고 있다.[4]

―대한생명을 포함한 신동아그룹의 강제 해체 사건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정확한 진상이 밝혀져야죠. 신동아그룹 퇴직 임직원 1918명이 서명한 탄원서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명의의 탄원서가 청와대에 제출됐어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사가 이뤄져야 해요. 저는 요즘 간증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병상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까?

“그동안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뤄낸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루빨리 쾌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은 김대중이 평소에 늘 하던 말인데[8], 그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당한 사람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돈으로 산 대북 송금 사건

조갑제, "대북 송금 사건 폭로 엄낙용, 15년만의 고백" : YouTube 2017. 3. 26. - 조갑제TV
趙甲濟, 15년 만의 진실! 엄낙용 전 차관, 회고록 통해 고백, ‘나는 對北송금사건의 기획 폭로자였다’ 2017-03-21 chogabje.com
엄낙용 著 <한 공직자의 경제 이야기> (2017년 3월 5일, 나남)
김대중 정부가 S그룹에 對北사업 압박하는 것을 알고 걱정하다가 현대그룹을 통한 對北송금 과정을 모 언론사의 편집국장에게 제보하였으나 거절 당한 후 엄호성 의원에게 연락하여 국정감사에서 진실을 증언하다.

돈으로 산 남북정상회담 덕택에 김대중은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러나 북한은 노골적으로 핵개발을 계속하고 남북관계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2002년 6월에는 월드컵 축구 경기 기간중에 서해상에서 북한의 도발로 벌어진 해전으로 해군 장병 다수가 사망했으나, 장례식에 정부 고위관계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고, 김대중 본인은 월드컵 결승전 구경하러 일본으로 출국했다.

김대중 정권 총평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시 두 아들이 구속되고, 자신의 측근인 아태재단 상임이사 이수동이 구속되는등으로 동교동 정권은 부패정권으로 불린다. 게다가 의약분업, 교원 정년 단축은 세금과 국력의 낭비로 규정된다. 언론세무조사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호남인사 중용은 편파·편중인사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대북화해 정책은 일방적 퍼주기로 매도돼도 그리 이상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노벨상을 타기 위한 공작의 일부였던처럼 비아냥거린다. 이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도 단 한마디 변명도 없이 수모를 참아야 했다. 맨주먹 야당으로 명분 있는 선전선동으로 일어서서 합종연횡의 줄타기로 정권까지 잡은 동교동. 4수 끝에 기적처럼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그들의 집권시대가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실패와 과오투성이로 몰리고, 차기 대통령선거판에서 부패와 악의 상징처럼 빈정거려지는 현실은 눈뜨고 보기 딱할 지경이었다.

한국 정치사에는 남산 혹은 정보부, 안기부로 불리던 정치공작처가 있었다. 분단 내전, 냉전 독재, 학생혁명, 군사쿠데타라는 특이한 역사가 배태한 제3의 막강 정치집단, 그것은 한국 정치에만 존재하는 괴물이자 어두운 유산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권력보위 기능을 맡았던 이 무소불위의 남산조직, 거기에 맞섰던 가장 두드러진 대항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동교동이었다. 권력욕의 화신이어서였건, 대통령병에 걸렸기 때문이었건, 아니면 불굴의 신념으로 뭉친 민주투사여서건 간에 동교동 사람들은 그렇게 불릴 것이고, 그 중심에는 김대중이 있다.

김대중 정권의 상대적 선진화 기여도:

박정희, 153.6% VS 김대중, 28.1%

2008년, 현대 경제연구원에서는 ‘정권별 선진화 기여 평가와 이명박 정부의 과제’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153.6%를 기록한 박정희 정부를 대한민국 선진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정권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정권초 선진화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정권 말에는 253.6를 달성했다는 의미로서 박정희 정부에 이어 , 전두환 정부 44.3%, 김영삼 정부 42.7%, 노태우 정부 36.5%, 김대중 정부 28.1%, 노무현 정부 23.8% 순이었다.

김대중의 수첩자료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납치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을때 그가 황망중에 호텔방에 남긴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있었다. 여기서는 원문기록을 충실하게 복제할 목적으로 철자법이 틀린 부분이나 영문에서 틀린부분도 원문 그대로 기록하였고 한자도 원문에 충실하게 복사하였다.

김대중의 “Various Memorandum”

김대중의 “Various Memorandum”

1. 1973년 3月 日 (일자는 공란으로 비어 있음) Johns Hopkin’s University. Edwin Reischauer

2. 講演中 韓國 問題에 言及하면서

< 韓國은 世界에서 中國 다음에 가장 오랜 歷史의 統一獨立을 지닌 나라다. 韓國의 (事大主義란 말을 썼다가 지움) 屬國이니하는 것을 오늘의 槪念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거의 完全에 가까운 獨立性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韓國민은 强한 意志와 民主主義에 對한 熱望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1~2年內에 반듯이 일어나서民主主義를 回復할 것이라고 나는 斷言할 수 있다.

朴正熙氏는 自己執權連長 以外에 統一에 對해서 어떤 誠意도 없다. 그에게서 統一을 期待한 것은 큰 잘못이다

韓國이 이와같은 獨裁를 오래 繼續하면 內部混亂이 일어나고 共産主義가 이를 利用하려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戰爭이 再開할 危險이 크다.

大國間의 調諪만 하면 된다는 Kissinger의 思考方式은 危險하다. 過去 歷史를 볼 때 韓國의 戰爭은 먼저 그 自體內部에서 불씨가 터져가지고 大國이 이에 介入한 것이다. 日淸戰爭이 바로 그렇다. >

김대중식 민주정치가의 4개조건

김대중식 민주정치가의 4개조건

民主政治家의 4個條件

第一 個性 , 第二 人間管理能力, 第三 行動力, 第 四 VISION

1. 個性
A)共産國家서는 오히려 一身破滅의 原因
B)民主國家서는政治家는 選擧, 黨과 官廳의運營, 世論造作에 appeal 하는 것을 가지므로서 大衆, 黨員, 公務員등의 支持를 받을 수 있다.

2. 人間管理
A) 政治家는 到處서 多數의 사람을 統率 내지 接觸해야한다.
B) 黨, 官廳, 側近, 大衆을 統轄 또는 動員하여 뜻대로 움직여야한다.
C) 이 能力의 巧拙이政治家의 業積을 크게 左右한다.

3. 行動力
A) 政治家는 現實의 改革, 修正, 補修하는 것
B) 政治家는 遊說, 組織 ,國會對策, 多數派工作 등 多方面의 行動이 必要

4. VISION
A)*定(?)된 政策路線, 行政體制를 超越해서 그 不足과 現實과의 矛盾을 是正해야한다
B) 다시 現實을 理想에 接近시킬것이며 그를 위한 方法을 發見해야한다
C) VISION은 直接, 衆智集結 어느 것이든 無關

○O四個條件의 比重에 따라 類型 相異

  1. 個性이 强*하며 行動力이 있으면서 VISION을 ideologish하게 歪曲한 政治家는 獨裁形
  2. 人間管理力 없으면서 權力에 依해서사람과 大衆을 움직일려고 한것은 專制的獨裁形
  3. 個性도 VISION도 없으면서人間管理, 行動力만 있는것은 行政型 官僚政治家
  4. 다른 特性은 없으면서 行動力만 잇는 것은 議院運營型 또는 院外政治型
  5. VISION과 行政力을 兼備한 것은 開發型
  6. 大政治家는 모두 네個를 兼備

○O정치가의 Personality

  1. 政治家의個性이 時代와 政治에 준 影향 至大
  2. 政治家의個性에 依해서 時代의 色彩, 卽 社會心理狀態나 動向이 크게變化한다.
  3. 社會心理의 變化는 社會變動의 前奏曲
  4. 어떤 改革案도 民心의 反應없이는 實現不能

○OEpisode가 필요

  1. Episode가 豊盛한 사람일수록 政治家로서의 評價높다.
  2. Nick name을 얻는 政治家는 庶民性과 大衆性이 强하다.
  3. 이러한 源泉은 潤達, 밝음, 愛婉에서 나온다.

김대중의 기타 메모 (제목 없음)

1. 民族的民主主義 行政的民主主義 韓國的民主主義 2. 民族中興 近代化 3. 反共國是 勝共統一 協相 南北統一 4. 重農改革, 새마을 運動 5. 民政移讓宣言 3.16辭意 , 67년 3選 絶對 否認, 68년 金相賢氏에의 再確言, 69년 3選改憲 要求, 71년 마지막 選擧(陸女史 마지막 投票 니 感槪가 無量), 72년 10.17 Corp detat, 6. 5.16 自由民主主義 守立, 反共Corp detat, 民族的 民主主義, 行政的 民主主義, 韓國的 民主主義 7. 5.16反共宣言, 69년 8.15 對話用意, 71년 金大中 統一 政策非難, 71年 7月 南北赤會談 提議, 71年 12月 非常事態宣言, 72年 6,25期念辭, 73년 7.4**, 73年 1月 反共體制强化 8. 71年 美中接近非難- 72년 4月 ASPAC서 歡迎

統一의 虛言

  1. 反共法 强化(統一論議 爲한 改正不應)
  2. 金鍾必 總理(1973. 1.東京民團本部訓示內容)

김대중의 Slogan

김대중이 선동에 이용할 목적으로 만든 슬로간으로 보인다.

  1. 韓國은 “日本公害自由輸出地域”
  2. 韓國은 “日本低賃金産業基地”


政局收拾案(1)

  1. 朴氏의 卽時 辭退
  2. 憲法의 10.17當時로의 還元
  3. 10.17以後 制定된 一切惡法의 改廢
  4. 政治犯 基他 10.17事態로 因한 被檢者의 釋放
  5. 모든國民의 基本自由의 保障
  6. 새로운 大統領과 國會議員의 선거
  7. 一切政治報復禁止

二大主張(H. 李교수)

  1. 民主主義 속의 過渡體制
  2. 中間Boss의 育成(특히 統一對備 젊은 世代의 大量育成)

○o 99%의 投票보다 한사람 野黨指導者의 自由로운 政治活動이 더욱 重要
○o 日, 美가 韓國과 맺은 大陸棚協定등은 中國의 態度따라 언제든지 變化. 中國은 石油의 自給自足으로 高地. 試錐段階서 **採掘時의 比率 안 定하면乃終에는 日,美가 有利한 結果.

  1. 後宮大使 報告 內容(Ideology is more thick than blood. 10년 or 20년 以內 統一 없다)


“나의 Image 를…”

< 나의 image를 ○1信念에 차고, ○2 寬大하고, ○3 멋이 있게, >

< 나의 장래는 ○1 믿고 行動하면 그렇게 된다(神의 도움) ○2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3 나는 執權하면 大衆民主體制를 실현하고 나는 南北의 平和共存, 平和交流, 平和統一을 실현하고, 나는 統一祖國을 世界大國의 列에 끌어올리며, 나는世界의 새로운 來日의 方向을 위하여 未來像을 提示하며, 나는 弱小國과 不幸한 人類의 權利를 위한 先導者가 된다. 나를 위하여 每日 祈求하는 家族과 나에게 希望을 걸고 있는 國民을 잊지말자! >


<宇宙의 모든 것은 電磁氣를 가지고 있다. 吸引과 反發의 法則은電磁氣와 같은 作用을 한다. 積極的인 生覺에는 積極的인 結果가 나타나고 消極的인 生覺에는 消極的인 結果가 나타난다. 이 世上에는 遇然은 없으며 原因과 結果의 法則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


김대중 메모에 대한 촌평

메모 전체에서 풍기는 촌티는 김대중의 성장과정과 전적으로 독학에 의존한 교육과정을 고려해 볼때 역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도대체 “大衆民主體制”란 어떤 체제를 의미하는지가 매우 불분명하다.

대중(大衆)민주체제는 대중(大中)민주체제

김대중은 대중민주체제에 대해 “모순과 갈등, 빈곤과 독재의 병리로 점철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을 분석, 진단하고 이것을 치유하고 대중의 자유와 복지를 최대로 증진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있게 발전시킬 수 있는 국가체제의 대안으로 대충민주체제를 제창한다”고 하면서

“나는 대중민주체제의 정치체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현실에서 가능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각기 갖는 모순을 대중민주주의와 산업민주주의에 의해서 극복하고 자유경제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나가는 한국형의 혼합경제체제라고 생각하며 이를 대중경제라고 이름합니다.” 라고 떠들었는데

대중민주주의와 산업민주주의가 그냥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는 대중민주체재란 현 대한민국이 채택하고있는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같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김대중이 제창하는 소위 대중민주체제란 역사상 존재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상 많은 체제 실험이 있었고 그리고 그 실험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자본주위 체제와 사회주의를 섞은 혼합경제체제란 존재한 적이 없다.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가장 공정한 체제로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체제이기도 하다.

이는 학문적 깊이나 전문성이 없는 김대중이 다독과 독학을 통해서 얻은 단편적 지식의 기초를 가지고 자신의 제한 된 상상력으로 생산해 낸 체제인 바 선무당 굿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당한 평가이겠다.

결론적으로그의 치세를 겪어 본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大衆民主體制”란 “大中이의, 大中에 의한, 大中이를 위한 체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겠다.

그 대표적인 실예가 자신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하여 5억 딸라에 해당하는 막대한 자금과 물자를 그 자금이 북괴의 군비확장을 위해 사용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김정일에게 송금한 반역적 행위를 자행했다는 사실이겠다. 이는 바로 자신을 위해 국가를 봉사시킨 대표적 이적행위다. 결국 김대중과 그의 후임자가 북에 보낸 거의 100억달라에 달하는 지원금들은 남한을 위협하는 핵폭탄과 남한을 겨냥하는 미사일이 되어 돌아왔다.

또 한가지 그의 메모를 통하여 분명히 볼 수 있는 사실은 그의 관심사는 모두, 어떻게 하면 정권을 잡을 수 있겠는가하는 집권 방법론에 집중되어 있고 정권을 잡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통치방법론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아마도 군사독재를 했다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차이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박정희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봉사시킨 사람이라면 김대중은 자신을 위해 국가를 봉사시킨 사람일 것이요 박정희가 (진정한 의미의) 애국, 애족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김대중은 행동하는 욕심을 가진자라고 할 수 있겠다.” 박정희는 국가를 위한 마스터 풀랜을 가지고 난 후 권력을 잡기위한 계획을 세웠던 사람이었던 반면 김대중은 권력잡기에만 혈안이 된 사람이었다.

김대중에게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자신의 출세와 야망을 달성시킬 한갖 도구에 불과한 것들이요 국가와 민족, 개인의 사랑이나 행복, 혹은 그 어떤 이념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인 바 이 관점이 그의 모든 행동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관찰할 수 는 것은 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메모해 둔 수첩에서 빨갱이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젊은 시절 좌익운동에 심취되었던 전력이 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사상적으로 전향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심중 깊은 곳에 감추어 있던 개인적 사상의 편린들을 적어 넣은 이 개인수첩에서 전혀 좌익적인 사상을 읽어 낼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특이하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자는 아닐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된다. 그렇다고 그가 김일성, 김정일을 위한 이적행위를 자행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김대중의 집권전략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메모는 김대중의 집권전략을 요약한 메모이다. 아래 메모중 영문철자가 틀린것은 바로 잡지 않고 원문대로 복사하였다.

  1. 民主主義 求國同盟
  2. 白牙館 (Kissinger)의 指持確報
  3. 國務省의 完全 掌握
  4. 進步派의 指援Team구성 (Knnedy, Reischaoer,Oakes)
  5. 親Nixon勢力의 協助確報
  6. 國防省과의 密接한 接觸
  7. CIA에의 通路 維持
  8. Santa Barbara會議 成立
  9. Honorary Doctorate獲得
  10. 新聞, Radio確充, 冊, panflet 出版 (틀린철자는 원문그대로 복사한 것임)
  11. 本國對策
A. 平時對策Team(政黨, 學生, 宗敎, 言論, 軍人, 勞組 etc)
B. 有事時 歸國 作業剖隊 (上記 參照)
C. 有事時 對策, 日 作業剖隊
D. 國內 作業剖隊

기타 행적

이철에 대한 김대중의 공산주의 강의

이철이란 사람은 1948년 경남 진주생으로 1985년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생이다. 일찍부터 정계에 진출하여 제 12대,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철의 진술에 의하면 1985년 3월경 자신은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로부터 “우리나라에는 프롤레타라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강의를 들었다한다.

이철은 1985년 2월12일에 있었던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의원이 되었는데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김대중으로부터 회견제의를 받고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게 된다. 김대중 동교동 자택의 지하실에는 비밀회견실이 있는 모양인데 이철의원은 바로 이 자리에서 김대중과 한시간여에 걸친 단독면담을 갖는다.

이 면담과정에서 김대중 왈 “현재 한국은 극심한 계급적 갈등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는 풀로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한국에서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상황이 악화되어있다.” “그래서 풀로레타리아 혁명이 꼳 필요하다”


김대중의 재산형성 과정

그 어느 땐가 이동복 선생은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털어 놓았다 6.15선언 몇 주념 기념식 석상에서 있었던 일이었다는데 연단에 오른 김대중 왈,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부를 잘해서 변호사가 되었지만 나는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 자리에서 이 말을 들은 이선생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하시던데 게속해서 이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김대중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사업을 해서 돈을 번 일이 전혀 없다는것이다. 그가 돈을 번을 번 사업이 있다면 수금사업(收金事業)이 전부라는 것이다.

수금사업이란 다름아닌 조폭들이 시장상인들을 겁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사업이 그 전형적인 형태이다. 흔히 시장통이나 거리의 노점, 아니면 유흥가 등에서 조폭들은 자신들의 신변보장 서비스를 강매하는 형식으로 영세상인들이나 유흥가 주인들로부터 속칭 “세금”을 징수하는데 바로 김대중의 치부방식과 한치에 차이도 없다 하신다.

자신이 총재로 있는 당의 공천을 받아서 국회의원 혹은 지방자치 단체장으로 당선된 모든 정치인, 혹은 관리로부터 매월 “권리금”을 수금했다니 그가 무슨 사업이든 해서 돈을 벌은 역사가 전무하면서도 아니, 실상은 그는 사업에 실패하여 빚쟁이를 피하여 도망다닌 역사만 있을 뿐인데 그는상당한 치부를 하였고 호회스런 생활을 영위했다고 전해진다.

김대중은 권리금 수금에 거부하는 일부 양심적 당원들에 대하여 철저한 보복으로 본때를 보이는 방법을 썼다한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아마도 조승순 의원의 경우일 것이다. 조승순 박사는 전남 순천지방의 갑부의 아들로 한때 그의부친의 재산은 전북 갑부 김성수를 능가했다고 전해진다. 갑부의 아들로 미국에 유학하여 정치학 박사를 획득한후 미국 미조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김대중의 권유를 받고 귀국하여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다. 이양반은 전형적인 전라도 양반으로 그 품성이 매우 강직했던 분이라고 전해진다.

국회의원이 되었든 군수가 되었든 김대중의 소위 권리금을 납부하려면 이 사람들은 제주머니에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의 자리를 이용하여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긁어 모아야 한다. 이 때 “능력”이란 다름아닌 “돈 긁어 모으는 능력”을 말한다. 한편 진짜로 능력있는 사람들은 눈짓만 해도 알아서 기는 사람들로부터 반자발적으로 상납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다. 당시 김대중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은 매달 억대의 소위 “권리금”을 김대중에게 헌납했을 것이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그런데 조승순 의원의 경우 알아서 기는 사람들로부터의 상납금도 호통을 쳐서 돌려보내니 이양반이 김대중의 수금을 당연히, 그리고 결연하게 거부하였을 것인즉 김대중에게 찍혀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국회의원을 그만 두셨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을 구체적 증거를 가지고 증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일이지만 아니땐 굴뚝에서 연기나는 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그의 호화스럼 생활과 그의 손 큰 씀씀이와 그의 신고재산만으로도 위에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김대중은 도무지 돈을 번 일이 없고 그의 국회의원 세비가 알려진 유일한 수입원인데 이것으로는 도저히 그의 씀씀이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자세한 내용을 보는 것 보다 큰 그림을 보는 것이 사태파악에 도음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김대중의 재산형성과정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겠다.


다리병 내림

김대중 가(家)에는 그의 친모 장노도로부터 내려오는 유전병이 있다고 한다. 고관절염이라는 이 병은 김(제갈)대중, 김(윤)대의에게 유전되었고 조카중 어떤 사람도 이 다리병 있다고 한다. 김대중의 아들 김(제갈)홍일에게도 전해졌고 일부 손자들( …)에게도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자신은 이 다리병이 1971년 5월 24일 전남 무안군 삼양면 대양리 앞길에서 있었던 교통사고 후유증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 사고가 순수한 교통사고 인지 혹은 군부가 김대중을 죽이려는 고의적 사고인가에 관계없이 다리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 사실이다.

즉 김대중이 찔둑거리게 된 것은 유전적인 원인 때문이고 그가 주장하는 대로 교통사고가 원인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김대중 주변의 의문사

처 차용수(혹은 차용애)
이복형 김대봉,
정몽헌,
장래찬,
딸 김소영,
정부 김소영의 어머니(성명미상)
동아일보 회장 김병관씨 부인의 자살
(to be continued)

준비된 대통령?

2008년, 현대 경제연구원에서는 ‘정권별 선진화 기여 평가와 이명박 정부의 과제’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153.6%를 기록한 박정희 정부를 대한민국 선진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정권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정권초 선진화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정권 말에는 253.6를 달성했다는 의미로서 박정희 정부에 이어 , 전두환 정부 44.3%, 김영삼 정부 42.7%, 노태우 정부 36.5%, 김대중 정부 28.1%, 노무현 정부 23.8% 순이었다.

빨갱이인가 아니면 기회주의자인가?

누구나 김대중의 일생의 기록들을 흝어본 사람이라면 두가지 특이점을 보게되는데 하나는 그의극히 지독한 출세에의 의지와 집요함이요 또 하나는 그의 지속적인 좌익편향성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빨갱이라기 보다는 기회주의자라고 하는데 혹자는 그를 전형적인 빨갱이로 본다.

양쪽이 다 일리가 있으니 누가 맞다고 단정하기가 매우 힘든다. 그와 상당기간 가깝게 지낸 사람인 양준용 기자는 그의 평소 언동이 빨갱이들의 그것과는 같지 않으며 그의 행동거지로 보아 기회주의자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하신다. 그의 언행에 무의식으로라도 ”무산계급, 해방, 프러레타리아 혁명 등등 상투적인 빨갱이 용어를 내 뱉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천한 학력을 고려해 보아도 그가 정통 공산주의 이론을 습득할 능력이나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 증거라면 김대중이 극우에 가까운 최서면(崔書勉)과 개인적으로 매우 친근한 사이라는 것이다. 김대중이 전형적인 빨갱이라면 극우분자와는 친구가 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이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극우분자인 최서면에게 접근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상정하기가 힘든 경우라고 한다. 그래서 김대중의 좌파 편향성도 그의 출세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서는 좌도 되고 우도 될 수 있는 인간인데 여러 정황이 그를 좌파 편향성 인간으로 보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 개발독재와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치하를 거치다 보니 기회주의 적인 김대중이 우파성향을 나타낼 기회는 없었고 좌파적인 상향을 보일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그가 빨갱이 처럼 보일 수 있는 당위성은 분명히 있다고 보인다.

어느날 대화중에 김대중은 이런 말을 했단다. “양동지, 당신은 TV를 볼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TV를 보시오? 가령 연속극을 볼때 무슨 생각을 하며 연속극을 보시오?” 라고 하면서 자신은 연속극을 볼 때도 이야기 전개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 내용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는 관점에서 TV를 본다고 했다는데 김대중은 계속해서 자신은 잠을 자면서도 정치를 생각한다고 했단다.

자신의 목적, 즉 자신의 출세와 명에욕의 충족을 위하여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집요함과 추진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며 그의 처절할 정도로 철저한 기회주의자적인 측면을 잘 보여준 일화 같았다.

이런 점에서 그가 철저한 기회주의자인 것이 맞는 것 같은데 반면에, 그는 또한 젊은 시절부터 대통령에 당선되어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지속적으로 , 그리고 변함없는 좌파 편향적인 주장과 행위를 한 것을 고려하면 그를 빨갱이가 아니라고 하기가 매우 난감하다. “오리같이 뒤뚱뒤뚱 걸으며 오리같이 꽥꽥 대니 오리가 틀림없다”는 말과같이 “빨갱이 처럼 말하고 빨갱이 행태를 보이니 빨갱이가 틀림없다”고 한다면 그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두뇌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그 사람을 판단 할 수 있는 길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일 것이고 실용성에 있어서는 이 판단기준이 전혀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만일 김대중의 일생에서 그의 출세지상주의적측면과 그의 좌익사상적측면에서의 행동 지침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었다면 이 때의 그의 결정을 보고 그가 기회주의자인가 아니면 빨갱이인가를 알 수있는 실마리가 될 터이지만 불행히도 이런 경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상 그가 진정 기회주의자 였다거나 빨갱이 였다는 것을 확연하게 구분하여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가 김일성을 도왔고 그의 후계자 김정일, 일명 “배불뚝이”를 도왔던 것은 사실이고 그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기회주의자 였던 것도 사실이다. 일생을 통한 그의 행적이 이를 말해준다.


김대중 어록

”이 김대중은 돈을 돌 보 듯합니다.”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행한 국회의원 선거 유세 중).
정치안해요. 제가 안해요.

이건 내문제니까 내가 안하는거요.

누가 나를 강제로 시키는거요.     


“저는 일생에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일이 없습니다. (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 하고는 다릅니다."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 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김정일은 나쁜 놈입니다"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약을 개정시키겠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여러 유세에서 늘 하던 말[8][9])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정신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존중되고 정의가 최고의 가치로 강조되는 정신혁명 말입니다.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그런 사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통도 보람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해야 합니다. 땀도 같이 흘리고 열매도 함께 거둬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혁명과 바른 사회의 구현에 모든 것을 바쳐 앞장서겠습니다.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10])
"주민들에게 직접 환갑상, 생일상을 차려주고 격려편지도 곧잘 보낸다.

함부로 사람을 버리지 않아 잘못했을 때는 가차 없이 벌을 내리지만 반면에 충분한 반성의 기미가 보일 때는 다시 불러들이고 과거를 묻지 않는다. 머리가 비상하고 탁월하며 논리 정연하고 치밀한 성격이다. 업무에 대한 열정이나 집중력이 대단하고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

(정상회담 직전 김정일에 대한 평가 중)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북한이 2006년 10월 9일 제1차 핵실험을 했을 때 김대중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 김대중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
(중앙일보 2000.12.11)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대북지원금이 핵개발로 악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북이 핵을 개발했다거나 개발하고 있다는 거짓 유언비어를 퍼트리지 마라. (만약 북에 핵이 개발된다면) 내가 책임지겠다."

(2001년 북한 다녀온 후)
"노벨평화상은 한국국민 모두의 업적으로 받은 상이니 만큼 저는 상금 (11억2, 222만원)을 노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습니다."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 김대중의 것입니다" “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

(2001. 12.10 조선일보)
"노벨평화상금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

"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 6.15 기념관을 지을 것이다".

(2002.5.20 중알일보, 세계일보, 신동아 2002.6월호)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 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2002.6.21 일간지 일동)

참고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上) "본인이 부족한 점 많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반공 일념만은 확고" pennmike 2018.11.29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下) "미국 교포들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 거부" pennmike 2018.11.29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上)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절대 조작 아냐” pennmike 2018-11-30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中) “12·12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도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 pennmike 2018-12-01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下) "박정희는 혁명으로 집권, 나는 생각 없었는데..." pennmike 2018-12-02
[weekly chosun] 美 망명 前 국정원 직원 김기삼, "DJ 노벨상 위해 국정원이 공작한 증거 있다" 2008.04.25 weekly chosun 2003호

같이보기

김대중 비자금

김대중의 1967년 국회의원선거 연설

김대중의 1971년 대통령선거 연설

김대중의 YWCA 초청연설문

광주사태 체험 공수부대원의 수기

광주사태 당시 '전남도청 독침사건' 진상

김대중 자백 진술조서

김대중 재판에 대한 청문회증언

워커(Walker) 전 주한미국대사의 김대중에 대한 회고

미국언론의 6.29 선언 분석기사

1987년 김대중 관훈클럽 토론

1992년 김대중 관훈클럽 토론

김대중의 'Le Monde'지 인터뷰

김대중과의 대담

1996년 김대중 월간조선 인터뷰

1997년 한국논단(韓國論壇) 초청 김대중 토론회

1997년 김대중 관훈클럽 토론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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