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 당시 총탄에 맞은 나무
붙잡힌 김신조

1·21 사태(-事態)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소속의 무장공비(124부대) 31명이 대한민국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개요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은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1월 31일까지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북으로 넘어갔다. 도주한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 2007년에 방한하여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1]

침투 경로

김신조 일당이 침입한 루트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한다. 18일 휴전선을 돌파했다. 19일 꽁꽁 얼어붙어 있던 임진강을 걸어서 횡단, 경기도 고양시 삼봉산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 후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21일 밤에는 세검정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까지 이른다.

이때 북한의 암호지령이 내려왔으나 해독하지 못하였다. 당시 침투한 병력 중 암호를 전담하는 인원이 없었다고 한다.

미 육군 2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던 서부 철책선 근무는 허점이 너무나 많았으며, 특히 미군과 한국군의 담당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침투하여 더욱 손쉽게 돌파 가능했다고 한다.

124 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삼형제와 마주쳤는데,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인데 설마 신고 하겠느냐는 이유로 투표를 통해 그들을 살려주기로 하고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라 덧붙이며 풀어주었다. 그러나 나무꾼 형제는 곧바로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김신조 일당은 우씨 삼형제를 "동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걸 들은 나무꾼 형제들은 저것들 무장공비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런 실책으로 나무꾼들이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하문 초소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 검문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방첩대 마크 때문이였다. 이들이 군복의 방첩대 마크를 내보이면 경찰이고 군부대고 달려나와서 무조건 열어줬다고 한다.

자하문 전투

전사한 최규식 총경을 기리는 동상

자하문초소에 당도한 124 부대원 31명은 9시 50분에 드디어 이곳을 지키던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2명에게 검문을 받게 된다. 부대원들은 이전처럼 "우리는 CIC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고 다그쳤지만 형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 시간이 지체됐고 무전으로 연락을 받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그들의 진군을 막아섰다. 이때 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이를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한 것인데 사실은 그냥 시내버스였다.

최규식 총경은 지근거리에서 여러발을 맞아 현장에서 전사하였고 검문을 하며 시간을 끌던 형사 정종수 경사는 동료 형사와 함께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였으나 이후 후퇴하는 공비들의 총에 중상을 입고 이후 치료 도중 사망한다. 그 외에도 많은 경찰이 부상 당했으며, 버스에 던진 수류탄 때문에 민간인 버스 승객 3명이 사망했다.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 생포되었다. 우리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건 발생하기도 했다.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결과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래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국방부 공격 및 요인암살, 교도소 공격후 죄수 석방 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 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한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민다는 대규모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판 테트 대공세를 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서 30여명을 침투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결정이 난것이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