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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全斗煥
전두환.jpg
직책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최규하전두환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전두환노태우

출생일 1931년 1월 18일
출생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별명

일해(日海)
용성(勇星)

정당 민주정의당 (1981년~1987년)
무소속 (1987년~2021년)
학력 육군사관학교
부모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배우자 이순자
자녀 1남 전재국
1여 전효선
2남 전재용
3남 전재만
종교 불교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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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全斗煥)은 대한민국의 11~12대 대통령이다.

전두환대통령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좌파 카르델로 점령당한 문화권력에 자유우파 정당이라는 국민의힘당의 멘달과 전투력을 봤을 때에는 아직까지는 꿈과 같은 일이다.

2022년 11월 23일은 전두환대통령 서거 1주기되는 날이다. 하지만 전방에 묻히고 싶다는 대통령의 유언은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택에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게 현실이다.[2][3]

2023년 8.15특별사면이 발표되였다. 윤석열정부는 2년차에 들어 섰으나 아직도 문재인에 대한 사법실현은 커녕 문재인의 적패청산으로 감옥에 갖힌 박근혜정부의 인사들에 대한 사면 또한 멀어보인다. [4]


개요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47년 대구희도초등학교,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59년 1월 24일, 이규동 장군의 장녀 이순자씨와 결혼했다. 1959년 6월 미 육군의 심리전 교육연수 과정을 이수한데 이어 1960년 7월 미육군 보병학교 레인저 과정을 수료했다.

1961년 5.16혁명 직후인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을 지낸 뒤 1964년 8월 고등군사반 과정을 마치고 1965년에는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1967년 수경사 30대대장을 역임했다.

1970년 11월 9사단 29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였고, 1973년 1월 육군 준장으로, 1977년 2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78년 제1사단장 재임 중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다음해인 1980년 봄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개혁작업을 수행했다. 이어 8월 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9월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81년 3월 개정 헌법에 따라 출범한 제5공화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국정의 기조를 개방과 자율로 전환하면서 안으로는 획기적인 물가 안정의 토대위에 10%대의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물가/성장/국제수지 흑자라는 3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했다. 88서울올림픽대회를 유치하여 국가의 위상을 끌어 올렸고 교육개혁과 문화 창달의 기반을 쌓았다. 밖으로는 한미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정상외교의 길을 열어 놓았고, 제3세계로 외교지평을 확대하면서 북방외교의 초석을 깔아 놓았다. 무엇보다도 1988년 2월 단임을 실천하고 퇴임함으로써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 정부 이양의 전통을 세웠다.


일생

결혼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에 축구부장으로 활동했다. 공부보다는 운동에 더 적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을 맡고 있던 이규동 장군이 마침 이때 3군 사관학교 통합 체육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두환이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인지 전두환 생도를 눈여겨보게 되었다.[5] 그 인연으로 1958년 1월에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규동의 딸 이순자와 전두환은 결혼을 했다.

박정희와의 인연

전두환이 소위로 임관한 후 장인인 이규동 장군을 만나기 위해 6관구사령부(영등포에 소재, 현재는 사라짐)를 찾았는데 그날 마침 그곳에 박정희가 와 있었다. 이것이 둘의 첫 만남이라고 전두환의 측근인 허화평이 진술하였다. [6] 이후로도 박정희는 전두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5.16 정변 성공 이후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당시 육군 대위였던 전두환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네, 전역(轉役)부터 하게나.

전두환 네? 각하, 뭐라고 하셨습니까.

박정희 전역해서 공화당에 들어가 정치를 하게.

전두환 네?… 각하, 저는 정치를 모릅니다. 정치를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저와 안 맞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다른 사람들은 서로 가려고 하는데 자네는 왜 안 가려 하나.

전두환 정치는 어렵고 육군 대위인데 돈도 없고… 조건도 안 맞고… 여러 형편상 제게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 도와줄 테니 해보게.

전두환 그럼, 가족하고 의논해 보겠습니다.

박정희 자네는 자네 문제를 가족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나?[7]

군인을 그만두고 정치할 것을 강력히 권유하는 박정희에게 어떻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해야 할지 감 조차 잡히지 않는 고민 속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전두환 대위는 다음날 박정희를 찾아가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전두환 저는 아무래도 군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알았네.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군대생활 잘 하게나.[8]

다음 날 박정희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리하여 전두환은 군(軍)에 남게 되었다.

보안사령관이 되기까지

1963년 소령 진급과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파견을 나가 1년 남짓한 기간 근무했으며, 중령 진급과 동시에 청와대 30경비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청와대 외곽 방어를 담당했다. 그런데 마침 전두환의 재임기에 1.21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9] 하지만 전두환의 책임은 아니었기에 특별한 징계를 받거나 하진 않았다.

전두환은 1.21때 도리어 엄청난 공을 세웠다. 1.21 사태 때 공비들이 작전을 결정적으로 단념한 건 청와대 바로 뒷산까지 침투에 성공했지만, 뒷산에서 조명탄이 계속 터져 밝은 대낮처럼 환해져 이때 실패를 깨닫고 공비들도 단념을 했고, 소산하는 중 김신조도 생포 됐는데, 전두환이 30경비대대장으로서 선견지명으로 평소에도 조명탄을 박격포에다가 쏘는 훈련을 엄청 시켜서, 1.21사태 때도 이 훈련 덕분에 전두환이 박정희를 살린 것이다. 이 공으로 박정희와 같이 사진도 찍고 신임이 더 두터워 졌다.

1970년에는 주 월남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듬해에 다시 한국에 복귀해 1공수특전여단장을 역임했다.

전두환이 제1사단장 시절 북한의 남침용 제 3땅굴을 찾아 내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79년 3월 5일 전두환은 마침내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0.26이 일어나기 불과 6개월 전이었다.

원래는 보안사령관은 대개 중장이 맡는 것이고 소장이 맡는 경우는 드문데 박정희의 강한 총애와 신임을 받던 전두환은 소장으로서 보안사령관에 임명된다. 이 인사로 김재규의 반란이 진압된다. 10.26때 박정희 말년의 인사를 보면 대부분 실패한 인사였다

김재규는 말할 것도 없고, 경호실장 차지철, 총리 최규하, 국방부장관 노재현, 육참총장 정승화, 비서실장 김계원 등 그나마 전두환이 10.26과 12.12때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김재규의 반란을 진압하여 그 공으로 대통령까지 된 것이다.



업적

10.26 사태

  • 10.26 사태 때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김재규를 체포하여 대한민국의 적화를 막았다. 자세한 사항은 10.26 사태 참고.
  • 12.12사건 또한 김재규와 10.26의 공범이었던 정승화 군벌의 반란을 도리어 진압한 사건이다. 12.12 사건 문서 참조

물가 안정

사실 한국은 독립이후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경제 였다. 전두환 때 물가안정을 경제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여 독립이후 처음으로 물가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경제성장 물가안정은 어떻게 보면 서로 상충되는 목표로 한가지도 잡기 힘든 데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특히 물가안정은 독립 이후 처음이었다. 외신에서도 경제성장 물가안정을 동시에 달성한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에서는 인기가 없다라고 보도 할 정도. 이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세계1위였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사실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다 외채 많았고, 중공업 부분에서 중복투자 과잉투자도 많았다. 이런 문제들도 전두환 정부에서 해결했고, 당시 운동권들은 외채 때문에 망할 것이다 노래를 불렀지만, 전두환 때 그런 위기는 오지 않았다.

김재익 등용

  •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임명하여 정보화 정책, 수입자유화 정책 등을 시행하게 하였다
  • '경제는 자네가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하며 신뢰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 김재익은 아웅산 테러로 순직했지만 전두환은 김재익 사후에도 뚝심있게 그의 경제철학을 밀고 나간다.

대학등록금

  • 대학등록금도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감당할 수 있을만큼 낮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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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단순화

  • 복잡한 농수산물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여 서민들도 저렴한 가격에 농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링크


삼청교육대

  •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 발표 (1980년 8월 4일) 후 삼청교육대를 설치하여 정치비리자, 부정축재고위공무원, 불량배 등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무리들을 순화 교육시켰다.

삼청교육대는 민주당 좌파 진영에서 전도환대통령의 만행으로비판하는 단골 메뉴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조직폭력배들을 전방 부대에 보내서 군의 조교들이 맡아서 육체훈련 정신개조를 했다. 5공화국 같은 드라마에서는 무슨 아우슈비츠 같은 수용소 처럼 묘사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군대에서 원래 교관을 하던 조교들이 통제를 해서 전방에서 교육을 시킨 거지. 이건 당시 삼청교육대의 교육을 담당하던 전방의 교관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국도 건설

  •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면, 전두환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국도를 확대 건설하였다. 지금도 오토바이로 전국 일주를 하려면, 거의 대부분 전두환 대통령 임기 중 건설된 국도를 이용해야만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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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육성

  • 프로야구(KBO)를 창단(1981)하여 스포츠 산업 및 문화 산업을 장려, 육성, 보급하였다
  • 좌파들은 이를 3S 우민화 정책이라고 헐뜯는데, 이는 1988년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2015 프리미어12 한국 우승 등의 스포츠 역사에서 대한민국의 빛나는 업적과 박찬호, 선동렬, 안정환, 박지성, 손흥민, 김연아 등의 스포츠 스타들의 탄생 및 그로 인한 수십 수백억이 넘는 부가가치 및 세계적인 국격 상승 등의 부대 효과를 모두 무시하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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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히 1981년, 제24회 올림픽의 개최지가 서울로 정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올림픽 개최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 다만 자유시장적 관점서 보면 스포츠는 시장의 원리에 맡겨야지 어째서 정부가 스포츠를 육성 및 보급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사교육 금지

  • 과외 및 선행학습을 금지하였다. 이는 재학생에게 예체능을 제외한 교과과정의 사교육을 금지한 것으로, 재수생을 위한 재수학원 및 특기생들을 위한 체육,음악,미술 학원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 사교육 금지는 가난하게 태어났어도 열심히 공부하면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이는 빈부격차 줄이기에 큰 공헌을 하였다

평화적인 정권이양

  • 대통령 직선제 시행 (6.29선언) 및 대한민국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 이승만의 하야. 쿠데타로 윤보선의 실각, 박정희의 암살 등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없었지만 전두환은 7년 단임 약속을 지키고,노태우를 설득해서(노태우 본인이 했다기 보다 도리어 노태우는 자기는 직선세 하면 떨어질 거라 반대했는데 노태우를 설득한 게 전두환이다) 직선제 개헌을 하기로 결단했다.

대일 경제외교

  • 대일본 외교에 있어서는 전두환 정권이 가장 모범적이었다.


평화의 댐

  • 전두환 전 대통령이 건설한 평화의 댐은 2020년 수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큰 피해를 막았다.

통금해제, 연좌제 금지 개방으로

군인 출신임에도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개방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랜 족쇄였던 통금을 해제시켜서 밤에도 자유롭게 통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연좌제 폐지해서 알지도 못하는 친지 때문에 인재들이 꿈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던 오랜 부조리를 개혁했다.해외여행의 제한 또한 풀었다

단임제 약속 지켜, 직선제 개헌

전두환은 영구집권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가 있었지만 약속대로 7년 단임을 하고 물러나서 한국 민주주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본인 스스로 최초로 평화적 정권이양을 이루려던 의지가 있었고, 실제로는 후보였던 노태우를 설득해서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게 했다.


기타

  • 이윤상 납치 사건을 대응하면서 "살려보내면 너도 살고, 죽여보내면 너도 죽는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 대통령 퇴임후 백담사에서 2년간 생활하였다
  • 2013년 추징금 환수 과정에서 오 나의 여신님 포스터가 나와서 오덕후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 일베저장소에서 엔젤두환으로 불리기도 한다
  • 역대 대통령을 가장 잔인하고 오랫동안 정치보복을 당한 사람이다. 퇴임하자 마자 백담사에 유배를 갔고 김영삼 때는 감옥에 갇혔다 이후에는 추징금 등으로 사돈의 팔촌까지 경제적 연좌제식으로 털렸다. 90세에도 서울 연희동 사는데 광주로 보내서 망신주기 재판을 했고, 장례식에서 조차 언론에서 왜 사과 안하냐는 소리를 했을 정도
  • 반달리즘의 대상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재임시에 쓴 현판 같은 경우는 5월단체들이 항의하여 없애고 있는 추세다. 독립기념관 현판도 전두환 대통령이 썼는데 특정 기념관장이 내용은 그대로 전두환에 이름만 없애 버렸다. 호국로 기념관 5월단체에서 항의해서 무슨 갈등을 없앴다면 없애기로 한 모양. 평화의 댐 같은 경우도 김대중 보여도 전두환에 대한 것은 어느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 518 기념관 쪽에서는 아예 입구에 전두환의 현판을 깔고 그걸 정치인들이 웃으면서 밟고 지나가는 미개한 짓까지 하고 있다. 518은 응당 진압해야 하지만, 518진압과 전두환과 상관이 없다. 좌파들에게 악마화 당했고, 우파에서 조차 전두환은 아니다 전두환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다.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었고 업적도 많았는데 이렇게 폄하 악마화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는 건 정말 맞지 않다 재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518 진압 책임론

좌파들은 518 진압 건으로 전두환을 민간인을 학살한 살인마라고 비난한다. 일단 518은 무기고 무단탈취, 도청무단점거, 도청 지하에 다이너마이트 설치, 교도소공격, 방송국 방화 등 이것만으로로 국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제대로 된 국가라며 설령 계엄이 아니라도 진압해야 될 사건이다. 근데 정작 전두환과 518 진압은 상관이 없다 518 때 전두환이 무슨 대통령 이었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전두환 518 당시 대통령도 아니었고 광주를 진압하는 부대장도 아니었고 정보부대 수장 지금으로 말하면 기무사령관 겸 김재규의 반란 이후 거의 와해된 중정 국정원 임시 서리를 겸직하고 있었다. 518은 응당 진압 해야 되어야 했고, 전두환은 그 진압과는 무관한 사람이다. 518 이후 불과 몇달 만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에 마치 12.12 이후에 전두환이 모든 걸 장악해서 최규하를 제끼고 진압을 진두 지휘한 게 좌파들의 의해 통설처럼 되어 있는데 근거 없는 음모론이며 전혀 사실 아니다.

저서


  • 전두환 회고록 1(혼돈의 시대 1979~1980), 자작나무숲, 2017.10.13.
  • 전두환 회고록 2(청와대 시절), 자작나무숲, 2017.04.05.
  • 전두환 회고록 3(황야에 서다), 자작나무숲, 2017.04.05.


연보

역대 대통령관련 구술채록 사업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 PDF 파일 원문 - 국립중앙도서관
pp. 122~147 전두환 전 대통령 연보


참고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上) "본인이 부족한 점 많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반공 일념만은 확고" pennmike 2018.11.29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下) "미국 교포들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 거부" pennmike 2018.11.29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上)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절대 조작 아냐” pennmike 2018-11-30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中) “12·12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도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 pennmike 2018-12-01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下) "박정희는 혁명으로 집권, 나는 생각 없었는데..." pennmike 2018-12-02
1979년 10월 26일~1980년 12월 31일 제5공화국 탄생까지의 주요일지 pennmike 2018-12-04
노태우 진술조서 "전두환 장군, 눈물 흘리며 대통령직 수락" pennmike 2018-12-05
신현확 진술조서 "김정렬 씨가 최규하 대통령 하야 적극 권유" pennmike 2018-12-06
최규하 진술조서, 처음부터 끝까지 "답하지 않겠습니다" pennmike 2018-12-07


관련 사이트


각주

  1.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우파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참조 김영삼#김영삼 정권에 대한 평가
  2. 전방에 묻히고 싶다던 전두환, 1년째 자택에 '임시 안치'
  3. [https%3A%2F%2Fwww.newsis.com%2Fview%3Fid%3DNISX20221123_0002097522 보수단체, 대한문 앞에 전두환 1주기 분향소]
  4. 국민의힘은 대통령과 수많은 인사들을 감옥에 보내놓은 일등공신임에도 석방에 대한 의지가 없다.
  5.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203100041
  6.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203100041
  7.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203100041
  8.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203100041
  9.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203100041


역대 대통령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대수 성명 재임
제1공화국
1 이승만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2 이승만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3 이승만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제2공화국
4 윤보선 1960년 8월 12일 ~ 1961년 5월 16일
제3공화국
4 윤보선 1961년 5월 16일 ~ 1962년 3월 23일
5 박정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6 박정희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7 박정희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제4공화국
8 박정희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9 박정희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10 최규하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11 전두환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제5공화국
12 전두환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제6공화국
13 노태우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14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15 김대중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16 노무현 2003년 2월 25일 ~ 2004년 3월 12일
2004년 5월 14일 ~ 2008년 2월 24일
17 이명박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18 박근혜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
19 문재인 2017년 5월 10일 ~ 2022년 5월 9일
20 윤석열 2022년 5월 10일 ~ 2027년 5월 9일 [1]
  1.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