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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최근 수정 : 2018년 12월 11일 (화) 23:15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 )는 한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연보

역대 대통령관련 구술채록 사업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 PDF 파일 원문 - 국립중앙도서관
노태우 전 대통령 연보 pp. 148~1

출생

1932년 12월 4일 (86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1]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2]

재임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Roh Tae-Woo signature.svg.png

[ 펼치기 · 접기 ] 1. 개요 2. 일생 3. 평가 4. 일화 4.1. 회의를 좋아하는 대통령 4.2. 보통 사람 노태우 4.3. 전두환과의 비교 4.3.1. 공통점 4.3.2. 차이점 4.3.3. 전두환과의 재회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대중매체에서 8. 이야깃거리 9. 각종 타이틀 10. 저서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을 일으킨 내란수괴.

군인 출신으로 제4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을 주도하였다.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으며,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슬로건은 "보통 사람" 이다.

12.12 군사반란-5.17 내란 혐의로 1995년 전두환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원을 선고받았다.[9] 이로서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사면되었다. 현재 전두환과 비슷한 이유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대부분 박탈되었다.[10][11]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에서 사실상 칩거생활을 해왔다. 희귀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있으며 이 때문에 기본적인 거둥도 제대로 못해서 휠체어를 타고 있고 2000년대 후반부터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있을정도로 상태가 약화되다보니 최규하,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의 영결식때 불참했으며,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을 마지막으로 참석했으나 이후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모두 불참하는 등 20년 가까이 공식석상에서 등장하지 않고 있다.

2.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일화[편집] 4.1. 회의를 좋아하는 대통령[편집] 노태우 정부 시기에 회의를 굉장히 자주 했다고 한다.[12] 당시 군사정부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회의를 강화했으며, 덩달아서 정부 부처에서도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취임하고 얼마 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泰) 바보(愚)니 당신들이 많은 의견을 내 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서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약간 유사할 수도 있는 증언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사안이 있으면 참모들끼리 회의를 해서 결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적지 않은 사안들은 참모나 장관들에게 위임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번씩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당 대표와 매주 만나서 국정현안에 논의하고 대화를 했다.

4.2. 보통 사람 노태우[편집] "나 이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대통령 선거에 쓰였던 슬로건인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말이 유명하다. 노태우 역시 박정희, 전두환 보다는 덜하지만 군인 독재자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 하기도 했다. 대선 당시에도 민주화 열기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에게 많은 부분에서 뒤쳐지고 있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 둘이 서로 욕심이나 부려서 먼저 대통령 하겠다고 단일화 안하고 뻗대고 있던 것과 대선 포스터에 걸렸던 이 문구 하나가 대선판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노태우에게는 어찌 보면 고마운 수식어라고도 볼 수 있다.

본인도 이 슬로건을 상당히 의식했는지 대선 이후에도 취임식이나 각종 연설이 있을 때마다 상당히 많이 썼으며, 노태우 집권 당시 대한뉴스에서 가끔씩 선행을 베푸는 일반인들을 취재해 위대한 보통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 보도한 적도 있으며 올림픽 성화에서 불을 붙인 사람들도 보통 사람 셋이었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때문에 개그맨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이 말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본인도 앞으로는 나를 풍자하여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책적으로도 5공과의 고리를 끊고 상술된 문단에서처럼 회의를 장려한다던지 본인도 김영삼, 김종필 등 여당 인사들과 잦은 회동을 가지면서 이전에 있던 군사 정권, 권위주의 이미지를 타파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은 노태우와 노태우 정부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게 되었다.

상기한 바와 같이 대통령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써도 된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그의 슬로건이었던 '보통 사람들'은 당시 풍자 만화가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주로 80년대 말 사회의 일그러진 모순을 고릴라의 모습으로 풍자한 책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중간에 다음과 같은 노래 개사가 실려 있다.

새 나라의 대통령은 보통 사람입니다 / 잘난 사람 없는 나라[13] / 우리나라 보통 나라(...)이건 좀

4.3. 전두환과의 비교[편집] "전 대통령의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ㅡ 1999년 9월 어느 잡지에 실린 노태우 육성 회고록 내용

4.3.1. 공통점[편집] 영남 출신

육군사관학교 동기(육사 11기)

장교양성교육기관 생활담당 교관. 전두환은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 노태우는 육군보병학교 구대장.

베트남 전쟁 파병부대 연대장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 전두환은 작전차장보, 노태우는 행정차장보. 이후 노태우도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특전사 여단장 경험- 전두환은 1공수특전여단장, 노태우는 9공수특전여단장

제1군단 예하 사단장 - 전두환은 제1보병사단, 노태우는 제9보병사단

국군보안사령관

민주정의당 총재

대통령

감옥행과 사면

하나회

집: 둘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거주한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는데, 특히 국군보안사령관과 민정당 총재, 대통령, 작전차장보는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임이라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4.3.2. 차이점[편집] 대통령이 된 이후의, 노태우의 국내/국외 정치 활동의 노선은 전두환의 노선과는 거의 반대 성향이었다. 대표적인 진보 인사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 토지 개혁이나 북방 정책 등 또한 전임자와의 대표적인 정책상의 차이점으로 꼽힌다. 특히 토지공개념에 중점을 둔 토지 개혁과 그를 바탕으로 한 경제 민주화는 당시 야당 일각에서도 너무 앞서나간다는 우려를 표할 정도로 진보적인 경제정책이었다.

전두환은 장관을 한 적이 없다. 반면 노태우는 전두환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관련 부서 및 일부 측근들과 함께 비밀리에 북한과의 정상 회담을 추진하려다 아군인 여권 관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 전두환 정부와 달리, 노태우 정부는 공개적으로 남북이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는 원칙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작성, 강영훈 국무총리의 서명을 넣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 구 공산권 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 14억 7천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14] 무기한으로 제공해 당시 큰 파장이 일었지만, 90년대 ~ 현재까지 러시아가 우리나라의 남북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한 태클을 걸지 않았던 건, 이 14억 7천만불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작용한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추징금 납입에 있어서도, 재산 규모를 축소 발표하고 재산 대부분을 둘째며느리인 박상아의 명의로 이전했다는 의혹과 더불어 납입을 피한다는 의심을 받아 끊임없이 망신살이 뻗친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사돈인 신동방그룹과의 소송전까지 불사하며 완납하였다.

전두환은 와이프부터 해서 동생에 아들에 자국 혐오 논란을 일으킨 손녀딸도 있는 등 가족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지만 노태우의 가족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자녀들이 전부 이혼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노소영의 이혼 소송은 남편이 워낙 유명인인 까닭에... 게다가 남편인 최태원 회장이 불륜을 저질렀으니 노소영은 오히려 피해자였다. 물론 노태우의 자녀들인 노소영과[15] 노재헌도(이혼) 살아 생전에 물의를 일으킨 적은 있지만, 노소영의 경우는 이슈가 큰 부친의 구설수에 조용히 묻혔으며, 노재헌 역시 가정사 문제로 치부되어 잠시 화제가 된 것 외에 파장은 크지 않았다.

후손의 병역도 대조된다.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은 병역의무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석사장교로 대충 땜빵했지만 노태우의 외손녀 최민정은 병역의무 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군 학사장교로 입대해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전두환은 나이가 거의 구순에 가깝지만 자주 필드로 나가 골프를 즐기고 퇴임한 지 거진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디어에 가끔 이름이 언급되고 상당한 팬들도 존재한다. 노태우는 그에 반해서 김영삼 정권 때 구속 수감 되었다 풀려난 이후 두문불출하며 근황이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나마 들린 소식이 건강 악화로 요양한다는 내용 정도였다. 그리고 전두환에 비하면 김영삼과 더불어 젊은 층에게서는 언급도 거의 되지 않는다.[16] 단지 젊은 층에게서 노무현이 노짱으로 불리면서 노태우가 그 반사 효과로 1대 노짱 혹은 원조 노짱으로 불리는 것 정도뿐이다. 노태우와 노무현이 성씨가 같은 노(盧)씨인 것에서 비롯된 드립. 혹은 디시 등지에서 낚시 용도로 노 전 대통령님 그립습니다... 라면서 노태우 사진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4.3.3. 전두환과의 재회[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1.jpg

13대 대선 전당대회 당시의 노태우와 전두환

"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 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 갔던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 마지막 회 中


서술한 대로 전두환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다. 군인 시절부터 줄곧 인생의 파트너이기도 했지만 대통령 재임 중 '5공 숙청'으로 전두환을 백담사[17]로 보내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된 후 말을 듣지 않아 상당히 괘씸했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는 스스로 직선제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체육관 대통령'인 전두환과 쌍으로 엮이는 것에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기도 같이 했으면서 이렇게 배신을 때리냐며 대통령이라도 귀 싸대기 맞는다며 분노했고[18][19]노태우는 전두환이 퇴임했으면서도 자신을 조종하려 들고[20] 또 노태우에게 닥치는 정치적 위기 대다수가 5공과의 연결 고리에서부터 오는 거라 전두환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결국 둘의 골은 깊어지며 10년 동안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구치소와 재판장에서 재회.[21]

2014년 8월 13일 전두환이 노태우의 자택을 방문했다. 당시 노태우는 뇌 질환으로 휠체어로 거동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자택에 갇히다시피 지내면서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누워있는 노태우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물었고, 옆에 있던 부인 김옥숙이 "알아보면 눈을 깜박이라"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이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10년간 애증이 겹쳤던 묵은 정을 마지막이 되기 전에 미련 없이 풀어내려 했던 듯하다.[22]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정의당

7,040,477 (35.2%)

당선 (3번)

초선[23]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민주정의당

8,282,738 (36.6%)

당선 (1위)

[24]

6. 소속 정당[편집] 민주정의당 (1981 ~ 1990)

민주자유당 (1990 ~ 1992)

무소속 (1992 ~ 현재)

7. 대중매체에서[편집] 문화방송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김기섭이 노태우 역을 맡았다. 같이 출연한 박용식의 전두환 역과 함께 화제가 된 캐스팅.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roh.jpg

문화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에서는 곽대홍이 맡았다.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김성원이 다소 나이 많아 보이는 노태우 역을 맡았다.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제4공화국에서 이후락 역을 했던 임채무가 맡았다. 완전히 전두환의 꼬붕 같은 스타일.

문화방송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서인석이 노태우 역을 맡았다. 외모는 그다지 닮지 않았지만[25] 전두환을 능가하는 책사를 잘 표현했으며, 특히 말투와 목소리는 가히 도플갱어 수준이었다. 배우 서인석이 태조 왕건의 견훤, 무인시대의 이의방, 정도전의 최영 같은 호방하고 거친 무인 연기로 유명하지만, 5공화국의 노태우는 서인석이 그와 정반대의 딸랑딸랑 연기도 잘한다는 걸 보여준 배역이었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54e491d200c076dde7b9.jpg

MBN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에서는 김덕현이 맡았다.

8. 이야깃거리[편집] 파일:external/ppss.kr/%EB%85%B8%ED%83%9C%EC%9A%B02.jpg

파일:external/www.insaauction.com/DI1307000048.jpg

따로 서예가 스승을 두는 등 노력하면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지만 경매에서는 거의 거래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돈으로 교환되는 가치가 부족하다는 의미. 시장 가격은 80~100만 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전두환의 서예 작품 시장가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수준이다.

박정희의 친위 세력이면서 12.12 반란까지 주동한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그는 전두환과 다르게 학창 시절에도 그렇고, 육사 시절, 박정희 시절에도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육사에서 영어교사까지 한 적이 있으니... 특히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1년 형이면서 친구이자 전우이기까지 한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다시피 쫓아내고, 대표적인 정적 중 하나였던 김영삼, 김대중을 포섭하려 했으며, 김영삼과 연합해서 3당 합당을 한 것과, 대통령 시절에도 김영삼을 포함한 여러 인재들을 불러서 주요 현안에 대해서 자주 토론한 행보도 그렇고, 그가 남긴 업적도 은근히 많은 데다, 아들인 노재헌도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등, 앞에서 서술한 상당히 흥미로운 행적으로 인해 재평가하자는 의견이 매우 많이 보이는 대통령이다. 현재는 박정희와 비교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노태우 자체도 상당히 좋은 대통령이었다고 재평가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났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죽을 때까지 매우 싫어하던 김영삼도 이런 행적 때문인지 노태우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받은 시기인 1996년 방영된 SBS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펀치펀치'에는 '배워서 남주나' 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전두환 역으로 출연하던 박용식과 함께 역시 노태우 역으로 출연했던 김기섭이 캐스팅되었다. 여기서 김기섭의 친구야~ 라는 유행어는 당시에 대 히트였다. 덕분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 흔히 '친구야'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둘 다 MBC드라마 출신이라는 게 아이러니. 더 아이러니하게 SBS의 코리아게이트에서 전두환을 맡았던 정종준도 여기 출연했다.

물태우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있다.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보면 서인석이 연기하는 노태우의 물 같음이 잘 묘사된다. 극중 '물태우 물태우 하니까 진짜로 물인 줄 아나?'라고 투덜거리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한테 물태우라는 별명이 있고 공공연히 사용되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사회가 이전의 군부 독재 시절보다는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국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26]. 노태우 이전까지는 워낙 대통령의 권위주의가 극심했기 때문에 대통령 희화화하는 것은 범죄이기도 했지만, 노태우는 ‘나를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의미 있는 치적에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항상 전두환 다음이라는 이력서 때문에 일각에서는 콩태우라 부르기도 한다.

영어를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잘했고 체력도 동기 중에서 전두환과 1, 2위를 다툴 만큼 뛰어났다. 별명도 '태릉 타잔'이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았던 데다가, 그의 영어 실력 덕분에 한때 영어 교관을 했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 그러나 스포츠 자체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테니스 정도만 하는 수준이었다. 축구나 야구에 복싱에까지도 관심이 많았던 전두환과 대조되는 부분. 그래서 역시 정치인이자 체육계 인사였던 민관식이 생전 회고록에서 둘을 비교하면서 은근슬쩍 노태우를 폄하했다.

딸 노소영 씨의 딸인 외손녀 최민정 씨가 해군 장교로 임관했다. 2017년 11월 중위로 전역.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60302.99002004158i1.jpg

2015년에는 암 투병 중이고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2015년 11월 22일 KBS 뉴스가 밝혔다. 같은 날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직접 가지 못하고 아들 노재헌을 대신 보냈다. 빈소를 찾아간 노재헌은 고인의 아들인 김현철을 만났는데... 파일:/image/001/2015/11/25/PYH2015112505060001300_P2_99_20151125132705.jpg 둘 다 각자의 아버지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

노태우가 장교였던 시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와 차지철에게 권유해서 박정희와 그 가족들, 차지철과 노태우가 휴가를 같이 갔었는데 차지철이 물에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자, 박정희가 '물이 무섭냐'고 묻자, 차지철이 '저희 어머님이 물에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물에 들어가지 않았었다고 회고했다(출처: 노태우 회고록).

부모님 중 한 분이 대통령 취임 당시에 생존해 있던 대통령이기도 하다.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10~1999) 여사는 생전에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지켜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김영삼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옹과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 여사. 이후 김태향 여사는 아들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6년 뒤인 1999년 4월 5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취임 직후인 1988년 어린이날 청와대 행사에서 어떤 어린이가 '대통령 아저씨'라는 호칭을 쓰면서 질문을 했는데, 답변을 하려고 했다가 갑자기 좋아하면서 "내가 대통령 아저씨로 보여요? 기분이 좋구만. 할아버지보다 아저씨가 나은데?"라는 말을 했다. 사실 저 때 나이가 만 55세였기 때문에 아저씨로 호칭할 수도 있긴 했지만[27] 아무래도 겉모습이라든지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할아버지로도 부를 수 있었으므로 본인이 흡족해한 듯 하다. 당시 보도 영상. (2분 45초)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미남인 인물로도 손꼽혔으며,[28] 실제 당시를 살던 어르신들 사이에서 부처님 상이라면서 노태우를 뽑은 사례도 존재한다는 얘기가 돌곤 한다.[29] 위의 전 대통령들과 차이라면 특이하게 젊었을 때보다도 중년에서 초로기의 인물이 더 좋다는 거다.[30]. 때문에 자녀 노소영과 노재헌 또한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물려받았다.

삼김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은 모두 전두환은 싫어하였지만, 노태우에게는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다. 자신들을 거칠게 탄압한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그들의 정치 규제들을 풀어주었고 왠만해선 건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삼김 중 김대중 이외의 나머지 2명과 힘을 합쳤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과 힘을 합치고 화해를 하려고 노력을 한 반면 전두환에 대해서는 백담사에 짱박아 놓는 선에서 끝났다. 사실 박정희 정권 삼대장(전두환, 노태우, 차지철)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성격을 가진 노태우였으며 문민 정권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어느정도 노력은 했으나 문제는 노태우 본인이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일, 그것도 전두환에 이어 2인자라는 점, 사적으로도 전두환의 친구라는 점 때문에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자신도 공범이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을 완전히 척결하면 본인도 척결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군부독재정권을 본격적으로 척결하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에서의 일이다.

2017년 현재, 구글에서 노태우를 검색해 보면 자동 완성으로 뜬금없게도 노태우 수영복이 뜬다. 이는 그의 이름을 딴 별명으로 불리는 NTW-20 때문이다. 실제 사진이 있긴 하다 정직한 제목

9. 각종 타이틀[편집]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민선 대통령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임기말 집권당 탈당 대통령

제6공화국 최초의 대통령

군정 그리고 군부 출신의 마지막 주자인 대통령

여전히 비민주주의 체제로 치부해야 될지 아닐지 아직 그 기준을 확고히 정하지 못한 대통령[31]

헌정 이후 직선제에서 가장 적은 득표율로 당선된 대통령 [32]

최초의 광역시 출신 대통령 [33]

10. 저서[편집]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 을유문화사, 1987년 11월 1일 #

<노태우 회고록 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조선뉴스프레스, 2011년 8월 8일 #

<노태우 회고록 하: 전환기의 대전략>, 조선뉴스프레스, 2011년 8월 8일 #

11. 둘러보기[편집] 노태우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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