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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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鄭周永
국적 대한민국
출생일 1915년 11월 25일
출생지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사망일 2001년 3월 21일
사망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부모 정봉식, 한성실
배우자 변중석
자녀 정몽필, 정몽구, 정몽근, 정경희,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정정인, 정정임

학력 송전소학교
경력 현대그룹 1대 회장

개요

현대그룹의 창업자이다.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김영삼, 김대중에 이은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생애

어린시절

정주영은 1915년, 현재 북한의 점유지인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났다.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물론 그 시절에 안 그런 집이 어디있겠냐만은 집안이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흉년이면 집집마다 양식이 떨어져서 눈이 온 강산을 뒤덮는 긴 겨울동안을 아침에만 조밥을 해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은 콩죽으로 넘겨야 했다. 겨울을 그렇게 보내고 봄이 되면 그나마 양식도 다 떨어져서 그때부터는 풀뿌리에 나무껍질에,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1]

정주영은 집안 형편의 여의치 않아 소학교[2] 졸업 후에는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농사를 지으면서 정주영은 농사일은 고되고 돈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된 농사일 틈틈이 나는 생각했다.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죽도록 일해도 배불리 밥 한번 못 먹는 농부로, 그냥 그렇게 내 아버지처럼 고생만 하다가 내 일생이 끝나야 한다는 건가.' (중략) 어쨌든 나는 도시로 나가고 싶었다. [3]

그래서 그 이후로 도시로 가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번번히 정주영의 아버지가 잡으러 와서 가출은 실패한다. 정주영의 아버지가 이토록 아들이 농사일 대신 도시에서 다른 일거리를 찾는 것을 반대했던 이유는 아마도 정주영이 고등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별다른 기술 없이 도시로 나가봐야 농사일 하는 것보다 잘 될리 없다고 생각해서였던 듯하다.

마지막 가출

번번히 가출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가출에 실패했던 정주영은 19살이 되던 해 봄에 인생에서 네 번째 가출을 한다. 마지막 가출이었다. 오인보라는 이름의 고향친구와 함께였다. 오인보와 함께 서울에 갔다가 오인보는 서울에 남고 정주영은 부모님이 찾기 힘들 것으로 생각되는 인천으로 갔다. 인천에서 부두 하역일을 했는데 높은 노동강도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 임금으로 인해 실망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에 돌아가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교사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엿공장에서 일하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쌀가게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일을 잘 했서 주인의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쌀가게 2년 만에 나는 주인아저씨로부터 복흥상회를 인수할 의향이 없느냐는 전혀 생각 못했던 제의를 받았다.[4]

그리하여 스물 셋의 나이에 쌀가게 주인이 되었으나 당시 일본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동시에 벌이는 등 국력에 비해 지나치게 무리한 전쟁으로 인해 본국과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도 전시 배급체제를 시행하였고, 그에 따라 정주영은 쌀가게를 인수한지 2년도 안된 1939년, 가게를 접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인 1940년 다시 서울로 와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게 되었다.

자동차 정비소는 당시로서는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라 쌀가게를 처분하며 얻은 정주영 자신의 돈과 오윤근이라는 이름의 사채업자에게서 빌린 돈 등으로 정비소를 개업했는데, 정비소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정비소에 불이 나 정비소는 물론이고 당시로서는 매우 고가였던 자동차도 타버려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정주영이 젊은 시절 내내 고생해서 마련한 정비소가 타버리고 거기다 차주들에게는 손해배상 책임까지 지게 된 것이다. 보통 사람같으면 망연자실해져서 다 포기해버릴 법도 한데 정주영은 다시 사채업자 오윤근을 찾아갔다.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몽땅 다 날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이대로 꺾이고 나면 먼저 밀려간 영감님 돈 3천 원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셔서 영감님 빚을 갚게 해주십시오'[5]

이리하여 다시 사채를 빌려 신설동에다 정비소를 개업했는데 영업이 제법 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일본의 통제경제 체제가 심화되어감에 따라 결국 이 정비소 또한 다른 정비소와 강제 합병당했다.

해방 그리고 건설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독립한 이후 정주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정비소를 재개업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군정 하에서 건설업자들이 자동차 정비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것을 보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사실 경험도 기술도 없었지만 건국이 되고 6.25를 겪고 국가재건을 하면서 건설업은 대호황을 누렸으며 건설업에 뛰어든 정주영의 선택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유엔묘지

1952년 유엔군 사절단이 부산에 위치한 UN군 묘지를 참배하기로 했는데, 당시는 겨울이라 묘지가 황량했다. 그래서 미군은 유엔군 묘지를 푸른 잔디로 덮을 것을 현대건설에 주문했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 푸른 잔디라는 것이 존재할리가 없었다. 그러다 정주영이 묘안을 떠올렸느데 바로 겨울에도 푸른 보리로 묘지를 덮는 것[6]이었다. 공사를 발주한 미군은 대만족을 표했고, 그 이후로는 현대건설이 미군의 발주공사를 도맡아 했다는 후문이 있다. 또한 신규 건설업체였던 현대건설의 주춧돌이 다져졌음은 물론이다.

고령교 공사로 위기를 맞다

휴전협정 조인 직전인 1953년 4월에 고령교 복구공사를 시작[7]했다. 고령교는 현재의 대구광역시경상북도 고령군을 잇는 낙동강에 건설된 다리였는데, 6.25 전쟁 때에 파괴되어 복구를 필요로 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에 숨어들어간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서라도 복구되어야 하는 다리였다. 그런데 전후 발생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공사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주영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는 생각으로 동생들의 집을 팔고 자동차 정비소를 판 돈으로 고령교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이 공사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보긴 했지만 현대건설은 자금이 부족해도 발주한 공사는 끝까지 책임지는 회사라는 인식이 생겨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정주영의 판단실패와 현대건설의 막대한 손해는 고령교 공사 뿐이 아니었다. 1965년 9월에 태국 정부에서 발주한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입찰에 성공하여 대한민국 건설사 최초로 해외진출을 했는데, 거기서도 손해를 엄청나게 보고 말았다. 이 공사와 관련하여 현대건설의 사장이었으며 17대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공사가 자신의 파격 승진의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명박이 보기에 이 고속도로 공사가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입수할 수 있는 자료를 총동원해서 적자규모를 추산했는데 그것을 이명박의 상사인 부장이 본사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내에는 태국에서 진행되고 있던 공사가 적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사람이 없었는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직후 회사는 발칵 뒤집혔고 이후 정주영 회장이 태국 현장에 찾아갔고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에 이명박을 현장 관리부장으로 파격승진시켰다[8]고 한다.

어찌되었건 이 공사도 막대한 손해를 보았으나 이 공사로 한국 건설사 중 유일하게 고속도로 공사를 경험해본 것은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서독을 방문하여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시찰하고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절감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토를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구상하였고 이후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를 발표하고 당선되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하였다. 현대건설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부고속도로 구간의 총 40퍼센트 가량을 수주하고 건설[9]하였다.

소양강댐

소양강댐은 현재까지도 국내 최대의 댐으로 국내 최대 권역이며 경제의 중심지인 수도권을 관통하는 한강 수계의 홍수방지 및 수자원 활용과 전력발전 등의 기능을 하는 댐이다. 이 소양강 댐을 건설할 당시 정부에서는 설계사인 일본공영의 설계에 따라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건설하려 했으나 당시 소양강댐 건설 현장은 콘크리트 생산지에서 거리가 멀고 콘크리트로 건설하면 자재비가 많이 들었기에 정주영은 정부에 모래와 자갈을 이용한 사력댐으로 설계를 변경하자고 건의하였다. 당연히 설계사인 일본공영과 건설부(현재의 국토교통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당시 건설부 관료 중 한명은 정주영과 현대건설 직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새끼들이 눈에 뵈는 게 없나? 니들이 뭘 안다고 건방지게 변경이야 변경이![10]

그러다 콘크리트로 건설할 것인지 사력댐으로 건설할 건인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의 말대로 비용도 저렴하며 북한으로부터의 폭격에서도 안전한 사력댐으로 건설할 것을 지시하면서 일단락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건설 중에 홍수에만 잘 대처하면 사력댐이 더 유리하오. 흙, 모래, 돌로 댐을 쌓아놓으면 포에 맞아도 펄썩했다가 도로 주저앉으면서 흙만 조금 튀어오르지 산을 폭격하는 거나 같거든. (중략) 오히려 사력댐이 더 발 뻗고 잘 수가 있단 말이오. 검토해보시오. 현대 주장이 불가능한 것인지. [11]

정주영과 박정희 대통령의 관계 및 상황판단력을 드러내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국내 최대 기업집단

정주영이 세운 현대건설을 모체로 하여,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전자 등 국내 거의 모든 제조업분야에 진출했던 현대그룹은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자산기준으로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이었다. 현대그룹의 뒤를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이 뒤따르는 형국이었는데, 삼성, 대우와 비교해서도 현대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

현대그룹 뿐만아니라 정주영도 주목을 받았다. 가난하고 소학교 졸업을 끝으로 중학교도 못나온 사람이 국내 최대 기업을 일구었다는 것 자체가 코리안 드림의 상징이었다.

정치

5공 청문회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11월 2일 국회에서 '5공 청문회'라 불리는 제5공화국 관련 청문회가 열렸다. 정주영은 전두환에게 자금을 상납했다는 죄목으로 이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전두환이 설립한 일해재단 등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김영삼 계열의 통일민주당 소속 노무현 의원에게 곤욕을 치루었다.

노무현 :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이 힘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간다는 그러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정주영 : …… (침묵)
노무현 : 그것을 단순히 현상유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좀 더 성장하기 위해 힘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까?
정주영 : 힘 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면 괴로운 일을 당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영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노무현 : 혹시 그 순응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정주영 : 능력에 맞게 내는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 일해가 막후권부라는 것이 공공연히 거론되기 이전에는 묵묵히 추종하다가 그 권력이 퇴조하니까 독자적인 견해,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주영 : …… (침묵)
노무현 : 왜 돈 문제가 아니라면 진작부터 6·29 이전부터 바른말을 하지 못했습니까?
정주영 :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노무현 : 이렇게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없을 때는 권력과 멀리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습니까?

정주영 : …… (침묵)[12]

당시 정주영을 향한 노무현의 발언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도 있었다.

[영상] 정권마다 정경유착 반복...자성·개혁 '공염불' YTN 2017. 1. 13
[노무현의 청문회 발언 51초부터] : "이 돈을 대통령한테 갖다 바쳤으니까 대통령도 사람이 양심이 좀 있으면 남의 돈을 그렇게 먹고 부탁 한 개 안들어 줄 수 있습니까?"

훗날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노무현 대통령이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 이 청문회에서의 노무현의 발언이 다시 화제가 되었다. 뇌물을 주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뇌물을 수수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뇌물수수의혹은 검찰의 수사중단으로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 권양숙과 아들 노건호 등이 박연차로부터 6백만불을 받았다는 것은 박연차의 증언을 통해 거의 사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무현 유족에 대한 수사 재개를 위한 고발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검찰은 계속 수사착수도 하지 않은채 덮었다.

통일국민당 창당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이어 1992년 3월에 열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자유당김대중이 주축이 된 민주당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던 중도층의 표심을 흡수해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으로 총 31명의 당선자를 내며 돌풍을 일으켰다.

제14대 대통령선거 출마

자신감이 붙은 정주영은 1992년 12월 18일 열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였으나, 김영삼, 김대중에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대북사업

1998년 북한에 소 1001마리를 갖다주고 금강산 관광 사업권을 받아 금강산 관광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때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이후 이명박 정권 때에 북한이 총으로 관광객인 우리 국민을 사살하면서 종료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 그가 세운 대북관련 기업인 현대아산은 매년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는 부실기업이 되었다.

정주영은 아마도 북한사회주의 체제를 겪었지만 개혁 개방 이후에 사유재산제는 보장되는 러시아 등과 같은 체제로 착각했었던 듯하다. 그러나 북한은 당국의 결정에 따라 화폐와 부동산 등의 자산도 뺏기는 극악한 공산주의경제이기에 사업권과 관광객의 안전 따위가 보장될 리가 없는 나라라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했던 듯하다.

정주영의 노년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또한 이러한 정주영의 행동에 상당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사(公私)의 구분을 했어야 했다.

사후

정주영의 사후 국내 최대 재벌이었던 현대그룹은 아들들이 그룹을 분할하여 가지며 여러 개의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이와중에 아들들간에 다툼이 있었는데, 이를 조선 태종 왕위 계승에서 벌어젔던 왕자의 난에 비유해 '현대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분할된 그룹은 다음과 같다.

그룹 관계 성명
현대자동차그룹 차남 정몽구
현대백화점그룹 3남 정몽근
현대알루미늄 4남 정몽우
현대그룹 5남 정몽헌
현대중공업그룹 6남 정몽준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7남 정몽윤
현대울산종합금융[13] 8남 정몽일


가계도

정봉식 처 한성실



정주영
(1915-2001)
현대 전 명예회장
정인영
(1920-2006)
한라 명예회장
정순영
(1922-2005)
성우 명예회장
정희영
(1925-2015)
전 현대조선중공업 대표
정세영
(1928-2005)
현대산업계발 회장
정신영
(1931-1962)
정상영
(1936-2021)
KCC 명예회장


처 변중석
(1921)
처 김월계
(1923)
처 박병임
(1928)
부 김영주
(1920)
처 박영자
(1936)
처 장정자 처 조주주
(1936)



장남 정몽필
(1936-1982)
장녀 정형숙
(1951-1974)
장녀정문숙
(1947)
장남 김윤수
(1946)
장녀 정숙영
(1959)
장녀 정일경
(1960)
장남 정몽진
(1960)


처 이양자
(1941-1992)
부 김자용
(1936- )
처 한숙자
(1948)
부 노경수
(1954)
부 임윤수
(1959)
처 홍은진
(1964)



2남 정몽구
(1938)
현대.기아차 회장
장남 정몽국
(1953)
장남 정몽선
(1954)
현대시멘트 회장
2남 김근수
(1948)
장남 정몽규
(1962)
현대산업개발 회장
장남 정몽혁
(1961)
현대정유 사장
2남 정몽익
(1962)
KCC 전무


처 이정화
(1939)
처 이윤희
(1954)
처 진영심
(1969)
처 허경
(1953)
처 김나영
(1966)
처 이문희
(1961)



3남 정몽근
(1942)
현대백화점 회장
2남 정몽윤
(1955)
한라건설 회장
2남 정몽석
(1958)
현대종합금속 회장
차녀 정유경
(1961)
3남 정몽열
(1964)
금강종합건설부사장


처 우경숙
(1951)
처 홍인화
(1957
처 안정혜
(1961)



장녀 정경희
(1944)
3남 정몽훈
(1969)
(주)성우 회장


부 정희영
(1940)
처 박지영
(1961



4남 정몽우
(1945-1990)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
4남 정몽용
(1961)
성우오토모터 부회장


처 이행자
(1945)
처 김수혜
(1963)



5남 정몽헌
(1948)
전 현대그룹 회장
차녀 정정숙
(1962)


현정은
(1955)
현대그룹 회장
부 이주환
(1961)



6남 정몽준
(1951)
현대중공업 고문


처 김영명
(1956)



7남 정몽윤
(1955)
현대해상화재 고문


처 김혜영
(1961)



8남 정몽일
(1959)
현대기업금융 회장


처 권준희
(1963)




각주

  1. 정주영, 이땅에 태어나서, 솔, 1998년, p22
  2. 지금의 초등학교
  3. 정주영, 이땅에 태어나서, 솔, 1998년, p24~25
  4. 정주영, 이땅에 태어나서, 솔, 1998년, p36
  5. 정주영, 이땅에 태어나서, 솔, 1998년, p39
  6. 중앙일보 2015년 11월 9일
  7. 정주영, 이땅에 태어나서, 솔, 1998년, p63
  8. 이명박, <신화는 없다> (1판), 김영사, 1995, p108
  9. 주간한국 2000년 7월 4일
  10. 정주영, 이땅에 태어나서, 솔, 1998년, p107
  11. 정주영, 이땅에 태어나서, 솔, 1998년, p107~108
  12. 한겨레 2017년 11월 2일
  13. 1998년 IMF사태 때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