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김영삼 정부
1706_108.jpg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1]
임기
1993년 2월 25일~1998년 2월 24일
전임
후임
내각
여당
민주자유당 (1993년 2월~1996년 2월)
신한국당 (1996년 2월~1997년 11월)
선거

김영삼 정부(金泳三 政府)는 1993년 부터 1998년까지이며 대한민국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이다. 보통 문민정부(文民政府)로 불린다.

문민정부인데 안티 군 정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추임초반에는 거의 93%정도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자랑하면서 임기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좌익사관이 학교역사 교과서에 들어간다. 소위 민주화세력을 역사의 주입이며 정당성을 가진세력으로 사관 민중사관이 교과서 서술에 들어가는 게 김영삼 정권 때 부터다.

김영삼은 3당 합당 특히 민정당 계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되었다. 초반에 정승화 등등이 12.12의 보복을 건의했지만,

민정당 계열의 지원을 받고 대통령이 된 그는 아마 정치보복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12.12 등은 5공의 통치 행위이다. 통치행위를 처벌 할 수 없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12.12는 쿠데타가 아니다.) 5공 세력에 대한 정치보복에 임기 초반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등등으로 임기 초반에 지지율을 다 까먹고, 특정 사람이 사석에서 노태우과 김영삼에게 준 선거자금 차명계좌에(김영삼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 금융실명제 자체는 전두환 때부터 한다는 말이 많았던 것) 대해 떠든게 언론에 나오기도 하고, 김대중은 김영삼을 코너로 몰기 위해 베이징에서 나도 노태우에게 돈을 받았다 라는 선언을 한다.

그러자 세간에서는 김대중도 저정도 돈을 받았는데 3당합당해서 대통령 된 김영삼은 도대체 얼마를 받아 먹은 거야 이런 이야기가 팽배했다.

김영삼은 여론전환용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일단 잡아들이고, 죄를 만든게 역사 거꾸로 세우기 재판이다. 김대중과는 야합해서 5.18특별법을 만든다.

5.18 특별법 역사거꾸로 세우기 모두 소급법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기에 그거 자체가 위헌적인 법이고 재판이다. 노태우 때도 5공 청문회를 하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고, 민주화 보상을 했지만,

김영삼은 12.12, 5.17, 5.18 역사를 다 거꾸로 세웠다. 전라도나 좌파들은 이 재판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대법원도 인정하지 않았느냐며 교과서에도 12.12는 군사반란, 5.17내란, 5.18 민주화운동으로 정의 되었는데, 재판 자체를 자세히 따져보면 희대의 정치재판 코메디 재판이다.

이회창이 감사원장으로 있을 때 마치 평화의 댐이 사기인냥 몰아가기도 했다. SBS에서는 코리안게이트, MBC에서는 제4공화국 등의 드라마를 방영해 박정희와 전두환을 군부독재라며 사회적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기도 했다. 사실 위에 드라마가 전두환, 노태우를 마녀사냥하며 자신의 정치위기를 국면전환할 때 나왔던 드라마들이다.

경제도 못했다. 이 당시 저환율 정책을 펴 원달러 환율이 800원 대였다. 지금 환율이 1,400원대를 왔다 갔다 하는데 경제 실력에 비해 원화가 고평가를 받아 해외여행과 사치품 수입이 늘고, 수출은 부진해 대외 무역수지 적자가 펑펑 터지고 있었다. 당연히 외환보유고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여기에 종금사가 일본에서 저금리 단기로 빌려다 동남아에 장기 고리로 빌려줘서 이자놀이를 하다가 동남아 소로스 등 환투기 세력에 의해 무너지자 이자놀이를 하던 종금사들도 무너지고 이걸 외환보유고에서 갚아주다가 달러가 고갈되서 imf에 달러를 빌려온 게 IMF 사태다. 일본에 갚을 외화(달러)가 없어서 IMF왔는데, 일본이 부채기한을 연장해 주고 자금을 빼지 않았다면 IMF는 안왔을지도 모른다.

그럼 일본이랑은 사이가 좋았느냐 원래 박정희 때 한일수교를 하면서 독도는 현상을 유지하기로 했다. 일단은 한국이 실효지배를 하대 일본이 가끔씩 클레임을 걸어주고, 또 독도에는 접안시설 등을 짓지 않기로 했다.

김영삼 때 이런 양국간의 약속 어기고 접안시설을 지었는데, 당연히 일본에서는 이에 대해 반발했다. 김영삼은 이때 일본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 이런 발언을 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중앙청이기도 했던 대한민국을 선포하고 제헌국회가 있는 한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중앙청 건물을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며 폭파시켰다.

일본이랑 사이가 안 좋았으니 한미일 공조를 바라는 미국이랑 사이가 좋았을리 만무하다. 김영삼은 어떤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이다 요딴 소리를 하면서 동맹인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좌익 민족주의자들을 고양시켰다.


국무위원 명단

직위 날짜
1993년 2월 1993년 3월 1993년 10월 1993년 12월 1994년 4월 1994년 10월 1994년 12월 1995년 2월 1995년 5월 1995년 7·8월 1995년 12월 1996년 1월 1996년 5월 1996년 8월 1996년 10·11월 1996년 12월 1997년 2·3월 1997년 8월 1997년 11월
대통령 김영삼
국무총리 황인성 이회창 이영덕 이홍구 이수성 고건
경제기획원 → 재정경제원[2] 이경식 정재석 홍재형 나웅배 한승수 강경식 임창열
통일원 장관 한완상 이영덕 이홍구 김덕 나웅배 권오기
외무부 장관 한승주 공로명 유종하
내무부 장관 이해구 최형우 김용태 김우석 서정화 강운태 조해녕
재무부 장관[3] 홍재형 박재윤
법무부 장관 박희태 김두희 안우만 최상엽 김종구
국방부 장관 권영해 이병태 이양호 김동진
교육부 장관 오병문 김숙희 박영식 안병영 이명현
문화체육부 장관 이민섭 주돈식 김영수 송태호
농림수산부 → 농림부 장관[4] 허신행 김양배 최인기 강운태 정시채 이효계
상공자원부 → 통상산업부 장관[5] 김철수 박재윤 안광구 임창열 정해주
건설부 장관[3] 허재영 고병우 김우석
체신부 → 정보통신부 장관[6] 윤동윤 경상현 이석채 강봉균
환경처 → 환경부 장관[7] 황산성 박윤흔 김중위 정종택 강현욱 윤여준
보건사회부 → 보건복지부 장관[8] 박양실 송정숙 서상목 이성호 김양배 이성호 손학규 최광
노동부 장관 이인제 남재희 이형구 진념 이기호
교통부 → 건설교통부 장관[9] 이계익 정재석 오명 추경석 이환균
해양수산부 장관[10] 신상우 조정제
정무제1 장관 김덕룡 서청원 김윤환 김영구 주돈식 김덕룡 신경식 홍사덕
정무제2 장관 권영자 김장숙 김윤덕 이연숙
총무처 장관 최창윤 황영하 서석재 김기재 조해녕 김한규 심우영
과학기술처 장관 김시중 정근모 구본영 김용진 권숙일
공보처 장관 오인환


함께보기

태극기.jpg 대한민국의 대통령
우파계열 좌파계열
제1-3대 제4대 제5-9대 제10대 제11-12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노태우 김영삼[11]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제18대 제19대 제20대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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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월간조선
  2. 1994년 12월 23일 '재정경제원'으로 개칭하였다.
  3. 3.0 3.1 1994년 12월 23일 폐지되었다.
  4. 1996년 8월 8일 '농림부'로 개칭되었다.
  5. 1994년 12월 23일 '통상산업부'로 개칭되었다.
  6. 1994년 12월 23일 '정보통신부'로 개칭하였다.
  7. 1994년 12월 23일 '환경부'로 개칭되었다.
  8. 1994년 12월 23일 '보건복지부'로 개칭되었다.
  9. 1994년 12월 23일 '건설교통부'로 개칭되었다.
  10. 1996년 8월 8일 신설되었다.
  11.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우파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참조 김영삼#김영삼 정권에 대한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