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jpg 대한민국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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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jpg
이명박
李明博
직책 제32대 서울특별시장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전임후임→

출생일 1941년 12월 19일
출생지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라노구 가미후쿠이도정
학력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학사)
부모 이충우, 채태원
배우자 김윤옥
자녀 장녀 이주연, 차녀 이승연

3녀 이수연, 장남 이시형

종교 개신교
재임 중 국무총리 한승수(2008.2.29~2009.9.28)

정운찬(2009.9.29~2010.8.10)

김황식(2010.10.1~2013.2.26)


생애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을 포항에서 보냈으며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 그 후에 현대건설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학 재학 시절

1964년 고려대학교 4학년 재학 중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해 징역살이를 했다. 나중에 출간된 자서전에서 이명박 스스로가 밝힌 시위 주동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양국간 민족사적인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는데 단순한 경제 논리로 덮어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

이때 이명박은 중앙대 1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재오와도 깊은 인연을 맺는다. 둘은 광화문 앞에서 열린 시위를 함께 주동[3]했다.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 이후 같이 시위를 주동했던 이재오를 특임장관에 임명하기도 하고, 청와대 내에서 6.3시위 참석자들과 함께 6.3 동지회 기념 행사를 열기[4]도 하는 등 정치입문 이후 우파진영에 속하였지만 6.3시위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현대건설 입사

대학을 졸업한 후 1965년 5월 현대건설에 입사를 지원했다. 필기시험에 무난히 합격한 후 인사부장 면접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인사부장은 이명박에게 이명박의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뽑아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취직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화가났는지 이명박은 집으로 돌아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 덕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명박은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이었던 이낙선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민정비서관 이낙선은 국가체제에 도전한 사람들은 당연히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명박은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5]

라는 말로 응수했는데, 며칠 뒤에 청와대 비서실은 이명박이 현대건설에 입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후 6월에 현대건설 최종임원면접이 있었는데 당시 현대건설의 회장인 정주영이 면접관으로 참여했고 피면접자인 이명박과 조우하게 되었다.

다음은 이명박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힌 면접 내용이다.

정주영: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

이명박: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정주영: 왜 그런가
이명박: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정주영: 말은 참 잘하는구만

(옆에 임원을 보면서)요즘은 말만 번지르르한 건달들이 많아.[6]

정주영은 이명박의 면접은 마음에 들었지만 학생운동전력이 영 탐탁치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이명박은 그해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다.

현대건설 입사 후

현대건설 입사 이후 이명박은 승진가도를 달린다. 스물 여덟에 이사, 4년 후 서른 둘에 상무가 됐고, 서른 넷에 전무, 서른 다섯에 부사장, 서른 일곱이었던 1977년, 현대건설 사장이 되었다. 이런 승진은 국내 주요 기업들 중에 전무후무하며 셀러리맨의 신화라는 말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명박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파격 승진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당시 현대건설태국에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였다. 이명박이 보기에 고속도로 공사가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입수할 수 있는 자료를 총동원해서 적자규모를 추산했는데 그것을 이명박의 상사인 부장이 본사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내에는 태국에서 진행되고 있던 공사가 적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사람이 없었는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직후 회사는 발칵 뒤집혔고 이후 정주영 회장이 태국 현장에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정주영은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에 이명박을 현장 관리부장으로 파격승진시켰다[7]고 한다.

결혼

고등학교 시절 영어선생님의 소개로 이화여대를 졸업한 김윤옥을 만났고[8], 1970년 12월 19일 결혼[9]했다.

정계입문 및 국회의원

1992년 3월 24일에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現 비례대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총재가 이명박을 영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선거로 현대건설에서 한 솥밥을 먹던 정주영과는 사이가 틀어졌다. 왜냐하면 정주영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이명박에게도 입당 및 출마를 권유했는데, 이명박은 다른 당인 민주자유당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1996년에 열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소속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하였는데 당시 상대 후보들은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통합민주당 노무현, 자유민주연합 김을동등등이었고 쉬운 선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여 국회의원 직무를 수행하던 중 검찰 수사에 의해 이명박의 선거캠프에서 자행된 선거법 위반이 밝혀졌고, 이어 이명박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따라서 서울 종로에서 1998년에 재보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때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한편, 이명박은 1999년 4월 대법원에서 벌금 700만원 형을 선고받고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는데, 다행히 1년 후에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사면복권되었다.

서울시장

2002년 실시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한나라당의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로 출마하여, 180만 표가량을 얻어 150만 표 가량 득표한 새천년민주당 김민석 후보를 꺾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직무를 수행하며 대선 주자로 떠올랐는데 서울시장으로서 이명박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청계천 복원 사업

삼일고가도로 모습, 삼일고가도로는 1969년 3월 22일 개통되었다.
삼일고가도로 해체 작업, 1969년 3월 7일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은 후보시절 청계천 복원 공약을 하였는데, 2000년대 이후 청계고가로의 노후화로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특별시장으로 당선되자 청계천 복원과 관련된 반대 여론이 심각했다. 심지어는 같은 지지자들 내에서도 교통대란이 일어나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란 우려를 낳았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할 때 정치권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던 상황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명박은 과거의 토건 사업을 바탕으로 청계천 복원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건설기준으로는 청계천 복원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0년 동안 콘크리트로 덮여 도로로 사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로 위에 삼일고가도로라는 고가도로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삼일고가도로의 해체는 30년만의 일이다.[10]

청계천을 복원하려면 그 도로들을 다 들어내고 50년 동안 고여서 썩은 공간을 정화해야 했다. 이명박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이용해서 속전속결로 청계천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서울특별시장 당선된 후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 철거를 시작으로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철교까지 약 5.84km의 구간을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하였다. 총사업비 3,800억이 들어갔다.

청계천 22개 복원다리
복원된 청계천, 그동안 청계천에는 2005년 10월 1일 복원 후 1억 9천만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했으며 내년 초 2억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11]

이후 청계천은 삭막했던 서울 도심의 명물이 되었으며 당시 서울 시민들도 청계천 복원을 이명박 시장의 최대 치적이 되었다.

서울의숲 계발

서울경마장이 과천으로 이전한 후 방치되어 있던 성동구 공터를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영감을 얻은 서구식 공원인 서울숲으로 바꾸어 놓았다. 성동구에 있었던 공장의 인천, 안산 등지로의 이전 이후 낙후되어있던 성동구는 서울숲 개장 이후 활기를 되찾아, 2020년 이후에 성동구가 매우 번화한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뉴타운 정책

왕십리 뉴타운을 비롯한 각종 뉴타운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인허가 절차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는데, 이명박과 후임 오세훈 재임 기에 낙후된 지역들을 재개발하여 건설된 수많은 뉴타운은 그동안 경기도의 분당, 평촌, 일산, 중동1기 신도시들에 뒤쳐지던 서울의 주거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버스전용차선 도입

환승시스템이라는 제도를 최초로 도입했다. 이명박이 환승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에는 당연히 돈을 내고 버스를 타면 끝이었고 환승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서 다른 버스를 타면 다시 돈을 내야 했고, 지하철로 퇴근한 후에 역에서 집까지 버스를 타고 가도 돈을 다시 내야했다. 이명박은 인천광역시, 경기도와도 협상을 벌여 수도권 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돈을 한번만 내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갈아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정착시켰다.

제가 서울시에서 교통개혁을 할 때, 제가 왜 버스개혁을 했냐면 저 변두리에, 없는 사람들은 다 변두리에 살아요.

변두리에서 새벽같이 나와서 서울 도심에 들어와서 장사하든지, 뭐 하는 사람들은 새벽 버스, 첫 버스 타고 세 번 정도 갈아타야 여기(서울) 들어옵니다.
그 사람이 10만원을 벌겠습니까? 몇 만원을 벌겠습니까? 버스비를 그렇게 내고 해도, 그래도 살기 위해서 아침에 첫 버스를 타면, 서울 변두리에서 타면 전부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이렇게 타고 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이 아주머니, 버스비 한 번 내고 올 수 없을까?'
그냥 버스를 갈아타더라도 버스비를 한 번만 내면 두 번, 세 번 갈아타도 30분 안에만 교대하면 몇 번 타도 공짜로, 한 번만 내도록 그렇게 시작했는데 정치권에서 이명박 시장 사퇴하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서울시 공무원들이 "수십년간 버스 그렇게 타고 다니고 했는데 다음에 출마할 것 같으면 이렇게 욕 먹고 뭘 이렇게(까지) 합니까?"
"당신은 버스를 타고 안 다녀봐서 공직자들이 모른다.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택시 타고 다녀 본 사람은 모른다. 그 서러움을. 이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저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들어온다. 그래서 버스비 한 번만 내면 되는 제도를 만들려고 한다."
재래시장이나 이런데 계시는 분들이, 장사하시는 분들이 다 변두리에서 오시잖아요. 제가 지금도 재래시장가면 되게 환영 받는 이유가,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버스 타고 다니고 한 번만 돈 내고 들어와서 그게 얼마나 절약되는지 모른다 이거죠.[12]

-이명박, 2010년


유력 대선주자

서울시장으로서의 성과와 추진력, 경제인 출신이라는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이력 등이 국민들에게 인상깊게 느껴졌으며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중 유력 대선 주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 시기에 정주영이병철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웅시대'라는 경제성장기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얻었는데 이 드라마에 이명박에서 모티브를 얻은 인물 또한 출연하였다. 그런데 드라마가 갑자기 조기 종영했다. 이에 대해 후일 작가의 인터뷰에 의하면 "방송이 시작되기 전 여권 고위 관계자에게서 '정치권 차세대 주자(이명박)를 다룰 때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이니 주의하라'는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13]고 한다. 이미 이때부터 당시 여권에서도 주목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대통령

대통령선거

당시 민심은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모두들 차기 대통령은 한나라당에서 배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통령후보자를 결정하는 한나라당 당 내 경선이 정말 치열했다. 경선 후보자는 이명박과 박근혜였는데 결국 이명박이 박근혜를 꺾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7년 12월 19일에 열린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은 1,149만 표를 얻어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 후보를 531만 표차로 따돌렸는데 이는 6공화국 이후 최다 득표차다. 그만큼 민심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부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의 공약 및 홍보도 경쟁 후보에 비해 인상적이었다. 상대 후보인 정동영은 특별한 공약 없이 네거티브에만 올인했으며 그가 속했던 대통합민주신당 또한 그동안 둘로 나뉘어 있던 열린우리당민주당이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이었다. 이에 비해 이명박은 747공약을 네세웠는데 연 7%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뜻했다. 마치 거대한 보잉747기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이 한국경제가 급속히 도약할 것 같은 이미지를 주는 신선한 공약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어 순탄할 줄 알았지만 이명박의 재임기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우선 취임 첫해에 2008 광우병 대란으로 홍역을 치렀으며, 9월에는 세계 4대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며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2009년을 불경기 속에서 보내고 집권 3년차인 2010년에는 북한이 두 번이나 도발을 감행했다.

한미 FTA와 광우병 대란

이전 정부부터 진행되던 한미 FTA협상을 마무리하고 타결했다. 이는 분업과 교환으로 국가가 부유해진다는 경제이론의 측면에서 볼때 타당한 결정이며 당시 제기되었던 반대파의 논리는 그 이론적 기반이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현재의 해석일 뿐이고 2008년 당시에는 방송 등 각종 언론 매체에서 미국산 소는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농후해 한미FTA가 시행된다면 국민 안전이 위협받을 것이라 집중 보도했고 이는 결국 2008 광우병 대란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도발

북한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연평도

대한민국 역사상 항상 북한의 도발이 끊인 적이 없었지만 이명박의 재임 시기에는 북한이 이전 10년 동안 민주당 정부의 햇볕정책에 익숙해졌다가 갑자기 지원을 축소해서인지 천안함 피격사건이라든가 연평도 포격사건같은 대규모 도발을 감행했다.

공공부문 개혁

공공기관 및 공기업에 대해 개혁의 칼날을 세웠다. 정부조직의 축소와 공기업의 개혁을 당선인 시절에도 공공연히 언급했다. 통일부여성가족부 등 필요성이 적은 부처를 없애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해 왔으며 전임 노무현 정부 시절 크게 늘어난 각종 위원회를 폐지했다. 또한 공기업 개혁도 천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용두사미로 끝났다는 평이 많다. 결국 통일부여성가족부는 존치되었으며, 공기업 개혁에 대해서도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막대한 적자를 내며 수많은 민간건설사의 존재 때문에 존립이유가 의심스럽던 대한주택공사와 대한토지공사를 통합해 토지주택공사를 출범시켰으나 이후 이 조직의 규모 축소와 효율성 개선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명박의 재임 기간 중 토지주택공사의 부채는 108조에서 31조원 가량 139조로 증가[14]했다. 민간 건설사의 시공능력과 자본력이 충분한 시기에 대한주택공사에 대해 합병이 아닌 민영화등의 절차를 밟았으면 국민경제의 부담이 더 경감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완의 개혁은 이명박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보수진영마저도 정부 부문의 축소 등 공공부문 개혁을 그다지 달가워 하지는 않는 경향이 있으며, 많은 국민들이 국가가 만사(萬事)를 해결해주기 바라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민 대다수가 민영화와 공공서비스 외부위탁 등의 정책을 지지했다면 이명박의 방침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 테지만, 국민 대부분이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일부 보수 정치인들마저도 이러한 방안에 대해 반대하게 되고 결국 좌초된 것이다.

부동산정책

전임 노무현 정부가 집값을 잡기 위해 규제 일변도의 정책을 썼던 것과 달리 주택공급 확대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전임 정부까지 천정부지로 뛰던 집값이 진정되었다. 이는 좌파 진영에서도 인정하는 업적이다.

(부동산 가격 하락은)이명박의 보금자리주택 효과다. 강남의 평균 집값이 평당 3500만원인데 내곡·세곡동 보금자리 분양가가 1000만∼1200만원이다. 강남에도 이 정도면 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걸 이명박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수 꼴통도 하는데 노무현은 왜 못했나. 노무현은 자기 지지자들은 가정불화에 시달리게 했고,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부자로 만들어줬다.[15]
-김헌동 경제정의실천연합 국책사업감시단장

세종시 계속 추진 공약 백지화 시도

노무현 정부 시절 계획되었던 세종시를 이명박도 대선공약에서는 그대로 진행한다고 했다가, 취임 후 백지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야당 및 여당인 한나라당 내 친박근혜 계열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에 관하여 설명을 하자면 박근혜는 노무현 정권 시기 한나라당 대표 때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을 이끌어내고, 반대투쟁에 앞장섰지만 이명박은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며 세종시 문제에 관해 별다른 역할을 한 것이 없었다. 이명박이 세종시를 그대로 강행한다고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자 박근혜는 충청도 지역 대선 지원유세에서 그대로 진행한다고 지역민들에게 약속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명박 집권기에 공약을 번복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명박과 친이계가 박근혜에게 세종시 백지화에 동의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정치적 자살을 하라는 요구와 같은 것이었다.

이명박이 세종시를 철회하려면 대선공약으로 내세웠어야 했다. 대선 기간 내내 정동영 후보와 지지율 격차가 엄청나게 컸으므로 그런 공약을 내세운다고 해도 당선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대선공약에서는 그대로 진행한다고 했기 때문에 박근혜도 지원유세에서 세종시 공약을 이행한다고 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명박 집권 후의 공약 철회도 지지했더라면 충청도 민심 이반으로 문재인과 표차가 크지 않았던 2012년 대선에서 낙선했을 것이다.

이명박과 친이계는 집권 후 2008년 총선 공천에서 친박세력을 대거 탈락시키는 등 집권기간 내내 박근혜 세력 무력화를 시도했으므로, 자신의 대선 공약을 번복한 세종시 백지화 추진도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친이계의 박근혜 집권 저지 시도의 일환으로 의심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세종시 이전 철회는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노무현 집권기 박근혜의 행정수도 이전 반대투쟁에 서울시장으로서 아무 힘도 보태지 않았던 이명박이 세종시 이전을 자신의 대선공약으로까지 내세웠다가 집권후 이를 번복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며 책임을 박근혜에게 떠넘긴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종합편성채널 허가

정부의 입김을 덜 받는 친보수적 언론을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종합편성채널을 허가하였으나 결국 이명박 정부의 의도와는 반대로 TV조선을 제외한 나머지 종합편성채널은 상당히 진보적인 채널이 되었다. 특히 JTBC는 후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큰 역할을 하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매체가 되었다.

대일관계

재임 중 후반기까지도 일본과 특별한 마찰은 없었으나 2012년 8월 14일 이명박의 일본천황 사과요구 발언이후 급속히 악화되었다.

한국에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를 하면 좋겠다 이거예요. '통석의 염' 같은 애매한 말을 할 거면 우리나라에 올 필요도 없다.[16]

일본 국민이 상징적 존재로 인식하는 일본 천황에 대한 높은 수준의 사과 요구를 한 이 발언에 일본인들은 즉각 반발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외교 당국자가 "믿을 수 없는 발언이다. 악영향이 수년에 걸쳐 미칠 것이다."[17]라고 이야기 했다고 하며, 야당이었던 자유민주당아베 신조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상괘(常軌)[18]를 벗어났다. 너무도 예의를 잃었다."[19]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천황사죄 발언은 외교적 참사였다. 천황은 일본인에 역린이나 마찬가지로.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건드리면 안돼는 것으로 임기말에 지지율이 살짝 올랐을지 모르나 일본에서는 대혐한시대가 열렸다. 게다가 쇼와천황이면 모를까 아키히토 현 상황에게 사과하라는 건 연좌제나 마찬가지다.

퇴임 이후

같은 정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와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 4년차인 2016년 7월에는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나도 못했지만 나보다 더 못하는 것 같다."[20]라고까지 이야기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경제성장

여러 대외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747공약에서 언급했던 7퍼센트 성장은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대외경제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는 전임 정부와 비교해 보았을 때 확실히 드러난다. 이전의 노무현 정부 5년간의 경제성장률이 4.3%로 세계 경제성장률을 밑돌았던 것과 달리 '경제대통령'을 모토로 집권한 이명박 정부의 초기 4년간의 경제성장률은 3.1%로 세계 경제성장률 2.8%보다 높았다. [21] 이는 세계적인 불황과 해외부문의 경기변동에 민감한 경제구조하에서 이루어낸 성과로 경제성장의 관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훌륭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한미 외교

정상회담중인 이명박과 조지 W.부시

재임 초에 한미 FTA를 타결하고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반미 좀 하면 어떠냐", 자주국방 등을 외쳤던 전임 노무현 대통령 시기와 비교해 대미관계는 개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이명박 대통령과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From now on, I will give you information.

이는 한미관계가 이전에 비해 더욱 강화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22]

4대강 사업

4대강 사업을 실시하여 홍수 때마다 반복되던 재해를 방지하게 되었으며, 여름 장마철에만 강수량이 많고 그 외에는 부족했던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부정적 평가

박근혜 탄핵의 주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것은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란표 (62표 가량) 때문이며, 여기에는 친이계 거의 모두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움직이는데는 공개적으로 탄핵에 찬성 의사를 밝힌 이명박 본인의 뜻이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탄핵이 이루어지자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감옥행이었다. 차기 정권을 반드시 자기 손으로 창출하겠다는 헛된 망상이 만들어낸 비극이며, 이런 망상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차기 정권을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 - 중앙일보 2016. 8. 28.
“이명박, 차기정권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월간 조선> - 국민일보 2016. 8. 29.


문재인 "與의원 상대로 탄핵서명 받아야"
안철수 "탄핵 정치적으로 좌고우면 안돼"
與시국회의, 朴대통령 징계요구안 제출
친이계모임서 "국민뜻 무조건 따르라", 보수대위기 수습 리더십 보여야


이명박이 허가한 종편의 거짓 선동이 사기 탄핵의 발단

이명박 정권 때 허가된 종편(종합편성채널)은 [23] 대개 친이반박(親李反朴)적 보도 경향을 보였다. 박근혜에 대한 근거없는 부정적 보도가 잦았고, 그 중에서 특히 최서원(최순실) 관련 허위 또는 왜곡 보도가 사기 탄핵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 TV 조선
이진동
엄성섭
손석희와 다이빙벨 이종인
최서원의 태블릿PC
  • 채널 A
  • MBN

박근혜 탄핵을 응원

  • 이명박 국민 과같은심정 박근혜 대통령 국민의 뜻 잘 받아들였스면.[24]

[깨진 링크][25]


  • 이명박 "탄핵안 가결, 국민의 뜻 따른 것"

그리고 그 결과

  • MB자택 앞서 촛불집회…'이명박 구속하라' 외쳐[26][27]


  • ‘최순실 게이트’에 입 연 MB “참담하고 부끄럽다. [28]

이명박 전 대통령이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1주기 추모식을 하루 앞둔 오늘(21일)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남긴 말입니다. ‘최순실 게이트’로 꽉 막힌 현 시국을 어떻게 풀면 좋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겁니다.

이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생각도 밝혔는데요.

  • 주진우 기자는 “각하, 편히 쉬십시오. 가시는 길은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라면서 “이명박 각하, 감옥에 가서는 제발 예수 믿으세요. 돈만 믿지 마시고”라고 덧붙였다.[29]


가계도

증조부
이규수
李圭秀



조부
이종한
李鍾漢



부 이충우
1907 ~ 1981
李忠雨
모 채태원
? ~ 1965



장녀 이귀선 장남 이상은
1933 ~
주식회사 다스 회장
차남 이상득
1935 ~
전 국회의원
차녀 이귀애 3남 이명박
1941~
3녀 이귀분 4남 이상필


최신자
1941~
김윤옥
1947 ~



장남 이지형 장녀 이성은 차녀 이지은 장녀 이주연
971 ~
차녀 이승연
1973 ~
3녀 이수연
1975 ~
장남 이시형
1978 ~


구본천 오정석 이상주 최의근 조현범




역대 대통령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대수 성명 재임
제1공화국
1 이승만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2 이승만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3 이승만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제2공화국
4 윤보선 1960년 8월 12일 ~ 1961년 5월 16일
제3공화국
4 윤보선 1961년 5월 16일 ~ 1962년 3월 23일
5 박정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6 박정희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7 박정희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제4공화국
8 박정희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9 박정희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10 최규하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11 전두환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제5공화국
12 전두환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제6공화국
13 노태우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14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15 김대중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16 노무현 2003년 2월 25일 ~ 2004년 3월 12일
2004년 5월 14일 ~ 2008년 2월 24일
17 이명박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18 박근혜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
19 문재인 2017년 5월 10일 ~ 2022년 5월 9일
20 윤석열 2022년 5월 10일 ~ 2027년 5월 9일 [30]


각주

  1.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우파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참조 김영삼#김영삼 정권에 대한 평가
  2. 이명박, <신화는 없다> (1판), 1995, p71
  3. 한겨레 2007년 8월 24일
  4. 한국경제 2011년 6월 3일
  5. 이명박, <신화는 없다> (1판), 1995, p90
  6. 이명박, <신화는 없다> (1판), 1995, p91
  7. 이명박, <신화는 없다> (1판), 1995, p108
  8. 이명박, <신화는 없다> (1판), 1995, p264
  9. 영남일보 2019년 1월 25일
  10. 삼일고가도 8일 역사 속으로 | 한국경제
  11. <청계천 10년> ①'흉물' 고가 철거 후 도심 명소로 변신
  12. https://www.mois.go.kr/video/bbs/type019/common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STiQHiKJFfDN1u2rz4uengbk.node10?bbsId=BBSMSTR_000000000255&nttId=54377
  13. 주간경향 2005년 1월 25일
  14. 주간경향 1017호
  15. https://www.google.com/am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Amp.html%3fidxno=7080
  16.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328115
  17. https://www.yna.co.kr/view/AKR20120814191100073
  18. 떳떳하고 바른 길
  19. http://world.kbs.co.kr/service/contents_view.htm?lang=k&menu_cate=&id=&board_seq=259918
  20. 세계일보 2016년 7월 10일
  21.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20221/44200315/1
  22.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601100018
  23. 대한민국의 종합편성채널 위키백과
  24. https://www.yna.co.kr/view/AKR20161218051351001 MB "朴대통령 뭐라고 하든 국민 뜻 따르면 돼"
  25.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31/2017123100513.html MB자택 앞서 촛불집회…'이명박 구속하라' 외쳐
  26. 2017123100511_0.jpg MB구속, 국정원 적폐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등 회원들이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이 전 대통령 자택 인근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를 하고 있다
  27.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381218 "참담하고 부끄럽다"
  28.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23500035 주진우, 이명박 구속 지켜보며 던진 한 마디
  29.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