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손창식 녹취록
최근 수정 : 2018년 12월 10일 (월) 07:58


김대중에 대한 “전설적” 자료로서는 아마도 1986년 1월 30일에 발간된 이한두(李澣斗)의 저서 “유신공화국”의 36쪽부터 47쪽까지에서 언급된 내용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이한두씨는 1995년 9월에 발간된 “한림공론 (澣林公論)”에서도 김대중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다음 1980년 5월 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인 시바다 미노루(紫田 穗)가 일본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에 김대중에 대한 연재기사를 싣고 이를 기초로 하여 1981년 3월 “김대중의 좌절”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였다[1]. 이외에도 김대중의 경호원 출신인 함윤식이 집필한 “동교동 24시” 조갑제가 쓴 “김대중의 정체”, 김진배(金珍培)의 “김대중 수난사-인동초의 새벽”, 손충무의 “김대중 X파일” 등이 있고 이 밖에도 이도형, 천봉재 등의 저작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손충무의 “김대중 X파일”은 그 신빙성이 다소 의심스럽다는 견해가 있어 이의 인용을 자제하였다. 한편 김대중 자신의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도 있지만 자기 변명성 기술로 편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아 이의 참고도 자제하였다. 최근에 출판된 저작으로는 전 국정원 직원인 김기삼씨의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가 있고, 지금은 절판되어 찾기 어려운 정의순 저 “김대중 체미 775일”도 있다[2].


양준용(梁濬容)[3] 기자의 기록

김대중 출생비밀을 10년간 추적한 손창식(孫昌植)에 대하여

대통령의 신상정보 가운데 성(姓)씨와 생년월일은 기본 사항이다.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 김대중씨가 태어날 때부터 김씨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과 소문들이 있어왔다. 전남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때 부터 그는 서자(庶子)라는 시비에 휘말렸고, 김씨가 아니라는 의혹은 역대 대통령 선거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었다.

김대중씨는 김해 김씨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참석한 문중(門中) 제사 날에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공공연히 걸렸을 뿐 아니라 1970년대 후반 일본 산케이(産經) 신문의 한국 특파원을 지낸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는 “김대중의 좌절”이라는 책에서 김대중의 실제 아버지는 윤창언씨일 가능성을 거론 했다. 이회창 후보와 맞붙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는 김대중씨가 김씨도, 윤씨도 아닌 제갈씨라는 의혹이 제기 됐다.

성씨 뿐 아니라 생년월일에 대해서도 호적에는 1925년생으로 등재돼 있으나 실제론 1923년생 돼지띠란 말이 무성하다. 이에 대해 김대중 본인은 한번도 적극적인 해명을 하지 않았다. 한국의 어느 언론도 이 문제에 관해서 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추적 보도를 하지 않았다.

손창식씨는 “자유 언론수호 국민 포럼” 사무총장 출신으로 1980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약 10년동안 김대중씨의 출생내막을 추적해 온 사람이다. 그는 김대중씨의 장남 김홍일씨와 동갑인 1948년 생이다.

그는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김대중씨의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비롯해 그 인근섬인 상태도, 하태도, 장병도, 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 곳에 사는 노인들을 만나 김대중씨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추적하는 방법을 통해 김대중씨 출생비밀에 접근했다.

김대중씨의 어머니는 장노도(1971년 78세로 사망)이다. 그녀의 고향은 목포에서 37.8 Km떨어진 남해안의 외딴 섬 하의도(荷衣島)였다. 하의도는 “연꽃잎으로 만든 옷”을 뜻하는 섬이다. 신안군(舊 무안군) 하의면으로 후광리(後廣里), 대리(大里), 웅곡리(熊谷里), 어은리(於隱里), 능산리(陵山里), 옥도리(玉島里), 오림리(五林里) 등 7개 리로 이뤄져 있다.

장노도(張鹵島)의 고향은 하의도 맨 동쪽 갯가 마을인 오림리였다. 이 곳은 갯펄이 많다고 하여 뻘 섬으로 불렸다. 장노도의 “노”자는 “뻘 노”이며[4] “도(島)” 자는 “섬 도”자로 뻘 섬 출신이란 뜻이다. 장노도는 후에 장수금(張守錦)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

장노도는 고종황제 시절인 1893년 6월 6일 아버지 장지숙(張之淑)과 어머니 주귀심(朱貴心)의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18세인 1911년 3월 10일 같은 동네에 사는 어부 제갈성조 (諸葛 成祚)에게 시집갔다. 제갈성조에게는 제갈성복(諸葛 成福)이라는 형이 있었다. 두 형제는 같은 울타리 안에 집을 짓고 살았다.

결혼 얼마 후, 제갈성조는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사망했다(병사 했다는 설도 있다). 제갈성조가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호적상 기록이 없다. 누군가가 제갈성조의 호적기록 한 페이지를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호적에 남아있는 것은 제갈성조와 장노도가 1911년 혼인했다는 것, 그리고 혼인한 장노도가 1925년에 아버지 장지숙 호적에 제입적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라하여 설사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혼(魂)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회 풍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노도는 18세에 시집가 부모호적에서 제적되었다가 다시 본가 호적에 입적된, 당시로는 기구한 운명의 여자였다.

1960년대 초, 내가 동교동 김대중씨 집에서 본 장노도는 달걀 형의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체구는 약간 비대한 편이었다. 김대중씨의 출생비밀은, 젊은 나이에 외딴 섬 하의도에서 청상의 과부가 된 어머니 장노도의 기구한 삶 속에 숨어 있었다.

김대중 생모의 기구한 삶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남편이 죽은지 얼마 후, 장노도는 시댁 오림리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에서 소금장사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열었다. 이 주막집에서 김대중씨가 태어났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뒤 하의도에 지어 놓은 대통령의 생가(生家)가 이 주막집이다.

호적에 따르면 김대중씨는 1924년 1월 16일에 출생했으며, 출생신고를 한 사람은 외할아버지 장지숙(혹은 장문숙)이었다. 당시는 여자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딸 장노도를 대신하여그녀의 아버지인 장지숙, 다시 말해 김대중씨의 외할아버지가 손자의 출생신고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24년 7월 7일 김대중씨는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입적되었다는 것이 호적상 기록이다.

해방 2년전인 1943년 7월 8일, 김대중씨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4년 1월 16일에서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했다. 일제 시대 호적을 정정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김대중씨는 목포상고 졸업반이었고 도요다(豊田)라는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상태였다.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한 도요다란 이름의 김대중 청년은 일본의 중국침략 거점인 여순 군항에서 활동하다가 해방을 전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순에서의 김대중씨의 행적도 언젠가는 규명해야할 숙제이지만, 아무튼 김대중씨의 출생은 여러모로 의혹 투성이었다.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대결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씨는 “뱀의 천적은 돼지”라며 돼지띠인 자기가 뱀띠(1917년 생)인 박정희 후보를 잡아먹을 수 있다고 연설했다. 돼지띠라면 1923년생이란 이야기다. 1923년 생이라면 어머니 장노도는 29세에 임신하여 나이 설흔에 김대중씨를 낳은 셈이다.

주막집을 경영할 때 장노도는 하의도 인근 섬에 살던 윤창언과 동거하다가 하의도 부자인 김운식의 첩이 되었다. 어머니가 김운식의 첩이 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씨는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되었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어머니가 윤창언씨와 동거할 때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윤성만이라고 불렸다.

김운식의 첩이었던 장노도는 1960년에 김운식이 본처와 (서류상으로) 이혼을 끝낸 다음 정식 혼인신고를 하여 본부인이 되었다. 김대중도 그제서야 서자 신분에서 벗어나 비로서 적자(適子)가 되었다. 1960년이라면 장노도의 나이 67세일 때이며. 김대중씨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할 때였다.

김대중씨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에게는 본처 김순례(金順禮)가 있었고 그 사이에 매월(每月), 대본(大本), 안례(安禮), 용례(用禮)라는 1남 3녀가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 김순례가 서류상 이혼당한 사실을 면 사무소 직원으로부터 들은 김운식의 장남 대본(호적상 이름은 大本이며 비석에는 大奉이라 적혀있고 동내에서는 대봉이라 불렀음)이 배 다른 동생 김대중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김대중씨 출생비밀은 좁은 하의도 바닥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찢어진 제갈성조의 호적

이같이 복잡한 사연을 지닌 김대중씨의 출생비밀을 알기 위해 손창식씨는 하의도와 그 인근 섬을 10년에 걸쳐 찾아가 그 곳에 사는 김해 김씨(金), 인동 장(張)씨, 제갈(諸葛) 씨, 윤(尹)씨 문중의 노인들을 만났다.

김해 김씨는 김대중의 호적상 아버지인 김운식의 문중 사람들이고. 인동 장씨는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의 집안 사람이다. 제갈씨는 김대중의 어머니의 첫 남편 제갈성조네 사람이고 윤씨는 김대중의 어머니가 첫 남편과 사별한 후 주막집에서 일시 동거했던 윤창언씨 친척들이다.

손창식씨는 이들 말고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하의도 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공무원들도 만났다. 그는 이 가운데 김대중씨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28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다.

비밀리에 이뤄졌던 손창식씨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인 “한길 소식지”에 “김대중씨는 김해김씨가 아니고 제갈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5] 이 일로 한길연구회 간사장을 맡고 있던 손창식씨는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 공안1부는 손창식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김대중씨 출생과 관련된 손씨 진술은 수사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손씨는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검찰 수사와 1심 재판에서 말을 아끼던 손씨는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자 항소심에서 자기방어에 나섰다. 손씨는 항소심에서 처음으로 “김대중씨는 김해 김씨가 아니다”라고 말한 하의도 일대 주민 28명의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했다. A4 용지로 875쪽에 이르는 이녹취록을 재판부는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증거로 채택되면 재판기록에 첨부돼 영구 보존되고, 공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항소심에서 손씨는 김대중씨가 김해 김씨가 아니고 제갈씨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 보관중인 제갈성조(김대중씨 어머니 장노도의 첫 남편)의 부친 제갈영범(諸葛永凡)이란 사람의 호적 원부 및 제적(除籍) 원부에 대하여 “인증 등본 송부 촉탁”을 신청했다. 호적 원부와 제적 원부는 본인이 사망했다 하더라도 본인은 물론, 그 자식들의 출생, 결혼, 사망 등이 기록돼 있는 문서이며, 인증 등본은 법원에 보관중인 서류가 관에서 인증하는 절차를 거쳐 발급되었음을 말한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를 기록해 놓은 호적 서류는 그 중요성 때문에 행정부(본적지 관활 면사무소)와 사법부(본적지 관활 법원) 양쪽에서 영구 보관하게 끔 되어있다. 그런데 하의면사무소에 보관 중인 제갈영범의 제적부에 아들 제갈성조와 관련된 페이지만 묘하게도 훼기(毁棄, 특정 페이지만 사라지고 없음)되어 있었다.

제갈영범의 제적부는 맨 첫 장에 당사자인 제갈영범이 언제 출생해 누구와 혼인하여 자식 누구누구를 낳았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에 제갈영범의 장남 제갈성복의 출생과 혼인, 자식 관계가 적혀 있다. 그 뒤에 차남 제갈성조의 기록이 이어지는데, 이 기록 중 맨 앞부분 한 장만 없어졌다. 이러다 보니 제갈성조의 출생과 사망, 자식 관계 기록이 사라져 버리고, 제갈성조와 장노도간의 혼인 관계 기록 한 줄이 맨 뒷장에 남아 있었다. 운명의 조화인지는 몰라도 이것이 김대중씨 출생의 비밀을 추적하는 단서가 되었다.

하의면사무소에 보관중인 제갈영범의 제적부가 찢어져 없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손창식씨는 목포지방법원에서 보관중인 호적서류를 신청한 것이다. 이 신청에 대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은 항소심 재판부에 보낸 회신에서 제갈성조에 대한 호적서류는 폐기되었다고 통보했다.

묘하게도 김대중씨의 경우엔, 어머니의 첫 남편 호적이 면사무소에서는 훼기되고 법원에서는 폐기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을 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은 종결되었고, 손창식씨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손씨는 심리(審理)미진과 채증(採證)법칙 위반등을 이유로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대법원 역시 이를 기각해, 이 사건은 1999년 10월 26일 종결되었다. 법원은 손창식씨가 김대중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점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지만 그를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이 재판은 한국의 월간조선(1999년 12월호: “김대중 대통령 명예훼손 재판에서 5:0 전승 중”[6])에서 처음 보도했을 뿐,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혼자서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탐사 작업을 하고,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손창식 씨는 건강을 크게 해쳤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레나 수술을 받았다. 그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했다.

대통령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출생의 비밀을 파혜쳤으니 누가 그에게 일자리를 줄 것이며 누가 도움을 줄 것인가?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의 13평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그는 좀 더 허름한 곳으로 집을 옮겼다 한다.

2004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져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 하지 못했다. 사인(死因)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망자(亡者)의 이름은 손창식(孫昌植 ·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전(前)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亡者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前)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동교동 가신(家臣)」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이렇게 허무하게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진리의 씨앗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이 책은 그가 뿌려 놓은 씨앗의 열매다.

20년간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

나는 손창식씨가 10년에 걸쳐 “김대중 출생비밀”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거짓말을 가장 많이한 사람이다.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떳떳하지 못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김대중씨는 출생의 비밀을 속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씨의 각종 거짓말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불행하게 했다.

출생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부모의 책임이다. 사실대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본인의 도덕성에 흠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이를 모면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고 했다. 손창식씨의 추적작업을 책으로 내기로 결심한 것은, 비록 늦긴 했지만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정치인 김대중으로 인해 호남 사람들이 가장 피해를 보았다. 김대중씨는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호남 사람들을 선동했고, 그 선동이 결국은 영.호남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김대중씨에게 볼모로 잡혔던 호남 사람들에게 이 책을 통해 비 도덕성으로 점철된 김대중 삶의 진실을 알리고 싶다.

출생은 본인이 책임질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은 그 동안 자신의 출생 내막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던 김대중씨에게도 누가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상도 출신인 나는 김대중씨와 질긴 인연을 갖고 있다. 나는 경향신문 견습 3기 출신으로 1961년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사회부 기자를 거쳐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할 때 정치 초년병 김대중을 알게 되었다. 나는 김대중씨보다 열 몇살이 어리지만, 정치인과 정치부 기자라는 특별한 관계때문에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9년, 나는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기사를 썼다가 정부에 미운 털이 박혀 강제 출국 당했다. 내가 쓴 기사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보도 통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기사가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긴 했지만, 야당 정치인 김대중에 대해 계속적으로 우호적인 기사를 썼다는 점도 강제 출국의 한 원인이었다.

그 후 일본, 하와이, 미국 등지에서 2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결국 정치망명객이 된 것은 김대중씨와의 질긴 인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씨의 당선이 확정된 그 다음날 (1997년 12월 19일), 나는 김대중씨의 일산 집에 초대받은 세 사람의 손님 중 한명이 되었다.

휴일에는 김대중 의원 차를 타고 야외 드라이브

내가 입사할 1960년 무렵, 경향신문은 가톨릭 재단에서 발행했고, 작고한 노기남 대주교가 사장이었다. 경향신문은 카톨릭 신자인 장면 정권과 가까웠다.

김대중씨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다. 그는 무소속 후보로 목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고향이라는 목포에서 그가 얻은 표는 300표를 넘지 않았다.

당시 목포는 단일 선거구로 야당세가 강한 곳이었다. 목포는 민주당 구파 출신의 거물 정중섭(鄭重燮)씨 아성이었다. 그가 지역구를 내놓지 않는 한, 김대중씨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뿌리를 알 수 없는 서자라는 소문이 김대중씨를 괴롭히고 있었다.

정치는 하고 싶었지만 고향에는 자리가 없는데다 민심도 흉흉해 김대중씨는 어디든 빈자리만 있으면 출마하려고 애썼다. 그를 정치적으로 지원한 사람이 장면 박사다. 김대중씨는 1956년, 서울 소공동에 있던 경향신문사 고문실에서 당시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장면 박사를 만났다.

카톨릭 세력을 대표하던 장면 박사와 노기남 대주교는 젊은 인재를 키우는 차원에서 김대중씨를 지원했다. 김대중씨는 장면 박사의 적극적인 지지로 1956년 민주당 상무위원에 기용되었다. 그 이듬해인 1957년, 김대중씨는 노기남 대주교의 방에서 김철규(金哲珪) 신부로 부터 정식 영세를 받았다. 영세시 김대중씨의 대부는 장면 박사가 맡았다. 1959년 5월 20일에 실시된 제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씨는 고향의 흉흉한 민심을 피해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김대중씨의 정치적 후견인 장면 박사는 민주당 신파의 총수였다. 민주당 신파는 구파에 비해 열세였다.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자 원외 지구당위원장이었던 김대중씨는 당 대변인이었던 조재천씨가 법무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자 민주당 임시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민주당 신파쪽의 웬만한 사람들이 다 입각한 상태여서 인재가 없었고, 당시 대변인은 당의 중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요 직책이 아니었다. 대변인 김대중은 달변이었다.

김대중씨가 출마한 강원도 인제 지역구가 선거 무효가 되는 바람에 1961년 5월 15일 재 선거가 실시되었다. 재선거에서 김대중씨는 당선되었으나 당선된 날이 5.16 군사혁명 바로 전날이었다. 5.16 군사혁명과 함께 국회가 해산되면서 김대중씨는 국회의원 선서를 하지 못해 정식 국회의원이 되지 못했다.

1963년 제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씨는 목포에서 출마해 처음 당선되었다. 1923년 생임을 감안하면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의 어머니 장노도가 호적상으로 김운식의 본처가 되었기 때문에 그도 서자에서 적자로 신분이 변해 있었다.

5.16군사혁명과 함께 정권을 빼앗긴 장면 박사의 민주당은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몰락했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했다. 제1야당은 민주당 구파중심의 민정당이었다. 윤보선씨가 대표였고, 김영삼씨가 대변인이었다. 김대중씨는 국민의당 등 중소 정당과 연합한 삼민회의 대변인을 맡았다.

당시 정치부 기자들은 현안이 있든 없든, 새벽 6시 부터 정치인들의 집을 한바퀴 도는 것이 일과였다. 야당을 출입했던 나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살았던 야당 거물 박순천 여사집에 맨 먼저 들른 후, 서대문구 동교동에 살았던 김대중 의원 집을 꼭 찾았다. 나는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대문구 갈현동에 살았다.

비록 초선 의원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많은 호감을 가졌다. 그는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선동 정치의 대가였다. 그 무렵 서울 효창구장에서 야당 주최의 공화당 규탄대회가 열렸다. 첫 연사가 김대중 의원이었다. 나는 김대중 의원의 지프차를 타고 행사장까지 동행했다.

“김의원, 오늘 아침 신문에 난 기사 보았소? 소가 자기 주인을 뿔로 박았다는 지방 기사인데 우직하기로 소문난 소가 주인을 뿔로 박다니 세상에 참 희한한 일도 다 있소” “아, 그런 일도 있었소”

내 말을 들은 김대중 의원은 차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효창구장에서 첫 연사로 등단한 김대중 의원은 10여분 전에 나한테서 들은 소 이야기를 제일 먼저 끄집어냈다. 원고에 없는 연설이었다.

“여러분, 소가 주인을 뿔로 들이받는 사건이 어제 발생했습니다. 소는 여러분이 잘 아사다시피 공화당의 심볼입니다. 공화당이 주인인 국민을 들이 박은 것입니다. 공화당이 민심을 들이박았으니 공화당이 망한다는 것을 하늘이 보여준 것입니다.”

소가 공화당의 상징임을 그는 십분 활용했다. 내가 차 중에서 1단 크기의 짤막한 기사에 대해서 한 말을 김대중 의원은 그 짧은 시간에 자기 것으로 소화해 냈다. 그 순발력에 나는 감탄했다.

정치인과 정치부 기자로서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휴일이면 거의 매주 김대중 의원은 자신의 검은 색 지프차를 타고 내 집으로 찾아와 함께 서울 인근을 드라이브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많이 이야기 했다.

그 때 이미 김대중 의원은 대통령 출마의 뜻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인 어느 누구도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훗날 호남 출신 야당 의원들도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나선다고 하면 피식피식 웃던 시절이었다.

그를 지원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훗날 한일회담이 끝난다음, 서울 서대문 갑구의 보궐선거에서 원내에 진출한 김상현 의원만이 김대중 의원을 지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김영삼에 대한 극한적인 경쟁 의식

국회의원 김대중은 국회 재경위원으로서 열심히 의원 생활을 했다. 그 당시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 도서관에 제일 자주가고, 제일 오래 앉아 있었던 사람이 김대중 의원이었다. 기자들이 김대중 의원을 만나려면 국회 도서관으로 가야만 했다.

김대중 의원은 원내 활동에서 상당히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대정부 질의를 할때, 당 지도부에 원고를 제출하지 않고 단상에 나가 사정없이 공격했다. 국회의원들 입에서 어떤 소리가 터져 나올지 조마조마할 때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연설의 강도가 약했기 때문에 국무위원 가운데 국회 본 회의장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있었고, 꾸벅꾸벅 조는 국무위원도 있었다.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 정치부 기자들도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김대중 의원 등장 때는 모두가 긴장했다.

1960년대는 중앙정보부의 기세가 등등할 때였다. 국회의원들도 중정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못했다. 국회 예결위원이었을 때 김대중 의원은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을 국회에 불러, 하루 종일 추궁하면서 중정의 예산을 삭감하기도 했다. 김의원의 중정 예산 삭감 투쟁은 기사화 되지는 못했지만 신문기자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의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의원의 대 정부 질의 차례가 되면 각 부 장관들이 다 제자리에 앉아서 긴장하며 들었고, 정치부 기자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시했다.

김대중 의원의 질의 가운데는 깜짝 놀랄만한 폭로가 많았다. 사실에 근거한 것도 있고, 유언비어성의 엉뚱한 것도 있었지만 그는 정부나 중정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권력으로부터 재정적인 혜택을 받았지만 미운 털이 박힌 김대중 의원은 열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의원들이 감히 말 못하는 소리를 많이 했다. 언변도 대단해 한일회담 반대 투쟁 때는 명연설을 많이 했다.

김대중 의원은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40대의 재선 의원 이었던 김대중씨가 일약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데는 김영삼씨의 도움이 컸다. 난데없이 김영삼씨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며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김대중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40대 기수론이 없었더라면 김대중씨 본인도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원내 활동을 열심히 하고 야당 의원으로서 열심히 투쟁하면 자기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김대중 의원은 동년배인 김영삼씨에게 만은 지지 않겠다는 극한적인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국회 진출은 김영삼씨가 먼저 했지만 같은 40대이고 김대중씨가 김영삼씨보다 세살이 많았다.

김대중씨는 원내를 지휘하는 원내총무가 되려고 엄청 노력했다. 그에게 힘이 되기 위해 나도 “의정 활동을 열심히 하는 김대중씨에게 한번 원내총무를 맡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면서 야당 의원들의 의향을 타진해 보았지만 씨가 먹히지를 않았다.

김영삼씨가 원내총무를 세 번이나 하고 그만두었을 때 유진오 총재가 새 원내 총무로 김대중씨를 지명한 일이 있었다. 총재가 원내 총무를 지명하면 의원 총회에서 박수를 치고 넘어가는 게 관행이었던 시절인데도 김대중씨는 원내 총무가 못되었다. 그 때 김대중씨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정말 쓴맛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씨는 자기가 원내 총무를 못한 것은 원내를 좌지우지 했던 김영삼씨가 배후에서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판에 김영삼씨가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하자 김대중씨는 “김영삼이가 나오는데 내가 못나갈 이유가 뭐냐”며 전격적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김영삼씨가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씨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에서 김대중씨는 김영삼씨를 제치고 후보가 되었다.

강제 출국 당하다.

1970년 9월 29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에 출마한 사람은 이철승, 김영삼, 김대중 세 명이었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씨가 1위를 차지했지만 표가 과반수에 약간 부족했고, 김대중씨가 2위, 이철승씨가 3위였다. 1등과 2등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씨는 김상현 의원의 초인적인 노력에 힘입어 예상치 못한 뒤집기로 김영삼씨를 제쳤다.

자금력이나 조직력에 있어서 김대중씨는 김영삼씨를 당할 수 없었지만 김상현 위원이 서울에 올라온 지방 대의원들을 밤새 찾아다니며 설득한 결과였다. 김상현 의원 특유의 털털함과 친화력이 큰 작용을 했다. “힘센 사람만 대통령 후보를 해야 하느냐, 아무것도 없고 설움 받는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김상현 의원의 설득을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김대중씨가 자신의 명함 뒤에 “내가 후보가 되면 당 총재는 당신에게 주겠다”는 글을 써 이철승씨에게 건네 준 것도 득표에 영향을 주었다. 이 바람에 이철승씨 지지표의 상당수가 김대중씨에게 넘어가긴 했지만 그 당시 이철승씨와 김대중씨는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모든 변수들을 고려할 때, 예컨대 이철승씨를 지지한 호남 대의원 표가 같은 호남출신인 김대중씨에게 간다 하더라도 김영삼씨가 승리한다는 게 정가의 지배적 분석이었다. 언론에서도 다 그렇게 예측했다. 1등과 2등간의 결선 투표가 신문 제작 마감시간과 거의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결과가 너무나 당연하므로 개표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아일보가 1면 톱기사로 “김영삼 대통령 후보”라고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대오보(大誤報)였다. 동아일보에 대한 김대중씨의 좋지 않은 감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1969년, 공화당 정부는 3선개헌을 추진했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임기 두 번을 다 채운 박정희씨에게 대통령이 세 번 될 수 있는 길을 터 주자는 것이 3선 개헌의 취지였다. 나는 경향신문 정치부의 국회반장이었다. 나 역시 3선개헌을 반대했다. 5.16 군사구테타를 통해서 한번 헌법을 뒤엎은 사람들이 또다시 헌법을 바꿔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3선개헌 통과의 원내 사령탑은 공화당 원내총무 김택수 의원이었다. 김택수 총무는 3선개헌에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 시청 앞 모 호텔 커피숍에서 나와 만난 김택수 총무가 서류뭉치를 내개 보이며 이런 말을 했다. “양기자, 국회에서 3선 개헌 통과가 어려울 것 같아서 바로 국민투표에 부칠 생각인데 어떻게 될 것 같소?”

3선개헌을 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고 국민투표에 바로 부친다는 것은 초 헌법적인 발상이었다. 물론 신문기사로서는 대 특종 감이었다. 김택수 총무는 공화당에서 작성한 “국민투표 추진안”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김택수 총무가 여권의 1급비밀이나 다름없는 그 계획안을 경향신문 정치반장인 나에게 보여준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대특종을 낚은 것이다.

나는 추진안을 토대로 기사를 써서 데스크에 송고했다. 1면 톱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낮 1시쯤 발행되는 신문에 내 기사가 빠져 있었다. 신문이 나오기 전, 김택수 총무가 공화당 의원 회의실에서 타사 기자들과 담론하고 있는 나를 찾아와 고함을 지르며 바로 두 시간 전에 나와 독대한 사실을 부인하고는 “내가 언제 당신을 만났느냐?”며 재떨이를 나의 얼굴에 던지며 행패를 부렸다.

중요 정보를 나에게 보여준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는 과잉 행동임을 깨달은 나는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날 오후, 나는 중앙정보부 신문 담당관에게 불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쓴 기사가 워낙 엄청난 내용이어서, 데스크에서 중앙정보부에 사실관계를 알려준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직원은 나보고 “당신은 요주의 인물이다. 한국을 떠난다면 문제삼지 않겠다”고 회유했다. 당시로서는 선택의 길이 없었다. 나는 일본 와세다 대학 연수 명목으로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아침, 나는 출국 인사차 김대중 의원집을 찾아갔다. 뒤에 언급되지만 나와 그는 가정의 대소사를 의논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나의 딱한 사정을 안 김대중 의원은 옆에 앉은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누마다 상에게 양동지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라”고 지시했다.

누마다상은 재일교포인데 한국 이름은 김종충(金鍾忠)이다. 그는 김대중씨와 같은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출신으로 김대중씨 보다는 두살이 많았지만 초등학교 동급생이었다. 김대중씨가 1971년 일본에서 한민통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 본부를 결성할 때 국제부장을 맡은 만큼 김대중씨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이희호 여사가 누마다씨에게 쓴 소개장을 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맞춤법이 틀린 글자는 괄호를 쳐서 바로 잡는다.

<김 선생님, 경향신문사 정치부 기자 梁浚容(양준용)씨를 소개합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십니다. 우리와 아조(아주) 가까히(가까이)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오니 그리 아시고 친절히 대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弘傑(김대중의 3남 김홍걸) 父(김대중씨를 지칭)는 매일 삼선개헌 반대 강연으로 지방에 나드리가 있어서 제가 대신 이 글을 씁니다. 弘傑 母>

1969년 한국을 떠난 나는 7년 동안 일본에 머물며 정치학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나는 김대중씨가 1973년 10월 유신을 피해 일본에 와 , 그의 재일 인맥을 구성할 때 바로 곁에서 그를 도왔다.

박사과정을 끝낸후, 일본 정부는 나에게 출국을 명했다. 공부가 끝났으니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주일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입국문제를 문의했더니 “당신은 여전히 요주의 인물이므로 입국 허가 대상이 아니다. 한국에 들어가면 그 순간 체포될 것이다. 당신이 살 길은 미국으로 가는 길 뿐이다”고 했다.

나는 하와이를 거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한국에서 강제 출국 당한지 20년째 되던 1989년에서야 나는 다시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김대중은 근본 없는 사람이여

한국정부로 부터 강제 출국을 당해 일본에 간 나는 김대중씨 소개장을 들고 김종충씨를 만났다. 김대중씨와 같은 하의도 출신이고, 김대중씨가 나에게 소개장을 써 줄만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마다 다다시(沼田忠)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일본의 전통 복장을 하고 살았다. 영락없는 일본 사람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무렵, 나는 그에게 김대중씨 출생과 관련해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한국은 돼먹지 않은 나라야. 근본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다는 거야”

친구가 친구 욕을 하다니. 하지만 친구들이 보는 “인간 김대중”의 실제 모습은 근본이 없는 사람이었다.

1998년, 자신의 처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김종충씨는 고향 하의도에 묘를 마련했다. 장례식에 동행한 나에게 하의도의 김씨들은 이구동성으로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이후 농촌 사정은 김영삼 대통령 때보다도 훨씬 못하다”며 대통령 욕을 했다.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왜 그렇게 심하게 욕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왜 우리 김가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한 촌로는 “근본은 속일 수 없는 법”이라는 말을 했다.

출생에서 시작되는 개인의 성장은 그의 개인적 성향과 성격을 좌우하는 요소다. 예로부터 가정교육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전통에서 그가 어떤 환경에서 출생했고 어떤 성장환경을 거쳤는지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심리학에서도 성장과정을 심리분석의 주요 변수로 보고 있다.

김대중씨에 대한 국민의 의혹은 도덕성과 사상성이었다. 그는 그의 출생과 해방전의 행적에 대해 철저히 숨기고 거짓말로 일관했다. 30여년 간의 정치행적에서 그는 돈에 대해서도 깨끗하지 못했다. 10년에 걸친 손창식씨의 김대중 출생 비밀 추적은 “인간 김대중”의 한 단면을 적라나하게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지금은 축첩제도가 금지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첩이 공공연히 인정되었고, 첩의 아들은 서자로서 입적이 허용되었다. 첩에도 양첩과 천첩, 두 종류가 있는데, 양첩은 본처가 없을 때 문벌이 낮은 집안의 처녀를 정식 예식을 거쳐 맞아들인 첩이며, 천첩은 본처 외의 첩들을 통틀어 말한다.

조선조 시대에는 양첩의 소생은 서자라 했고, 천첩의 소생은 얼자라 하였으며 경국대전의 서얼차대법은 서자와 얼자에 대한 차별을 명문화한 것이다. 김대중씨의 어머니 장노도의 경우, 그녀의 호적상 남편 김운식에게 김순례라는 본처가 있었기 때문에 천첩에 해당하는 셈이다. 천첩의 아들 김대중씨는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당시 사회분위기 상 사회적 운신의 폭이 매우 좁을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씨가 목포에서 처음 출마해 몇 백 표밖에 받지 못한 것도 서자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야심이 강했던 김대중씨는 이 신분상의 족쇄에서 탈피하기 위해 1960년 6월 1일자로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를 강제 이혼시키고, 자 신의 어머니 장노도와 김운식을 서류상 혼인시켯다. 장노도의 나이 67세 때의 일이었다. 이 날자로 김대중씨는 김운식의 적자로 “호적 세탁”을 하고 김해 김씨가 되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성씨인 김해 김씨를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이용한 것이다. 이 “호적 세탁” 이후 김대중씨는 금배지를 달았다.

김운식은 1974년 2월 25일 사망했다. 김대중씨는 동교동 집에서 김운식 비보를 받았다. 그는 장례식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비서들과 함께 온천지에서 휴양했다. 1937년 고향 하의도를 떠난 김대중씨는 1987년 평민당 대통령 후보시절 목포 지방 유세도중 처음으로 고향을 찾아 성묘했다. 김운식으로부터 물려받은 김해 김씨라는 성은 그의 정치적 야욕을 채워주는 하나의 도구였을 뿐, 그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89년 2차 대전의 전범 히로히토 일본 왕이 죽었을 때 서울 일본대사관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고, 이 사실을 특종 보도한 한 신문[7]에 대해 허위보도를 했다고 비난하고 해당 신문을 고발하겠다는 쇼를 벌이기도 했다. 1994년 북한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는 조문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는 자신에게 성을 물려준 아버지보다 히로히토와 김일성을 더 추앙했을까?

도요다(豊田)으로 창씨개명한 김대중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일제 시대 김대중씨가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다(豊田大中)였다. 일제 시대 대부분의 한국인은 마지못해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석 자로 된 이름에 한 글자를 더 넣어 일본인처럼 넉자로 늘리거나 성을 일본식 한자로 표기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어쩔 수 없는 소극적인 창씨개명이었다.

김대중씨는 자기 이름을 豊田大中이란 일본인 이름으로 완벽하게 바꾸었다. 풍전 또는 도요다라는 이름에서 김대중을 연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김종충씨 소개로 일본에서 만났던 일본인 중의 한명이 하라다 시게오(原田重雄)다. 하라다씨는 1932년 생으로 김대중씨 보다는 나이가 어리다. 그는 동경 신주쿠에 있는 하라다 맨션의 소유주다. 하라다 맨션은 내가 다녔던 와세다 대학 근처에 있다. 그는 재산이 많고 정치에 관심이 높은 사람이다. 김대중씨가 1973년 일본에서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자 자기 빌딩의 사무실을 빌려준 사람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된 이틀 후 김대중씨는 하라다씨를 일산 자택으로 초대했고, 노벨평화상 수상 때는 하라다씨를 동행해 노르웨이에 갔다. 대통령 취임 후 김대중씨는 하라다씨를 네 번 서울에 초청했다.

김대중-하라다 간의 관계에 대해 일본 동경신문은 2000년 10월 14일자 신문에서 1면 톱기사로 보도한 적이 있다. 제목은 “광주사건 체포 직전 일본인에게 보낸 편지-김대중대통령을 구하다”이었고, 김대중 대통령과 하라다의 얼굴 사진이 기사 옆에 실려 있었다. 기사 내용은 이렇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 광주사건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일본인 친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통의 편지를 보냈었다. 김대통령에게 위기가 닥친 것을 안 친구는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 정부 관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국제 여론의 환기에 힘썼다.

김대통령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동경도 신주쿠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하라다 시게오씨. 편지를 받은 날은 1980년 5월 18일 이었다. 하라다씨 기억으로는 그날 한국을 방문한 재미 한국인 지식인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김대통령은 전날 군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하라다씨는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하는 등 김대통령의 구명활동에 힘썼다. 두 사람의 친밀한 교제는 그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김대중씨의 창씨개명이 도요다라는 사실을 나는 하라다씨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라다 씨는 김대중씨가 목포상고 졸업 후 만주 여순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일본 명치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김대중씨 친구 김종충씨는 그 무렵 북만주 지역에서 교편생활을 했는데, 김종충씨도 김대중씨가 만주에 있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여순은 만주 침략을 위한 일본의 군사기지였다. 때문에 군 정보기관이나 경찰의 특고(特高, 특별고등경찰관) 관계인을 제외한 민간인은 출입통제지역이었다. 나는 하라다씨에게 물었다. “김대중 선생은 그 당시 여순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여순에서 학교를 나왔다더군요”

당시 여순의 실태를 아는 사람들은 여순에 있었던 조선인은 100% 일본의 밀정이었다고 증언했다. 도요다 청년이 여순에 있었다는 사실을 하라다 씨가 알게 된 것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김대중씨가 여순 출신 일인들의 모임에 참석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여순 출신 일본 동문들이 축하하러 한국에 가려고 한 적도 있다고 하라다씨는 내게 말했다.

김대중씨는 자신의 학력에 대해 6대 국회때부터 건국대학 졸업이라고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니 한국의 건국대학이 아니고 만주의 건국대학이라고 말을 바꾼 적이 있다. 만주 건국 대학은 만주에 만주국을 세운 일본이 만주국의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일본 학생을 주로 뽑았으나 조선인도 일부 선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김대중씨는 국회 수첩등에 기록된 자신의 이력에서 건국대학 부분은 빼버렸다. 젊은 시절의 김대중씨가 도요다라는 완벽한 일본인 이름으로 만주 여순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면, 히로히토 일본 왕의 빈소를 참배한 김대중씨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제는 김대중씨 본인이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김대중과 히틀러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씨의 라이벌은 공화당 김병삼후보였다. 그는 5.16 쿠테타 당시 헌병사령관이었고, 후에 내각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씨를 떨어뜨리기 위해 목포에 내려와 지원유세도 했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씨는 “유달산의 넋”이란 제목의 연설로 선동술의 극치를 이루었다. 1967년6월4일, 목포 역전 광장에서 행한 이 연설은 목포의 명물인 유달산과 영산강과 삼학도를 절묘하게 엮은 것으로 신문에도 연설내용이 소개 되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후 일본에서 2차 대전 관계서적들을 열람하면서 나는 김대중씨의 이 연설이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젊은 시절, 뮌헨 반란을 일으켰을 때 대중 선동을 위하여 써 먹은 연설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고향 산과 강을 인용한 히틀러식 연설 수법을 김대중씨가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김대중 전집”에 실려 있는 연설을 인용하면 이렇다.

<나는 저 유달산에 대해서, 저 흐르는 영산강에 대해서, 삼학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유달산이여! 너에게 넋이 있으면, 삼학도여!, 너에게 정신이 있으면, 영산강이여! 네게 뜻이 있으면 목포에서 자라고 목포에서 커 가지고,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이 김대중이를 지금 한 나라 정부가 외지의 사람, 목포 사람도 아닌 외지의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나를 죽이고 나를 잡으려 하니 유달산과 영산강과 삼학도가 넋이 있고 뜻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것을 목포 시민 여러분과 같이 호소하고 싶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도 김대중씨처럼 사생아 출신이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김대중씨가 한반도 밖의 섬에서 출생했듯이 히틀러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의 히틀러는 김대중씨처럼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자랐으며, 히틀러 역시 김대중씨와 같은 대중 선동가였다. 출신의 미천함은 그들에게 한이 맺히게 했고, 이 한을 그들은 독서를 통해 탈출을 꾀했다.

김대중씨는 “민족의 한을 안고”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우리 민족은 한의 민족이다.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다. 민족의 한은 바로 민중의 한이다. 한은 민중의 좌절된 소망이다. 한은 체념하지 않은 민중의 기다림이다. 한은 민중의 기다림 속에서 그 성취를 위해 기울이는 민중의 몸부림이다.

나의 일생은 우리 민족애의 경애와 고난받는 민중의 헌신 곳에 살고자 몸부림쳐 온 한의 일생이다. 나는 내 생명보다 더 소중히 생각한 우리 민중들의 자유와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민주사회의 토대를 세우고 통일에의 길만이라도 열고자 열망했다. 그러나 운명은 나에게 무엇 하나 이루도록 허용함이 없이 모진 수난만 격도록 한 것이다>

학창시절 김대중씨는 매우 영리했다. 목포상업고등학교 학적부에 따르면, 1학년 때는 111명중 1등, 2학년때는 119명중 4등, 3학년때는 155명중 2등, 4학년 대는 149명중 8등 5학년때는 150명중 39등이었다.

그는 국어(일본어), 수학, 한문, 영어, 역사 등에서 85~100점을 받았다. 일본인 교사들이 작성한 성행(性行)란에는 “명석하고 모범적인 인물”로 기록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히로히토 왕과 손잡고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일제시대 일본 젊은 세대의 우상이엇다. 히틀러의 자전적 소설 “나의 투쟁”은 당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읽은 베스트셀러였다. 일제 시대 일본인이 세운 목포상고를 다닌 김대중씨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탐독했으리라 믿어진다.

목포상고 졸업 후 김대중씨가 만주 여순에서 무슨 일을 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입을 통해 “여순 시절”은 단 한번도 밝혀진 일이 없다. 그의 여순시절 행적과 히틀러가 그에게 끼친 영향력은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대목이다.

첫 부인의 석연치 않은 죽음

또 하나 김대중씨가 밝혀야 할 것은 첫 부인 차용애(車容愛, 호적상 이름은 車容秀)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다. 차용애는 목포 유지 차보륜(車寶輪)의 딸이었다. 차보륜은 한민당 목포시 부위원장으로 우익이었다. 꽤 잘 살았던 그는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한 사위를 구명하기 위해 많은 재산을 날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용애는 1946년 4월 9일, 김대중씨와 결혼해 홍일 홍업 두 아들을 낳았으나 1960년 5월 27일 사망했다. 김대중씨가 강원도 인제 선거에서 떨어진 직후였다. 아내 사망 2년후인 1962년 10원 16일, 김대중씨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신여성 이희호씨와 재혼하고 1963년 아들 홍걸이를 낳았다. 이희호씨는 계훈제씨와 가까운 관계라는 소문이 그 당시 파다하게 나돌았다.

차용애 사망에 대해서는 자살설과 병사설 두가지 설이 있다. 자살설은 김대중씨가 강원도 인제 선거에서 낙선하자 생활고에 시달린 아내가 계가 깨지자 음독 자살했다는 내용이다.

김대중씨 본인은 아내의 사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어려운 가정을 잘 꾸려나가 주었지만 선거가 끝나자 곧 병사했다. 그녀의 죽음은 아마도 오랫동안 쌓여 왔던 심신의 피로와 직접적으로는 선거전에서 받은 정신적인 타격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결국은 나의 정치활동이 아내를 죽인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녀에 대한 비통한 회한의 정을 금할 수 없다”

나는 김대중씨의 이 주장을 사실이라 믿지 않는다. 남편이 국회의원에 떨어졌기 때문에 병사했다면, 낙선한 국회의원 아내들은 모두 병사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름없다. 김대중씨의 경우에는 두 번째 낙선이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 안된다.

차용애씨는 병사한 게 아니라 자살했다. 동교동 전에 신촌의 대신동에서 살 때 양잿물을 들이키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은 일이 있다. 아내가 양잿물을 마셨다는 기별을 받은 김대중씨는 아내를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집 근처의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영등포쪽 병원으로 데려가다 차안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주장이 당시 정가에는 파다했었다. 그녀가 왜 음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음독 후 김대중 의원이 취한 조치에 대하여 정가에서는 말이 많았다.

내가 서울 동교동의 김대중 의원 집을 출입할 때 김홍일 의원은 고등학생이었다. 어머니의 돌연한 자살과 아버지의 재혼은 열 네 살이었던 홍일씨의 가슴에 큰 상처를 주었다. 재혼 1년 후,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 홍걸이란 아들이 태어나자 홍일씨는 반항아로 변했다.

홍일씨는 부모와 같이 살지 않고 서울 영등포의 외삼촌 집에서 살았다. 홍일씨는 가끔 신촌 집에 찾아와 계모 이희호 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렸다. 그럴때마다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보다 못한 내가 홍일씨를 집밖으로 끌어내 “아버지의 부인이면 너의 어머니인데 어머니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나무란 적이 많았다. 생모 차용애가 사망했을 때 홍일이는 열 두 살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모르지 않는 나이다. 생모가 만일 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했다면 계모에게 그렇게까지 행패를 부리지 않았을 것으로 나는 본다.

1980년대 김대중씨 자금을 관리했던 한 측근으로부터 나는 차용애씨 음독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말이다.

“이희호씨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57년 8월이다. 이화여대 강사, YWCA 총무로 활동했던 이희호씨는 신여성으로서 당시 뭇 남성의 우상이었다. 김대중씨는 첫 부인이 살아 있을 때 이희호씨를 알게 되었다. 이희호씨 자서전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희호 씨는 집안이 좋은데다 부자였고, 차용애씨는 예전엔 부자였으나 당시엔 빈털터리였다. 좌익 활동을 한 남편을 구하려다 탕진한 결과였다.

출생 신분이 천해 국회의원이 되기 힘들었던 김대중씨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이희호씨에게서 찾았다. 이희호씨는 김대중씨보다 연상이다. 애까지 딸린 남자가 연상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희호씨와 결혼하기 위해 김대중씨는 아내 차용애를 심하게 구박했다. 남편의 구박을 견디다 못한 차용애는 결국 양잿물을 들이키고 말았는데, 근처 병원에 바로 데려갔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택시안에서 아내를 죽였다.

이런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시 김대중씨 집에서 일했던 민모라는 여자다. 차용애씨가 죽은 후 이 여자는 대신동 집을 떠났다. 하지만 그후 1년에 한번씩 동교동을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김대중씨는 측근을 시켜 그녀에게 1년치 생활비로 몇 천 만원씩 주었다. 입막음용 돈이었다. 이 여자는 서울 모 대학 앞에서 미장원을 하고 있다.

김대중씨 첫 부인 차용애씨는 이처럼 비명에 돌아갔다. 첫 부인 자살부분도 언젠가는 규명이 되어야 한다.

김홍일 의원의 대학 진학

김대중 의원의 사무실은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 옆에 있었다. 홍일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김의원은 나에게 홍일씨의 대학 진학 문제를 상의했다. 당시 나의 형은 서울 모 대학의 교수였고, 나중에는 그 대학에서 부총장을 지냈다.

나는 교수인 형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국회의원인데 가정적으로 불우해 아들이 공부를 하지 못햇다. 그 아들을 대학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1960년대 말 무렵에는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이 많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부탁이면 입학이 가능했다.

김홍일씨는 입학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대학 입시가 끝난 후 나는 대학 합격 증서를 받아서 김대중 의원에게 갖다 주었다. 김대중 의원은 대단히 고마워했다. 며칠 후 김대중 의원이 나를 불러 비행기 표 2장을 주면서 “홍일이를 데리고 제주도에 다녀 오라”고 말했다. 나는 홍일씨와 같이 제주도에서 일주일을 같이 보냈다.

오랜 시간 후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20년 만에 한국에 귀국한 나는 어느 모임에서 국회의원이 되어있는 홍일씨를 만났다. 홍일씨는 아주 반가워하면서 자기 부인을 불러 “내가 대학 합격 후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수영장에서 같이 사진을 찍은 분이 이 아저씨”라고 나를 소개했다.

반국가 단체 한민통의 수괴

1972년 10월 17일, 국정감사 기간 중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상현, 조연하, 김경인 등 김대중계 의원들은 전격 체포되었다. 당시 국회 국방위원이었던 김대중씨는 고 이태영 여사로부터 유신이 단행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신 발표 1주일 전에 일본으로 떠나 체포를 면했다.

그는 유신 선포 일자를 정확히 귀뜀받고 혼자서 한국을 탈출했다. 일본에 온 김대중씨는 나와 같이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들이 박해받고 있을 때 김대중씨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군정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2월 18일 제 9회 재일 한국청년동맹 겨울 강습회에서 그는 250명의 청년들 앞에서 “나는 공산당을 전멸시킨다는 방식에 반대합니다. 공산당이 숙청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가 자신을 가지고 공존하며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고 역설했다.

그해 4월 24일 미국 씨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에서는 이런 취지의 강연을 했다. “괴뢰, 괴뢰하는데 무슨 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정사실을 우리는 27년간이나 무시해왔는데 이북은 공산당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이남은 민주체제도 안정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할 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확립시킨것은 잘한 것이 아니냐. 한국의 6.23 평화통일 외교선언은 동서독처럼 남북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

이런 발언이 있은 후, 그는 1973년 7월 6일 미국 워싱톤 메이풀라워 호텔에서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약칭 “한민통” 미국본부를 결성하여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이어 7월 10일 일본에 건너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준비하다가 1973년 8월 8일 일본 그랜드 호텔에서 납치되었다.

납치사건이 발생한 후 나는 하라다 맨션에 있던 김대중 사무실에서 그의 007가방을 발견했다. 가방 안에는 상당액의 미 달러와 수첩이 들어 있었다. 이 수첩에는 1973년 1월 1일 부터 시작해 납치 당하기 전날까지 김대중씨가 매일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과 용건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만난 사람은 이름위에 일자로 획을 그어 만났음을 확인하고 만나지 못한 사람은 그냥 두었다.

수첩 맨 앞장에는 내 이름과 일본의 내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수시로 나를 불러내어 내 의견을 구하기 위해 수첩 맨 첫 장에 내 이름을 적어 둔 것 같다. 기자 출신인 나를 그는 특별한 존재로 여긴 것 같다.

김대중씨가 세계적 주목을 받는 정치인이 된 것은 납치 사건 때문이며, 이후락 부장 시절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씨를 납치하게끔 촉발한 것이 일본에서의 한민통 결성이다.

한민통에 대해 대법원은 1981년 판결문에서 “한민통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인 북괴 및 반국가단체인 재일 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 지원을 받아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라 함이 본원의 견해로 하는 바이오”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의 정확한 명칭은 “김대중 한민통 조직 및 내란 음모 사건”이다. 김대중씨는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내란 음모죄에 대해서는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의 수괴 부분에 대해선 자유롭지 못하다.

돈에 목숨을 건 김대중

10월 유신을 피해 일본에 도망왔을 때 김대중씨는 돈에 아주 궁색한 빈털터리였다. 그는 수중에 돈이 없으면 힘이 없는 사람이다. 하루는 나와 같이 점심을 먹고 할 일 없이 동경 긴자가리를 거닐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김대중씨가 이렇게 말했다.

“양동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해외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아마도 돈을 어마어마하게 가지고 나갔을 거요. 그 돈을 빼앗아서 같이 씁시다” “어떻게 뺏지요?” “양동지가 신문기자 출신 아니요. 만나서 잘 애기하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가 있을 거 같은데” “그 더러운 돈을 왜 탐을 냅니까?” “돈에 무슨 죄가 있어요. 돈은 잘 쓰기만 하면 좋은 겁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독립운동할 때 친일파의 돈을 빼앗아 독립자금으로 썼습니다 우리가 김형욱 돈을 빼앗아서 못 쓸 게 뭐가 있어요”

궁색하다고 그런 발상을 하다니, 나는 기가 막혔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하겠다면 당장 서울로 돌아가십시오”라고 쏘아 붙였다.

김대중씨에게 있어서 돈은 모든 가치 척도의 기준이었다. 그를 위해 돈을 많이 만들어 오거나 많이 가져오는 사람은 유능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그렇지


(Missing Page here…………………………………………………..)

숨겨둔 딸, 버려진 딸

아들만 셋인 것으로 알려진 그에게 딸이 있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1989년에 귀국한 나는 김대중씨 측근들에게 이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나만 모르고 있었지, 측근들은 김대중씨 딸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다.

딸의 이름은 김소영이었다. 그녀는 1969년에서 1970년 무렵에 태어났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일본에 있던 1973년에는 네살 쯤 되었다. 딸의 어머니는 김대중씨의 단골로 수송국민학교 앞 “대하”라는 요리집에서 일하던 여자라고 했다. 김대중씨 딸을 낳은 이 여자는 언젠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혼외정사로 태어난 이 딸은 김대중씨의 장래를 염려한 고 이태영 여사가 맡아 키웠다. 이태영 여사는 정대철 의원의 어머니다.

김소영은 서울 모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이태영 여사 생전에는 이태영 여사가 양육했고, 이태영 여사가 죽은 뒤에는 정대철 의원이 후견인 역할을 했으며, 그 후에는 김홍일 의원이 김소영의 생활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런데 김홍일 의원이 배다른 여동생을 매우 구박했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김소영은 서울 여의도 아파트에서 살았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후 김소영의 존재는 김대중 집안 입장에서 더욱더 눈의 가시거리가 되었다. 김소영은 이를 비관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몇 년 전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이야기였다.

김소영 어머니의 젊은 시절은 김대중씨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비슷했다고 한다. 자기 어머니의 과거 일로 속앓이를 했던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근본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한테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인륜이기 때문이다. 근본이 없고 정치적 야욕만 강한 김대중씨는 인륜을 저버리고 자기가 뿌린 소영이란 씨앗을 내팽개쳤다.

김대중씨 측근들은 소영이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소영이의 죽음에도 흑막이 있는 것으로 의심한다.

김대중씨는 대통령이 되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많은 것을 그는 거두었지만 자신이 뿌린 씨앗은 하나도 거두지 않았다.

돈 문제로 감옥에 간 그의 자식들과 그의 측근들은 그가 뿌린 씨앗의 결과다.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 김소영의 인생도 뿌리기만 했을 뿐 거두지 않은 그의 씨앗이다. 양잿물을 들이키고 자살한 전처 차용애, 고향 하의도를 등진 제갈 가문의 사람들, 술로서 인생을 마감한 이복형 김대본도 그가 뿌린 씨앗의 결과다. 여든을 맞이한 김대중씨가 진정한 정치인으로서 역사에 기록되려면 이제는 뿌린 씨를 거두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출생의 비밀에서부터 모든 것을 국민 앞에 당당히 밝혀야 할 것이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나는 김대중씨의 일산집에서 전라도 최고의 음식이라는 홍어회를 대접받았다. 씽씽한 홍어의 진한 맛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김대중씨는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서 또 한접시를 시켜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그 식탐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식탐을 비롯한 모든 욕심을 버리는 순간, 김대중씨는 국민들 앞에 새롭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출판하려는 이 시점에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김대중이 그 허울을 벗고 김대중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소실되었다.


후기

나와 김대중씨간의 인연을 길게 소개한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진실에 근거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다음에 시작되는 손창식(孫昌植 )씨의 글은 10년간에 걸친 손창식씨의”김대중 출생비밀” 추적기다. 이 글은 김대중 대통령 측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된 손씨가 법원에 증거물로 제출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손씨 사건을 담당했던 항소심 재판부가 증거 채택을 하지 않았던 그 녹취록이다.

“김대중 출생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손씨는 하의도 일대 주민 28명의 증언을 녹음했는데, 이 녹음을 3회에 걸쳐 다시 듣고 이 녹취록을 작성했다.

당사자들은 손씨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편안한 마음에서 말했기 때문에 행여라도 이 녹취록이 공개될 경우에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손씨는 실명과 주소를 사용하지 않았다. 녹취록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가명이며, 그 옆의 성별, 나이, 만난 날짜를 적어 놓았다. 가명을 쓰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000으로 표기했다.

녹음의 진실성과 객관성 면에서 사는 동네 정도는 표기하고자 하였으나 워낙 좁은 동네이다 보니 증언자들의 신원이 드러날 것 같아서 뺐다. 1988년부터 10년에 걸친 추적 작업이었기 때문에 증언자 가운데 일부는 사망했고, 상당수는 생존해 있다. 사투리는 가급적 살렸다. 녹취록 원부는 CD에 수록해 놓았고, 녹음 테이프는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의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해 놓았다고 손씨는 말했다.

추적기 앞부분은 손창식씨의 라이프 스토리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왜 이 추적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다시 말해 동기의 순수성을 알리기 위해 이를 포함시켰다. 이 녹취록으로 인하여 등장인물들에게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며, 만약 있게 된다면 송구하게 생각한다.

2004년 3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양준용 씀[3]



손창식(孫昌植)의 녹취록

어머니의 한 (恨)

내 이름은 손창식(孫昌植) 입니다. 내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김대중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시간 거리 입니다. 나는 딸만 일곱을 둔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딸 일곱을 두고 일본에 건너갔다가 해방 후에 귀국한 아버지 손귀봉 (孫貴峰)이 1948년에 뒤늦게 본 자식입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철물 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돈도 꽤 많이 벌어 일본에 온 완도출신들에게 학비도 지원하고 여러 모로 편의를 제공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서도움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귀국 후 아버지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 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발생한 6.25 전쟁의 혼란기에서 마흔 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습니다. 6.25 동란 당시 나는 세살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고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삼복더위가 한창인 어느 저녁인데, 술이 많이 취한 작은 외삼촌이 잠자는 나를 바닷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총판(總販)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나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엇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냥 울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까 세상 물정을 모를 때였습니다. 외삼촌 말이 너무나 궁금하여 호적을 살펴보았더니 호적에는 어버지가 1949년에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집안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그 당시 가슴속엔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성인이 되자 비로소 누님으로부터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25 전쟁 후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빨갱이들이 시골 사람들을 게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내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타살)했다는 것입니다. 외삼촌 두 명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있은지 3일 후 완도는 해방 되었고 내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27명은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 까지 지낸분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살 박이인 나를 업고 완도 경찰서 서장실을 찾아가 “동네사람들을 한명도 죽여서는 안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 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 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 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 했다고 누님이 말해주었습니다.

“내 아들의 원수는 27명이다. 나라에서 이 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데 이 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적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사람 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내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수염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나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나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춘이 어린 나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내 어버지를 죽인 죄책감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있는 곡식부터 걷어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한(恨)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윗사람 노릇하기 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를 돕다.


완도 중학을 졸업한 나는 완도 수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대처인 광주로 나가 숭의 실업고교에 진학하고 1968년 조선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누님으로부터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들은 것이 이때였습니다.

못 배운 사람들을 가르친 것이 죄가 되고 6.25 동란 중에 빨갱이 손에 죽은 아버지를 1949년에 병사(병사)한 것으로 허위 기록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공부가 싫었고,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미웠습니다. 실의에 빠진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반 건달 생활을 1년간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4H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완도군4H연합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1970년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완도 특산물인 해태(김)를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듬해 내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내 결혼식 주레를 맡았던 분이 완도 출신으로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한 김선태(金善太)씨 였습니다. 이 분이 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김선태씨는 전남 보성, 장흥, 강진과 해남 지역의 유세 독려반 책임자였습니다. 김선태씨는 나보고 “호남 지역의 젊은 지도자들이 호남 출신 대통령 탄생에 일조를 해야 한다”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내 나이 스물 세 살이었습니다. 나는 사업을 잠시 접고 신민당 완도군당 선전부장 겸 김선태씨 보좌역이 되었습니다. 도시락을 사들고 다니며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유세차 현지에 내려온 김대중 후보를 먼 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환감했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우리 호남인들에게는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는 나에게 혹독한 후유증을 가져 왔습니다. 가산을 몽땅 쏟아 부은 해태 사업이 선거를 쫓아다닌 바람에 망해버려 하루 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방황하고 있던 나는 친지의 소개로 대구에 있는 신성무역이라는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고향에서는 도저히 재기할 방법이 없어 가족을 버려두고 홀로 객지로 나갔던 것입니다. 그 때가 1972년 이었습니다.

신성무역은 대일 “홀치기”무역회사였습니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을 한 옷과 허리띠를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 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지만 값이 비싸, 그 당시 “효자 수출품” 이었습니다.

내 신분은 공원 겸 견습사원이었습니다. 이 직장을 제 2의 인생이라 생각한 나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습니다. 1972년 석유파동이 터졌습니다. 기름이 없어 공장을 가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 C油를 구하기 위해 전 직원이 외지에 출장을 다녔습니다. 나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유공 대구지사 소장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소장에게 나는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유공 대구지사 소장은 “회사 간부들에게 인정 받고 싶은 게 당신의 진짜 소원이냐”고 묻고는 한참 후 봉투 한 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리터 짜리 기름 한통을 겨우 구입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군수 월급이 1만 5천원인데 나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대구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습니다.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장사를 하면서 거금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가산을 거의 보충했습니다. 아버지 제사 지내려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끝으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정도 회사원 생활을 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신문기사

나는 1978년 김선태씨의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습니다. 김선태 씨가 양일동 (梁一東)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 였습니다. 나에겐 인권 부국장이란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김상현(金相賢)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에서 부장직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충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서거함으로서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나는 내가 존경하는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10일자 신문을 보면서 나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일자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 매일 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김대중씨는 김해 김씨가 아니라 윤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금산제(金山祭)가 1980년 5월 9일 경주 인근인 흥무왕릉에서 열렸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초헌관(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김대중씨는 일반 제관으로서 검은 색의 제복을 입었다. 이날 아침 대제(大祭)가 열린 흥무왕릉 앞에는 김대중이 아닌 윤대중이라는 풀래카드가 나 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8][9]

선생님이 김해 김씨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윤대중”이라니요 가당찮은 소리 였습니다. 선생님에게 대통령 챤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명을 다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한(恨)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 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어 드리는 일이야말로 내 숙명이라 생각했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나는 이들의 말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었습니다.

성(姓)씨 문제는 김대중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성씨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김대중 선생은 너무나도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년간 그를 따라 다닌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하면 내가 직접 하의도로 내려가 확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그의 정적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줘야겠다는 것이 “김대중 출생비밀”을 추적하게 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어머니 때문입니다. 6.25 전쟁 중에 빨갱이들 손에 남편을 잃고,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나 하나를 보고 살아 왔습니다. 내가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판에 무엇 하나라도 열심히 할 생각은 안하고 맨날 김대중씨를 따라 다니며 뒤치닥거리만 하는 나를 어머니는 못내 걱정하였습니다.

내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김대중씨와 다시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같은 성격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더욱이 사상도 온전하지 않는 김대중이를 따라 다닌다는 것은 무덤파는 격이다. 제발 조심하거라”

나는 이 작업을 통해 김대중씨는 사상이 불온한 분이 아니고 정적의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이 일을 끝내는 순간, 나를 제일 잘 안다는 나의 어머니에게 “김대중씨는 모함을 받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심은 했지만 나는 바로 하의도로 내려 갈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 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년 5월 말에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광주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이경식(李京植 자유 언론수호 국민 포럼 대표)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 청량리, 잠실, 영등포 일대의 전화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나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 형무소에는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포고령 위반사건으로 구속된 김홍일, 한화갑, 김옥두, 함윤식씨 등이 수감돼 있었습니다. 나는 정통 동교동 맨은 아니었지만 광주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무렵 김대중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고 이희호 여사가 아들 김홍일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었습니다. 광주 사태로 고생한다며 이 여사가 나에게 귀마개하고 벙어리 손 장갑을 넣어주어 참 고마웠습니다. 고맙다는 편지를 썼더니 이 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주었습니다. 김홍일씨는 나와 동갑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출소 후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자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습니다. 거기서 번 돈으로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 하나를 인수했습니다. 전국 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지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인수 1년만에 전국 10위 권으로 올려 놓았습니다. 서울 강남과 경기도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개척한 결과였습니다. 내 활약상은 미원 사보에도 소개되었고,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습니다.

사업이 성공하자 나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습니다. 한국 정치범동지회 대변인을 맡았고 1985년 민추협(민주협)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되었습니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 이었습니다. 쫓기고 숨어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나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습니다.

1987년 후반 경, 수 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 나는 졸지에 망했습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읍니다.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해 국회의원 출마를 고려하던 시절인데, 부도를 수습하느라 정치는 뒷전이었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겨우 빚을 수습한 후,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나는 그 동안 미뤄왔던 하의도 행을 결심했습니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 산께이 신문의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 기자를 찾아갔습니다. 김대중씨가 김씨가 아니고 윤씨라는 책을 쓴 사람이 시바다 기자였기 때문에 그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습니다[1].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 주한 일본 대사관 등을 무대로 활동한 시바다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정동에 있었습니다. 나는 사전 연락도 없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 시바다 기자에게 그가 쓴 기사를 던져주며 서투른 일본말로 몰아세웠습니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요?” 나의 흥분한 모습에 시바다 기자는 놀란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유창한 우리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 정치범동지회 대변인 손창식이란 사람이요.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하고, 사형선고를 받아 옥살이 까지 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니요. 당신이 신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기사를 신문에 연재했기 때문에 당신은 전두환 소장의 1등 첩자요. 당신을 국제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 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김대중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 보았자 소득이 없었습니다. 나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준 호적초본을 들고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나는 청계천 세운 상가에 가서 상의 옷 주머니에 숨길 수 있는 소형 녹음기 하나를 구입했습니다. 17만원 짜리 인데 자동 되감기 (오토 리버스) 장치가 되어 있어 테이프를 교체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시간 동안 녹음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1988년 4월, 나는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향해 떠났습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서, 목포 연안부두에서 하의도 행 배에 올랐습니다. 하의도는 목포항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어서 배가 하루에 한 번만 다녔습니다. 목포에서 하의도 까지의 거리는 37.8 Km인데 도중에 안좌도, 장산도를 거치기 때문에 네댓 시간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소형 녹음기 한 개를 들고 갔는데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내려갈 때부터는 녹음기 세개를 준비했습니다. 한 개는 상의 옷 주머니에 넣고 또 한개는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개는 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습니다. 세 개를 동시에 틀어놓고 시험해 보니 한 두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하의도는 국내 최대 소금 생산지입니다. 국내 염전의 61%가 전남에 집중해 있고 전남 염전의 89%가 신안군에 몰려 있는데, 비금도, 신의도, 하의도가 주 생산지였습니다.

하의도를 찾아가다.

김대중씨의 고향 후광리는 일제시대 유명한 염전이었는데, 그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물이 빠지면 일대가 온통 염전이고, 물이 들어오면 주변의장병도(長柄島)가 길게 병풍처럼 에워싸, 모세의 기적처럼 썰물 때는 땅이 붙고, 밀물때는 갈라지는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낙지 중에서도 별미로 치는 뻘 낙지를 잡을 수 있는 곳이 하의도 였습니다. 뻘 밭을 달리는 꽃게, 화랑게, 동게가 지천이고 갖가지 조개들이 서식했습니다.

주막집에서 태어난 김대중씨는 대의(大義, 1997년 사망), 대현(大賢)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 장노도를 모시고 후광리에서 살았고, 그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은 이곳에서 산 하나를 넘은 대리(大里)에서 김순례씨와 살았습니다. 대리는 하의도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면사무소와 천주교 성당이 위치했습니다.

김대중씨가 유년 시절 다녔다는 서당은 후광리에서 소금 방죽을 거쳐 야트막한 산 하나를 넘는 10리 길이었는데, 이 서당 역시 대리 마을에 있었습니다. 장노도는 후광리에서 세 아들을 독자적으로 키웠습니다. 그녀는 자식들이 학교 갔다오는 길에 대리의 김운식 집에서 놀거나 자고 오면 호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김대중씨는 김운식과 가까이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934년 하의보통학교가 개교하자, 서당에 다녔던 김대중씨는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이 학교에는 일본인 교장과 조선인 출신 교사 등 2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대중씨는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37년 목포로 이사가 목포 제일 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목포로 이사갈 때 장노도는 자기가 낳은 세 아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목포에서 그녀는 여관을 운영했는데, 하의도에서 살았던 김운식은 틈이 나는 대로 목포에 나와 이 여관에 머물며 고향 사람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김운식은 1974년 2월 25일, 하의면 대리 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김운식의 외아들 김대본씨가 이 보다 2년 전인 1972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집안의 가장 맏이인 김대중씨가 상주 역할을 하는 게 가문의 기본 예절인데 김대중씨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다음은 녹취록 입니다. 일상적으로 나눈 대화는 생략하고, 출생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손창식(孫昌植) 녹취록

김대중의 어릴 때 이름은 윤성만

김용철씨 인터뷰 기록 (남, 67세 1988년 4월 중순)

Q: 그러면 아저씨가 혹시 일본 사람, 그러니까 신문쟁이라는 사람을 혹시 만난적이 있습니까?

A: 아니오, 나는 그런 사람 모른디요.

Q: 아니, 아저씨는 김대중 선생과 초등학교 같이 다녔으니까 몇 년전에 일본신문에 나왔던 얘기하고 비슷한 말씀을 하시니까 혹시나 해서요.

A: 그러니께, 하여간 김대중이는 어렸을 때 윤성만이었고 항상 우리들 대장이여.

Q: 어떤 대장인데요?

A: 지가 대장이라고는 안했지만 우리들이 대장처럼 항상 앞장 세웠제.

Q: 가령 뭣을 하면서 주로 놀았는가요?

A: 지금 우리동네 앞이 뻘밭 아닌가벼. 저 뻘 밭에 옛날에는 고동, 반지락, 낚지, 없는 것이 없었제. 물이 빠지면 (썰물) 어쩔때는 숭어도 나왔는디 숭어같은 고기는 어른들이 갱메기, 그러니께 그물을 쳐 놨다가 물빠지면 잡았거든. 그 어른들 따라 댕김서 한참 놀다보면 옷이란 것은 전부 뻘 범벅이고 눈도 코도 안 베제.

Q: 그러면 김대중 선생님은 그때 그런 것 많이 잡았습니까?

A: 김대중은 작난같은 것은 별로 안했고 우리가 잡은 것도 조금씩 놔눠서 성만이 한테 모아주고 그랬제.

Q: 아저씨 말고 아까 그 같이 놀았(다)던 친구분은 지금 뭣 합니까?

A: 그 사람은 일찍 죽고 없어. 그 사람이 컸으면 잘 됐을 것인디.

Q: 그럼 또 누구누구가 있습니까? 현재 살아 있는 분은

A: 000 사는 000, 그라고 000,000

Q: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놀다가 소도 띠기고 풀 베고 하는 일도 하고 그랳겠네요?

A: 예끼 말이라고 해. 그때 우리 면에 소가 있는 집이 몇집이 없어서 소 띠기는 안 댕겼어.

Q: 그 때도 윤성만이라고 했으면 같이 큰 친구들은 다 알겠네요?

A: 2년 학교 댕기다가 갑자기 성만이가 목포로 전학 가브랬어.

Q: 몇 학년 때요?

A: 아마 그 때가 4학년 땐가 3학년 겨울 방학 지나고 학교 안나왔어

Q: 그러면 윤성만이 아버지가 윤창언인데, 윤창언이네 가족도 전부 목포로 갔습니까?

A: 아니여. 그 집은 그데로 있었고 성만이가 살던 집은 저기 000가 샀다고 그러고 갔어

Q: 그 때 담임선생은 누구였어요?

A: 000 아이고, 그 사람 대단 하셨어

한 시간쯤 지나자 노인은 가겠다며 일어났다. 내가 “얘기를 하다가 가면 어떻게 해요”하며 손을 붙잡자 “아니 그란디 젊은이가 이상하게 묻는 것이 여간 보통이 아니구마!” 라며 성가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재빨리 “아니 그러면 그 윤성만이 오늘날에 유명한 김대중이라고 알게 된 것은 언제 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은 잡은 손을 뿌리친 채 걸어가면서 “김대중이가 유명해지고 김가 호적에 옮겨졌는디… 우리(친구들)는 말 안하제” 라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나를 무시하고 금방 가버렸다. 주변은 적막하고 논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였다. 농번기여서 그 노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김대중씨와 그의 어머니 장노도가 목포에서 살았던 곳은 목포시 만호동 203번지의 영신여관이었다. 만호대라는 돌게단을 올라가 맨 꼭대기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째 집이었다. 훗날 금강여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내가 찾아 갔을 때는 다른 사람의 소유였는데 빈집이었다.


“김대중은 돼지띠여 (즉, 1923년생)”

김창석 씨 인터뷰 기록. (남, 68세, 1990년 4월 하순)

용철노인이 동창생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창석이란 분이다.  그는 꾸준하게 김대중의 정치활동을 지지해 왔다고 한다.  초 여름의 햇살이 따가운 어느 염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김대중씨에 대한 질문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신 중정(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질듯이 묻다가 내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다. 경계심이 보통이 아니엇다. 뭘 물어볼 때마다 그는 “무슨 소리를 나에게 묻는 거여!”하며 언성을 높였다.

A: 무슨 소리를 나에게 묻는 거여!

Q: 아저씨가 김대중 선생과 친했다면서요? 아저씨는 선생님을 언제 만나고 아직 못 만났습니까? 지금도 김대중 선생을 열열히 지지하고 행여 손해는 없으신가요?

A: 그라믄 젊은이는 김대중씨하고 같이 징역도 댕겠구마. 고생들이 많소. 이 면에 함부로 말했다가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디 성만이 얘기는 하지 말어.

Q: 성만이 얘기가 아니고 김대중 선생의 어릴적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서 왔지, 무슨 염탐하러 온 것 아니니까 기억난대로 말씀해 주세요.

그는 10여분 가량 말을 하지 않았다. 화제를 돌렸다.

Q: 아저씨는 그럼 김대중 선생이 71년 처음 대통령 입후보 했을 때도 열열지지 였겠네요?

A: 지지하지 않한사람 몇이나 있간디. 거의 전부가 지지했제.

Q: 그럼 아저씨 그, 때 박정희는 뱀띠(1917년생) 였었고 김대중 선생은 돼지띠(1923년생) 였는데 아저씨는 무슨 띠세요?

A: 나는 두살 적게 먹었은께 소띠제.(1925년생)

Q: 김대중 선생은 이제 25년생이라 그러니까 아저씨 하고는 동갑이네요.

A: 예끼 아니여. 김대중이는 돼지띠여. 아 그런께 그때(71년) 대중이가 얼마나 말잘해. 다른 짐승은 전부 뱀한테 지지만 돼지란놈은 뱀을 그냥 먹어버려. 아, 독도 있는 디 참 희한하제. 돼지는 뱀을 참말로 먹어! 아, 나도 어렸을 적 뱀 잡아다가 우리 돼지를 주면 막 돼지가 지근지근 먹어번진디.

Q: 그러면 김대중선생이 돼지띠라 그런가요?

A: 아 젊은이가 왜 자꾸 했든 말을 또하고, 또하고 그려. 우리 친구들이 야, 대중이 참말로 말잘한다. 촌놈이라 저런 것도 알고 그랬제. 박정희를 받아 치는디 기가 막히더마.

Q: 그럼, 김대중 선생은 시골서 10살까지 밖에 안 살았는데 어떻게 그런것을 알았을까요?

A: 글쎄말이여. 참말로 기가 막히게 말 잘하더만.

그때 저 멀리서 사람 둘이 걸어오는 것을 본 노인은 나를 전혀 모른 척 외면하고 그들을 쫓아 달아나듯이 가 버렸다.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분일 것 같아 한 시간 가량 말을 부쳐 보았지만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근처 양파 밭에서 일흔 정도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혼자 일하고 있었다. 새참 가져온 물이라도 얻어 마실 양 다가 갔다.

윤용순씨 인터뷰 (여, 70대, 1990년 4월 하순)

Q: 양파는 염분기가 있어야 잘 되는가, 목포, 무안, 신안 이쪽은 거의가 양파를 많이 합니다.

A: 그것은 모른디 모두가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많어요

Q: 물 한잔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근데 왜 할머니 혼자 심심하게 밭에 나왔어요? 품앗이라도 하셔서 동네분들하고 같이 하시지요.

A: 우리같은 늙은이 하고 누가 품앗이 한다요. 그라고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 품앗이 같은것 없어요.

Q: 할머니 물병가져 오셨어요? 물 한잔 얻어 먹게요.

A: 고뿌는 없제마는 쩌 꼬랑에 수건 밑에 있는디.

Q: 아이구 할머니 오늘 날씨가 더워지네요. 저하고 얘기하며 쉬었다가 허리도 펴고 하십시요.

A: 젊은 분은 어디서 왓오. 여기는 뭣하러 왔오. 이 섬에 누구 친척을 만나러 오셨오?

Q: 아, 예, 아니 저는 완도 사람인데 김대중 선생 모시고 서울 삽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노태우 그런 사람들이 자꾸 김대중 선생을 일본놈들 하고 같이 김대중이는 윤성만이다 하고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뜨리니, 어제 오늘도 아니고 수십년 전부터 그렇게 공격하여 대통령을 자꾸 못하도록 하니까, 내가 이번에 조사를 해 보고 서울가서 요놈들 공격을 할려고 합니다.

김대중이란 이름이 나오자 친절하게 물을 주던 노인은 금방 표정이 바뀌고 밭일 하다 말고 호미를 들고 집에 갈 요량으로 준비하지 않는가.

Q: 할머니 제가 같이 거들어 드릴께. 이렇게 하면 되지요?

A: (한참 침묵하다가) 그런 것이면 남자분들한테 물어보제…

Q: 할머니는 이 동네 오래 사시다가 결혼 했겠네요.

A: 여기서 낳고 컸제

Q: 할머니 그러면 김대중 선생하고 나이가 비슷하시겠다. 지금 몇이세요?

---묵묵 부답---

Q: 할머니는 김대중씨한테 많이 맞았지요? 여자니까.

A: 우리는 같은 동네가 아니라 맞지도 않았고 잘 몰라.

Q: 그래도 같이 이웃마을에서 컸으니까 잘 알것 아니여요?

---묵묵부답---

갑자기 할머니는 일을 끝내고 일어서 가신다---

Q: 할머니 일 안하고 가세요?

---묵묵부답---(성가신듯 황급히 치마를 털고 가면서)

A: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누구를 난리를 칠라고. 여보시오 싸게 가시요.

사근사근 하시던 할머니가 표독하리만큼 화를 내며

A: 날 더운디.

그리고는 민망스럽게 가 버렸다.  다시 따라 가면서 할머니는 윤씨냐? 고 물었으나 말이 없다가

A: 내가 윤가요. 나한테 오지말고 저리가요. 별 개새끼들이 다…

표독스런 욕을 퍼 붙고는 가 버렸으나 나중에 그가 윤창언씨와 0촌되는 사람임을 확인하였다. 동리를 다 가서는 저 멀리 담장밑에서 한참동안 내가 걸어가는 광경을 주시하고 게속 몸을 피하면서 보고 있었다.---

본 재판이 시작되면서 그 노인은 일본인 [시바다 미노루]와 또는 안기부 직원에게 많은 얘기를 했던 00의 본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91년 항의차 [시바다 미노루]를 찾아가 뭣인가 취재원 중의 한 여인을 지목하여 말하든 그 00여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99년 설날 현재 아직도 그분은 생존해 있었다.

나는 그날 면사무소 앞에있는 여인숙에서 하루를 자기로 하고 창석이란 노인을 다시한번 집으로 찾아갔다.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소주 3병과 마른 안주, 또 선창가에서 갓 잡아온 낙지 4마리를 사서 그 분을 찾았을 때는 집에서 친구분과 술을 들고 있어서 술과 낙지를 드렸다.

그러나 낮에 보다도 훨씬 냉정하고 눈길한번 주지 않았고 분위기가 여간 귀찮고 같이 있는 친구에게 뭔가 들킨기분이였으므로 대화를 포기하고 돌아왔고 면사무소에 들려 호적초본과 윤창언씨의 제적원부를 신청해 보기로 하고 다방에서 직원과 차한잔을 나누었으나 그는 말도 못 붙여보게 단호히 거절하며 큰 소리로 나를 면박을 줘서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 때는 본인에게만 호적 관련서류를 발급했을 때였다.


배 안에서 만난 한 상인의 증언

다음날 아침, 목포로 가는 배 시간에 맞춰 부두에 갔으나 사람만 웅성웅성대고 있었다. 배가 고장이라는 것이다. 당시 목포와 하의도를 오간 여객선은 낡고 속도도 느렸다. 지금처럼 배에 자동차를 실을 수도 없었고, 도중의 섬이란 섬은 다 들어가 사람들을 실었기 때문에 목포까지는 네댓 시간이 소요됐다.

한참을 가다린 후 배에 올랐다. 배 안은 삼삼오오 화투도 치고 나도 한 목 끼어서 화투를 치는 데 우리판에 끼어든 60대의 아저씨와 나는 한 시간 가량 놀다가 그만 두고 둘이 얘기를 놔눴다. 그런데 나의 짐 속에 녹음기가 깊이 들어 있어서 녹음을 할 수 없었지만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그 사람은 하의도 사람인데 약 15년전 각 면에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화제는 김대중 선생과 하의도로 옮겨갔고 그는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김대중선생의 집안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사망한 김대중씨의 이복 형 김대봉씨의 친구가 어느 마을에 살고 있고, 또 다른 어느 마을에는 김대중씨의 이복 누나 남편이 생존하고 있음을 알았다. 대리 마을에 사는 김해 김씨 문중 어른이 김대중씨 출생 과정을 잘 알고 있으며, 오림리에는 김대중씨의 생모 장노도의 조카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한테 주소와 전화번호까지도 알았음으로 이번여행은 큰 수확이었고 안기부와 [시바다 미노루]에게 취재원을 제공한 사람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도 바꿨다. 하의도 사람들은 김대중씨 집안 이야기라면 일단 경계부터 하는 분위기여서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김대중씨 집안 사람들을 접촉하기 전에 이들의 친척이나 친구들을 먼저 접촉하여, 시간이 걸리더라도 외곽에서부터 서서히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목포에서 그와 그날 저녁 밥을 먹고 나의 여관에서 하루밤을 같이 지내기로 하고 그 분이 술을 좋아했고, 뜨내기 장사꾼 답게 입담이 좋앗다. 사귈수록 선량한 사람이었다. 내 주량은 맥주 한 잔이지만 즐겁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 분은 내가 10여년을 탐사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그와 나는 돈독한 우정으로 지내며 나에게 어쩔때는 감동하기도 하고 불쌍하다며 위로를 보내준 나의 유일한 팬이다.

하의도를 다녀온 석달 후 나는 다시 낚시꾼 행색으로 하의도에 살고있는 용호씨를 만났다. 그는 70대 초반으로 사망한 윤창언씨와 인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김대중씨의 어릴때 이름이 왜 윤성만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손재주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그를 만나면 김대중의 출생장소와 내력을 자세히 알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가 멍청해서 아들을 뺏겼어”


김용호, 점례씨 인터뷰 기록 (남 70초반, 여 70 초반, 1990년 7월 중순)

Q: 어른 께서 손재주가 많다고 소문 듣고 망가진 낚시대와 손전등 그리고 라듸오를 좀 손 봐 주시라고 왔습니다.

A: 라디오 방에나 그런 데로 가야지 늙은 사람 한테…

Q: 아저씨는 원래 여기서 사셨어요?

A: 아니제 인근 섬에서 살다가 이곳에 왔오

Q: 그러면 장가도 이곳에서 했겠네요

A: 아니여 다른 섬에서 스믈 하나에 결혼했오

Q: 생활이 썩 부자신 것 같은 데요

A: 몇년전 까지는 괜 찮았는디 자식도 가르치고 시집보내니 이제는 먹고 살 정도밖에 안되요. ….

Q: 그러면 김대중씨에 대해서도 잘 알고 내막도 잘 알겠네요

A: 자세히 들어 알지만은 나는 말할 수 없제. 그런 말은 묻지 말어.

Q: 아저씨, 그래도 아저씨는 윤창언씨와 남이 아니니 김대중씨 도움도 받고 그렇겠네요

A: 도움은 무슨 도움, 그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못된 사람들이제.

Q: 김대중씨가 윤씨가 확실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요?

A: 매일같이 내 마누라가 욕을 하든디.

Q: 할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A: 광주 새끼들한테 갔는디 오늘이나 올 것인디, 아직 안오고 있어. 빨리 올 일이지 왜 안오는지 모르겠구마---

Q: 할머니는 그러면 자세히 알 것이고…아저씨 고칠동안 오셨으면 얘기좀 들어 봤으면 좋겠구만요. 저는 이곳에 김대중 선생과 이런 친척분이 살고 있다는 것도 의외고 또 윤씨와 친척이라니하두 이상해서…

A: 우리집 사람은 그런 얘기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사납게 얘기해 붕께 얘기안혀.

아저씨는 온 동네를 뒤져 철사 줄과 나사못을 구해 정성스럽게 낚시대와 손전등을 고쳤주었다. 듣던 대로 아저씨의 손 기술은 대단했다. 할일 없는 시골에서 일거리가 생기니까 아주 재미 있는 듯 했다. 라듸오는 납땜이 떨어졌다며 숫불에 납인두까지 구해와서 고쳐 주었다. 그러고 있는데 할머니가 수박을 들고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도 70대 초반으로 보였다. 할머니는 사온 수박의 속을 긁어내 얼음을 넣고 화채를 만들어 내 왔다. 화채를 먹으면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Q: 할머니!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기다리느라 지쳐 게신데 왜 그렇게 열흘이 다 되서야 오시면 할아버지 진지는 어떻게 합니까?

A: 저가 없어도 혼자 밥도 잘 해먹고 여기저기서 얻어먹기도하고 술도 잘 먹고 한께 더 편하제라우

Q: 할머니는 김대중선생이 윤씨라면서요?

A: 누가 그런소리 해요?

Q: 들어서 알아요.

A: 저 영감택이가 또 헛소리를 했구마. 술도 안 먹었구마는 또 뭔 헛소리를 해서 오자마자 사람의 복장을 뒤집을꼬?!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소. 뭐 일 다 봤으면 어서 가시요. 우리 동에 사람도 아닌 젊은 사람인것 같은데. 일 다 봤으면 어서 가시요. 저 영감이 도데체 그렇게 그놈의 집구석 얘기는 하지 마라고 했는데, 또 무슨 얘기를 모르는 아저씨 한테 했을까!

Q: 할머니 고정하시고 저 아저씨는…

A: 시끄럽소! 아저씨는 가시요 영감, 000아부지 어디 갔을까 이놈의 영감!

Q: 그러면 할머니는 윤창언씨 몇째(딸이)신데요?

A: 그것도 몰라요. 왜 그렇게 나에게 알라고 야단일까! 그 김가놈들 땜에 빨리 이곳을 떠나야제. 젓같은 것들이 대통령되면 뭐고 즈그 김가 따라 갔은께 우리하고 연관지을것 뭣이간디. 우리 아부지가 팔자 사나워서 허 허 흑 흑… (울다가) …멍청한께 호적에 빨리 올렸드라면 아들도 생기고 또 아들도 안 뺏기고…여보시오 속 뒤집지말고 가랑께라우…영감 00아부지…

할머니는 울다가 영감을 찾으러 옆집으로 어디로 야단이고 나는 더 있을 수가 없어서 아저씨에게 수리비, 술도 한잔 대접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동네 회의에서 객지사람에게는 말 안 하기로 했어”

유병하씨 인터뷰 기록(남, 1990년 12월 7일)

유병하씨는 김대중씨의 배다른 형 김대봉씨와 잘 안다는 사람이었다.  나는 김대본(혹은 대봉)의 묘소를 둘러보고 난 다음 병하씨를 찾아갔다.

Q: 김대봉씨가 돌아가셨는데. 어쩐 사람은 불쌍하게 일찍 세상 떠났다고 그러고 어쩐 사람은 술병나서 죽었다고 그러는데 왜? 그렇게 일찍 죽었습니까? 무슨 병인데요?

A: 사연이 복잡해. 그고 저고 김대중이는 지금 어느나라에 있능교? 어쩐 사람은 미국에 있다고 하고 또 영국에 있단 사람도 있응께. 그러나 그 사람 오만것 다 해 보구마. 젊은 분은 김대중이 좋아 따러 다녔응께 아무것도 못하고 큰일이구마. 김대중이 땜에 신세 조진 사람이 한 둘이여야제. 망한 사람은 또 그 숫자도 모르겠제. 김대중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봉이네 식구와 자식들에게는 그라믄 안돼제. 지금 대봉이 어멈(부인)이 서방죽고 나서, 영감(김대본 부친인 김운식)과 할멈 (김대본의 모친 김순례)모시고 새끼들하고 거 참. 고생 숱하게 했오. 그래도 김대중이는 쌀 한톨, 영감 괴기 꼬랑지 한번 안 사줬을 꺼구마. 영감도 불쌍하제. 할멈(부인 김순례)까지 잃고 늙어서 설움 많이 받고 살았구마.

Q: 아저씨 술 한잔 드세요. 제가 지금 대봉씨 산소에 갔다가 술한잔 따르고 오는 길인데 한 병 더 샀으니 안주가 없지만 술 한 잔 드세요!

A: 그렇지 않아도 목이 텁텁한디. 어참 잘 됐소. 내 부엌에 가서 안주거리 김치하고 잔을 가져올께

Q: 그래서 선생님을 따르던 저희들이라도 이렇게 선생님 일가친척을 찾아 보살필라고 다니지 않습니까?

A: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다고 무슨 말 함부로 못해. 이태 전인가 작년인가 젊은 사람이 동네사람 여럿 있는디 면사무소에 가 김대중이 대본이 호적띠러 면사무소 갔다가 망신 당했단 소리 못들었소? 빰까지 맞았다 하든디. 동네 사람들은 다 알제마는 객지 사람들에게 말 안해. 동네 회의까지 있었응께. 누구도 김대중씨 얘기하지 말자고. 일본 신문에 근 1년간이나 연재되고 책도 일본말로 나왔는디. 도대체 그럴싸하게 썼드라고 하든구마. 그런디, 그것이 아 안기분가 어디서 조사해다가 줬다구마. 나도 젊은 사람이 김대중이하고 같이 감옥에도 댕기고 했다 항께 이런 말 하는디, 어디가서 함부러 말하지마. 귀딱지 맞고 망신당항께.

Q: 김대중선생과 대본씨는 사이가 좋았다면서요?

A: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듯이) 누가 그래? 사이가 좋아? 여보시오 사이가 좋았으면 대봉이가 미치깽이 술주정뱅이 처럼 살다가 죽었겄어?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쓸데 없는 소리는…

Q: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저씨 날도 저물고 추우니까 저하고 같이 술집에 가서 시원한 탕하나 시켜다가 저하고 같이 여관 방에 가서 말씀좀 하시죠. 아저씨가 대본씨하고 친구분이라 젤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씀하신 것 같으네요.

A: 그럽시다

논둑길을 걸어오면서 아저씨는 술기운이 드는지 말을 많이 했다. 부둣가에 잡아둔 여관에 불을 따듯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근방 식당에서 불고기와 생선매운탕을 시원하게 시켜놓고 옆방에 손님이 들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아저씨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A: 김대중이가 원래 태어난 곳이 여기서 얼마 안 멀어. 걸어서 20분 정도 걸릴까 그래.

Q: 그러면 아저씨, 방도 아직 춥고 식당에다 시켜놓은 음식 천천히 1시간 후에 갔다 달라고 하고 춥지만 같이 한번 그 동네 가 볼까요? 길은 좋습니까?

A: 그래, 그란디 여기 고물딱지 같은 차(영업용 택시)가 한 대 있는디 지금 있는가 모르겠네. 내가 나가서 한번 알어볼께

Q: 그래 주십시요

가다 말고 다시 내게로 와서 귀에 입을 대고, “택시 타거던 어디간다, 김대중이 그런 얘기는 일절말고 거기서 내려갔고 집만 내가 가르쳐 줄탱께 다시 차 타고 오기만 해요” 하며 밖으로 나갔다.

Q: 알았습니다.

라고 나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다. 아저씨는 김대중이가 태어 났다는 집 앞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A: 전에는 이곳이 거의 염전 동네여. 염전이 지금도 있지만 일제시대 때는 일본 배들이 많이 들락거렸제.

Q: 지금 부두보다 이곳이 더 번창했습니까?

A: 말도 못해. 이곳이 큰 부두였어.


김대중 식구를 원수처럼 여기는 사연

아저씨는 김대중씨의 생가 앞에는 하의도 선착장보다 더 큰 부두가 있었다고 말했다. 집을 구경한 후 세워놓은 택시를 타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선 후 나는 물었다.

Q: 아저씨 그런데 왜 윤가들은 전부 자기 “씨”라고 합니까?

A: 가만있어. 내가 그 내막을 여기서 같이 자면서 차분히 얘기할텐께.

소주를 큰(물)컾에다 따르고 두 잔을 마시고 나서…

A: 여보시오 당신 정보부 사람 아니제?

하고 다짐하듯 물었다. 내가 아니다라고 하자 그 분은 입을 열었다.

A: 그래서 당신이 대봉이 산소에 갔다 오던 길이고 해서 당신이 술한잔도 못해서 술맛은 안나지만 당신이 맘에 들고 대봉이 집 식구들한테 데리고 갈려다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내가 이곳까지 따라 왔제. 당신은 우리 전라도 섬 사람들이라 또 말이 통해. 그런께 대봉이가 김대중이네 식구를 원수처럼 여기는 내용이 거기에 있어.

대중이 아부지가 사실은 윤가가 아니여, 아니제. 아까(본) 저 주막집에서 와서 (김대중 어머니가) 윤가하고 놀아 났는디 석달만에 애기를 낳써. 그것이 대중이여. 대봉이 아부지 전에. 그리고 윤성만이라고 이름 붙여지고…내 얘기만 들어.

어른은 벌써 술이 취하고 있었다

Q: 천천히 드시고 저하고 같이 여관에서 주무시지요.

A: 그럽시다. 그라면 내가 집에 못들어 간다고 연락하고 화장실 갔다가 오께.

밤 12시 10분을 지나고 있었다.

Q: 그러니까 천천히 취하지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저는 내일 떠나가니 아저씨 취해불면 어떻게 해요

A: 그럽시다.

방이 따땃한께 술이 탁 취해부네. 지금 몇시여 (12시 10분이라고 일러줌)

Q: 윤성만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왜 김대중입니까? 말도 안된소리를 취해가지고 하시면 어떻합니까?

A: 예끼! 이사람이 이제 술첸사람으로 여겨불면 내가 기분 나쁘제. 나이가 나하고 근 30년이나 차이가 나고 내 큰 딸보다 적게 먹은 사람한테 거짓말을 해! 여보시오, 얘기를 그랑께 들어 봐.

Q: 아저씨 그러면 김대중선생 동생들도 있고 참, 누나들도 있었습니까?

A: 있었제. 아마 둘이였을께야, 둘. 나는 잘 기억이 없지만 대봉이는 잘 알아. 대봉이 처도 알고. 윤가는 원래 제갈성조의 형, 성복이하고 친구야. 단짝이었제.

Q: 그럼 누나들은 제갈씬가요?

A: 그라제. 제갈이여….그래 가꼬, 윤가는 아들 생기고 또 아들도 낳았어. 그것이 지금 대의여(金大義, 김대중의 바로 밑 동생, 1927년생). 크고 어른 될 수록 대의는 윤가, 윤창언이 얼굴을 쏙 빼 닮었어.

Q: 아저씨 그러면 윤창언이란 사람은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A: 있었제, 그랑께 들어봐. (여관 방문을 열어 누가 엿듣나를 확인하고) 윤가가 불쌍한 사람이여. 각시를 셋을 얻었는 디, 이 여자들이 들어오면 딸만 한 둘 놔놓고 죽어버려. 아마 그집 딸들이 여섯인가 되는디, 전부 배가 틀려. 그랑께 윤가는 좋아라 냅다 이름부터 윤성만이라 짓고 그랬제. 그리고 아마 4년인가 살었든갭이여. 그란디 왜 호적을 안 올렸든지 지금도 그것은 잘 몰라. 대봉이 살았을적 말에 의하면, 그 때 자기 아버지가 대중이 어므니(장노도)를 건드러 브랬든갑서. 주막집잉께 많은 남성들이 드나 들었고, 또 전에 대봉이 아부지가 돈 많고 술도 좋아하고 노래도 잘하고 잘 놀았제. 멋쟁이여. 돈도 많은, 목포에다가 여인숙도 차리고 왔다갔다하고, 여하튼 김운식어른이 그 집에 드나들자 윤창언이는 꼼짝못해. 아주 꼼짝 못하제. 늙어가면서도 꼼짝 못했어. 삥아리 세끼가 삥아리때 지면 어미닭이 되세도 못이기듯이 말이여. (이 어른은 술이 너무 취했고 나는 감쪽같이 테프를 갈아끼웠다) 그런디, 이 술집도 안돼. 왜? 김운식이가 맨날 차지하고 앉아서 술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 누가 술집을 와. 그란께 술집은 안하고 저 보리밭 내일 보여주께. 거기다가 김운식씨가 3칸짜리 집을 지어서 김대중이네는 그 집에서 컸어.

술이 취한 아저씨는 말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매우 정직한 분이었다. 내가 고생한 이야기를 듣고는 격분하기도 하고, 내가 무서운 사람 이라고도 했다.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본 신문이나 책에 쓰여진 김대중씨 출생 부분은 잘못 쓴 것이라고 말하고, 내 같은 사람에 의해 김대중씨 출생 문제가 똑바르게 정리되기를 희망했다.

나는 병하씨와 하루쯤 더 있고 싶었으나 경렬씨를 만나야 한다는 스케듈 때문에 아침 7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야 했다. 곤히 잠들고 있는 병하씨를 방에 남겨둔 채 선창에 나가 배를 탔다. 병하 아저씨께 봉투에 돈 5만원을 넣어 놓고 “감사합니다 다시 뵐때까지 안녕히 게십시요” 메모를 남기고 떠났다.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훗날 다시 올 것을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다..


김대중 어머니는 통이 큰 여자

김경렬씨 인터뷰 기록 (남, 75세, 1991년 2월 초순)

배는 하의도를 출발한지 1시간 30분만에김경렬씨가 살고 있는 섬에 도착했고 나는 어렵게 김경렬씨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지 여간 신체가 안 좋았다

Q: 건강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젊은 분들은 어데 갔습니까?

A: 아들 며느리는 바다에 가고 아무도 없오

Q: 하의도에 살고 있는 병하씨를 잘 아신다면서요. 이곳에 왓다가 우연히 병하씨를 만났더니 할아버지 한테 가면 잘 가르쳐 줄 것이라고 해서 찾아 뵜습니다. 몇 말씀만 여쭤봐도 되실지 할아버지 잘 들리세요 제 말이?

A: 잘 들리요. 물어 보시요

Q: 윤창언씨가 할아버지하고는 친척되시고 또 같이 생활도 한 적이 있으시다면서요?

A: 50살쯤 먹었을떼 한 7년 같이 지냈제. 그란디 무슨 일 있오. 그 사람(윤창언) 죽었어.

Q: 그래서 제가 그 분한테 오래전에 들었던 김대중씨가 아들이란 얘기를 그때는 흘려듣고 말았는데 요새 일본사람, 서울 사람들이 자꾸 김대중이가 “윤가”라고 해서 참말인가 하고 여기까지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시니 잘 알것 같에서 왔습니다.

10분 가량 말씀이 없더니,

A: 그런 애기를 이 늙은이한테 왜 물어? 나 몰라 그런거.

Q: 그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 혼내줄려고요. 괜히 거짓말을 하고 김대중씨를 모함하니 너무한 것 아니에요?

또 한참 있다가 그는 말했다.

A: 김대중이는 윤가가 아니고, 그 밑에 사람(김대의)은 자기 아들이라고 하드구마. 윤창언씨가 술 채면 술먹고 김운식이는 나쁜놈이라고 막 욕해. 그런 것은 하의도 사람들한테 물어야 잘 알제. 왜 여기까지 나한테. 늙은이가 뭘 안다고…

Q: 윤창언씨가 생존했을 때 할아버지한테 그런 애기를 했어요? 김대중씨 동생 “대의”가 자기 아들이라고요?

A: 잘은 모르지마는 윤창언씨가 아들이 없었어. 처복도 없고. 나중에 얻은 마누라 한테서 아들이 있었지만. 그라고 윤창언씨가 나보다 나쌀이 훨씬 많아서 자주 못 물어봤제.

Q: 그러면 왜 그때 김대중씨하고 대의를 바로 호적에 올리지 안올렸을까요?

A: 그 때 아마 큰 딸들이 있었고 윤창언이하고 주막집 관계 때문에 자주 다투고. 내 아들이니 누구 아들이니하고 싸웠등개비여. 그런 찰라에 술집은 잘 안되고 윤창언이 돈벌이도 안되고 돈은 자주 못갔다 줬으나 이름은 윤성 뭘라고 지어주고 그랬어

Q: 그러면 김대중씨 동생은 윤가가 틀림 없겠네요?

A: 그렇제. 김대중이는 자기하고 살기전 애기를 배갔고 자기 한테서 낳고, 그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라고 하제.

Q: 또 김대중씨 어머니는 딸들도 있었다면서요?

A: 있긴 있었다고 한디, 나는 그 딸들은 몰라. 그 때는 윤창언이도 모르고. 하의도에서도 잘 몰라. 좌우간 (윤창언씨는) 그 각시(장노도)하고 무척 싸웠다고 하드마. 그 자식들 때문에.

Q: 그럼 그 데리고 온 딸들은 제갈성조 딸인가요?

A: 맞어. 첫 남편 새끼들이제.

Q: 첫 남편 제갈성조 호적에는 없다고 하든 데요.

A: 왜 없어? 있었응께 제갈씨가 됐겄제. 아무튼 난 잘 몰라도 김대중이 어므니가 사납기도 했고 걸쭉한 사내처럼 그런께 통이 컸든 모양인디, 나는 그곳에 안 살았응께 잘 몰라.

Q: 할아버지는 김운식씨도 압니까? 김대중씨 아버지요?

A: 뭐! 김운식이가 왜 김대중이 아부지여. 그런말 하지말고, 내 몸이 좋지 않으니 하의도 김가들한테 가서 알어봐. 하의도에 가면 김00씨가 있어. 그 사람이 문중에서는 젤 어른이제. 가면 잘 가르쳐 줄 거이구만. 그랑께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묻지말고 가시오. 나 누어서 자야겠어. 아이구 머리야…

그리고 그는 아무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김대의는 우리 윤가 피여”

윤용하씨 인터뷰 기록( 여, 72세, 1991년 봄, 5월 하순)

김대중씨가 다시 한국에 왔다. 출생 내막을 정확히 알아서 선생님께 빨리 보고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바빴다. 하의도에 장기간 머물 생각으로 몇 벌의 옷과 낚시 도구, 배낭, 텐트 등 갖가지 도구를 챙겼다. 번갈아 행색을 바꾸기 위해 산그라스도 준비 했다. 간첩들이 꼭 이렇게 하지나 않을까 싶었다. 목포의 단골 여관에 짐과 옷을 맡기고 가벼운 차람으로 윤하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목포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섬에 사는 분이다.

Q: 할머니는 이곳에 언제부터 사셨는가요. 시집와서 쭉 살았습니까?

A: 아니제. 원래 시집은 하의도로 갔는디, 거기서 7년 살다가 또 다른 섬으로 이사 가서 10년 넘게 살았오. 그라고는 이곳에서 쭉 살지라.

Q: 할머니는 연세보다 신식여성처럼 아직도 정정하고 고와서 멋쟁이 할머니 말씀 듣었겠어요.

A: 멋쟁이는 무슨 멋쟁이. 젊어서는 그런 소리도 들었제마는..

Q: 할머니는 자꾸 아니라고 하시는데, 할머니의 아버지가 윤창언씨니까 저 김대중씨와는 남매간이 맞으시잖아요.

김대중과 남매라는 말에 놀라듯이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나서

A: 이 양반이 큰일날라고 큰 소리로…

Q: 그런 소리하면 누가 잡아가요? 그래도 할머니는 귀도 좋으시고 김대중 선생이 할머니보다 나이가 작아 어려서는 누님이라고 불렀다면서요? 어떻게 부르고 컸어요?

A: 누님이라고 불렀지마는, 그때는 핵교도 못 댕기고 컸어. 그리고 우리는 (각자 다른 섬에 살아서) 배를 타고 가야 볼 수 있은께 잘 못 봤제.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가 또 뻘섬에 작은 새 각시 얻어서 술집한단 소리가 듣기 싫어서 잘 못 봤어. (김대중은) 우리 집에는 한번도 안 왔어. 우리가 눈치도 하고 그럴깜시 (아버지가) 일부러 안 데리고 왔는지도 모르제. 대중이 어무니 (장노도)가 (우리 집에) 왔는지 안 왔는지는 몰라. 그란께 혹시 젊은이가 하의도 사는 내 동생 만난 적 있오?

Q: 아니오 만난적 없는데요.

나는 만난 적 없다고 발뺌했다. 작년에 양파 밭에서 일을 하다가 나를 만났다가 나에게 사납게 욕설을 하고는 담밑에 숨어서 나의 행적을 살폈던 그 할머니 이야기였다. 그 할머니는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부정했지만 실은 윤창언씨 딸이었다. 윤하 할머니는 말했다.

A: 그렇게 살금살금 염탐하듯이 댕기면 안돼. 일본신문엔가 뭔가 나고 나면서 부텀 저것들(김대중)이 사람을 시켜가꼬 욕을 하고 꼼짝 못하게 해서 우리는 통 말을 안할라고 하제.

Q: 아니 김대중씨가 어릴때 윤성만이라면 할머니 아버지 자식인데 왜 그렇게 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A: 김가놈들이 그란께 개새끼들이제. 내가 언젠가 우리 아부지(윤창언) 한테 한번 물어봤어 아부지가 그때 몸 편찮혀 누워 있을 땐 갑구마. “어째서 김운식이 저것들은 암말 안한디, 대중이 가깝단것들은 우리를 욕하고 못살게 한지 몰것다”고 그랬더니 아부지가 “다 내탓이다. 돈 없은께 그리고 그 때는 아들 볼 욕심으로 발한번 잘 못 디덨다가 이꼴이 뭣이냐. 앞으로는 상대하지 마라. 대의는 요즘 소식 오드냐? 그놈도 가끔 다리가 아프다고 그런다 하더라. 대중이 먼칠로 그 에미 내림인가 벼. 그래도 대의는 소식이라도 준께 어짜것냐. 느그들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라고 얘기하니까 확실이 우리 핏줄은 핏줄인갑다고 여기고 있지요.

Q: 할머니 잘 알았습니다. 할머니 한테 들은 말씀 절대 어디가서 안 할께요. 염려마십시요.

A: 그래도 우리 아부지도 새엄니(장노도) 들어와서 아들낳고, 그 놈(김대의)이 지금 어른이 다 됐는께 친정 뼈따구 노릇은 하고 있응께 좋제.

Q: 그런데 김대중이는 제갈가 쪽에서는 자기 핏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면서요. 제갈성조는 언제 죽었습니까?

A: 일찍 죽었고 그 딸이 아마 죽었단 소리를 들은것 같은디. 즈그 누님하고 나쌀 차이가 아마 7,8살 차이가 된다고 하드마. 그란께 제갈씨는 아니제. 주막집 하믄서 아부지 하고 좋게 지내다 낳쓴께 아부지가 우리 윤가 이름을 지어 좆째. 제갈가들은 괜한 트집이여. 제갈 딸이 아마 나보다 한,두달 더 많았다고 하제. 대중이가 나보다 다섯살이 적은께. 지금 75살이나 76살 됐겄쩨.

Q: 김대중씨가 돼지띠가 맞씁니까? 돼지띠가 아니란 사람도 있고.

A: 돼지띠가 맞어. 그랑께 전에 아부지가 자랑하듯이 “나는 돼지띠 아들이 있은께 부자로 살 것이다”고 술만 묵으면 해싸뜨마.

Q: 그럼 김대중이 어머니가 할머니랑 이뻐했어요?

A: 나는 딱 어렸을 적 장에 아브지 따라가서 한번, 단한번 그리고는 못 봤제. 한번은 데려가서 밥도 먹이고 하더만 나중에는 못본척 해 불드란께.

Q: 이뻣어요? 김대중이 어므니가?

A: 남들은 이쁘다고 하는디, 나는 그 엄니가 무섰어.

Q: 그럼 아버지가 (같이)자고 그런것도 못 보셨겠네요 할머니는?

A: 맨날 그 쪽에서 자꾸 몇일만에 한번씩 집에 오는디. 그 때 또 우리 아브지는 새 엄마가 있었었으니께 아브지하고 쌈해 싸았제. 김대중이 어므니땜세. 그런께 앞으로는 그런것 절대 우리쪽이다 묻지말고 댕겨. 우리를 남남보드끼 한디 우리하고 무슨 상관 있다고 자꾸 우리 형제간들 찾아 댕기고 그래싸노.

Q: 그래도 대의씨 하고는 서로 안부가 되고 왕래가 있으시다면서요?

A: 시끄럽당께.

할머니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A: 젊은 사람은 아닌갑구마. 내 동생네 와서 묻던 싸가지 없는 놈은 아닌것 같은께. 그런 몰상식한 놈이 어딧서. 내 동생이 쓰러질뻔 했다 하드마.

Q: 오래오래 사시고 건강하시면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돼서 “누님 청와대 오십시요”하면 뵐찌모르고 윤가 핏줄이면 찾겠지요. 너무 원망 마시고 건강하세요.

A: 대통령 대문 뭣해. 김가놈들은 즈그 피다고 하제 제갈가들 즈그 피다고 하제. 윤가 피를 갖고 서로가 날린디. 첫째는 우리 아브지가 호적에 못 올리고 학교 못 보낸 죄여. 두고두고. 내 생전에 피 심판이 어떻게 될지. 원센(원수)놈의 돈이여. 지금이나 예전이나 그래서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여. 여봐 씨도둑도 돈인께 해분것 봐.

Q: 아 참, 할머니! 김운식씨네 큰 아들하고 김대중씨는 몇살 터울이여요?

A: 한 동갑이라 하제, 한 동갑. 죽은 큰 아들이 좀 더 일찍 나왔다고 한디 자세히는 몰러.

Q: 김대중이가 목포에서 두번 국회의원 나왔을 때 할머니는 한번 강연 들어 보셨어요?

A: 아무도 모르게 유달국민학교에 몰래 가봤제. 사람이 많이 왔지만 두번째 나왔을 때도 서자새끼 서자새끼 해서 아마 300표밖에 못 얻고 떨어졌디야. 그렇게 김가씨 쓰다가 낭패당했제.

Q: 할머니 시장하신데 저쪽 식당에 가셔서 뭘 좀 드세요. 뭘 잘 잡습니까? 음식은?

A: 잡채를 좋아하지마는…

Q: 그럼 갑시다. 그리고 또 좋아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술도 한두잔은 하십니까?

A: 술은 못 먹는 당깨.

식당에서 주인과 손님들이 반갑게 할머니를 맞았으나, 노인은 일절 말없이 잡채 큰 접시 하나를 잡수셨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다시 목포로 갔다가 이틀 후 하의도로 갔다.


“고향을 내 팽개치고 하의도를 팔아먹고 다녀”

김성수씨 인터뷰 기록 (남, 75세, 1991년 5월말)

그를 만난 자리에서 먼저 지난 해 배 선실에서 만난 분의 얘기부터 꺼냈다.

Q: 어른 께는 죄송하지만 촌 노인네신줄 알았는데 상상외로 중년신사이십니다.

A: 어서 오시오. 마침 내가 심심해서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서…

Q: 일 그대로 하시지요. 어른 께 천천히 몇 말씀 드릴려고 왔습니다. 큰 집에는 사람은 없고 혼자 계십니까?

A: 전부 일 나가고 없제.

Q: 어르신 지금 제가 김대봉씨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인데 대봉이는 받을 奉자로도 쓰고 근본 本으로 쓰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A: 그냥 대봉이 대봉이 그랬제. 봉자로, 그러나 호적에는 근본 本으로 됐을 께구만.

Q: 아래에 있는 운식 어른 묘에는 김대중 선생 어머니 묘가 있고 상석도 잘 만들어 졌더라구요.

성수씨는 아무 대꾸를 않다가…

A: 젊은이 날씨 좋응께 산에나 갈라우.

하면서 방에서 옷을 챙겨 입고 나를 안내하여 산에 올랐다.

A: 아니 산을 가시면 이쪽 길인데 저를 따러 오시오. 김대중이하고 관계가 있고 이 늙은이 하고도 관계가 있는 산이 있는디 따라 오시오. 옛날에는 서당으로도 썼고 우리 면에는 그래도 귀한 산이요.

Q: 아 그러면 후광산 입니까? 김대중 “호”가 된 후광산.

A: 그렇게 얘기한 사람도 있어.

20분 가량 걸려 서당이있었다는 곳에 가니, 마을과 바다, 염전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져온 술과 안주를 내 놓고, 딸기를 싸온 것이 있어 골짜기의 깨끗한 물로 잘 씻었다.

성수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A: 젊은이 “삼종지도”란 말 들어봤오?

Q: 정확한 뜻은 모르나 三從之道란 얘기는 압니다.

나는 볼펜으로 노트에 三從之道란 한자를 적었다. 성수씨는

A: 젊은 사람이 낮 바닥(얼굴)만 예쁘게 생긴 것이 아니고 한문 글씨도 썩 잘 쓰네. 어디 한번 얘기해 보시오

Q: 여자는 어려서 부모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그런 뜻 아닙니까?

A: 그렇제. 김대중이 말을 듣자고 온 것 같은데 뭐가 궁금하오?

Q: 어른 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요즈음 이상한 얘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화가 나서 이렇게 어른을 찾아 자초지종을 알아볼려고 왔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에 두번씩이나 출마하고 사형, 감옥을 넘나든 어른한테 일본 언론과 한국에서, 심지어 국무총리까지 했단 사람들이 쌍스럽게도 김씨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김해 김씨라는 사람까지 합세하여 신문 TV까지 또 책을 쓴 몰지각한 사람까지 까발리고 있으니 한국도 아닌 왜놈들 신문, 책 에까지 실어지는 판국이니 이게 어디 나라꼴이, 또 김대중씨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른은 묵묵히 나의 얘기를 듣고 술만 마시다가

A: 젊은이, 젊은이는 고향이 어디여. 김대중씨는 언제부터 따라 댕겼어?

Q: 완도 출신이고 1971년 때 지금 완도 군수 그러니까 자칭 김대중씨가 매형이라고 하는 “차관훈” 군수가 선거 대책반 조직부장이었고 제가 선전부장을 지냈습니다. 金善太 초대 무임소 장관을 모시고 김대중 선생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했다가 그 중간에 약 8년간 직장생활도 했습니다. 다시 정치에 입문하여김대중 선생을 지금껏 모시고 있는데 감옥도 1년 3개월(광주 사태) 갔다오고 별 짓을 다해 봤습니다.

A: 김선태 그 분 참 훌륭했어. 지금 작고했겠지 그분 본은 무엇인고?

Q: 금릉 김씨인데 완도에서는 청산도에 많이 집성촌으로 살고 있으시죠.

A: 그랑께 김해김씨는 아니구만. 아까 삼종지도라는 얘기를 또 하게 되구만. 김대중이가 나쁜사람이여. 이곳에도 여러사람 망쪼들게 했어 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A: 아버지가 제갈가이건 윤가이건 김해 김가이건 그 중에 한사람은 대중이 아부진디, 대중이는 아버지는 고사하고 고향도 땡게불고 지 혼자 하의도 팔아먹고 다녀. 하의도가 그렇다고 김대중이 때문에 손해본 것은 없제마는 정부에서 덕 본 것도 없어. 군이나 도청에 부터 하의도는 김대중이다 해서 예산도 없제 그게 문제가 아니라 대중이를 여기 사람들은 “요술쟁이”라 불러. 요술 부리는 요술쟁이. 거짓말에다가 꾀가 많고 남을 둘려먹기를 잘항께. 그래서 요술쟁이여.

Q: 아니 어른 께서는 제갈가라고 하셨는데 제갈가는 또 무엇입니까?

A: 이 면에서는 윤가 윤성만이라고도 하지만 나이많은 사람들은 제갈가라고 하제.

Q: 왜 제갈가라고 합니까?

A: 제갈 성조란 사람한테 대중이 어므니가 시집을 갔어. 거기서 딸 둘을 낳고 제갈성조는 10년만엔가 죽었어. 그런데 그 집이 나란히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큰 집 작은집이 살았지라. 그랑께 시숙이 죽은 동생 가솔들을 돌본답시고 드나들다가 잘 못된 것이여. 시숙이 그런께 제수를 욕탐한 것이여. 그러자 남편 죽은지 3년이나 지난 여자가 헛 구역질을 하니까 여자들이 수상하게 여겼거든. 그 때는 공동샘을 쓰고 동네 여자들이 모여서 빨레를 하고 했응께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제. 남편 죽은 아낙이 자꾸 배가 불러오고 임신인 것이라 여자들이 오죽이나 수군수군 거렸것어.

서방도 없는 젊은 여편네가 그랬으니까. 그러자 저 뻘섬이라고도 하고 뻘이섬, 봉도라고도 한 염전옆에 부둣가에 술집, 그랑께 주막집을 차려 주었제. 저 염전이 그때는 큰 부자여 일본 왜정시대 때는 쌀보다 소금이 더 값나가는 것잉께. 그러고는 윤가놈이 그 곳에 죽치고 자고 살았제. 그란데 석달인가 넉달만에 얘기가 나왔는디 그것이 지금 김대중이여. 그때는 윤성만이제. 윤창언이란 사람은 봉을 잡은 것이여, 여자복도 없이 각시 얻으면 딸만 낳고 죽고 죽고 하다가 첫 아들을 본기라. 김대중이 어므니가 거기가 친정이여. 친정에서 얘기들 키운다지만 술집이 잘 될리 없제. 어렵게 살았을기구마. 그러고 또 쪼금 있다가 동생을 낳았는디 그놈이 대의여. 그러고는 제갈성복이 하고 쌈을 많이 했어 윤창언이가 돈도 없는 건달같은 사람이였지만 똥구멍 삘간 사내라. 그럭저럭 살 때 우리 김가인 김운식 어른이 그때는 날리던 멋쟁이 건달 난봉꾼이거든. 낚아챘어 그라고 멀리 저기 후광리에다 집도 지어주고 작은 부인 노릇을 하고 살았어. 그렁께 이제와서 니씨니 내씨니 하고 말하지만 윤가 하고 살면서 대중이를 낳았은께 이름을 윤성만이라고 지은거야. 이곳 서당에도 윤성만이라는 이름으로 다녔어. 김대중이가. 그러다가 늦게 아마 열 한 살쯤 학교를 들어갔는디 나이가 많응께 2학년으로 그냥 들어갔어. 2학년이라고 하지만 나이도 많고 서당에를 댕겨놔서 일본시절이라 공부를 썩 잘했어. 무조건 1등이였어. 그런디 1년정도 댕기다가 김운식 영감이 작은 집 자식들 전부 데리고 목포로 이사가더만. 그러고는 김대중이는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이 상을 당했어도 오지도 않고 말들응께 비서들하고 같이 온천장엔가 휴양지 호텔로 가버렸당구마. 그런께 여그 사람들이 김대중이를 나쁜놈 근본도 없는 놈하고 욕하제. 죽은뒤 한참 뒤에 한번 왔는디 다리가 아프다, 천주교 다닌다 산소에다 절도 안하고 가버렸은께 사람만 몽땅 끌고 와서 그냥 가버렸어 영감은 차분히, 그리고 가끔은 흥분도 하면서 한참 얘기하다가 술도 연거푸 마셨다. Q: 그렇다면 김대중씨는 호적도 없이 보통학교를 갔단 말씀인가요?

A: 그런께 그때 김운식씨 민적(호적)에 서자로 올렸는가 목포 있을 때 옮겼는가 모르겠는데 그것이야 호적보면 알겠지만 그 때부터 김대중이여. 나중에 강원도에 입후보 했을 때는 金大仲 이라고도 했어. 나도 그 민적을 봐서 알아.

Q: 어른 께서는 김해 김씨 문중이니까 김대중씨를 족보에도 어떻게 올렸는지 아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걸 알고 윤창언이란 사람은 가만 있었습니까?

A: 난리가 났었제. 족보 올릴때는 나는 잘 모르고 지금도 서자로 올려진 족보는 우리집에 있어.

Q: 언제 몇살로 올려졌습니까?

A: 몇살이다 언제 그런말은 없고 올려졌어. 윤창언이는 그 때 살인낼까 그랬어. 그러나 윤창언이는 이 섬 사람도 아니고 김운식 어른 한테는 꼼짝도 못하제.

Q: 그렇다면 큰 집, 대봉이 집에서는 어쨌습니까?

A: 어쩔 수 있어? 할 수 없이 작은집, 큰집 그라고 살 수밖에.

Q: 그 때는 김운식씨가 부자였든 모양이죠?

A: 부자여. 목포에 여관도 했고 이것 저것 사업도 하다 망하고 그랬제. 그러나 그 집도 김대중이가 정치하고부터는 망하기 시작한 것이여. 영감이 대중이 뒷돈 대고 했을 것 아니여.

Q: 어른 께서는 그때도 김대중씨를 만난적 있습니까?

A: 만났고 말고. 목포까지 가서 도웁기도 했제. 아, 그란데 김대중이가 한문은 참 잘해. 언제 그런책을 읽었는지 소학, 대학에 나오는 문자를 써 가며 강연하는디 기가 막히게 잘 하더구만.

Q: 두번 다 차점으로 떨어졌다면서요?

A: 차점은 무슨 차점. 낙동강 오리알처럼 두번째 나왔을 적은 360푠가 밖에 못 얻었어.

Q: 거지 됐겠네요

A: 말할 것 없제. 처가집(김대중 장인 차보륜)이 목포에서는 내 놓으라는 갑부여. 그 덕에 살다가 어쩌다가 강원도 가서 보궐선거에 당선됐지마는 곧 5.16 군사혁명이 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제.

Q: 서울 정치는 이 것, 저 것, 저희들도 아니까 어른 께서는 김대중 선생 어렷을 때 말씀을 더 자세히 해 주세요.

A: 대충 얘기 했는디. 더 자세히 알라고 하면 후광리에 있는 대중이하고 같이 학교다녔던 사람을 만나서 자세 알아봐. 전부 얘기해 줄것 이구만. 그 사람은 술도 많이 안 먹고 착실하니께 자세히 가르쳐 줄 것이여.

Q: 어른께서는 술이 취하세요? 어른 이곳 개짝지 낚시하면 어디서 고기 많이 잡습니까?

A: 저, 모퉁이 있제. 저기 낚시꾼들이 많이 와. 저기는 뻘밭이 아니고 자갈 밭이어서 고기가 많이 낚이거든.


대중이를 식칼로 찔러 죽이겠다.

나는 그 어른과 긴시간 얘기를 나누고 어른이 가르쳐준 후광리에 들어서서 김대중씨의 옛 학교 친구를 찾았다. 그 때 그 분은 마을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점방에서 술 5병을 사고 고추장과 식초도 더 샀다. 그리고는 그들이 있는 곳에 다가가 그 분들의 화를 돋굴만한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김대중 선생은 이 나라의 큰 인물이고 하의도의 자랑인데, 그가 김해 김가가 아니고,  윤가다  제갈가다 하면서 말이 많은데, 화 안나세요?  다른데 사는 우리 같은 사람도 화가 나는데…그러니께 하의도 후광리 출신 김대중씨는 대통령 못되는 거예요.  팔 걷어 붙이고 서울이다, 일본이다, 쫓아가서 전두환이 김종필이를 죽여야  될거 아네요.  그래야 일본 게다짝들도 남의 나라 지도자에게 이러쿵 저러쿵 못할꺼고.  그러나 이 동네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니 말이 많은 겁니다.”

이렇게 화를 북돋게 하고는 혼자 말처럼, “빨리가서 한놈 잡아서 회부터 처먹고 밤 낚시나 해야제. 아저씨들 술, 회 잡수시고 싶으면 저녁에 저한테로 오십시요.” 라고 말하고 갔다

낙시를 드리우고, 텐트를 치고, 라면을 끓일려고 하는데 인적 소리가 들렸다. 자녁 11시 경이였을까 아까 낮에 후광리 동네서 봤던 김윤철씨였다. 너무 반가웠다. 나는 즉시 소형 라디오 속에 있는 녹음기를 틀고 김윤철씨에게 말을 시켰다.

김윤철씨 인터뷰 기록 (남, 60대 중반, 1991년 5월)

A: 젊은 분이 낚시 왔소, 아니면 이 곳에 무슨 염탐하러 다니오? 나 오늘 당신이 저 웃마을 김해 김씨 문중 어른을 만났단 얘기 지금 듣고 거기서 술 한잔 얻어먹고 오는 길인데 당신이 정보부 사람이오 김대중 비서실 사람이오? 내 (당신) 얘기는 대충 문중어른 한테 들어서는 알지마는 (당신은) 괘씸한 사람이여. 왜? 우리동네 들어서자 마자 나부터 찾고 여러사람 있는데서 동네를 욕하고 나를 빗대서 욕하는 것이 여간 괘씸한 것이 아니여. 당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내 얘기를 안 했으면 나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마침 문중 어른이 사람을 보내 만났더니, 당신 얘기를 하기에 확인 한번 해 보려고 왔오. 쪼그마한 섬에 보통학교 학생들이라고 해 봐야 몇 사람 안 돼. 그런식으로 어른들을 놀리면 안되는 것이여.

술이 잔뜩 취한것 같은 아저씨는 전혀 취기가 없었고, 또렷하고 논리정연한 말로 나를 혼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Q: 아저씨 죄송합니다. (저는) 겸사겸사 왔습니다. 낚시도 하고 (하의도에) 온 길에 김대중씨의 사정이나 한번 들어 봤으면 하고 왔다가 그만 제가 경망스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흥분을 자극시켜 지금 같은 상황을 바라고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나는 게속해서 말했다.

Q: 용서하십시오. 저는 정보부 사람도 이니고 (동교동) 비서실 사람도 아닙니다. 김대중 선생님을 오랫동안 모시고 따르다 보니 젊은 놈이 오기도 났고, 정부와 사회의 불만도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용서하십시요. 가능하면 김대중 선생님에 대한 얘기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오직 일본놈 신문기자 [시바다 미노루]인가 하는 사람을 만나고 선생님이 아니면 제가라도 국제헌법재판소에 그자를 고발하려고 하거든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나는 낚싯대가 있는데로 갔다.  낚싯대를 보니 잡고기 두마리가 걸려 있었다. 비눌치고, 회를 만들어 가지고 온 초장과 함께 들고 갔다. 

A: 야 맛 좋다. 사실 회는 이렇게 묵어야 제 맛이여. 그런데 젊이 분은 회를 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술 한잔 해 보고 권해야제. 한 잔 하시오.

Q: 저는 술을 한잔도 못합니다. 특이체질이라서 조금만 하면 온 몸이 두드러기가 생기고 트러불이 생깁니다.

A: 그런 사람이 뭔 정치를 혀. 말들은께 고생도 많이하고 그렜단 소리 들었는디, 정치하지 말고 돈 벌 궁리나 하시오. 젊은 분이 잘 하겠구마. 그라고 얘기는 알겠는데, 그런 호기 이젠 부리지 말어. 이 면내에서는 김대중이를 사람같이 안봐. 어디 일가친척 찾아보지 않는 사람이 큰 사람 될 것이여? 사람은 자기 태어난 고향부터 다스려야 해. 왜 그런 말 있지 않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하는 말. 자기집, 자기 고향도 돌보지 않으면서 무슨 나라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당신도 그런것 알라카고 다니면 이 동네서 좋은 소리 못 듣고 매 맞고 가 알았어!

Q: 고기가 맛이 좋은데, 아저씨 술한잔 더 하시지요. 그런데 아저씨는 전에 어디 관공서 근무하셨어요? 아주 논리가 정연하시고 사리가 분명하신걸로 봐서 이 곳에 오래 안 사셨지요?

그는 자기 삶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김대중씨와는 연관이 없는 얘기라서 생략한다.

Q: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더 드시지요. 그러나 선생님께 한가지 청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A: 말 하시오 어려운 것 아니면 들어드리리다.

Q: 선생님 김대중씨 호적, 어머니 친정호적, 제갈성조씨 호적 하나씩 면 사무소에서 떼 주셨으면 합니다만…

A: 그건 안돼. 누구도 못 떼. 얼마전 동교동 비서실서 왔다고 부탁했는데 면에서 안해줘. 김대중 본인 아니면 안된다고 해서 그 사람도 그냥 갔어. 학교 학적부도 안해주눈디, 학교서.

Q: 학적부도요? 학적부는 행정 공문서하고는 다른 것 아닙니까? A: 그래도 외(왜) 그런지 안해줘.

Q: 선생님 것도요?

A: 아, 내것이야 띨 수 있지만 김대중이 학적부는 없데여.

Q: 그러면 졸업생, 입학생, 재적했든 사람들 주소록 떼 달라고 한번 해 보지요?

A: 허허, 그러면 더 안해줘. 당신이 낼 학교가서 한번 생떼써봐. 해 줄랑가.

회를 다 먹은 동안 낚시에 걸린 고기가 있는가 보니 큰 숭어 한마리와 낙지 한 마리가 걸려서 건져왔다.

A: 와따, 맛있는 숭어가 낙지도 낚시에 걸려오내. 술 안주 좋다.

Q: 선생님하고 술 먹는줄 알고 요놈들이 물어 줬는것 같습니다.

A: 하여간 칼 솜씨가 좋구마. 어지간한 식당 주방장 빰치게 잘 하시구만.

Q: 그런데 아까 대강 말씀 들었지만 김대중씨는 왜 그렇게 이곳에서 욕을 많이 합니까?

A: 여러가지 이유도 있지만 첫째는 대봉이 죽은 것이 김대중이 때문이다 그거야. 대봉이가 30대에는 밤에 식칼도 쓱쓱 갈았어. 김대중이 찔러 죽인다고…

Q: 예?! 그렇게 까지요? 그 전에 (자기 아버지 한테)작은 집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면서요?

A: 안 것이 문제 아니고, 그 때 면사무소 직원 하나가 대봉이 불러 술 사주면서 일렀어.

Q: 뭣을 요?

A: 그런께 그 때 자기 아브지(김운식)가 면사무소에 가서 자기 어머니 (김순례)와는 이혼을 했다고 이혼 신고를 하고, 대중이 어머니 (장노도)와 결혼한 것으로 호적을 올렸든 것을 대봉이가 그 때 알았던 거여. 그 소리를 들은 대본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를 개패듯이 때렸거든. 그때 동네사람들이 난리가 났어, 말리느라고.

Q: 아버지를 요?

A: 그라제. 죽게 아들한테 맞고 꼼짝도 못했제.

Q: 야, 나쁜 사람이구나. 그런다고 아버지를 그렇게 패요?

A: 허허, 무슨 소리를 그렇꼬롬 해. 그일이 있고 나서부터 대봉이 아버지는 대봉이 한테 꼼짝 못하고 날마다 싸워. (대봉이) 식칼들고 목포로 대중이 쫓아 가거던. 가면 열흘씩 안와.

Q: 김대중씨가 없어서요?

A: 그게 아니여. 그런께 미친놈이라고 소문나고 술주정뱅이라고 맨날 낮부터 저녁까지 술만 먹어. 그러니 그집구석이 온전할리가 없제. 그렇게 목포로 김대중이를 쫓아가면 대중이는 누가 일러줬는지 벌써 알고, 목포 선창가에서 찦차를 대 놓고 대봉이가 삼바시 (부두에 띄워 놓는 선창: 일어)에서 내리면 대중이가 절을 허리가 굽어진데로 절을 한데야. “아이고 형님 오십니까? 어서 타십시요” 그라믄 찦차를 타고 일류 요정으로 간다누마. 가서 술 좋아한께 곤자꾸로 술 사주고 또 이쁜 기생을 하나 대중이가 대봉이한테 붙여 준다누마. 그리고 여관에서 몇일씩이고 죽치다가 대중이가 돈을 듬뿍 주면 또 대봉이는 슬쩍 와불고.

Q: 아따, 아저씨! 풍이 좀 심하네요. 어떻게 동생이 여자 붙여주고 그랬겠어요.

A: 허허 그런께 미친 놈들이라고 하제. 동네서는 목포에서 죽기살기 했겠다 하고 있으면 그렇게 미친놈처럼 쫓아간 대봉이는 멋진 양복에 희희락락해서 돌아오는 거야. 또 며칠 있으면 즈그 아버지를 패고. 그러다 결국 몇해 못가서 대봉이가 술병나고 간이 안 좋아젔제. 그런데도 날마다 주태백이돼어 술만 마시고 다녔으니 배겨나겄어. 그래 갖고 즈그 어무이 아버지 보다 먼저 죽고 말었어.

Q: 야, 그러면 동네서 김운식씨 체면이 말이 아니였겠네요.

A: 체면이 뭐여. 살림 다 털어먹고 마누라, 며느리 눈치속에 자기 마누라 죽고나서는 서울로 댕겼든 모양이든마. 대중이, 대중이 어머니한테 천덕구럭지 대접 받으면서도.

Q: 서울 오면 누가 감히 선생님의 아버님을 홀대 했겠습니까?

A: 아니여. 나도 확인 했었는데 국회의장을 지낸 분에게서 들었어. 영감(김운식)이 대중이 집에가서 쏘파에 앉있으며는 김대중이하고 이희호 여사는 개 닭보듯하고, 장노도는 “뭣한다고 여기까지 오고 당신이 아들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 얀박살(무안)을 당했제. 며느리(이희호)가 봉투에다 몇만원 넣어서 손에다 주지도 않고 탁자에다 놓면 영감이 그걸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거야. 내가 김운식 본인한테 들었다니까.

Q: 글쎄요 제가 듣기에는 너무 과장된것 같은데 소문이 그렇게 났습니까?

A: 그렁께 동네서는 김운식도 사람취급 안했어. 아따 배도 부르고, 술도 잘 먹었네. 더 먹으면 취해. 그라고 혼자 술을 먹으니까 안주는 맛있어도 술맛이 없어. 젊은 분이 같이 한잔씩 했으면 좋았을 텐디. 나도 이제 가서 자야것소. 내일 아침에 고기 잡은 것을 갖고 우리집에 오시오. 국 끓여서 밥먹읍시다. 잘 먹고 갑니다.

나는 그날 너무 피곤했고 왔다 간 김윤철씨의 얘기가 너무 기분 나빴다. 나는 초여름 이라고는 하지만 한기가 느껴지고 밤새 열을 동반한 감기에 기침까지 심하게 앓고 아침 일찍 약을 사먹고 자고 말았다.

다음 날은 하의도 장날이여서 많은 사람들이 (짐을) 머리에 이고 지나갔다.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낚시 봇짐을 메고 투벅투벅 걷고 있는데 뒤에서 두 젊은 아낙들이 제법 큰 소리로 김대중을 욕하고 흉보고 있었다. 솔깃하여 천천히 그 여자들 뒤를 따라 걸으며 녹음기를 틀었다.

젊은 아낙1: “참말로 김대중이가 대통령이 되면 “개천에서 용났다”고 난리 겠구마” 젊은 아낙2: “참말로 개천이 아니라 섬 바닥에서 용났단 소리가 훨씬 좋제” 젊은 아낙1: “그라믄 그 때는 뭔 가라 할꼬. 윤가라고 할까 제갈가라고 할까?” 젊은 아낙2: “이름이 김대중인디 어떻게 또 바꿔 말도 안되는 소리제”

내가 좀더 가까이 다가서자 그 젊은 아낙들은 외지인인줄 알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래, 이제라도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천에서 용났다” 는 소리가 진짜로 나올 것이 아닌가? 용이라도 그냥 용인가. 서자로 태어난 용이 아닌가? 세상을 잘 못 만나고, 부모를 잘 못 만나서 서자가 된 것이 어찌 본인의 책임인가?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사회의 힘없고 서러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 서자라는 사실이 무슨 흠이라고 꽁꽁 숨기고 있을까? 서자라는 사실을 공개하라고 내가 한번 선생님께 건의해 봐야지. 아니야, 어른한테 건방진 것은 아닌지 몰라. 낚시대를 둘러메고 걸어가면서 나는 혼자서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되씹으며 걸었다.

목포에 가는 배가 없어, 목포에 간다는 어선 한척을 빌려 타고 목포에 도착하니 저녁 7시였다. 심한 감기로 컨디션이 아주 나빴다. 나는 여관에서 이발을 한 후, 바로 병원에 입원하여 12일간 요양하고 퇴원하여 인근에 사시는 윤성자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방문을 열고 황급히 나오는 것을 봤어”

박공심 인터뷰 기록 (여, 68세. 1993년 4월 초순)

박공심 할머니를 만난 것은 1993년 4월이었다. 할머니는 김대중씨의 이복형인 김대봉의 처이다. 목포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나의 하의도행에 동행했다. 나는 할머니와 3일을 같이 지내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김대중씨의 가계, 다시 말해 출생의 비밀을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한(恨)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한이 할머니의 삶을 통곡과 분노로 얼룩지게 했다. 전체 녹음 시간 3시간 10분 동안 할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러기에 이 녹취록에서는 할머니의 말 한마디를 한 획도,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할머니의 증언은 비밀로 남겨둔다. 언젠가는 더 생생하게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과학적인 DNA 검사를 통해 김대중씨의 출생이 시원하게 공개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의도에 사는 제갈 성(씨)의 할머니를 만났다. 70대 후반이었다. 할머니는 김대중씨 어머니 장노도가 제갈성조한테 시집와 살때 그 옆집에서 살았다. 장노도의 신혼생활을 잘 아는 분이었다.

제갈정순씨 인터뷰 기록 (여, 78세 후반, 1993년 8월)

Q: 그러면 할머니는 그때 몇살이셨어요?

A: 열살인가 그랬제.

Q: 열살 때 일이 지금도 기억 나세요?

A: 애기도 봐 주고 그랬응께, 그 쩍에는 열살 묵으면 밥도하고 그랬어.

Q: 그러면 그 때 이웃에 사는 제갈 성복씨가 동생(제갈성조)집에 드나드는 것도 봤단 말씀인가요?

A: 한 두 번 봤제. (제갈)성조가 죽고 나서.

Q: 할머니가 제갈성조가 죽은지 어쩐지 어떻게 알어요?

A: 아 사람이 죽었응께 울고불고 야단이제. 젊은 사람이 죽었응께.

Q: 할머니 그런 말씀 아무에게나 막 하세요?

A: 절대 안하제마는 젊은 사람이 늙은이를 지금 무시항께 해버렸제. 아 열살이면 빨래도 했는디.

Q: 그래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괜히 큰일 날려고. 저 한테는 전부 해도 되지만 다시는 그런 말씀 행여 마세요. 윤가네나 김가네가 들으면 할머니 잽혀가고 혼 나잖아요?

A: 저 봐, 저렇게 노인 망구룰 골려줬다 어쨌다 하면서…

Q: 그러면 할머니는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그 큰집 제갈성복씨가 방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보고.

A: 뭔 생각을 해. 큰 집 작은 집인디.

Q: 나중에 얼마나 있다가 장노도씨가 뻘이섬으로 주막집을 하러 갔어요?

A: 그것은 확실히 모르겠는디. 가을 참께 이사 갔어.

Q: 이사가고 그 집은 누가 살앗어요?

A: 조카들이 와서 살았제.

Q: 그 사람들이 오래 살았어요?

A: 상당히 오래 살았제.

Q: 할머니 말고 다른 어른들도 제갈성복씨가 장노도방에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을 본 사람 있어요?

아무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A: 그 사람이 지금 죽었제마는 나보다 열살 쯤 더 먹은 우리 집안 여자가 여러번 봤다고 얘기 했어.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나도 작은 목소리로,

Q: 그런께 그 큰 아부지(제갈성복)가 김대중 선생 아부지다 그것이요?

A: 우리 클쎄는 소문이 그렇게 났어.

Q: 할머니 그 때 김대중씨 어므니가 배가 불렀든 것은 봤어요? 기억 나세요?

A: 배가 불렀는지는 몰라도 김대중이 엄마가 신체가 좋았어. 아들이 집에 들어오자 노인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는 양 다시는 말을 안했다. 다음 날 노인집 주변을 몇시간인가 서성거리다가 노인만 있음을 알고 뒷산으로 노인을 데려가 또 물었다. 노인은 전날과는 달리 얘기를 많이 안했다. 도리어 나에게 물었다.

A: 젊은이는 어디산 누구여? 서울서 왔어? 서울 말씨는 아닌것 봉께 이 근동에 사요?

Q: 예, 저는 완도 사람인디 이곳에 볼일 보러 왔다가 하도 할머니가 정정하시고 또 귀중한 옛날 얘기도 잘 하셔서 또 왔어요. 어제 하다가 만 얘기 한가지만 더 해 주세요.

A: 난, 또. 늙은 할망구 큰일 낼 사람은 아니것제?

라며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Q: 큰일은 무슨 큰일. 어제는 농담으로 했든 것이고 할머니는 지금도 김대중 선생 아버지가 제갈성복일거란 생각이 들어요?

A: 그 뒤로 여러 사람 얘기를 들어봉께 틀림없어. 그 때 제갈성복씨가 방문을 열고 황급히 나왔응께. (내가) 똑똑이 봤당께!!

Q: 그래도 그런말 함부로 하지 마시요. 큰일 나요. 혹시 내가 나중에 순사들 앞에다 할머니 불러서 증인 시키면 어떻할려고 그래요? 농담이고요.

A: 그라믄 할 수 없제. (내가) 거짓말은 못항께. 지금 젊은이 한테 얘기 한데로 해야제. 나 말고도 제갈성복이가 김대중이 아브지란것 봤다고 여자들 모이면 한사람도 많이 있어.

Q: 할머니 그러면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고 또 이곳에 올 기회 있으면 할머니 보러 올께요. 안녕히 게세요. 참 할머니 이거(모자) 더울 때 쓰시고 이 돈(5만원)으로 잡수고 싶으신 것 사 잡수세요.

A: 고맙소. 또 오시오 잉.

소리 없는 투사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 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여러갈래 얘기들이 근원지가 이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었다. 떠도는 얘기들이 예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할머니는 남도 아닌 김대중씨 어머니의 첫 남편 제갈성조와 친척이다. 좁은 섬 바닥에서 인동 장씨와 제갈씨가 혼인을 했으니 하의도에 사는 장씨와 제갈씨는 사돈간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곳 하의도 바닥에서 뿌리를 박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갠지, 밥그릇이 몇 개인지를 훤히 아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말은, 무식한 시골 아낙들의 무식한 소리가 아니라, 무식스럽지만 끈질기게 삶을 이어 온 민초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서울 한복판에서 나도는 김대중씨와 관련된 해괴망측한 소리들의 진원지가 이곳 하의도였다니.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왔던 김대중 선생의 실체가 하나씩 들춰지고 있다니 나는 참담했다.

전두환, 김종필 등 김대중 선생의 정적들에게 “당신들은 거짓말 쟁이요”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 생각들이 점점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두려웠다.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인물사 추적을 위하여 소리 없는 투쟁가처럼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내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낸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몇 년 전, 신문에서 읽은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김해 김씨 문중 선산에서 있었던 사건은 단순한 경상도 사람들의, 또 군사문화의 산물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등진 아버지와 몽매한 나의 어머니의 한이 왠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추적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김대중 선생 본인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김대중 선생이 답을 한다고 해서, 아니 답을 안한다 하더라도 어쩌란 말인가?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호적정리를 하는 것이다. 호적정리를 하여,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잘 못 각인돼 있는 김대중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 누가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김대중 선생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새끼꼬기”가 아닌가.

여기까지 온 마당에, 내가 이 작업을 포기하고 침묵하기에는 내 자신과 내 인생이 초라해 질 것 같았다. 이왕 시작한 탐사작업인데,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씨도둑

윤덕숙씨 인터뷰 기록 (여, 71세. 광주거주. 1994년 2월)

덕숙씨는 김대중씨와 하의 보통학교 동창이다. 집에 전화해 며느리를 통해 만나고 싶다고 했다. 한 다방에서 덕숙씨를 만났다.

Q: 추우신데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A: 먼 일인지는 몰라도 저 쪽 아들집에서 며느리한테 연락와서 나와 봤오.

Q: 속 상하시것어요, 선생님 대통령 안 됐으니…

A: 나 혼자만 속상하면 하제마는 하의도, 목포, 광주 할 것없이 온 나라 여자들은 전부 울드마.

Q: 글쎄 말여유. 호남에 운이 없는 갑소.

A: 운도 없제마는 씨 도둑은 해서 안된다고. 언젠가는 들통나고 뽀록 나제. 누구 원망도 못혀. 자기 잘못이제.

Q: “씨 도둑”이라는 그건 무슨 말씀이여유? A: 여태껏 김대중이 따라 댕겼담서 아직 그것도 모르요? 그랑께 떨어지제. 주인 모실라면 주인보담 더 알아야 할 것인디.

Q: 저희들 불찰이 큽니다. 요즘 이상한 얘기가 자꾸 들려서 진짜 한번 확인해 볼려고 하는데 아시는 대로 좀 알려주십시요.

A: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일찍 광주로 와부러 나서.

Q: 그럼 시집은 광주로 오셨든 모양이지요?

A: 그것은 아니지마는 애기들 다 낳고 목포로 해서 지금 광주서 살제. 이렇게 다 늙고 할맛씨 다 대 부랫소.

Q: 그런데 선생님 보다 더 젊은 아주머니 같은데?

A: 머 그래라우. 대중이는 나보다 두살이 더 많애도 하나도 안늙었드랑께. 서울서만 살아서 그랑가? 그렇게 감옥도 많이 댕기고 고생도 했제마는 대체 어려서 부터 잘 생겠제.

Q: 아니 선생님 보다 적다면서 어떻게 학교는 같이 다녔어요?

A: 이-잉, 대중이가 늦게 서당 댕기다 학교에 들어와서…

Q: 그랬었군요.

A: 그랬제마는 대중이는 일년인가 댕기다 4학년때 부텀은 목포로 갔어. 늦게 학교 들어 왔지마는 공부를 여간 잘했어. 일본말하고 샘본 그런께 산수를 그렇게 잘 하드라고.

Q: 학교댕길때 까부렀어요? 깡쟁이도 많이 부리고?

A: 깍쟁이는 안 불었지마는 …젊잖했어. 젊은 분은 비서했소. 먼 몸이 너무 쌀쩠오. 요즘 사람들 쌀찌면 안좋다고 난리듬마. 빼시요 빼. 내가 지금 뱅기타러 공항에 가야 한께 빨리가야 것는디.

Q: 그럼 한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이 윤성만이라 불렀오 대중이라고 불렀오?

A: 성만이라고도 하고 대중이라고도 했든 것 같애, 나중에.

Q: 왜 윤가라면 윤대중이라고 하지 그랬을가?

A: 나중에 우리 면 사람들은 그것도 아니고 “제갈 씨”라고 하드랑께. 다 그래. 어처구니 없제. 그랑께 “씨도둑” “씨도둑” 그래.

이 때 다방으로 할머니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황급히 뛰어나가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Q: 할머니는 무슨 띠요?

A: 나, 소띠.

라며 할머니는 황급히 가버렸다. 소띠라면 1925년 생이다. 할머니가 김대중씨보다 두살 어리다고 했으니 김대중씨는 1923년 생이라는 이야기다.

김대중 호적등본을 부탁하다.

김점식씨 인터뷰 기록 (남, 40세 초반 1994년 4월 초순)

하의도 선착장에서 만난 젊은 사람이 김점식씨다. 그는 어부일을 하는 하의도 토박이 였다.

Q: 점식씨에게 한가지 부탁이 잇는데 가능하면 도와주십시요.

A: 내가 지금 보시디시피 배를 타고 일을 하러 가는 중이라서…

Q: 약 30분 정도면 되겠는데…

A: 아, 그런 개새끼들이, 김대중선생을, 어뜬 놈의 새끼들이… 아마 정보분가, 윤가 새끼들인가, 일본놈들 신문에 몇년 전부터 김대중 선생을 모함하고 다니니, 젊은 분이 좀 따져서 이 곳 지서놈들, 면사무소 새끼들 호통을 좀 치고 가시요.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도 해갔꼬. 죽여부래야제. 이것 사람 꼴이 뭣이요. 몇번이나 대통령을 나온 사람을 나쁜 새끼들이제. 제갈가다, 윤가다, 김가다 도깨비 작난도 아니고 해도 너무 하지 않소.

Q: 그러니까 (김대중 선생의) 호적 등본이라도 있어야 따지든지 어쩌든지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점식씨가 젊으니까 면사무소에 가서 김운식씨 호적등본, 윤창언씨, 제갈성조, 김대중선생 외할아버지 장문숙씨 등본을 떼다 주시오.

A: 직접 가셔서 떼 달라고 하시지요.

Q: 제가 갔더니 안된다고 합니다. 점식씨는 (김대중 선생과) 남도 아니고, 젊은 분이니까 면사무소 직원들을 전부 알 것 아닙니까? 그러니 좀 부탁해 보십시요.

A: 내가 시방 배가 오면 바다에 가야항께, 그라면 여기 있어 보시요. 내가 면사무소에 가서 떼 줄랑가는 몰것소마는 한번 부탁해 봇께요.

20분 후, 점식씨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왔다.

Q: 어떻게 떼었습니까?

A: 하나도 못해 준다 하요. 안되것는디. 아, 면사무소 직원들이 전부 왜 뗄려고 하냐, 무엇에 쓸려고 하냐고, 따지고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라고 날린디 어떻게 하것소?

Q: 그래 뭐라고 하셨습니까?

A: 일본놈들, 또 누구든 김대중선생한테 김가가 아니라고 한 새끼들한테 따지러 갈라고 그런다고 했제라우.

Q: 그래도 면사무소 사람들이 안 해준다 그말입니까?

A: 오늘은 내가 바쁘고 내가 다시 떼보고 편지로 보내면 안되겠오. 우리 삼춘은 잘 안다고 항께 우리 삼촌한테 주면 아저씨 한테 갈 것 아니오. 호적 등본이라고 그랬오? 종이에다 적어주고 가시오 그럼 내가 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께.

나는 메모지에 필요로 하는 호적등본을 적어주면서,

Q: 그럼 꼭 좀 해서 삼춘께 주십시요. 그래도 젊은 분이라 제일 났구마. 부탁합니다.

A: 다른 것도 아닌 선생님에 대한 그런 것이라면 해 드려야 제. 알았으니 어서 가시오. 나는 저기 배가 왔은께 가 볼라우.

하고는 돌아갔다.


“김대중 선생이 솔직하게 얘기혀야 혀”

윤병주씨 인터뷰 기록 (남, 50대 후반)

목포에 살고 있는 윤병주씨는 하의면 대리 출신이다. 김대중씨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씨의 집 근처에서 살았다. 젊은 사람이어서 말이 통할 줄 알고 찾아갔다.

Q: 윤 사장님은 목포에 가신지 오래 되셧어요?

A: 한 20년 됐는 갑소. 글 안해도 친구한테 연락받고 알았소만 우리는 그냥 어른들한테 들은 것밖에 잘 모르요. 또 그(김대중) 이야기만 나오면 속이 상하요.

Q: 왜 윤 선생님은 무식한 분도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그냥 얘기만 듣습니까? 사실 확인을 안 해 봤습니까?

A: 할아버지쩍 얘기 아닙니까? 사실, 그대로 얘기처럼 됐다면 그래도 사실대로 하자고 어른들한테 얘기드려서 바로 잡아 놓자고 했지만 얼굴을 붉히고 야단 처분디 어떻게 하것소?

Q: 윤 사장님은 언제,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셨어요?

A: 중학교 댕길땐가 학교에서 듣고 대판 큰 싸움 벌어졌오.

Q: 뭣이라고 그런께요?

A: 김대중 어른이 “제갈”가라고 안하요.

Q: 누가요?

A: 학급친구가. 나는 아니라고 하고 어렸을 땐께 서로 우김질 하다가 그랬지요.

Q: 그놈이 제갈가였든가 보지요?

A: 그라재. 그란께 즈그 빼따구다 그거여. 그런 상놈의 새끼가 그런 소리를 하니 기가 맥해서나도 덤벼브랬제. 그 뒤로 동네사람들 도 그렇고, 면에 서도 많은 사람들이 쑥덕쑥덕 하는 거야. 그 뒤로는 나도 아무말 안해브랬제.

Q: 윤 사장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젤 좋겠다고 생각해 보셨어요.

A: 내 생각에는 누구도 안되고 김대중선생이 솔직하게 얘기해부래야 돼.

Q: 어떻게요?

A: 어떻게나 마나 이제 국민들한테 얘기 해야제. 비록 이제 대통령 3번이나 떨어젔제마는 그래도 유명한 사람 아니여? 그런께 “우리 어므니가 참 불행했었다. 그랑께 나도 불행했다” 이렇게 말이여.

Q: 그것을 어떻게 선생님이 국민들한테 말하며, 또 한다더라도 자세히 얘기해야 될 것인디 또 뭐 그런것이 사실이라고 하드래도 선생님 때 일인가요, 부모들 어머니때 얘긴데.

A: 말 잘했소. 그랑께 좋제. 비록 대통령은 안 됐더라도 유명한 사람 아니여. 설령 만약도 대통령이 또 된다며는 개천 아니 섬에서 용났다 할것 아니것어. 우리들은 말 못해.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선생님을 따라 댕김서 징역까지 가고 그랬으면 비서는 아니드래도 아 선생님한테나 그 자식들한테 아까 내가 얘기한테로 직언을 한번 하는 것이 어띠어. 그라면 당신은 귀딱지를 맞거나 조용히 받아드려서 그렇게 할지도 모르잖여.

Q: 제가 어른한테 어떻게 말씀드릴수 있겠습니까?

A: 하긴 그라제. 그랑께 아무도 말 못한거여.

Q: 그래도 사장님은 친척되시고 목포에서 사업도 하시니까 또 연세도 저보다 많으시니 한번 밀씀드려 보지요.

A: 예끼, 이 사람. 나는 못해. 괜한 소리했다가 와전되면 말이여, 참말로 세 성바지(김씨, 윤씨, 제갈씨)가 난리 날거구마. 그 후손들이 떼거리로 난리날 거구만. 더군다나 대통령까지 떨어지고 속도 아닌디.

Q: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외가집 그러니까 장문숙씨는 자식이 없었습니까? 그 동네 장씨들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무남독녀였다는 사람도 있든데…

A: 무남독녀라고 봐야제. 후손이 없어. 그것은 인동 장씨들 산디가서 어른들한테 물어보면 알 것이요.

Q: 사장님 바쁘신데 감사합니다. 안녕히 게십시요.

윤병주 사장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분이었다. 그 분의 제의가 자꾸만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때 많은 생각에 빠졌다. 벌써 4-5년 동안 돌아다닌 결과 해답은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냥 돌아갈 뿐 멈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윤병주 사장을 만난 후 나는 이 일을 그만 둘 것인가, 말 것인가로 또 한번 고민했다. 선생님의 신원(身元)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애당초의 목적이 벌써 궤도를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 탐사작업을 하면서 나는 때론 봉변도 당했고, 또 기관원 (정보부)들의 낌새 때문에 긴장되고 두렵기도 했다.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은 일에 매달린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나를 고달프게 했다. 내 생활은 점점 힘이 들었다.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집사람을 볼 낮도 없었다. 더구나 점차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김대중 선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식혀버렸다.

윤병주 사장을 한번 더 만나 봐야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나보다 연배인 그 분에게 나의 갈등과 고민을 얘기하고 싶었다. 목포에 내려온 길에 김대중씨 생모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의 조카와 김대중씨 생모와 동거했던 윤창언의 친척을 만나 지금의 이 갈등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죽었을 때 온천에 휴양 가”

김병호씨 인터뷰 기록 (남, 60세 초 1994년 4월 초)

Q: 선생님은 대봉(?)씨의 조카신데 아저씨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 왔습니까?

A: 속상하고 분하지요. 그리고 어리석었다고 생각도 들고 암튼 그 아저씨는 불쌍해요.

Q: 김병호 선생님은 이 곳 사람들 말로는 술도 안 잡수시고 착실하신 분으로 소문이 났든데 저도 소주는 한 잔도 못하고 한 잔 먹으면 식중독처럼 부풀어 오르고 온 몸이 근질근질해서 죽겠어요. 맥주는 한 컵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저하고 맥주 1병만 하시겠습니까?

A: 그럽시다. 나도 한 고뿌는 먹을 수 있어요.

Q: 일하시다 말고 오셨으니 간단히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참말로 김해김가가 아닙니까?

A: 그 얘기는 이 동네 사람들은 (그 얘기를) 다 알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김대중씨가 워낙 김씨라고 알려졌으니…

Q: 김대중 선생이 (김씨 문중) 산소에는 가끔 들리십니까?

A: 우리보다 더 잘 알것구만. 오기는 뭣을 와요. 운식이 할아버지(김대중의 호적상 아버지) 돌아가셨을 적에도 (가택)연금 같은 것도 풀리고 했는디 나중에 들리는 소리는, 어디 온천엔가 휴양지로 비서들 데리고 목욕 갔단디. 그랑께 동네사람들이 욕하제. 더군다나 큰 아들이 없은께 장남 대신이제. 그런디도 안 와브랬은께 에이…

Q: 김병호 선생이 서울가서 직접 한번 말씀드려보지요.

A: 뭣을 요?

Q: 착실하신 분으로 소문 났으니까 김대중 선생도 진지하게 받아주실지 알아요. 개천에서, 아니 섬에서 용났다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그렇게 대담한 사람 되시라고요.

A: 여보시오! 왜 내가 그런 헛소리를 합니까?

Q: 우리나라보다 더 큰 미국 초대 대통령 쬬지 워싱톤도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그랬고 독일에 빌리 브란트 수상도 사생아라고 당당하게 얘기 했으면서도 유명한 노벨평화상을 받고 세계인들로부터 비난은 커녕 존경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지금 미국 대통령 빌 크린턴 대통령도 자기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 하면서도 대통령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A: 그것은 자기들이 스스로 해야제. 누가 그런말을 할 겁니까?

Q: 술한병 더 가져오라고 할 가요?

A: 아니오. 이제 됐고 나는 나가봐야 것는디 이거 어떻하지요, 미안해서.

Q: 제가 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좀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또 한법 뵙지요. 감사합니다.


학적부 떼려다가 선생들과 싸움

윤정길씨 인터뷰 기록 (남 30대 초, 94년 4월 초)

하의도 선창가를 거닐고 있는데 젊은 사람 하나가 낚시배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하의면 사람 같았다. 젊은 사람들은 김대중씨 출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 젊은 사람을 붙들고 무작정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나는 김대중씨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해야 겠다. 나는 젊은 사람에게 다가 갔다.


Q: 내가 낚시대는 안 가져 왔지만 낚시하러 가신다니까 저도 같이 가면 안됩니까? 여유로 낚시대가 좀 없습니까?

A: 갑시다. 낚시 잘 하세요? 오늘은 바다 짱어 낚으러 가는데 날씨도 좋고 하니 같이 가십시다.

Q: 그럽시다. 그러면 제가 점방에서 소주 몇 병 사 가지고 올께요. 초장이랑 마늘은 있습니까?

A: 짱어 낚는데 무슨 초장입니까? 된장 풀어서 살짝 냄비에 끌이면 아조 맛이 좋제라우.

Q: 그럼 제가 얼른 소주 몇 병만 사 올께요.

A: 아따, 서울 양반 태우고 갈랑께 조심스럽네. 그만 갔다 오시오.

뛰어서 약 10분 정도 걸려서 소주 다섯 병을 사들고 배에 올랐다.

Q: 자 갑시다 5병 샀는데 술 잘 드세요?

A: 뭔 술을 그렇게 많이 사브렸소. 나는 한 병정도 밖에 못 먹는디. 선생님 술 좋아 하시능가 봐.

Q: 저는 술은 못먹지만 술먹은 사람들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 술 곤작구 취한 사람들 뒷 치다꺼리도 잘하고, 그래서 술친구 많아요.

A: 그란디 오늘 기계가 괜찮을지 모르겠네. 가끔 찜빠를 하든디. 쪼끔만 잡다가 옵시다.

Q: 오늘 바다 날씨가 잔잔하고 좋습니다.

A: 그랑께 채취선 쎄네기(동력기) 작은 배 끌고 왔제라우 그란디 짱어 낚시 해 보셨오?

Q: 옛날에 쪼끔은 해 봤지요.

약 10분간 바다를 향해 나간 뒤 배를 멈추고 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은 말했다.

A: 짱어는 낚시 넣기가 바뿐께 부지런해야 한디. (아저씨가) 할랑가 모르것오. 요놈은 배를 따갖고 삐득삐득 말려서 꼬치가루 좀 넣고 아침 해장국을 끓여 먹으면 참말로 맛 좋제라우.

젊은이는 낚시를 잘 했다. 15분 만에 스무 마리를 낚았다. 내가 술 한잔 하자고 말을 걸자, 그는 익숫한 솜씨로 장어탕을 끓였다. 먼저 그가 하의도에 뭐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Q: 낚시 멈추고 좀 쉬었다 하고 합시다.

A: 그런디 선생님은 여기 뭣하러 오신 분이요?

Q: 면사무소 왔다가 오늘 자고 내일 갈려고요. 여기 잠자리가 안 좋아 짱어 낚다 보면 금방 날이 샐것 같아서 나왔지요.

라며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리고,

Q: 이 곳 출신 김대중 선생만 대통령이 대불었으면 하의도가 엄청나게 좋아저 브랬을 것인디 전라도가 원체 작은께 이제는 틀려 브랬제.

하며 젊은이의 의중을 떠 보았다. 그의 이름은 윤정길로 윤창언씨의 친척이었다. 따져보면 김대중씨와도 남이 아니었다. 그에게 물었다.

Q: 그나저나 윤정길씨는 김대중 선생 한 번만이라도 만나 봤소?

A: 아따, 우리 같은 촌놈이 어떻게 보것오. 언젠가 목포가서 한번 보기는 했제마는 아따 인자 많이 늙어브랬씁디다. 그나저나 김대중이가 김간디 어른들 노인들은 김가가 아니라고 그랑께 뭣속인지 참말로 징헌 세상이지라.

Q: 어째서 김가가 아니라고 그래. 이 면에서 그래 쌉니까?

A: 징합제. 여자들이 수근수근하고 진짜 징하제요. 남부끄러 이것이 뭐요 대통령까지 나온 사람한테.

Q: 선생님이 여기에서 국민학교 그랑께 그 때 일제시대에 여기 초등학교 댕겼다면서요?

A: 일년인가 댕기다가 전학 가버렸다 합디다. 어쩐 사람은 그 때 김가호적을 올렸다고 하고, 그 때 서자로 올렸다 합디다.

Q: 저기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잘 했다면서요?

A: 공부도 잘하고 한문 서당에 댕겨놔서 한문도 그렇게 잘한다요.

Q: 그런 훌륭한 분이 있으니 하의도 사람들은 좋겠구마.

A: 좋으면 뭣할것이요. 아무 소용없제.

Q: 그나저나 윤정길씨, 그 학교 초등학교에 가면 잘 아는 선생님 있어요 (선생하고 아주 친하단 얘기듣고 만나기로 했음)

A: 나하고 학교만 파하면 맨날 같이 있는 선생이 있는디 뭣할라고 그라요?

Q: 그러면 내일 수요일잉께 학교가서 김대중 선생 학교다닐때 재적 증명서하고 성적표하고 하나 뗄 수 있으면 그 친구한테 떼 달라고 한번 해 보시요.

A: 뭣하게요? 저기 누가 한번 띨라고 항께 학교서 없어졌다고 안해줬다 한 소리를 들었는디 그럽시다. 내일 내가 오전에 학교가서 물어보고 해다 드리께요. 근데, 뭣할라고 그라요?

Q: 우리 애가 공부를 하두 안해서 “봐라 김대중선생은 어려서 이렇게 공부를 잘하고 한문도 많이 알고 그랬단다” 하고 보여 줄려구요.

A: 애가 몇살인디요

Q: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요.

A: 그랍시다. 그란디 낼 띨려면 육지로 못가겄는디 배는 아침에 뜬께

Q: 내가 내일 면사무소에서 볼일 더 보고 갈거애요. 그러니까 오늘 낮 12시 넘으면 다방에 있을께요

A: 알았습니다. 거기서 기다리시요.

Q: 빨리 낚시 합시다. 저 때문에 많이 못 낚았다고 하지 말고.

다음날 아침 그는 다방에 오지도 않고 수소문 해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저녁 늦게 필자가 자고있는 여관에 술이 잔뜩 취한채 나타났다. 학교에 갔다가 선생들 한테 야단만 맞고 선생들 하고 싸우고 맞고 돌아왔다고 하면서, “선생님 포기하세요 안되겠네요. 그러나 저는 젊은 선생님을 존경할랍니다. 용기내서 김대중씨께 편지하여 솔직히 얘기한번 해 보시요. 개천에서 용났다는 김대중씨가 되도록 그래서 앞으로 우리 대대로 어린 애기들에게 용기와 긍지와 꿈을 갖고 살도록. 그러나 씨도둑은 안된다고도 꼭 하십시요”하고 말했다. 하도 술이 취하여 말소리가 여관 또는 길거리 사람들이 듣도록 떠들어서 택시를 불러 실려 보냈다.

이 젊은 이의 말에 나도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서울로 올라 가자. 가서 선생님이나 측근 누구에게 네가 탐사한 결과를 꼭 말 하리라.” 고 다짐했다.

김홍일의 싸늘한 반응

서울에 올라온 나는 김대중씨의 큰 아들 김홍일 씨를 만났다. 김홍일씨는 나와 동갑이고 감방 동기생이다. 나는 그에게 내가 조사한 얘기, 즉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해주고, 이를 김대중 선생께 전하여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의 어머니는 불행한 분이다 때문에 나의 소년기도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야망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정도만 밝히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 이후 나에게 돌아 온 것은 싸늘한 냉담이었다. 동교동 측근들을 만날 수 없었고, 다시는 동교동을 출입할 수 없었다. 동교동의 장벽은 높았다.

나는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조사 결과가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랬다. 그게 아니라면 나의 순수한 뜻을 김대중 선생이 이해하기를 희망했다. 내 뜻이 나의 일방적인 생각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시작했다. 잘 못될 경우 내가 존경하고 애정을 갖고 있던 김대중 선생과 영영 헤어질 지도 모른다는 것도 감안했다. 나의 순수한 뜻은 그러나 김대중 선생의 아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노인들의 말이 잘못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1995년 부터는 좀 더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 수집에 나섰다.


윤말순씨 인터뷰 기록(여, 50대 초, 목포, 요식업 1995년 1월 초순)

윤말순씨는 목포 어느 디방의 주인이었다. 그녀의 다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Q: 같이 차 한잔 하시지요. 저는 커피 주세요. 가게가 참 좋습니다. 아늑하고. 장사 잘 되십니까?

A: 감사 합니다. 여기 사세요?

Q: 아니 윤말순씨 만나러 왔습니다. 하의도에 살았던 윤창언씨와 친척 되지요?

A: 그것은 어떻게 아세요?

Q: 그럼 김대중씨하고는 남이 아니시겠네.

A: 오빠되지요. 그래도 남들은 몰라요. 우리가 말 안한께.

Q: 윤말순씨는 이곳에 사신지 오래 됐습니까?

A: 예,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곳에서 살았어요.

Q: 김대중씨가 말순씨의 오빠라는 이야기를 남들한테도 서슴없이 얘기하세요?

A: 선생님이 물으니까 다 아는 분이구나 하고 대답했지요. 얼마 전에 대의 오빠도 이곳에 오셨어요.

Q: 그 분 건강은 좋은 가요?

A: 예 그런데 그 오빠도 대중이 오빠 맨스럼 자꾸 아프다고 그러데요. 왜 그런가 모르겄서요. 홍일이도 그러고.

Q: 김홍일씨를 자주 만납니까? 이곳에 오셨어요?

A: 여기는 안 왔어요. 그란디 대의 오빠한테 물으니까 몸이 그렇게 뚱뚱하고 다리가 많이 아프다고 그라드만요. 병인가 어쩐가 즈그 아부지하고 전두환이한테 잽혀가서 너무 많이 맞아서 그랬을까?

Q: 김대중 선생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아프지요.

A: 그것은 아니여요 (작은 소리로) 교통사고 휴유증은 아니고 발목에 무슨 이상한 병이래요. 그랑께 미국으로 치료 갔다가도 못 고치고. 그 병원에서 그냥 그렇게 계시라고 했다 합디다. 늙어서 휴유증 있다고 그란디요. 또 대의 오빠도 그러고 홍일이도 그라고 무슨 내림인지.

Q: 김대현씨는 요?

A: (시무룩한 표정으로) 거기는 잘 몰겄서요

Q: 대현씨는 아주 건강하시던데요.

A: 그 사람은 우리 종자가 아닌께 잘 모르제. 오살 것들!

Q: 아니 대중씨와 대의씨가 오빠라면서 그렇게 말씀하면 안돼지요.

A: 사진보면 모르요. 대의하고 대현이하고는 완전 딴판인디. 자꼬 그런얘기 하지말고 차 식은께 차드세요.

Q: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김대중 선생하고 대의씨도 얼굴이 많이 닮지 않았든데. 한 뱃속에서 나온 강아지도 아룽이 다룽이 있는데 얼굴로 압니까?

A: 그래도 그 집 식구들 하고는 키도 틀리고 완전히 딴판이제

Q: 그 집 식구라니, 이 아주머니 큰일 날 소리하네.

A: 그것들은 김가고, 우리는 윤간디 어떻게 같것소. 말이 안되제.

Q: 그것들이라니요? 그럼 형제간들이 아니란 말씀에요?

A: 배는 같지만 씨는 틀리지라우, 그람.

Q: 김해김씨 족보에도 있고 호적에도 있는디 무슨 씨가 틀리다고 그럽니까?

A: 말하면 복장 터진께…

Q: 잘 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나에게 그런소리 하면 안 되지여.

A: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요. 상태도 하태도 누구한테나 물어보시요. 다 그렇게 얘기하제. 몰겄소? 김가들은 즈그 씨라고 우기겄제마는. 그고 저고 아저씨는 살 쪼꼼 빼시요. 너무 뚱뚱해서 되것소. 연애한번 할락 했더만 틀렸구마.

Q: 지금 나이가 몇인데, 남편한테 몽둥이 맞으라고. 객지에서 다리는 누가 이어줍니까?

A: 그런 걱정은 말고. 서울 무슨 동서 삽니까?

Q: 상게동이요. 서울 잘 압니까?

A: 그럼 내가 얼마나 자주 간다고.

Q: 그런데 이집에서는 회 같은 것 없네. 왜 목포에서 회 같은 것 팔지 않아요?

A: 우리집은 양식이니 그런것 안팔아도 경치가 좋께 잘 돼요.

Q: 회 먹고 싶은데. 저 바다 보면서. 아주머니도 같이 먹읍시다.

A: 그러면 민어회하고 낙지 쪼금 시켜 드릴까?

Q: 그래요. 아주머니것 하고 같이.

A: 민양아 이리와봐! 저 호남집에서 사장님한테 내가 그런다고 민어 한 사라, 낙지 다섯마리 시켜갖꼬 와. 회초장하고 찌게도 시원하게 마늘, 상추도…

하면서 종업원을 시켜서 회를 시켰다.

Q: 진짜 아주머니 나이 물어도 됩니까? 저는 48년생인디.

A: 아이고, 나보다 쪼끔 쩍구만. 연하의 남자네. 그래도 잘 생겼지마는 살이 너무 쩌서 싫어요.

Q: 그러면 목포에서 로멘스를 한번 만들어 볼까?

A: 맛있게 드시네요. 커피 드시겠어요?

Q: 예 그럽시다. 여기 음식을 먹여줘야 하는데. 짐을 이곳에 잠깐 맡기고 저녁에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A: 그러십시요. 저녁에 오셔서 술도 한잔 잡수시고 여관 잡아 가십시요.

Q: 하의도 분들도 많이 옵니까?

A: 잘 안오시고 하의도에 게신 김달민씨라는 나이 많이드신 할아버지는 잘 오시는데, 요 근래에는 안오세요. 하의도 들어가시면 김달민 어른을 만나보면 제일 정확하게 김대중씨의 성이 윤가다 제갈이다 김가다 하는 것을 정직하게 그리고 똑똑하게 말해 줄거예요. 제가 아는 사람중에 젤 유식하고 또 바른 어른 이니까.

그 분은 내가 서당에서 만났던 어른이다.

Q: 감사합니다. 제가 아마 저녁 6시 쯤이면 다시 올 겁니다. 가방도 맡기고 갑니다.

A: 여관방 연락하여 예약해 놓겠습니다. 제일 조용한 한식방으로 부탁해 놀께요. 다녀 오십시요.


“김씨 문중에서 잘 알제”


장일미씨 인터뷰 기록( 여, 70대 후반, 1995년 1월 초)

장일미 할머니는 김대중씨의 어머니 장노도와 같은 인동 장씨 집안이다.

Q: 할머니는 이곳에서 사신지 오래 되셨다면서요. 자녀들은 전부 어디 가습니까?

A: 전부 나가고, 손자들은 학교에 가불면 나 혼자 집보고 있제. 어저께 그렇잖아도 조카한테서 연락왔어요. 누가 찾아 갈 거라. 그래 뭔일로 오신께라우?

Q: 오전에 올려다가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나쁜일은 아니고 김대중 선생 어머니하고 가깝게 지냈다고 해서 물어 찾아 왔습니다.

A: 어려서는 그 고모(장노도)가 나를 이뻐했제마는 고모가 하의도를 떠난 뒤로는 죽어붕께 못 만나고. 그 고모가 고생 많이 했째라우.

Q: 그 때 할머니는 몇 살때에요?

A: 열 넷, 열 다섯쯤 묵었을 적이여. 그 고모가 뻐리섬(주막집 했던 곳)에 살 때도 그랬고, 또 후광리로 이사갔을 때도 과부여.

Q: 그러면 할머니는 김대중씨 어머니에 대하여 잘 알겠네요?

A: 알다 뿐이요. 그 고모 고생고생한 것 다 알제. 그랑께 그것도 그 고모 팔자여 팔자.

Q: 그러면 장노도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요?

A: 그것은 모르제마는 크믄서 다르케도 불렀든것 같은디 기억이 안나네.

Q: 그러면 친정아버지는 아들이 없었어요?

A: 아들이 있었제마는 일찍 죽었다고하제. 그랑께 그 고모네가 잘 못 살았어. 그래도 아들이 대통령은 못 됬서도 그런 아들도 낳고 잘 됐제.

Q: 할머니 그러면 첫번째 시집갔을 때는 잘 모르시겠네요

A: 처음 시집갈 때는 잘 모르제마는 우리 친정 가까운 동네로 주막집 같은 것을 했을 때는 딸 둘인가 데꼬 왔었고 그 집에서 대중이를 낳았을 것이여. 그 딸들하고 나이차가 많애.

Q: 그러면 대의는 언제 낳어요.

A: 그 곳에서 대의를 또 낳고 한참 크다가 후광리 집으로 이사갔을 것이여.

Q: 그럼 그 건너 윤창언이란 사람 기억 납니까? 딸 많고 부인이 셋이나 죽은 분.

A: 알제. 그 분이 주막집에 살다시피 했든것 같어. 내가 고모집에 가면 그 사람이 있었응께. 내가 그분에게 작숙(고모부)이라고 불렀응께. 그러면 그 작숙은 나를 참 예뻐했었어.

Q: 그러면 김대중씨는 윤가가 아니겠네요?

A: 나중에 어른들한테 들어본께 대중이는 윤가가 아니고 대의가 윤가라고 하드랑께.

Q: 왜요? 윤가 하고 낳았은께 윤가지 왜 제갈가여요?

A: 응, 그때 제갈 작숙은 한참 전에 죽었는디 애기밸차가 어디 있겄어. 그랑께 윤가지.

Q: 윤창언씨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석달만엔가 애기를 낳았은께 윤가가 아니라고 하든디. 할머니 잘 생각해 봐요.

A: 나도 들어서 알어. 그러나 그런 흉칙한 소리는 김가들이 괜히 헐뜻을라고 시숙(제갈성복)애다 그러고 하제. 윤창언이 작숙하고 주막집 오기 전부터 알았응께 애기가 생기고 뻘이섬으로 데려오고 여기서 낳았제.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지어서 하면 안돼제.

Q: 할머니, 그러니까 할머니 판단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네요.

A: 하믄 그라제. 그런 쌍스런 소리가 어디 있겄서. 그것은 김가 문중들이 그런 소문을 내고, 또 그집 큰아들이 술만 묵으면 그래 쌌는 갑더마. 그건 헛소리여.

Q: 그러면 할머니! 김가들 문중에서 김가라고 호적에 올리고 왜 그런 소리를 할까요

A: 그거야 나중에 그 작숙(윤창언)이 김가한테 각시를 빼껴불고 부아가 나니까 그라제. 그 큰아들(김대본)하고 맨날 싸움질을 항께 소문이 그렇게 났제.

Q: 그럼 할머니는 윤가가 맞다 그 말씀이네요.

A: 그라제 그러나 지금은 뗄 수 없제. 김대중이로 유명해졌는디 이자 말 못하제. 그란디 이런말 어디가서 하지 마시요. 늙은이 괜히 자식 손자들한테 혼이 낭께.

Q: 그럼 할머니는 김가문중에서 누가 제일 잘 알것이라고 생각해요?

A: 그야 그집문중에서 나이가 젤 많은 (김달민) 어른이 잘 알제 누가 알어. 그집 큰 며느리(대본의 처)는 뭐라고 해 싼단 소리 들었어도 하여튼 김가 문중들이 더 잘 알제. 김가 문중이 그 섬에서는 젤 많은께. 바보들이여 이제 그만하게 똑똑한 김가라고 해줫으면 아무 소리를 말아야제. 그런 싸가지 없는 소리를 하믄 누가 챙피하겄서. 즈그 김가들이 더 챙피스럽제. 글않겄소?

Q: 그러지요, 그러면 할머니 김대중씨 누나들 언제 보고 못 봣어요?

A: 주막집 떠나고 나도 시집 와불고 그집도 목포로 가브랬은께 그 뒤로는 못 만났어. 그 고모 고생한것 생각하믄 가슴이 지금도 미어질려고 해.

Q: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A: 창언이 작숙이 돈도 없었제. 돈도 돈이제마는 애들 핵교도 못 보내고. (고모가 애들 학교 보내려고) 시집을 옮겨 댕겼응께. 여자마음은 몰러, 심정이 어쨌을 꼬. 지금도 생각하면 불쌍혀 (눈물흘림).

Q: 장씨들도 많은데 장씨들이 김가들 한테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면 될 것 같은디요.

A: 그말 말어. 언젠가 우리 친정에서 김가들한테 한번 말했다가 원 없이 챙피 당해 브랬는갑드마. 나는 모르제마는 누가 그래. 우리가 왜 그런소리를 해. 김가들이 심지어 그 큰아들(김대본) 살았을 적에는술만 처 먹으면 “갈보년, 잡년” 하는 말을 입에 달고 댕겨.

Q: 아 그랬었군요. 그러면 안되지요

A: 안되고 말고. 그런 몰상식한 소리를 하고 동네방네 떠들고 댕깅께 쬐그만 애기들까지 소문이 나고. 그러면 안되지. 그고저고 쪼끔 있으면 우리 아들하고 며느리하고 들어올 시간인디 어서 가시오. 늙은이 시집살게 하지 말고. 어서 가시요.

하의도를 떠난 제갈 가문

제갈성남씨 인터뷰 기록 (남, 50대, 충남 대덕 1995년 10월 말 경)

제갈성남씨는 충남 대덕에 사는 제갈 집안이다. 본래 하의도에서 살다가 1960년 무렵, 전 일가가 충남으로 이사했다. 들리는 소문에는 김대중씨가 국회의원이 된 후, 고향바닥에서 떠 도는 출생의 내막을 감추기 위해 제갈씨 집안을 강제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Q: 회사가 아주 좋던데 오래 근무 하셨든 모양입니다.

A: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좀 전 말씀하신 그런 얘기를 왜 내가 선생님께 해 드려야 하는지? 한번도 이런 문제로 신문이나 라디오 TV기자들하고 얘기 해 보거나 문의해 온 분도 없었는데 선생은 신문사에 계십니까?

Q: 실례했다면 용서 하십시요. 저는 김대중 선생과 그 분 어머니 문제로 일본신문과 책에 난 기사에 분노한 사람입니다. 비록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은 안 되었다 해도 이나라 근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인데, 그런 분을 군부 출신들이 김씨가 아니라며 더러운 음모를 하기에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몇 년동안 몇 차례에 걸쳐 하의도를 찾았더니 선생님이 제갈씨 후손이라고 해서 왔습니다. 실례되었다면 용서하시고 아시는 대로 몇 말씀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무슨 말씀인데요? 바쁘니까 간단히 물어 얘기하세요.

Q: 이 곳에 사신지가 오래 되셨는가요?

A: 예, 오래됐어요. 40년 이상 됐을 겁니다.

Q: 전 가족이 전부 전출하셨는가요?

A: 완전히 이곳에 왔지요.

Q: 이곳에 아버님이 특별한 직업이나 와야하는 계기가 있었을 까요?

A: 그것이야 어른들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나 섬 생활을 완전히 떠난 것이지요.

Q: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혹시 아십니까?

A: 계셨다고는 하지만 제가 태어나기 전이라서 잘 모르고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Q: 그 작은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은 김대중 선생 어머님과 15년간 결혼하여 딸을 둘 낳았다는 소리도 하고 어떤 사람은 딸이 하나였는데 10년 정도 사시다가 사망했다는 소리도 있는데 그런 얘기 들어 보셨어요?

A: 저희 집 옆에서9년인가 10년 사셨다고 그래요. 딸은 둘인가 있었는데 한번도 만난적이 없고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지요.

Q: 그렇다면 선생님 할아버님과는 집안 조칸데 그것을 모를리가 없을 텐데요.

A: 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어린시절은 모르지요. 또 객지에서 살아서 들은 소리도 없고요.

Q: 작은 할아버지 무덤이나 산소는 어디가 있습니까? 선조 산소에는 갈 것 아닙니까?

A: 그런 것은 묻지 마시고, 나 지금 시간이 없으니 회사 가봐야 겠는데 물을 것이 있으면 제가 전화번호를 적어 줄테니제 어머니를 만나보세요. 실례합니다. 선생, 명함있으면 하나 주세요.

Q: 명함은 없고 제가 전화와 이름을 적어드리겠습니다.

A: 미안합니다. 약속을 한 시간이 촉박해서.

Q: 안녕히 가십시요.

정용례씨 인터뷰 기록 (여, 70대 후반, 대전, 1995년 5월 초)

성남씨의 어머니가 정용례 할머니다. 나이는 70대 후반이었다. 아들이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고 나서 집으로 찾아갔다. 1995년 5월 초순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용례 할머니는

A: 뭔 일 인디, 아들 회사로, 집으로 이렇게 뭣을 알려고 쫓아다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요?

하고 닦아 세웠다.

Q: 예 죄송스럽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하의도에 갔더니 이곳에 가서 알아보면 안다고 그래서 왔더니 제갈성남씨는 잘 모르겠다고 어머니한테 물어보라고 하길래 찾아 왔습니다.

A: 우리가 이곳에 이사온지가 사오십년도 더 된디 그 사람이 무엇을 알것이요. 우리는 김대중씨 어머니가 어쩌고 그런것 모릉께 어서 가시오.

Q: 할머니 그게 아니고 성남씨 작은 할아버지(제갈성조)가 딸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것만 좀 일러주세요.

A: 우리는 거기서 살다 왔지마는 통 그런것 모릉께, 별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겄네.

Q: 아니요 할머니! 할머니한테는 작은댁 시아주버니 되시는 분 얘긴데 모른다고 하시면 안돼지요.

A: 글쎄 그 사람은 일찍 죽었고, 딸들 다 죽었을 것이요.

Q: 그러니까 할머니, 딸이 하나였는지 둘이였는지는 알 것 아니겠어요?

A: 둘이면 멋하고 하나면 멋 하겄소. 왕래도 없다가 다 죽고 없어요. 그랑께 그런것 알라고 하지말고 가시요.

Q: 할머니 그러면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A: 왜 자꾸 건방지게 어른들을 물어쌓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Q: 그럼 할머니, 작은 할아버지 무덤은 어디 있어요? 호적은 이곳으로 같이 옮겨 왔어요?

A: 빨리 나갔시오. (대문 밖으로 밀어내며) 앞으로 그런 소리 물으면 우리 아들이 신고할 거요. 알었어요?

결국 제갈 성조의 형 제갈 성복의 후손들이 대전에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확인한게 없었다. 제갈 성복씨가 몇년에, 무슨 이유로 고향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하의도를 떠났다는 사실은 확인 되었다.

이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오래 전부터 김대중씨에게 누나 두명이 있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장노도가 제갈성조와 살때, 딸 둘만 낳았다는 것이었다. 훗날 하의도에 다시 내려가 확인 한 결과 김대중의 이모, 즉 장노도의 여동생들이 김대중씨 누이들로 잘 못 전해진 것이었다.

김운식 산소가 없어지다.

김달민씨 인터뷰 기록 (남, 80세 전후, 하의도. 1996년 7월 초)

하의도에 사는 김달민 어른이 내가 적어준 연락처로 등기 편지를 보내왔다. 급히 만날 일이 있으니 연락해 달라는 것이였다. 나는 그에게 연락하여 우리는 목포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음 날이다. 목포에서 레스토랑 윤사장을 반갑게 만나고 나는 유달산 중턱에 있는 음식점에서 그 분을 만났다

A: 아니, 그렇게 연락을 해도 안되고 당신 이상한 사람 아니요?

Q: 죄송합니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이렇게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A: 반갑다 마나 당신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노인네가 급하게 찾을라고 그라면 어떻게 빨리 연락이 되야지 말여.

Q: 황송합니다.

A: 황송하나마나 내가 그동안 하두 속이 상해서…

Q: 무슨 일인데요? 급하다니 누가 별세라도 하셨습니까?

A: 누가 죽으면 당신하고 무슨 상관 있다고 늙은 이가 당신을 찾어?

어른은 화가 잔뜩 나있었다. 어른은 앉자마자 누런 사각 봉투를 꺼내 그 속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를 꺼내 나에게 확인 시킬려고 했다.

Q: 어르신, 시장하신데 식사부터 시키시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나는 회 한사라와 한정식, 정종을 시켰다. 노인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A: (내 나이) 80이 다 먹더럭(먹도록) 그런 후레새끼들은 처음이야. 본디도 없고 근본이 없는 나쁜 놈들 인줄은 처음 알았어!

Q: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으신 모양인데 천천히 말씀하시고 술 오면 술 한잔 드시고 말씀하세요. 요즘 그런데 신문에 김대중 선생 선영을 용인에 옮긴다고 손석우씨하고 김대중씨가 묘자리에서 찍은 사진도 나왔어요. 옮겼습니까?

A: 글쎄, 그놈의 새끼들이 상놈의 새끼들이야. 원 나, 이런일 처음 봐! 이런 일을 할라면 말이여, 집안과 문중 어른들, 그리고 동네사람들에게 아무날 아무시에 묘를 파분하고 용인 아무군데로 옮겨간다고 기별을 하고나서 술 한 잔, 돼지 안주 한 접시도 대접하고, 옮겨야 한 것이여.

원래 묘라는 것은 사람 사는 집하고 한가지여. 옮길 때는 새로 집을 이사간 것하고 같은 것인디, 하루는 집에서 쉬고 있응께 밭에 일하러 나간 아들이 얼굴이 백지장이 되갔고 오는 것이여. 그리고는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버지, 아니 쩌 우( 저 위)에 김운식 어른의 산소가 없어젔어요. 삘간 뙤 잔등만 보이고 벌(묘) 안이 민둥인디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어요” 한단 말이여.

그래 깜짝 놀라 올라가 봉께 멧둥(분묘)이 없드랑께. 기가 맥혀서 헐떡거리고 벌 안에 펄쩍 주저 앉아서 황토흙을 만지작 거링께 이것이 (법원에 제출하겠다고 했던 물품) 하나 있어. 그래 이것(봉투)를 당신한테 주고 얘기좀 할라고 연락했는디, 연락이 되야제.

이 때 밥상이 들어왔다.

Q: 어르신 식사하시고 나서 말씀하시고 좀 쉬었다 얘기하시죠.

미지근하게 데워 온 정종 한그라스를 단숨에 들고나서 노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A: 원 이런 후레새끼들이 다 있겄어. 지가 그래가지고 무슨 대통령! 당신 올라가거든 김대중이 직접만나 내가 그런다고 문중에서 시끄럽다고 말좀혀.

Q: 알았습니다. 술 한 잔 더 하시고 안주 드십시요. 알았으니 식사 다 하시고 차분히 말씀하세요. 저는 그냥 그렇게 된줄 모르고 죄송합니다. 이제 식사하시고 말씀하세요.

우리는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노인은,

A: 아따, 잘 묵었고 당신 이리 가깝게 앉어봐.

하며 나를 불렀다. 노인은 봉투속에서 비닐로 몇 겹을 싼 물건을 펼쳐 보였다.

Q: 어르신 커피한잔 하시겠어요 술 한잔 더 하시겠어요

A: 나는 아까 먹다 남은 술 다시 가져오라고 하면 돼지 뭐.

나는 술과 커피를 시키고 나서 말햇다.

Q: 어르신 말씀하세요.

A: 이것 좀 봐.

봉투속에서 비닐로 몇겹을 쌓은 물건을 펼쳐 보였다. 노인이 보여준 것은 한 조각의 유골 이었다. 섬찟 했다. 노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A: 새벽에 메뚱 파감서(파 가면서) 이런 것을 빠체놓고 원 세상에 이거 뭔 꼴이여. 이게 근본이 있는 새끼들이 한 짓이여. 기가 막히고 말도 안나오고 지금 문중 다른 사람들 한테는 암말 안했응께 다시 갖다주고 그 곳에 메뚱 다시 파서 이거 넣어주라고 그래.

Q: 그러면 김대본씨 집에서는 알았을 것 아닙니까?

A: 알았는가는 모른디 대봉이 처는 방에 처밖케서 암 말 안하드랑께. 이거 뭔 꼴이여. 원래 문중산에 저 양반(김운식)이 들어오겠다는 것도, 그 분이 작은각시 첩을 얻었응께 못 들어가고, 그래서 거기 큰 할멈(김순례) 곁에 모신 것이여.

나중에 작은 각시 묘도 문중에서 얘기해서 저쪽에다 가묘(假墓)를 만들었든 것이여. 그란디 용인인가 어디가 가족묘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본 마누라, 큰 아들(김대본) 묘도 파다 순서대로 모셔야 한 것이여. 그란디 큰 마누라 메뚱은 놔 불고, 김운식이 묘만 파 갓불면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여. 김해김씨 종망신이제.

그랑께 큰 마누라는 젊어서는 김대중이 어므니한테 서방 뺏기고, 죽어서는 자기(김운식) 아들도 아닌 엎어온 자식(대중)에게 서방도둑 맞은 꼴이니 이놈의 기막힌 곡절을 어떻게 감당할라고 그란지 몰겄서. 그러면 안되제. 아무리 삼강오륜 법도가 무뎌지고 유교사상이 희박해지고 있는 세상이라고 기본을 무시하면 대통령이 아니라 뭐가 되도 큰 욕먹는 것이여. 이거 꼭 갖다 당신이 직접 주고 내가 크게 화내고 있더라고 전해야되. 알겄서요?

Q: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르신, 제가 그렇잖아도 작년초에 제일 측근에게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듣게하자고 하고 독일 수상 빌리브란트 미국의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 현재 대통령 빌 크린턴 의 얘기도 해 주고 직접 전화하고 했으나 그 후로 연락은 커녕 동교동 쪽에는 발도 뭇 붙이는 신세가 됐습니다.

A: 그라믄 학자들한테 일러버려. 나쁜 새끼들이야. 김해 김씨 문중을 멀로 보고…그란디, 그 대본이 새끼들도 꾁 소리 못한 것이 뭐 어디 한자리 줬다 하더만. 그래서 그란지 그 딸네들도 아무 소리가 없어. 당신 그 새로 만들었다는 산소에는 가 봤오?

Q: 아니요 아직 못 가 봤습니다.

A: 엑끼숨(안타깝다는 사투리), 한번 가 봐야제. 우리도 못 봤제마는 어떻게 써 놨는지… 헹(기침소리) 술은 그만 합시다. 나는 오늘 집에 못가고 당신, 서울 가요?

Q: 아니요. 어르신하고 하루 더 자고 가지요. 같이 여관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 배로 들어가십시요.

A: 그라제 그라믄 행--엑

Q: 어르신 내려 가십시다. 가셔서 저기 가면 윤창언씨 친척이 하고 있는 식당에 가서 커피한잔 하고 쉬었다 갑시다.

A: 그집 가 봤오? 그것들도 피해자여. 윤창언이가 바본께 할 수 없제마는.

Q: 그럼 어르신도 김대중 선생이 제갈 씨라고 생각하세요?

A: 그라제. 씨도둑은 못한다고. 대중이가 꼭 제갈씨 닮았제. 하여간 요술쟁이여. 꾀가, 꾀가 비상한께.

Q: 뭐 요술쟁이요?

A: 아 일본말로 “야바위”말이여. 야바위 꾼하고 똑 같어. (녹음 중단. 택시 승차 25분)

Q: 여기도 와 봤구마. 저것들은 뭐라고 해?

A: 저 분은 윤씨라고 하길래 제가 김대중씨는 윤가가 아닌것 같고 대의는 윤가가 확실한것 같다고 했더니 실망이 크든데요.

음식점에 도착했다. 주인 여자가 어른을 반겼다.

AA: 아이고 어르신 어서 오십시요. 저 양반은 도깨비 같은 사람이여. 어르신 이쪽 창가로 앉으세요. 오늘 오셨어요?

A: 어-잇, 자네도 잘 있었는가?

AA: 어르신, 저 양반 혼좀 내 주세요. 맨날 여자나 울리고 바람만 피우고 다닌다요.

A: 그래, 남자가 바람도 피워야제. 헹-에

Q: 어르신 저는 커피 하겠습니다. 어르신은 뭘로 드시겠습니까?

AA: 어르신은 커피 싫으시면 유자차 드세요. 따끈하게.

A: 그래

Q: 커피한잔, 유자차 한잔. 사장은 뭘로 드시겠습니까? 시키십시요.

AA: 앵, 미워죽겠어. 미쓰 박, 커피하나 유자 두잔 손 선생님도 오늘 왔소? 어르신 저 양반하고는 같이 다니지 마세요. 순 바람둥인께.

A: 야 그래도 저런 젊은이 요즘 없어야. 나하고 세번째 만나제마는 술도 안먹고 담배도 안 피고, 그라고 똑똑하고 그라믄 됐지 왜 자네는 그렇게 함부로 해?

AA: 손사장은 한 1년만에 왔제. 전화도 바꿔져 버랬드마.

A: 전화도 안돼갔고 내가 얼마나 찾았든지 등기편지로 연락했드마 왔드라.

AA: 하여간 웃기는 사람이여요.

(중단 잡담 40분)

Q: 어르신, 김대중 선생 외할아버지 혹시 기억 나십니까? 함자가 장문숙 어른이 맞은 가요?

A: (한참 생각하다가) 잘 기억이 안 나는디. 그것은 장씨들한테 물어보면 알제.

Q: 장씨들도 잘 모르고 장문숙 (張文淑)은 아니라고 그래요.

A: 그라믄 면 사무소에 가서 알아보면 알제.

Q: 아참, 이번 가시면 면 사무소에 가셔서 외할아버지(장문숙) 호적 제적등본 하나 떼서 등기로 좀 붙여주십시요.

A: 그라제.

Q: 김대중씨, 제갈 성조, 성복, 윤창언씨 껏도요. 시골이니까 동네만 말하면 다 해 주지요.

A: 알았어. 내가 면사무소 가서 해다주께.

Q: 어르신 왜 김대본씨 딸들 그리고 부인은 분묘 파묘해 갔는데 아무소리가 없을까요?

A: 그란께 그것들도 돈 몇푼씩 받아쳐먹고 아무소리 말아라 그랬응께 아무 말이 없겄제.

AA: 원래 그런 굿은 일하면 딸들이 더 난린디.

A: 글쎄 말이여. 여기(풍습)도 그래?

(다시 자리에 와서) 어르신 주무시고 가실려며는 싸우나나 하시고 주무시다가 식사하고 여관으로 가셔요.

Q: 아 그렇게 하십시요. 싸우나 모셔다 드리고 저는 예약하고 여기서 5시쯤 뵙겠습니다.

A: 그것이 좋것어. 그럽시다. 나 소변좀 보고 오리다.

김달민 어른이 싸우나에 계신동안 나는 여관에 짐을 맡기고 레스토랑에서 기다렸고 2시간 후 어른은 돌아왔다. 그곳에서 저녁을 들고 호텔에 왔던 시간은 10시 30분 쯤. 어른은 매우 피곤하셨던 것 같고 호텔에 오자 마자 잠이 들었다. 아침에 간단한 해장국을 들고 하의도 가는 부두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호흡이 가빠 몇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갔더니 심근경색 협심증이라고 했다. 심장수술을 받고 20일간 입원했다. 퇴원 후에도 호흡이 가빠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남하고 얘기하는 것도 싫었다.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았다.


풍수 쟁이 손석우를 만나다


하의도에서 보내온 김운식의 유골을 전해주기 위해 김대중씨 부모의 묘 자리를 봐 주었다는 손석우씨를 만났다. 그가 지관(地官)이므로 유골을 관에 담아서 새 묘터에 넣으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손석우씨 인터뷰 기록 (남, 80대, 1996년 8월)

Q: 지관 어른은 본이 밀양이십니까?

A: 예, 밀양이 올시다. 댁도 손가요?

Q: 반갑습니다. 저도 밀양이 본입니다.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이구요. 저희 중시조가 12대조 할아버지를 저의 뒷산에 모시고 완도군에서는 집성촌이고요, 12대 할아버지가 보성, 장흥을 거쳐 완도에 오셨다고 합니다.

A: 그래요? 그런데 지금은 뭣해요?

Q: 하는 일 없습니다. 그런데 족장어른 께서는 유교의 전통적 장묘사업도 하시는가 보죠?

A: 사업이라기 보다는 누가 산소를 봐 달라고 하면 봐주기도 하고 또 비석문을 쓴다든지 한다면 글쓰는 분들 소개도 해 주고…

Q: 여기 김대중씨 산소를 족장어른께서 잡아주셨다고 들었는데 몇평이나 됩니까?

A: 아마 한 500평 될거요.

Q: 돈도 많이 주시든가요? 보통 그런 명당자리를 주선 하시면 수고비로 얼마씩 받습니까? 많이 받겠지요?

A: 조금 줍디다.

Q: 그거야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한 10억쯤 받으셨어요? 일산 자택도 잡아주셨다고 하니 많을 받았을 것 같은데요.

A: 얼마 못받았어.

Q: (산소는) 용인 어디입니까? 구경한번 가 보게.

A: 약도를 적어줄테니 (약도와 동네이름을 적어주고 ) 한번 가 보시요. 앞에 둘러있는 산세가 온갖 것을 전부 품을 수 있도록 돼 있어 보기가 참 좋소.

Q: 그러면 김대중선생의 부친, 그러니까 김운식씨 큰 부인(김순례) 작은 부인(장노도) 유골도 같이 모셨는가요?

A: 그것은 아니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했지.

Q: 아니, 그러면 큰 부인은 시골에 놔두고 김운식씨 유골만 모셔왔단 말이에요? 그런 식도 있습니까?

A: 그런식이라니. 그렇게 하는 수도 있어.

Q: 에이, 족장어른도. 큰 부인이 (자)손을 생산하지 못했으면 하지만 부인이 장남도 생산하고 딸들도 여럿있는데 나중에 족장어른 그 문중사람들한테 항의 받으시면 어떻할라고 그랬어요. 그것은 족장이 잘못한 것입니다. 족장이 코치하고 마련한 것인데 어떻게 책임질려고 그래요?

A: 문중이라니, 김해 김씨들이? 아니, 자식이(김대중) 그렇게 하겄다는데 문중이 무슨 소용이여 (그리고는 곤란한듯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Q: 그러시면 안되요. 제가 알기로는 김대중 선생이 장남도 아니고, 큰 부인과는 계속 한 집에서 살다가 부인이 세상을 먼저 떠나자 나중에 부인곁에 묻혔습니다. 작은 부인 가묘가 그 옆에 있었지만, 새로 유골을 용인에 묻으려면 당연히 큰 부인도 같이 모셔서 세 분봉을 해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예(禮)가 아닐까요?

A: 그것이야 후손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 그런데 당신은 시골 하의도를 많이 가봤오?

Q: 가 봐서 잘 아니까 이런 말씀 드리지요.

A: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며) 나는 몰라 그 사람들이 하란대로 했으니까.

Q: 아니 족장어른이 주선하고 코치까지 했다고 자랑하셔 놓고, 이제 와서 그 사람들 책임이다 그러시면 안 돼지요. 잘 아시는 어른이. 또 그런일을 김대중씨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압니까? 족장 어른이 시킨데로 했겠지. 그럼 시골 파묘시간은 몇시였습니까? 유골도 빠뜨리고 갈 정도면 이곳 하관 시간이 급했든 모양입니다.

A: (버럭 화를 내면서) 몰라, 왜 그런데 젊은 사람이 정치를 한다면 당신 정치나 잘 해요. 남의 일에 배 나라(놓아라), 감나라 하지 말고!

손석우씨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Q: 그러신다고 가시면 어떻해요? 몇 말씀 더 하고 가십시요.

A: 나빠요. 괜히 늙은 사람 불러내 놓고.

내가 아무리 붙잡고 사정을 해도 손석우씨는 화를 내며 가 버렸다. 변명하기가 궁색했던 모양이다. 손석우씨와 대판 싸움을 하고 헤어진지 두 달 후, 다시 목포로 내려가 달민 어른을 만났다.


김달민씨 인터뷰 기록 (1996년 10월 초 목포에서)

Q: 어르신 안녕하셨습니까?

A: 젊은 사람이 몸이 그렇게 안좋담서, 지금은 괜찮소? 조심해야지.

Q: 어르신, 제가 그 산소(용인에 있는 김대중 가묘)에를 갔다온다 하면서도 못 가보고 그냥 와서 죄송합니다.

A: 글쎄말이여. 가서 사진도 찍어 오고 좀 그랬으면 좋았을걸

Q: 그러나 그 묘소자리를 잡아 준 지관 손석우씨를 봤으니 얘기는 드릴 수 있어요.

나는 손석우씨와 만났던 이야기를 노인에게 해 주었다.

A: 참 기맥혀서. 동네 사람은 커녕 문중에도 기별도 없고 말도 없었어. 지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여. 거기도 요술쟁이 아니여?

Q: 약간 그런 사람이에요.

A: 당신도 그 사람과 같은 손가 아니여? 손씨들 못쓰겠구마. 진도에 살든 손재형씨 같은 분은 얼마나 양반이고 당신도 몇 번 만나보니… 그런데 지관이란 사람이 못 쓰겠구마. 아무튼 당신이 말 잘해 줬구마. 나쁜놈들, 하여간 세상이 제멋대로야.

용인 묘지 답사

1997년4월경, 나는 김대중씨의 경호실장을 지낸 함윤식의 차를 타고 그의 안내를 받아 용인에 있는 김운식 가족묘지를 탐사할 수 있었다. 함윤식과 나는 각자 카메라, 함윤식은 비데오 카메라 까지 휴대하고 웅장하고 거대한 묘소를 촬영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김대중 선생의 출생에 얽힌 의문과 소문의 실상을 알게 됐다. 이 후 나는 김대중씨가 결코 김해김씨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나는 또한 윤씨의 실상도 짐작할 수 있었다. 김대중씨의 생모가 김운식과 살기 전에 김대중씨를 낳은 게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씨가 김해 김씨가 아니고 윤씨일 수도 있고 제갈씨 일수도 있다는 하의도 주민들의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원수의 김가들

199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나는 나의 숙원이었던 김대중씨의 출생비밀을 학술적으로 규명해 보고 싶었다. 내가 녹음한 하의도 주민들의 증언, 그리고 김대중씨 본인과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의 호적과 제적부등을 중심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검증을 하고 싶었다.

이 일이 시작되면 김대중씨 외에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가계도 다 조사하여 국민들에게 올바른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 자료로 제공하고 싶었다. 내가 근 10년동안 젊음을 바쳐 해왔던 김대중 출생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지도자를 검증하는 이 작업을 위해서는 정치권의 선배와 교수, 학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이 문제를 나와 가까이 지냈던 김대열(金大烈 한나라당 위원장)씨와 상의했다. 그도 동의했다.

검증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하의도에서 파묘했다는 김대중씨의 호적상 부친 김운식 묘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다시 한번 하의도를 방문했다. 1997년 9월경이었다.

80대 초반의 덕자 할머니는 차 길에서 벼와 고추 등을 멍석 위에 올려놓고 말리고 있었다. 인동 장씨들의 집성촌인 봉도(현지에서는 뻘이 섬이라고 함) 부근 이었다. 봉도에는 장씨는 물론이고 제갈씨도 많이 살았다.


제갈덕자씨 인터뷰 기록 (여, 80대 초반, 1997년 9월)

Q: 할머니, 위험하게 차길에서 이런것을 말리고 계셔요? 자동차가 다니면서 전부 바퀴로 밟아 버리겠네요.

A: 그래도 차가 잘 비켜서 다녀주고 햇빛이 좋고 세멘바닥이라 길에서 말리면 잘 말릉께.

Q: 할머니는 이 근방에 사세요?

A: 야, 저집이 우리집이요.

Q: 할머니 힘들면 제가 도와드릴께요. 허리도 펴고 쉬었다 하시지요. 저는 목포에 가야 하는데 아직 배시간이 멀어서 놀러와 봤습니다.

A: 감사하요. 저것(멍석)좀 이 쪽으로 몰아다가 피(펴) 주시요.

Q: 잘 마르겠습니다. 저 소금밭에는 요즘도 소금 많이 거두겠어요.

A: 그랑께 요세(요새)는 소금값도 없고 일도 많이씩 못합디다.

Q: 옛날에는 많이씩 했습니까?

A: 말도 못하제. 소금배가 한번씩 오면 겁나게 싣고가고 말도 못했제라우.

Q: 할머니 그런디 저 집이 옛날에 김대중씨가 태어난 집이라면서요?

A: 어디서 오셨소?

Q: 서울서 왔습니다.

A: 뭔일에 오셨소?

Q: 할머니는 이곳이 친정 이지요?

A: 우리 친정은 쩌(저기) 동네요.

Q: 그러면 이동네로 시집왔어요

A: 시집온 데는 이 동네가 아니고 쩌기였는디 시방 이 곳에 살고 있지라우.

할머니는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A: 집이(당신이) 김가네 식구제?

Q: 아니요. 저는 이곳 사람도 아니고 김가도 아니에요. 왜, 제가 김가 같아요?

A: 원시놈의 김가들. 또 대중이 대통령 나왔다고 살판 났제.

Q: 맨날 떨어지는테 살판이라니요? 할머니도 적극 선거운동해서 김대중씨 대통령 만드세요. 그래야 이 곳도 대통령이 태어난 섬으로 유명해 질것 아니겠습니까.

A: 돼면 좋지만, 김가들만 살판 나제. 대통령 되면 즈그씨라고 까불어 싸는 꼴을…나 죽고 나면 몰겄제마는…

Q: 그러면 할머니도 김대중선생이 제갈 씨라 그런 말인가요?

A: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나서) 대중이는 우리씨여. 원센놈의 돈이 없고 학교 보낼 처지가 못되고 김가들은 돈 있응께 호적도 올리고 학교도 보냈응께 우리는 할말 못하제.

Q: 할머니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윤씨들은 또 자기씨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A: 그것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여.

Q: 모르다니 할머니는 다 아세요? (목포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시간이 금방이었다)

A: (갑자기 울면서)원센놈의 선거만 닥치면 속이 뒤집어 징께.

Q: 속상하세요?

A: 속상하고 말고제 (머리에 쓰고 있었던 수건을 풀더니 사정없이 흑흑 소리를 내고 울고 있었다)

Q: 할머니 그래도 울지 마세요.

AA: (세워둔 택시기사는) 지금 안가면 배 놓쳐요. 빨리 갑시다.

나는 급히 자리를 피하고 할머니를 위로도 못해주고 택시를 탔다.

오늘 만난 춘길씨와의 한 시간 반 동안의 면담은 그동안 내가 가졌던 온갖 추리와 궁금증을 말끔히 씻어주는 자리였다. 하의도에서 만난 그는 김대중 출생비밀의 해답을 갖고 있었다.

이 분을 만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설렘과 긴장, 공포와 조심스러움 속에서 보냈는가. 춘길씨를 만난 후부터 나는 춘길씨만은 절대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감을 더 한번 느꼈다.

춘길씨로부터 기가 막힌 사연을 들은 나는, 다시는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았다. 국민들을 편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포부인데, 정치가 사람의 근본을 바꿔버리고, 고향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다니. 만약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출생은 국민들의 관심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돈으로 사람의 입을 막고, 호적서류 일부를 없애고, 관련자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했다니 정치란, 아니 권력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또다시 거짓말을 낳는다고 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고향 사람들이 그를 야바위꾼이니 요술쟁이니 하는 말을 할 정도라면 그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거짓말을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 했다니 정치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춘길씨를 만나고 난 그날 아침 여덟씨 경, 나는 김대본씨와 그의 어머니(김순례)가 외롭게 잠들어 있는 산소에 다시 한번 올랐다. 산소 바로 밑까지는 양파밭이고, 무성한 억새풀이 길을 막고 있었다. 밭에서 일하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는 올라간 길로 내려오지 못하고 묘 쥐 쪽의 고개를 넘어 먼 길을 걸었다.

고개를 넘어오다 나는 조그마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정치권 주변의 일들을 반성했다. 그래도 내가 자위할 수 있는 것은 그 흔한 정치자금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것, 내 양심에 부끄러운 돈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재산을 탕진했으면 했지 나는 부정스러운 돈을 받지 않았다.

김대중씨 진짜 호적


한길 소식지 제 2호(1997년 10월 29일 발행)에 “김대중 출생 및 가계의 비밀을 밝힌다”는 제목 아래 내가 추적했던 작업의 일부가 공개되었다.[5] 당시 나는 한길소식지 편집인 겸 간사장이었지만 이 기사는 나의 동의 없이 몇 몇이 임의로 쓴 것이었다.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대중씨의 출생 및 성장 과정, 가족관계, 학력, 사회경력에는 너무나도 의문점이 있다는 것이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양식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제갈 성조가 1920년 12월에 병사하면서 김대중씨의 생모 장수금(장노도의 개명)은 남편의 친형인 제갈성복과 몰래 동거를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제갈성복은 장수금과의 동거 이전에 본처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후 제갈성복은 동네 친구였던 윤창언에게 임신한 몸의 장수금을 넘기고 장수금은 윤창언과 동거를 하던 중 제갈성복의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김대중(당시에는 윤성만이라고 불림)이었다>

내가 추적했던 김대중의 출생비밀과 큰 틀에서는 비슷했지만 세밀한 부분에서는 약간 달랐다. 내가 작성하지도 않은 기사를 계재한데 대해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 무렵 나는 서울에 사는 병수씨를 만났다. 70대 중반의 병수씨는 하의면 면사무소 출신이다. 한길소식지 간사장이라는 신분을 밝히고 용건을 말하자 병수씨는 한길소식지에 보도된 “김대중 출생비밀”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5]

제갈병수씨 인터뷰 기록 ( 남, 70대 중반, 서울 1997년 10월 말)

A: 당신들이 만든 자료를 봤는데 내가 볼 때는 틀린 것이 많아요.

Q: 어떤 부분이 틀린가요?

A: 그러면 안돼. 언젠가 났던 일본 신문기사와 그리고 “이한두”라는 사람이 쬐그망케 쓴 책하고 같은 소리요. 그리고 그런 얼토당토 않는 무슨 도표를 만들어 놓고. 당신이 만들었어요? 김대중씨도 이제는 성을 바르게 불러버리지 참 또 이런것까지 나오니 기가 맥키구마.

Q: 선생님은 전에 하의도에서 면 사무소에서 근무 하셨다면서요?

A: 그랬지. 오래 됐오.

Q: 어떤 것이 틀린가요?

A: 아, 일본신문, 그런 책들하고 같으니까 잘못된 것이요.

Q: 그럼 지금이라도 시정하는 기사를 쓰도록 선생님이 바르게 고쳐주시지요?

A: 이제는 눈도 잘 안보이고, 우리 섬에서는 그런 소문과 낭설이 많지만 제가 볼 때는 호적이 있어야 하요. 당신들은 호적이 있응께 그렇게 썼오? 호적을 보고 여러사람 껏하고 대조를 해 보면 알게 될 것요.

Q: 호적을 몇번이나 하러가고 김대중 선생이 다녔다는 초등학교 까지 가서 재적 증명을 할려다가 망신만 당하고 못했습니다.

A: 남의 집안문제라 얘기는 못하지만 김대중씨 진짜 호적을 찾아 줄라거든 자세히 알아보고 하지도 않고.

Q: 미안 합니다. 여럿이 만들다 보니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00까지 지내시고 일을 보셨든 분이니 자세하게 기억을 더듬어 말씀해 주시면 합니다마는.

A: 나도 여러사람 호적이 있으면 설명해 줄 수 있지만, 아, 하의면에서 호적계와 면장을 지낸 분이 서울가 사는디 그 분한테 물으면 자세히 알 거요. 그러나 그분이 잘 말하지 않을 끼요.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이 김대중 호적을 여러번 고쳐버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Q: 그분 전화와 성함을 좀 적겠습니다.

A: 내게 있을거요. (전화번호는) 000번 이름은 이 00요. 이 사람이 면장때 고쳐버렸다고 하는디 법원 것하고 대조를 안해봐서. 그러니 그 사람을 만나봐요. 그란디 절대 말 안할꺼요. 나쁜 새끼들, 호적은 법원 것하고 면사무소 것이 글자한자 한획도 틀려서는 큰일나.

병수씨가 알려준 전화번호로는 하의면 면장을 지냈다는 분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을 통해 하의면 사무소에서 근무했던 병열이란 분을 찾아냈다. 서울에 살고 있는 그도 70대 였다.

김병렬씨 인터뷰 기록 (남, 70대 초, 1984(?! 1998?), 4월 서울)

Q: 그러면 한가지만 더 얘기 해 주세요. 선생님은 면장을 지냈던 이양배 (李良培) 면장을 잘 아시지요? 지금 서울에 계신다는데. 전화번호와 주소라도 좀 말씀해 주세요.

A: 전화는 000-0078이고 주소는 모른디 아마 딸네집에서 같이 살 거요. 양배씨는 오래전부터 면사무소에 근무했고 한문글씨를 아주 잘 쓰는 명필이요.

Q: 왜 (하의) 면사무소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호적과 외가집, 윤창언, 제갈성조, 제갈성복씨 등, 관련자들의 호적을 발급하지 않고 따지고 누구냐고 묻는 것은 왜 입니까?

A: 그것은 잘 모르겠구, 자기들의 어떤 후환이 두려워서…

Q: 그럼 하의도 북 초등학교에서는 당시 일본시대 때 학적부가 있습니까?

A: 있겠지마는…(중략)

Q: 선생님 께서는 과연 김대중 대통령이 정말로 김가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의 근거와 원인은 어디 있다고 보는 겁니까? 선생님의 입장에서.

A: 첫째는 김대중 대통령의 호적관계에서 서자냐, 적자냐 하는 부분이 개운치 않게 정리돼 호적에 자기 어머니(장노도)를 김운식과 혼인신고 해 버린것하고 다음은 죽은 김운식의 장남 대봉씨가 자기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소란 스럽게 하고 술을 먹고 병을 얻어 죽었다는데 있고, 그 다음으로는 이번에 동네 사람은 커녕 직계 자식들도 모르게 몰래 유골을 파 왔으니까요. 당신 말대로 김운식 비석에 자기(김대중)가 장남인 것처럼 해 놓으니까 모두들 씨도둑이라고 그러는 거지.

Q: 하의도 김씨 문중에서 그런 사정을 제일 잘 알고 게신분은 누굽니까?

A: 달민 어른하고 서울 살고 있는 김00씨지.

하의도 면장을 지낸 분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그와 전화통화를 했지만 그는 나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우리 세 사람이 만난 것은 무덤까지 갖고 갈 비밀이여

나는 드디어 김대중씨 호적과 그의 생모 장노도의 첫 남편 제갈성조의 형이 되는 제갈성복의 제적부 등을 입수했다. 장노도의 첫 남편 제갈성조의 호적은 구할 수가 없었다. 이 호적을 들고 1998년 6월 초, 서울에서 달민 어른과 김00씨를 만났다. 당시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된 상태였다.

Q: 두 분을 같이 모신 것은 달민 어른께서 같이 만나자고 해서입니다. 감사합니다.

A: 그래 손창식 씨는 이것들을 어떻게 구했소?

Q: 몇 년 전에 새로 생긴 전산(電算) 우편제도 효과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두분 어른께서 이 호적들을 천천히, 자세히 검토해 보시고 좋은 해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관련서류 열 두 가지를 내 놓았다. 나는 두 분 어른과 2박3일 동안 같은 여관에 지내며 호적을 검토했다.

Q: 달민 어른께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만약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되면 한번만 더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지난 10 여 년간 해 온 일의 결과를 꼭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A: 이제 대통령까지 돼버렸는디 무슨 소용이 있겠소. 호적을 전부 본께 김대중이는 당신에 대한 고소를 취하해야 돼. 이거 큰일 날 일이구만. 보통일이 아니여. 면사무소에서 제갈성조 호적을 없애버렸으니 볼 수가 있겠어? 그러나 목포 법원에는 원부가 남아 있응께 큰일 나겠구만.

Q: 저도 이렇게 까지 호적을 어처구니없이 해놓았는지 몰랐어요.

A: 뭣이든 꼬리가 길면 잽혀. 어쩌다 당신을 고소해 가꼬(가지고) 이제 꼼짝없이 탄로나게 생겼는디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옆에 있던 김00씨는

AA: 우리 김가들은 할 말이 없어졌제. 이거 참 큰일 났구만. 어른 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하며 달민 어른의 의견을 구했다. 달민 어른은 묵묵히 있다가 나를 보고

Q: 당신 말이야, 재판을 하더라도 이 호적들은 법원에 제출하면 안돼. 큰 일 나, 큰 일

라고 말했다.

A: 그렇다면 저는 어떡합니까?

Q: 그래도 안 돼. 제출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재판부에 고소를 취소해 버려야제. 이거 참 큰일이여. 우리가 대통령을 직접 만나든지, 아니면 말이 들어가도록 해 볼탱께 당신은 누구에게도 아무말 하지 말어. 그라고 우리가 이번에 만나서 3일씩이나 같이 호적을 보고 의논했단 말은 죽을 때까지 말 안하기로 약속을 지켜.

Q: 알겠습니다. 그러나 기소가 되고 재판이 시작되면 달민 어른은 제가 꼭 만나서 의논드리고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A: 난, 이제 당신 안 만나. 찾아오지 말어. 우리 세 사람이 만났다는 것은 무덤까지 당신이 지켜야 혀. 그렇게 안하면 자식들은 물론이고 고향사람들과 김대중 대통령한테 우리는 매장되고 전부 고향을 떠나야 혀. 알았제.

나는 대답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잘못하면 내가 감옥 갈 문제여서 함부로 대답하기 어려웠다. 달민어른은 일어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A: 약속은 지켜야제. 잘못하면 큰 일 나겠구만. 우리는 이제 가 볼랑께. 젊은 사람이 보통이 아니랑께. 몇 년 전부터 예사 사람이 아님은 알았지마는 큰 일 낼 사람이여. 그라고 대통령은 고소한 것들을 어떻할라고 이만큼 벌려놨는지, 참…

두분은 여관방을 나갔다.


밤에 이뤄진 검찰 조사

김대중씨의 누명을 벗겨주겠다는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한 이 탐사작업을 통해 나는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내 인생 후반기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할 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한길연구회에 간사장으로 참여한 것은 김대중씨의 출생 내막을 학술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계기로 하여 김대중씨 외에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가계도 다 조사하여 국민들에게 올바른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 자료로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근 10년 동안 젊음을 바쳐 해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길연구회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김대중씨 출생과 관련된 기사를 보도하는 바람에[5] 나는 1997년 11월 19일 김대중씨 측으로부터 형사고소를 당했다. 나는 7개월 동안 18회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공무원들의 퇴근 시간 이후에 이뤄졌다. 나에 대한 조사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았다.

내 담당 검사도 김해 김씨였는데 그는 내가 조사한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굉장히 놀라워했다. 그는 내 진술을 듣기만 할 뿐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다. 검사는 나에게, 조사만 하지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 실체를 다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소 만기일(1998년 6월 18일)에 검찰은 나를 기소했다. 그 얼마 후, 나는 1심 첫 재판 기일을 통보 받았다. 나는 이틀인가 삼일인가를 아무 생각없이 잠만 잤다. 세상 인심이라는 게 참 우스웠기 때문이다.

25년간 야당 생활을 하면서 내가 주로 맡은 분야가 인권이었고 나는 야당에서 인권국장까지 지냈다.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당원들의 변호사 선임이 인권국장인 내 임무이었으므로 나는 세칭 인권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많이 안다. 기소가 된 후 그분들을 찾아가 내 문제를 도와달라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사건을 맡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현직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모두 겁이 났던 모양이다.

수임료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를 피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무실에서 빨리 나가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무지하게 서러웠다. 그래서 나는 며칠간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잠만 잤다.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사람이 잠만 자니까 친구들은 나를 속 없는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칙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꿀릴 거라곤 없었다.

나는 혼자서 재판 준비를 했다, 법대 출신인 이경식(李京植)선배로부터 법률적인 도움을 받았고,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다.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계기

나에 대한 1심 첫 재판은 1998년 7월 14일 오후 4시, 서울형사지방법원 319호 법정에서 열리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재판이 다 끝난 뒤인 밤 8시에 열렸다. 법정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피고인인 나와 내 친구인 이경식, 조복형(趙福衡) 3명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격려하기 위해 끝까지 법정에 남아 있었다.

첫 재판에서 나는 피고인 모두(모두) 발언을 통해 재판장과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재판은 누구를 위한 재판입니까? 이 재판이 대통령의 통치에 보탬이 됩니까?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현직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불경스럽기 때문에 재판을 취소해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김홍일 의원의 측근이며 나도 잘 아는 현역 국민회의 의원이 내 집을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해외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줄테니까 국내를 떠나라”고 했다. 재판에서 입을 다물어 달라는 것이었다. 돈도 10억인가 20억을 준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명예훼손 사건은 고소인이 소를 취하하면 처벌하지 못하는 사건이므로 소부터 취하해 달라”고 했다. 그는 세 번인가 나를 찾아왔는데 소 취하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이 국내를 떠나라는 말만 계속했다. 그는 단순한 연락책이었을 뿐 결정권은 없는 것 같았다. 소 취하를 하지 않으니까 재판은 계속되었다.

나에 대한 재판은 여러 사건과 같은 날에 열렸지만 재판 순서는 항상 맨 끝이었다. 시간이 오후 4시로 잡혀 있었지만 어떤 때는 밤 10시에 열리기도 했다.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법정에서 기다리는 일이 내 일과였다. 밤 7시나 8시쯤 시작해 재판이 끝나고 나오면 컴컴했다. 텅빈 법정에서 재판부하고 검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재판을 했고, 방청객이라고는 이경식 조복형 선배가 유일했다.

1심 재판장은 대구 사람이었다. 키가 작고 점잖았다. 대구는 신성무역 다닐때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곳이었다. 나는 대구출신 재판장한테 호의를 가졌고, 재판장도 나에게 호의적인 것 같았다.

재판장에게 김홍일 의원측 사람들이 찾아와 화해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정을 말해 주었더니, 재판장은 그들과의 얘기가 끝난 뒤애 재판을 하자며 재판 날짜를 계속 연기해 주었다. 재판장도 화해를 원했던 것 같았다. 나도 적극적으로 재판에 임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중이던 1998년 어느 날, 나는 갑작스런 감기 증상에 몸을 가누지 못햇다. 나는 응급환자로 보훈병원에 입원했다. 고혈압이며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광주사태 때 투옥된 민주화 유공자였기 때문에 병원비는 크게 들지 않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그때부터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 중이다.

입원 후 김홍일 의원측에서는 연락을 끊었다. 협상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나는 재판부에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던 김해김씨 문중 제사에서 초헌관이 김종필씨였기 때문이고, 전두환씨는 김대중씨에 대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해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증인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홉 번째 재판을 하던 날,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재판장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심리를 종결하고 선고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재판장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나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에 2년을 선고했다. 선고가 있은 지 얼마 후, 그는 법복을 벗었다.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니 김대중 정부에 속았다는 생각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법원과 검찰만은 정신과 기개가 살아 있는 줄 알았는데 실망이었다. 이 정부가 왜 나를 기소하고, 왜 나에게 실형을 선고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법원과 경찰에 분명히 밝혔지만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내 친구나 친척, 심지어 아내에게도 김대중씨 출생 비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김대중씨 본인이 자기입으로 말하기 전에는 내가 들었던 증언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내 녹음 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증언자들에게 미칠 김대중씨 측의 협박, 공갈도 두려웠지만 내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해 준 하의도 주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투박하개 응해준 그들의 눈망을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증언자들 뿐 아니라 하의도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야 할 그들의 2세나 3세, 4세에 미칠 파장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 재판으로 인해, 내가 했던 일은 공개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숨길 게 없었다. 나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 재판은 내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대통령 본인에게도 불행이었다.

계훈제 선생의 육성 테이프


계훈제 선생은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초대 졸업생이다. 민족주의자로서 갖은 독재와 억압속에서도 함석헌, 장준하, 백낙천, 김동길 선생과 더불어 순수 재야 운동을 하신 분이다.

1998년 6월 어느날, 내가 김대중 대통령 측의 고소에 의하여 기소가 되었던 날이었다. 선생은 서울대 교유인 친구 편에 간단히 적은 편지 한 통을 내개 보내왔다. 근일간 자기를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7월 초 선생 댁을 방문하였다.

선생은 나를 원고와 책이 가득한 서재로 안내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흐트러진 몸이었지만 녹음기를 꺼내놓고 선생은 자신과 김대중, 그리고 이희호 여사와의 인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장 3시간 40여분 동안 또렷하게 젊은 시절 이희호씨와의 순애보적 사랑 얘기와 애환, 김대중씨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말씀하셨다.

선생은 자신의 육성이 담긴 녹은 테이프를 나에게 주면서 “유치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 유언이라 생각하고 책으로 출간해 주게. 한으로 점철된 내 일생과 내 마지막 심정을 김대중씨에게 꼭 전해 주게”라고 말씀하셨다.

선생은 내가 가까이 지낸 분도 아니고 허물없이 모셨던 분도 아니다. 가끔 정치범동지회 사무실에 오시면 존경하고 우러러 모시던 어른이었다. 갑자기 그런 요청을 받고 보니 내가 진 짐 중에서는 제일 무거운 짐이 되었다.

“왜 하필이면 미천한 저에게 이런 일을 맡기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씨를 상대로 재판을 준비하는 미스터 손의 당당함이 이 일을 맡기게 했다”

분노와 애석함과 미련이 담겨있는 선생의 육성 고백은 필자의 가슴을 에이게 했다. 나에게 녹음 테이프를 건네줄 때 어린 아이의 눈처럼 빛나던 선생의 눈빛은 지금도 내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내가 생각했던 책의 제목은 “대통령 김대중의 진짜 DNA는?” 이었다. 이 책은 선생의 육성까지 상, 중, 하 세권으로 차분히 쓰려고 했으나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떨어지니 나는 위험을 느꼈다. 계획을 바꿔 김대중 출생에 관한 추적 작업과 재판 기록만을 먼저 쓰고, 다소 무관한 선생의 글은 훗날 정리하여 발표할 생각이다.

계훈제 선생은 내 작업이 끝나기 전에 운명을 달리했다. 그 분이 나에게 준 육성 테이프는 지금도 짐으로 남아있다. 이 책의 출간을 게기로 계훈제 선생의 영전에 나의 뜻을 전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아래 글은 내가 4년 전에 썼다.



<고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날, 영안실에도 묘소에도 향불을 피우고 인사를 못했습니다. 생전에 선생님께서 저에게 주고 가신 숙제를 다 이루어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면목이 없습니다.

핑계 같지만 선생님을 만난 지 1년 6개월이 지난 후에야 김대중씨와의 재판이 끝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여의치 않은 생활이다 보니 미처 녹취록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주신 육성 녹음 테이프 원본은 믿을만한 친구의 외국 은행 비밀금고에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번 김대중 출생에 관한 책 속에 선생님의 육성의 글을 같이 발간하고자 했습니다만 책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선생님의 고귀한 유언집은 추후에 별도로 출간할 생각입니다.

유족들과는 진지하게 상의해 보지 않았지만 제 성의껏 준비하여 발간하고 이익금 전액은 유족들에게 전달하여 뜻 있는 곳에 선생님의 유언대로 장학사업에 쓰이도록 하겠습니다.

청년 시절의 고귀하고 멋진 로맨스는 짧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순애보는 요즘 세태의 젊은이들에게는 값진 메세지가 될 것이며 거짓으로 얼룩진 이 사회에 던지는 분노의 함성일 것입니다.

선생님의 젊은 청춘이 어쩌다 병마에 시달리고, 그 병마에게 일생의 건강까지 빼앗기고 한스럽게도 선생님의 일생을 결국은 굴복으로 몰아갔습니다. 그것을 선생님은 “나의 업보요 김대중씨의 강도 짓”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숭고한 순애보는 영원히 자리매김 할 것입니다. 반드시 값지게 출간해 드리겠습니다. 왜 하필 저에게 그 무겁고도 조심스럽고 어려운 짐을 남기고 가신 까닭은 이제는 알 것 같지만 어쩐지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선생님,

김대중씨의 출생에 얽힌 비밀은 김대중씨 생전에 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 이번에 “대통령 김대중의 진짜 DNA는?”이라 하는 책을 출간하는 시기에 선생님의 책을 만들기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인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렵습니다.

저는 “손창식이는 왜 하필이면 이 나라 지도자의 약점만 추적하고 다녔는가?”라는 잘못된 관점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김대중씨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군부 독재자나 특히 일본 언론과 기자들이 남의 나라 지도자에 대한 예우나 체면도 생각치 않고 훼손하는 것이 싫었고, 당사자인 김대중씨 마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이 싫어서 진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그들에게 반격하겠다는 것이 저의 소박한 충성심이었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돌을 던지고 저를 못된 탕아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 선생님의 육성은 훗날. 차분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젊은 후손들에게 값있는 자료로 만들어 선생님 영전에 바치겠습니다.

불안한 심정으로 지금 김대중 출생 관계를 책으로 엮으면서 행여 제가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등진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육성은 온전히 남아 다른 사람이 대신 정돈하여 발간할 준비는 해 두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내 선생님의 유고집을 출간하는 날, 선생님의 영전에 엎드려 인사드리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빌며 나라를 위해 축복해 주십시오.

2000년 봄.  손창식 씀 >


기자와 다시 찿은 하의도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있던 2001년, 나는 한 기자와 함께 4박5일 일정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내가 야당에서 인권국장을 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기자다.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나는 이 기자에게 내가 해왔던 비밀작업을 알려주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되고 내 존재가 세상에 공개된 다음,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내 작업을 이야기해 주엇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에 관심이 많았다. 예전에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디음에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대해 그는 궁금해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같이 다시 한 번 하의도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가벼운 관광객 차림으로 서울을 떠났다. 여름이어서 둘 다 선그래스를 끼었다. 지난 십 수년 간 혼자서 하의도를 찾을 때는 진짜 조마조마했다. 어떤 때는 낚시꾼 복장을 하고 봄, 가을에는 여행객처럼 위장했지만 정말 불안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현직 기자가 동행하니 겁나는 게 없었다.

하의도 선착장에 도착하니 큰 돌에 “대한민국 제 15대 김데충 대통령 태생지 하의도”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하의면 농협에서는 외지 관광객을 위해 하의도 역사를 기록한 책을 팔고 있었다. 사단법인 한국도서(섬)학회에서 발행한 “내 땅 찾기 300년 역사의 섬 하의도”란 책이다.

하의도 역사를 소개한 이 책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1925년 1월 6일 김운식과 장노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적혀 있었다. 김대통령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노도의 얼굴 사진도 실려 있었다. 김운식의 본래 장남 김대본과 김대중 관계에 대해 이 책은 김대본이 김대중의 “큰 집 형님”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큰 집 형님”이라면 김대중씨의 아버지에게 형이 있었고, 그 형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현직 대통령이 서자 출신이라는 점을 감추려 하다보니 “이복 형”이 “큰 집 형님”이 되는 상식 밖의 일이 생겼다. 아부가 지나치면 조작이 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 아닌가. 대통령을 탄생시킨 하의도이지만 워낙 좁은 섬이다보니 다방이라고는 없었다. 여관도 한 군데 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씨가 살았던 집은 대리마을에 그대로 있었다. 대문 밖에서 안을 쳐다보니 여든 살 가량인 김대본의 처가 살고 있었다.

김대중씨로 인해 술 병(病)을 얻은 남편 김대본을 여의고, 없는 살림에 시부모를 수발하며 살아온 한 많은 여성이 그녀다. 나는 그녀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지금 또 다시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동행한 기자는 집에 들어가자고 졸랐지만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돌아서서 나왔다.

대통령이 다녔던 대리 마을의 서당은 그 자리에 있었다. 대통령이 태어난 후광리 주막집은 “대통령의 생가”라는 표시판과 함께 잘 단장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의 종손이다. 종손이 사망하면 문중 묘소에 묻히는 게 관례인데 김운식은 문중 묘소에 묻히지 못하고 대리 마을 뒤 산에 묘가 있었다. 첩(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 문제로 가문에 누를 끼쳤기 때문이라 한다.

묘에 가 보니 김운식 묘의 왼쪽에 그의 본부인 김순례 묘가 있고, 그 오른 쪽에 장노도의 가묘(假墓)가 있었다. 김운식과 본부인 묘 사이의 간격은 약 30Cm쯤 되었는데, 김운식과 장노도 묘 간의 간격은 그 보다 훨씬 넓었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다 죽으면 첩의 경우엔 비록 묘자리라 하더라도 남편과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게 옛날 풍습이다.

김운식의 묘는 파헤쳐져 봉분은 있지만 유골은 없다. 유골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이 새로 마련한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김대중 대통령은 용인 묘소에 김운식-장노도의 유골만 합장하고, 김운식의 본처 김순례의 묘는 고향에 그대로 두었다.

김운식 묘 바로 위에 김대중 대통령의 배다른 형 김대본의 묘가 홀로 있었다. 묘 앞에는 비가 있는데 비 앞에는 “김해 김공 대봉 지묘(金海 金公 大奉 之墓) ”라 써 있고, 비 뒤에는 “제 대중 추모 봉립(弟 大中 追慕 奉立)”이라 쓰여 있다. 동생 대중이가 형을 추모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비를 세운 연도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 것이 사실적 기록이다. 가문과 근본을 조작하려해도 비에 기록된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나보다. 내가 가 본 경기도 용인의 김운식 묘에는 김대본의 이름이 아예 빠져 있으며 김대중이 김운식의 장남으로 기록돼 있다.

비문을 읽은 기자도 그제서야 내가 말한 “김대중 출생비밀”을 납득하는 것 같았다. 묘 곁에 앉아 잠시 쉬면서 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혜롭거나 요령있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적당히 넘어가는 식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 방식이 서툴렀는지는 몰라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장노도가 태어났던 뻘 섬 집은 그대로 있었고, 그 집 옆에는 제갈씨들이 살고 있었다. 일흔이 넘은 제갈씨 사람들은 장노도와 결혼했다가 요절한 제갈성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10년 전보다 훨씬 살이 찐 나는 기억하지를 못했다. 다행스러웠다.

이제는 내 이야기를 마무리할 차례다.

나는 김대중, 아니 제갈대중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법과 제도마저 무시한 채 대중을 선동하고 독불장군처럼 살아 왔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정직하고 솔직해 지고자, 그리고 인간 존재의 가치를 확인코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대한민국에도 정의가 살아 있음을 나는 이 글을 통해 보여 주고 싶다.

나는 재판 전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출생 비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고 해보지를 않았다. 당신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내가 들었던 얘기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내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순수하게 응해준 그들의 눈망울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나에게 불이익이 닥치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죽는 날까지 그 분들의 신원과그 분들의 말을 녹음한 테이프는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계기로 하여 국가가 김대중씨 성씨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한다면 역사를 위한 소명의식에서 모든 것을 공개할 것이다.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 일부는 고인이 되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나의 순수한 입장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김대중 선생, 당신은 성을 변조하고 고의적으로 호적을 훼기했다. 정녕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을 속였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전 세계 인류를 속였다. 위선이며 고의적 과실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이 정녕 대한민국을 생각한다면 죽기 전에 국민들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기를 바란다. 한 시대를 풍미한 당신이 우리 후대를 위한 마지막 책무라 믿는다.”

3. 손창식의 재판기록

앞에서 밝힌 대로 손창식씨는 김대중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형사고발을 당했다.

1심 재판의 사건 번호는 “98고합516”이고 담당 검사는 서울 지검 공안부 김희관 검사이고 담당 판사는 서울 지방법원 형사 23부 최세모 판사였다. 사실 심리의 시작은 1998년 7월 14일 16:00 으로 되어 있었다. 다음은 검사 김희관이 작성한 공소장이다.

< 공소장 피고 손창식 죄명: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 위반, 출판물에 의항 명예훼손

공소사실 피고인은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새정치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후보자를 비방하여 동인이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한길연구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동 단체의 회보형식으로 주간지를 창간한 후

이를 통하여 김대중 후보의 출생, 경력, 사상, 건강 등에 관하여 허위내용의 기사 내지 동인을 비방하는 내용의 기사를 연재하여 이를 전국일원에 무료로 배포하기로 공소의 함윤식과 공모한 후 1997년 9월 경 서울 종로구 당주동 145 미도파광화문 빌딩 2층 211호(70평)를 임차보증금 2,800만원, 월세 308만원에 임차하고, 공소의 조범진, 김민수, 신학철, 서성숙, 김희수 등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등 사무실운영에 필요한 준비작업을 마치고, 같은 해 10월 7일 위 사무실에 “한길연구회”를 정식으로 발족하여,

피고인은 동 연구회의 간사장으로, 공소의 함윤식은 주간으로 각 취임하고, 이어서 같은 달 22일 서울시에 “한길소식”이라는 제호의 주간지를 발행인을 함윤식, 편집인을 피고인으로하여 정기간행물등록(등록번호: 서울다05308호)을 한 다음

1. 1997년 10월 하순경 “한길소식” 제 2호(1997. 10. 29. 자)를 발행하였는 바,

- 사실은 김대중은 본관이 김해 김씨인 부 김운식과 모 장노도간에 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출생 및 가계의 비밀을 밝힌다”는 제하로 i. 제 2-5면에 “김대중은 제갈성복과 장노도간에 태어난 것으로, 김대중은 본래성이 제갈임에도 우리나라 제일의 성씨인 김해김씨를 자신의 본관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이용하였다는 취지로 허위내용의 글을 게재하고

- “영웅주의에 빠진 식언의 정치인 김대중”이라는 제하로 i. 제 11면에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하고 모든 것을 음해와 공작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이미지 손상차원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점에서 김대중씨는 거짓말 쟁이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건국이래 정치인으로서는 제일 많은 거짓말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김대중씨는 그의 정치역정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한 식언을 남겼고, 군사독재와 맞서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들은 김대중씨의 실쳬를 알게되자 그의 주변을 떠났다……얼마전 한 TV토론회에서 “평생에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일이 없다. 다만, 때때로 약속을 어긴 일이 있을 뿐이다”라는 희대의 명언이자 최대의 거짓말을 해 국민들에게 실소를 자아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씨는 자신의 거짓말을 합리화시키고 은폐키 위해서 철저한 보복을 사슴치 않고 자행했다”라는 비방내용의 글을 게재한 후 ii. 동 “한길소식” 제 2호 25,000부를 인쇄, 그 무렵 전국일원의 불특정 다수인에게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대통령후보자인 김대중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함과 아울러 공연히 동인을 비난하는 내용의 사실을 적시하여 동인을 비방하고, 이와 동시에 출판물에 의하여 동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이로써 선거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잡지를 통상방법외의 방법으로 배부하고,

2. 1997년 11월 초순경 “한길소식” 제 3호(1997년 11월 6일자)를 발행하였는 자,


- 사실은 김대중은 1949년 여름에 보성경찰서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사실이 없으며, 오익제의 월북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사상전력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하로 i. 제 2면에 “김대중씨는 1949년 여름에는 보성경찰서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전남경찰서에 구속된 사실이 있다” ii. 제 5면에 “최근에는 국민회의 상임고문이었던 오익제가 월북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오익제의 월북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관계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것과 함께 북한의 노동신문이 1997년 8월 16일 이후 오익제에 관한 기사의 헤드라인 대부분을 “남조선의 국민회의 상임고문이며…”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북한에서 한국내 정당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회의만을 인정한다는 것을 암시하며, “한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대남관을 기준으로 볼 때, 유일무이하게 국민회의만을 인정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허위내용의 글을 게재하고.

- 사실은 김대중은 6.25당시 전남지구 해상방위대 부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역기피자, 김대중 대통령 후보 자격 없다는 제하로 i. 제 6면에 “김대중과 국민회의의 간교한 작전을 주효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다시 한번 속인 파렴치한 권모술수였다. 사실 병역에 관해서 김대중은 할 말 없다. 그가 병역필증(제대증)도 없는 병역을 기피한 병역 미필자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지난번 이회창 총재 두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신한국당측에서 역으로 자신의 병역문제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자 자신은 6.25당시 목포 해상방위대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다는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지금까지 김대중이 직접 밝힌 자신의 병역과 관련한 발언내용을 살펴보면 국민을 우롱하는 거짓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허위내용 내지 비방의 글을 게재하고

- “김대중의 왜곡된 종교관, 무엇을 위한 신앙 생활인가?”라는 제하로 i. 제 9면에 “김대중씨의 왜곡된 종교관을 볼 때 김대중씨는 미신 신봉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이 한사코 독실한 천주교 신자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의 행태를 볼 때 그는 무속신앙에 심취한 사람이며, 대통령병에 걸린 중환자이다.”는 비방내용의 글을 게재한 후 ii. 동 “한길소식” 제 3호 20,000부를 인쇄, 그 무렵 전국일원의 불특정 다수인에게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대통령후보자인 김대중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함과 아울러 공연히 동인을 비난하는 내용의 사실을 적시하여 동인을 비방하고, 이로써 선거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잡지를 통상방법외의 방법으로 배부하고

5. “1997년 11월 중순경 “한길소식”제 4호(1997년 11월 13일자)를 발행하였는 바,

- 사실은 김대중이 치매를 잃거나 제 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혼절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불치의 병을 갖고 있다”라는 제하로 i. 제 3면에 “김대중씨의 건강문제는 소문이 아닌 사실로서, 그의 건강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황임이 확인되었다. 결국 김대중씨와 국민회의는 김대중씨의 건강문제를 철저히 은폐해 왔으며, 각종 언론풀레이를 통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왔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는 지병인 무릎관절염과 가벼운 청력장애, 노인성 당뇨증세는 있으나 정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김대중씨가 치유불가능한 ‘고관절괴사증’(비구와 대퇴골을 접합하는 관절이 썩는 불치의 병)과 치매증상을 앓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김대중씨는 이미 알려진 것 외에도 5차례 이상 혼절한 사실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김대중씨는 한보사건으로 권노갑이 구속되자 혼절했으며, 9월13일에는 일산 자택에서 혼절을 했다. 또한 10월 3일에는 부산 호텔방에서 혼절한 사실이 있으며, 10월 10일에는 일산 자택에서 비자금 대책을 논의중에 35분여 동안 혼절해 대책회의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지난달 10월 17일에는 김해 김씨 추향제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와, 호텔방에서 혼절한 사실들이 밝혀졌다”는 허위내용의 글을 게재한 후 ii. 동 “한길소식” 제4호 20,000부를 인쇄, 그무렵 전국일원의 불특정다수인에게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대통령후보자인 김대중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함과 동신에 출판물에 의하여 동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이와 아울러 선거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잡지를 통상방법외의 방법으로 배부하고

6. “1997년 11월 하순경 “한길소식” 제 5호(1997년 11월 20일자)를 발행하였는바, - “김대중의 여우의 기지”라는 제하로 i. 제 14면에 “김대중씨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면피한 사람이 되어 온 출생배경과 성장과정을 거쳐왔다……이런 점에서 김대중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세상을 살아왔고, 자유자재로 자신의 색깔을 바궈온 ‘카멜레온’의 정치인이다……..김대중씨는 어릴적 친구가 한명도 없는 외톨이였다. 그리고 현재도 군사독재하에서 함께 모든 희생을 감수하며 투쟁했던 수많은 친구들이 단 한명도 남이있지 않고 그의 곁을 떠나 외톨이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김대중씨의 말대로 친구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잘 잘못을 가린다면 잘못은 김대중씨에게 모두 귀결된다. 왜냐하면 그는 직언과 충언을 하는 친구이자 동지들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늘 친구들을 거짓말과 배신으로만 사귀어 왔기 때문이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한 후 ii. 동 “한길소식” 제 5호 20,000부를 인쇄, 그 무렵 전국일원의 불특정다수인에게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공연히 대통령후보자인 김대중을 비난하는 내용의 사실을 적시하여 동인을 비방함과 동시에 출판물에 의하여 동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이와 아울러 선거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잡지를 통상방법외의 방법으로 배부하고,

7. “1997년 12월 중순경 “한길소식” 제 8호(1997년 12월 11일자)를 발행하였는 바, - “김대중, 당신의 붉은 사상 더이상 감출 수 없다”라는 제하로 i. 제 6면에 “오익제가 김대중씨에게 보내온 편지내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북한에서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있으며 그가 집권을 한다면 자신들의 통일방안과 일맥상통하는 통일방안을 김대중씨가 갖고 있으므로 빠른 시간안에 통일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어쨋든 오익제의 편지는 김대중씨와 오익제의 관계가 보통 이상임을 증명해 주는 동시에 북한이 이번 15대 대선에서 남한의 대통령으로 김대중씨가 당선될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씨가 집권을 하게 되면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이 아닌 그들이원하는 방법으로 통일이 달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는 비방의 글을 게재한 후 ii. 동 “한길소식 제 5호 20,000부를 인쇄. 그 무렵 전국일원의 불특정다수인에게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공연히 대통령후보자인 김대중을 비난하는 내용의 사실을 적시하여 동인을 비방함과 동시에 출판물에 의하여 동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이와 아울러 선거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잡지를 통상방법외의 방법으로 배부한 것이다. >


이 공소장에 대하여 손창식씨는 다음과 같은 진술서를 관게당국에 제출하였다.

<검찰 공소장에 공표된 증거등에 대한 진술서>

본 피고인은 18회에 걸친 검찰의 조사과정에서 한길연구회 본래의 목적과 취지를 밝혀왔던 것처럼 문제된 한길소식지의 발행에 대하여 한길연구회의 간사장과 편집인으로 실질적 기여를 못하게 되므로 3회에 걸쳐 사의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오늘에 이르렀던 것과 행위에 책임은 질 수 없으나 표견상 한길연구회의 간사장과 편집인으로서 책임질 일이 있다면 책임질 것이라고 밝혀온 바 있습니다.

소송경제의 원칙과 대통령 선거당시 “정치보복”을 않겠다던 김대중씨의 공약에도 불구하고 한길소식지의 주간 함윤식씨와는 별도로 본 피고인을 1998년 6월 16일 (7개월 기소만기)에서야 공소를 결정하여 재판을 받게된 데 대하여는 한길소식지 2호의 내용에 대하여 김대중씨나 검찰은 본 피고인에게 “허위사실”임을 입증시킬 의지가 있고 명백한 “명예훼손”의 근거가 있어서 공소했을 것으로 믿고 본 재판에 임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본 피고는 김대중씨의 명예를 한 번도 실추시켜본 사실이 없고 1990년 5월 경부터 1997년 10월까지 약 9년간 탐사하고 취재해온 자료들을 단 한번도 발설 시켜본 사실이 없으며 한길소식의 원래 취지가 학자 또는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검증 (세미나, 토론, 분석)을 하기로 했던 계획이 실행되지 않자 내놓고자 했던 자료는 일절 불문에 붙여 왔을 뿐 “명예훼손”을 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공소사실로 적시된 문제의 한길소식지 내용들에 대하여 객관적 사실의 진실에 대한 글을 썼거나 편집에 일체 관여 못한 제 3자인 피고인으로서는 공소사실에 대한 행위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 뿐 구태여 간사장, 편집인으러 명의상(名儀上)의 책임까지 회피하거나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길소식 제2호 김대중씨의 성씨가 김해김씨가 “제갈” 또는 “윤”싸란 이른바 성씨변무(姓氏辯誣)의 문제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직접 글을 쓰거나 편집과정은 모르나 평소 연구해오고 현지 탐문, 탐사해 온 자료중 한길소식지에 실린 신안군 하의면 소재 묘소와 비석, 경기도 용인군 소재에 조성한 김대중씨의 가족묘 사진이 사용됐다는 점에서 공소의 책임이 있으므로 그 경위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1. 피고인이 김대중 현 대통령 성씨의 진, 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 후부터 정가에 설왕설래한 풍문 때문이 아니라 1980년 9월부터 6개월간 일본 산께이 신문의 주간 시바다 미노루가 쓴 연재기사와 동인이 쓴 단행본 “김대중의 좌절”[1] 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8일 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 능 춘계대제인 금산대제에 초헌관으로 참석한 김종필씨가 인지한 바와 같이 김대중씨가 단하에 있는 자리에서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꼈다는 기사들을 보고 당시 김대중씨의 열혈 지지자로 전위 역할을 했던 피고인으로서는 많은 의문과 김대중씨가 소극적으로 대응한데 대한 울분과 충정의 일념에서 그런 음해의 요소들에 대해 반박자료나 대응논리를 위하여 김대중씨의 출생에 대해 깊이 탐사해 오던중 이런 문제는 김대중씨가 직접 공표해야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즉 우리의 속담에 “씨도둑은 해서는 안된다” 말이 있지만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오늘날 독일 통일을 이룩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수상도 “난 사생아다”라고 당당히 얘기하고 미국의 “빌 클린턴”대통령도 “…나는 사생아요,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자기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공표했지만 오히려 역경에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세인의 추앙을 받고, 빌리 브란트는 최대의 영예인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씨의 호적이나 현지 취재 과정에서 탐사가 계속될수록 김대중씨 측이 정치적 모함이라고 일관해온 주장이 한낱 강변인 것을 알게되고 더욱더 인물사적 측면에서 계속 연구하고 정치적 모함에 대응하려던 나의 취지는 빛을 바래왔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씨는 계속하여 정치모함 또는 음해라고만 계속 주장할 때 피고는 김대중씨에 대한 실망과 환멸로 귀착케 됐습니다.

공소 부분 증거에 대한 진술

- 증거 1호증: 1980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대구매일 등 국내 각 신문의 금산제(金山齊) 김대중씨 참석기사에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등의 유인물, 현수막 등이 있었다는 내용과

- 증거 2호증: 1986년 1월 30일 발행 “유신공화국의 몰락” 저자 이한두씨의 책 36쪽 부터 47쪽 까지의 윤성만 이라고 적시한 글과

- 증거 3호증: 1995년9월 발간한 이한두씨의 한림공론(한림공론)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대중씨를 일컬어 ”대통령은 고사하고 성씨나 찾도록 하라”고 적고 있으며

- 증거 4호증: 1980년 5월 1일부터 약 6개월에 걸쳐 씌어진 일본 산께이 신문 시바다 미노루 논설위원의 연재기사

- 증거 5호증: 1981년 3월 1일 인쇄한 일본 시바다 미노루가 쓴 단행본 책 “김대중의 좌절”[1] 총 237쪽 중 “날조된 우상” 98쪽부터 122쪽까지 책에서 보듯,

- 증거 6호증: 김해김씨 “성명서”

- 증거 7호증: 김대중씨 호적 초본

1.예를 들어 김대중씨 호적에 들어난 것만 보아도 전남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 호주 장문숙의 장녀 장노도(김대중씨 생모)씨가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김대중씨를 서자로 출생신고 하여 1924년 7월 7일 접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43년 7월 8일에야 출생년월일을 1924년 1월 16일에서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한 점이나 1960년 6월 5일 김해김씨인 김운식씨와 장노도씨 혼인으로 적출자(적출자)가 됐다는데 당시 우리 호적 기재의 관행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고 1924년 출생신고 당시의 필체나 1960년 6월 5일 적출자(籍出子) 정정자의 필체가 36년을 뛰어넘어 같은 필체로 되어 있다는 것도 의문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용인에 있는 묘지 부(父), 김운식 모(母), 장노도의 비문에 기재된 장수금(張守錦)이란 변(變)성명이나 김대중씨 전처 차용수의 호적이 비석에는 차용애로 기재되어 있는 필유곡절에 대한 의문을 낳게 됐습니다.

이같은 수많은 설왕설래한 의문들 속에 피고는 1990년 5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약 8년간 김대중씨의 출생지 하의도를 13회, 그 인근 지역 안좌도, 진도, 임자도, 비금도 그 외의 지역을 10회, 총 23회를 방문하여 (1회 평균 3박 4일) 김대중씨를 아는 사람들 28명을 만나 대화하고 녹음, 촬영 등 자료 수집을 해 왔고 “한길 소식 2호”의 문제의 글은 본 피고인이 쓰거나 편집에 전혀 관계치 않았으나 피고인의 용인 묘지 사진과 하의도 묘지 사진들이 사용됐으므로 이상의 자료에 결정적으로 배치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만났던 사람들 중 일부 대화 내용 중에는 “…김대중은 우리 오빠…”라고 우겨대는 하의도 70대의 노파에게 피고는 “왜 그렇다면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느냐?…”고 하니까 “그 사람들(김운식씨 측)은 돈도 있고 목포에 데려가 학교도 보내고 호적도 올려줬는디… 할말 있어야제!…”라고 하면서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흐느끼는 노파, 또 다시 하의도에서 만났던 다른 노인은

김대중은 원래 성만이여, 윤성만이, 우리가 보통학교 댕길때 바지가랭이 걷어올리고 금방 뛰어가믄 개짝지에서 고동도 잡고, 꼬막도 줍고 바지락도 잡고 뻘 밭에서 같이 놀았응께… 이제는 김대중으로 호적에 올려지고 유명해 졌응께 우리(친구들)는 말을 안하제…”

진도에 있는 윤씨는 “…김대중의 동생 대의는 틀림없이 우리씨고 내 피붙이여..”하는 사람. “…하여튼 후레새끼들이야. 동네에 있는 우리 김가 집안도 메뚱을 파가는 것을 몰랐응께…그라믄 못쓴 것이여. 파갈라면(김운식의 유골이장) 제사도 올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막걸리 잔도 한 잔씩 주고… 멧뚱 옮긴 것도 이사 가는 것하고 똑 같은 것이여!…. 본마누라 멧뚱은 나두고 그냥 영감만 파가불면 이건 어디 법이여, 인정도 없제…그라믄 못쓴 것이여, 씨도둑은 말라했는디…” 알아듣는 둥 못알아듣는 둥 중얼거리는 김해김씨의 말의 의미에서 수많은 동네사람들과 섬사람 들의 소리들은 무었을 의미하는가요?

“한길소식 2호”에 인용된 본 피고가 촬영한 용인 묘비 사진(비석은 김재중씨가 장남으로) 하의도 현지 묘소와 비석에 (김대중씨 차남으로) 씌여진 가승보(家承普)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김운식씨 본처(김순례)의 묘는 그대로 놔두고 간 도덕적 의미는 어떻게 설명될 것인지 의혹과 의문은 더욱 증폭시킬 것입니다.

재판장님, 이와 같은 설(說)들이 국내 뿐 아닌 외국언론, 특히 본 사건이 기소되는 과정까지 의구심이 계속된다면 차제에 우리의 역사가 되어버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성씨는 재판부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검증시켜야 하고 다시는 이런 논란이 없도록 철저한 규명이 되게 본 재판이 진행되기를 진정코 원합니다.

아울러 본 피고의 입장에서 보면 기소가 되고 재판이 진행되기까지 전라도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피고로서는 피고의 명예를 위해서도 철저하게 재판이 진행될 것을 원하고 그것만이 전라도 출신인 피고는 친구나 친지들로부터 허무맹랑한 거짓으로 전라도 출신 김대중 대통령을 음해 했거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으며 사실과 증거를 갖고 탐사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 본 피고인이 의도한 바 인물사 연구 탐사의 진의가 될 것입니다.

안기부와 한나라 당에서 돈을 받고 이회창씨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언론과 검찰은 몰아갔고 여론화시키자, 본 피고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고발에서 기소되기까지 본 피고의 가족들은 김대중씨 측근들과 전라도 고향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망나니 등 수많은 못된 질타에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은 물론 이제 중학생인 딸에게까지 무차별 적으로 형용할 수 없이 퍼붓는 상스런 욕을 하고 폭언, 공갈 전화까지 감수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꼭 재판을 받아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래왔습니다.

사실 본 피고인은 대통령 선거기간 동안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한나라당 당적의 선택은커녕 이회창씨와 일면식도 없습니다.

객관적인 재판부의 조사나 탐사 규명 작업이 진행된다면 그동안 본 피고가 수집해둔 자료를 제공하고 기꺼이 고증에 협력할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시대이며 풍문이나 소문에 의지하지 않고 모근(毛根) 하나로 범인을 찾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꼭 필요하다면 유전자(DNA) 감식 방식으로도 나라의 지도자의 성(씨)에 관한 사항이 다시는 “설”로 회자되어 누가 되지 않도록 심리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본 사건은 자영인 (개인)의 치부가 아니라 명실공히 공인이요 대통령에 대한 문제이기에 우리의 역사와 김대중씨 출생에 더 이상 설왕설래하는 오류가 없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는 혈족, 씨족을 중시하는 전통씨족사회입니다.

고아나 버려진 영아에게도 우리의 호적법은 그 사실 내용과 함께 성씨를 붙여 부여하는 미덕도 있으며 그럴 경우 일때도 사실적 기록은 해 두는 것이 우리 민법의 순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공소장에서 김대중씨가 김해김씨라거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증거 6호증에서 보듯 현역 김해김씨 국회의원 김용갑 외 15명은 1997년 11월 20일 성명서에서 “시조대왕 앞에서 문중과 관계없는 정치 집회를 하여 우리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김해김씨임을 부정했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해김씨의 씨(氏), 혈(血)에 대한 논쟁은 확실하게 규명되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역사와 시시비비는 지속될 것이며 나라의 위상과 “위인 김대중” 인물사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도 역사의 인물이 생존해 있을 때 투명하게 밝혀져 김대중씨 성씨의 논쟁은 더 이상 오류나 우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증거를 제시했듯이 19년전, 20년 전부터 국민들은 물론, 전직 대통령, 외국 언론까지 무차별 적으로 비판되고 있었음은 나라의 자존을 위해서도 불식되어야 함에도 19년전, 20년전의 시시비비는 그대로 묵과해 오다가 특히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씨와 같이 남의 나라 지도자의 성씨까지 이러쿵 저러쿵 우리의 자존을 비하하고 있었음에도 김대중씨는 이에 대하여 제소하가나 대응을 못해오다가 자국민 그것도 17년 동안이나 김대중씨의 개인 비서로서 경호를 담당해온 비서와 민주화 투쟁을 위해 함께 투쟁하고 투옥까지 감내해온 본 피고 동지가 대응 논리를 위해 탐구해오고 수집하거나 쓴 글들을 문제삼아 유독 사법부에 제소하는 방법으로 처리하는 김대중씨의 온당치 못한 정치 보복은 타기 해야할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 사건은 “선거법…” 또는 김대중씨의 명예훼손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된 것과는 별개로 이제 역사의 진실 문제를 밝혀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별도 제출한대로 법원에 보관중인 김대중씨의 호적 원본은 물론 관련자들의 호적 원본, 학적부 등을 증거 보전해 주시어 관련자들의 원본을 대조,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컨대, 재판장님!

안일한 유교의 전통사회 개념에서 성씨 문제를 가지고 논쟁한 것은 점잖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물며 자연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역사의 위인이기에 재판장 께서는 역사의 소명의식을 갖고 김대중 대통령의 성씨의 진, 부에 대한 피고의 충언을 부정적으로만 보시지 마시고 긍정적 측면에서 역사의 사초로서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기필코 밝히거니와 김대중씨의 성씨를 놓고 다시는 이런 따위의 무수한 설과 쑥덕공론은 자칫 소문의 와전은 될 수밖에 없고 이제는 대통령 김대중씨의 역사가 아닌 한국의 역사임에 허위가 아닌 투명한 역사로 기록되게 하여 주십시오.

또한 본 피고는 현재 그동안의 자료들을 정리하여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다 성실하고상세하게 기록할 것입니다.

끝으로 조선시대 선각자 성삼문의 의미 있는 충고가 피고의 기슴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약한 자의 정의는 강한 자에게 빌미를 준다”는 말을 끝으로 피고의 진술을 끝맺음 하고자 합니다. 이상

1998년 7월 14일 진술자 피고 손창식 >


피의자 신문조서

검사 김희관, 피고 함윤식

문: 피의자의 성명, 연령, 주민등록번호, 직업, 주거, 본적을 말하시오 답: 성명은 함윤식, 연령은 55세,주민등록번호는……입니다.

검사는 피의사건의 요지를 설명하고 검사의 신문에 대하여 형사소송법 제 200조의 규정에 의하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알려준 즉 피의자는 신문에 따라 진술하겠다고 대답하다.

문: 피의자는 형벌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몇 번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의 학력은 어떤가요? 답: 1959년에 목포 동광고를 졸업하였습니다.

문: 피의자의 경력은 어떤가요? 답:1964년 취업차 독일에서 있다가 1966년 9월에 귀국하여 광주에서 출판사업을 2년 정도 하다 1968년 서울로 상경하여 1969년에 북창동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려고 계약까지 하였는데 고향 선배인 권노갑씨가 저를 찾아와서 “내년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씨가 출마하는데 도와달라”고 하여 그렇지 않아도 그 전부터 김대중씨에 대해 흠모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제의가 들어와 그 때부터 1985년 11월 김대중씨와 결별할 때까지 김대중씨를 도와주었고, 1986년 개인 사업으로 이것저것을 해 보았고, 1992년에 목포에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권노갑씨와 경선을 치뤄 권노갑씨가 당선이 되었고, 그 뒤로 다시 제 사업을 하였습니다.

문: 피의자의 병역관계는 어떤가요? 답: 1963년에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를 하였습니다.

문:피의자의 가족관계는 어떤가요? 답: 처 서명자(52세, 주부), 장남 함명환(30세, 회사원), 차남 함정환(27세, 회사원) 입니다.

문: 피의자의 재산정도 및 월수입은 어떤가요? 답: 재산으로는 살고있는 집 등을 포함하여 2억원 가량되고, 월수입은 400만원 정도됩니다.

문: 월수입 400만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요? 답: 금년 11월 말까지 임춘원 전의원이 경영하는 서대문구에 있는 세림간호병원(현 동신병원)에서 고문으로 있으면서 월 150만원정도 받았고, 공개하기는 그렇지만 친구들과 동업을 하는 사업체에서 얼마 정도의 수입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문: 믿고 있는 종교가 있나요? 답: 기독교를 믿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가입한 일이 있나요? 답: 민추협 및 정치범동지회 회원입니다.

문: 피의자의 건강상태는 어떤가요? 답: 양호한 편입니다.

문: 피의자가 1993년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은 것은 어떤 내용인가요? 답: 1986년 6월 초에 제가 지은 “동교동 24”란 책에 나오는 이수동이 저를 고소하여 처벌받은 것입니다.

문: 피의자는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답: 1997년 10월 7일에 발족한 한길연구회의 주간으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길연구회의 정기간행물인 “한길소식지”를 발행하는 데 있어 제가 발행인으로서 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피의자는 김대중 총재와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나요? 답: 1969년 말부터 1985년 까지 수행비서겸 경호책임자로 일을 하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김대중씨를 오래동안 도와주다가 결별하게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설 때 저에게 김대중씨에게 전해달라면서 1급비밀을 건네 준 친구 아들이자 육군 중령이 그는 저에게 자기를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비밀문서가 든 봉투를 9차례에 걸쳐 주는 것을 그의 부탁대로 누가 주었는 지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 김대중씨에게 건네주었는데 5.18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날인 5월 17일에 김대중과 제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으면서 김대중씨가 미처 없애지 못한 위 일급 정보에 대한 출처에 대해 “함윤식이가 안다”라고 저에게 떠 넘겨버려 배신감을 느꼈으며, 1985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자택연금상태에 있다가 연금이 풀리자마자 수안보 온천으로 휴양하러 가게 되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전화로 망월동 묘지에 들르냐고 문의하여 제가 김대중씨에게 망월동 묘지에 먼저 들리겠냐고 물어보니 대뜸 “또 의심을 받게 망월동 묘지에는 왜 들리느냐”고 하여 실망감을 주었고, 또한 동교동 김대중씨의 자택을 신축한다고 하여 많은 돈이 필요하여 국민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반대를 하였는데 김대중씨가 “나도 이제 편하게 살려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하느냐”고 하여 저에게 다시 실망을 주었고, 1985년 국회부의장직을 둘러싼 갈등으로 김대중씨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완전히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피의자에게 한길소식지 제 1권에서 5권까지를 보여주면서

문: 피의자가 발행한 한길소식지가 맞는가요? 답: 예 맞습니다.

문: 피의자는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한길소식지의 발행인인 피의자와 편집인인 손창식을 선거법위반등으로 고발한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답: 예, 알고 있습니다.

문: 한길소식지 제2호 1면에서 “김대중 출생 및 가계의 비밀을 밝힌다”는 소제목으로 “김대중씨의 출생 및 성장과정, 가족관계, 학력, 사회경력에 너무나도 많은 의문점이 있다는 것이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양식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제갈성조가 1920년 12월 병사하면서 김대중씨의 생모 장수금은 남편의 친형인 시숙 제갈성복과 몰래 동거를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임신을 하게되었다. 제갈성복은 장수금과의 동거 이전에 본처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후 제갈성복은 동네 친구였던 윤창언에게 임신한 몸의 장수금을 넘기고 장수금은 윤창언과 동거를 하던중 제갈성복의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김대중(당시에는 윤성만 이라고 불림)이었다”라는 기사가 허위내용이라고 고발인 측에서 주장하는데요. 답: 그 내용은 사실입니다.

문: 위 기사가 사실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답: 올해 9월 중순경 두 사람으로부터 그와 같은 내용을 제가 들었는데 첫번째 사람은 김대중씨와 친척이 되는 사람으로서 김대중씨와 국민학교 4학년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자기집에서 함께 학교를 다니는 등 김대중씨와 막역한 사이였던 사람으로부터 김대중씨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고 그 분으로부터 진술서를 징구받았고, 그 대화내용도 녹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김대중씨의 생가와 제일 가까운 이웃에 살았다는 제갈씨 성을 가진 노인으로서 그 사람으로부터 김대중씨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위와같은 기사를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길연구회 간사장 손창식도 직접 김대중의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가서마을 주민들로부터 김대중이 제갈성복의 아들이라는 것을 듣고 왔습니다. 제가 받은 진술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때 피의자가 제출하는 진술서사본을 본 조서 말미에 편철하다.

문: 진술서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요? 답: 저희 사무실에 있을 것입니다.

문: 위 진술서에는 작성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데 어떤가요? 답: 저희들은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의 신분 보장을 위해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법정에서 증인으로 채택이 된다면 데리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문: 위 진술서를 징구받은 사람의 인적사항 및 연락처는 어떻게 되는 가요? 답: 본인의 신원을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앗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변보호 차원에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문: 녹음테이프가 있다고 하는데,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왔는가요? 답: 사무실에 있는데, 추후에 녹음테이프 제출문제는 본인과 상의하여 결정할 생각입니다.

문: 사실은 녹음테이프가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요? 답: 아닙니다.

문: 녹음을 한 일시, 장소, 경위는 어떤가요? 답: 금년 9월 하순 광화문 미도파빌딩내 한길연구회 사무실에서 그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그 사람에게 녹음을 하겠다고 말을 하고, 그 사람과 저와의 대화내용을 녹음하였습니다.

문: 당시 그 자리에 다른 사람도 있었는가요? 답: 저와 그 사람 단둘이서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문: 제갈씨 성을 가진 또 하나의 사람의 구체적 인적사항과 연락처는 어떻게 되는가요? 답: 저는 그 사람을 방금 제출한 진술서를 써준 분을 통하여 소개받았기 때문에 그 분의 이름이나 연락처는 잘 모릅니다.

문: 고발인은 김대중씨가 제갈성복과 장수금 사이에서 출생을 하였다고 하는 위 기사가 터무니 없는 허위 기사여서 김대중 총재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저희는 확실한 자료에 의하여 주장을 한 것인데 허위 기사로써 김대중씨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는 것은 억지 주장입니다.

문: 위 소식지 제2호 8면에서 “영웅주의에 빠진 식언의 정치인 김대중”이란 소제목으로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하고 모든 것을 음해와 공작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이미지 손상 차원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점에서 김대중씨는 거짓말 쟁이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건국이래 정치인으로서는 제일 많은 거짓말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전 한 TV 토론회에서 “평생에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해 본 일이 없다, 다만 때때로 약속을 어긴 일이 있을 뿐이다”라는 희대의 명언이자 최대의 거짓말을 해 국민들에게 실소를 자아낸 적이 있었다” 라는 기사는 허위내용이라고 고발인측에서 주장하는데요. 답: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문: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었인가요? 답: 제가 위에서 진술하였듯이 김대중씨와 결별한 이유도 많은 거짓말을 하여서 입니다. 일일이 열거를 하려면 많지만 몇가지만 들자면 국회의원 공천과정에서 많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의 비서였던 유훈근에게 전주 공천을 주기로 하고서는 며칠 후 오탄씨에게 3억원을 받고 공천장을 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유훈근 본인에게 들어서 아는 것입니다. 또한 정계 은퇴를 하겠다고 몇 차레나 국민과 약속을 해 놓고선 번번히 약속을 깨고서 대선마다 출마를 하였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한푼도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고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대국민사과성명을 하기 한시간 전에 당시 북경에 있던 김대중씨는 급히 기자회견을 청하여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 밖에 받지 않았다고 하여 또다시 거짓말을 함으로써 거짓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은 정말 거짓말인 것입니다.

문: 고발인은 김대중씨는 건국이래 정치인으로서는 제일 많은 거짓말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위 기사내용이 허위여서 김대중 총재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제가 알기로는 정치지도자로서 국민과의 약속을 김대중씨만큼 많이 깨뜨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여 기사를 게재한 것이기 대문에 고발인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 위 소식지 제3호 1면에 “김대중의 사상전력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소제목으로 “남조선 신민당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의 혁명세력이 연합성을 띠게되며, 민족해방이 이루어진 후의 사회 해방은 주로 무산 계급이 담당한다는 백남운의 연합성 신식 민주주의 이론에 터를 두고 있다가 1946년 11월 23일 조선 공산당, 인민당과 함께 남한 좌익 정당의 총 본산인 남로당으로 합당되었다. 한편 1946년에 김대중씨는 목포시 남교동 파출소 습격에 가담하여 체포된적이 있으며, 1949년 여름에는 보성경찰서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전남경찰서에 구속된 사실이 있다. 또한 김대중씨와 정태묵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다. 정태묵이 전쟁전에 전남 벌교 부근을 거점으로 서남 빨치산 부위원장을 맡고 있을 당시 김대중씨도 같은 지역에서 좌익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지난호(2호) 한길소식지에서도 밝혔듯이 김대중씨의 전처 차용애와 간첩 정태묵이 연인 사이였으나, 정태묵이 전납 벌교 부근 백년산에 입산하게 되면서 결별을 한 점 등도 김대중씨와 간첩 정태묵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 예측할 수 있다”란 기사를 게재한 사실이 있는지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고발인은 “김대중 총재가 46년에 남교동 파출소 습격에 가담하여 체포된 적이 있으며 49년 여름에는 보성경찰서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전남경찰서에 구속된 사실이 있다. 간첩 정태묵과 관계가 있다”라는 위 기사내용이 사실과 전혀 다른 허위여서 김대중 총재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저희는 있는 사실 그대로 게재를 한 것입니다. 허위의 사실로써는 김대중 총재를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 사실이라는 증거는 무었인가요? 답: 김대중씨가 46년의 파출소 습격 사건과 49년의 보성경찰서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는 사실은 81년 초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대구 교도소에서 복역할 당시 함께 복역중이던 김대중의 경호실장이었던 박성철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고, 또한 일본 산께이 신문 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시바다 미노루가 86,87년경에 잡지 세까이(세계)와 젠보(전모)에 쓴 글에도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씨와 간첩 정태묵의 관계나 차용수와 정태묵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태묵의 친동생인 정태인과 절친한 친구였던 이모씨로부터 들었습니다. 참고로 김대춘씨가 공산주의의 한 계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중앙위원 391명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겠습니다.

이때, 피의자가 제출하는 “해방조선”사본과 김형욱이 저술한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중 일부를 발췌한 사본을 본 조서 말미에 첨부하다.

문: 박성철은 위와같은 사실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요? 답: 박성철은 6.25 사변 전후로 해군 헌병대 목포지구대장을 하였기 때문에 김대중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문: 박성철의 연락처는 어떻게 되는가요? 답: 박성철은 1984년경에 사망하였습니다.

문: 이모라는 사람의 인적사항은 어떤가요? 답: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 사람의 신분보장때문에 여기서 밝힐 수는 없습니다.

문: 시바다 미노루 기자는 어떤 근거에서 위와 같은 기사를 게재하였는지 아는가요? 답: 시비다 미노루 기자가 70년 말부터 80년 초에 한국에 와서 조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 잡지 기사에 대해서 추후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문: 위 소식지 제3호 6면에서 “병역기피자, 김대중 대통령 후보 자격없다”라는 소제목으로 “김대중과 국민회의의 간교한 작전은 주효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다시 한번 속인 파렴치한 권모술수였다. 사실 병역에 관해서 김대중은 할 말이 없다. 그가 병역필증도 없는 병역을 기피한 병역 미필자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지난번 이회창 총재 두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신한국당 측에서 역으로 자신의 병역문제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자 자신은 6.25당시 목포해상방위대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다는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지금까지 김대중이 직접 밝힌 자신의 병역과 관련한 발언내용을 살펴보면 국민을 우롱하는 거짓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계속…..


참고 자료

1980년 9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김대중 모친의 제갈성조 제갈성복 형제, 윤창언, 김운식과의 관계에 대해 나온다. 계엄사의 수사에서도 김대중의 출생 관계는 상당히 밝혀졌던 것으로 보인다.

公判(공판) 과정서 드러난 「出生(출생)서 親北傀(친북괴) 활동까지」 解放(해방)후 左翼(좌익)에 加入(가입) 共産(공산)활동 벌여
출생과 성장
金大中(김대중)의 생모 張鹵島(장로도) 여인(71년 5월 9일 사망)은 1911년 諸葛成祚(제갈성조)와 결혼했다가 사별, 1920년에 尹昌彦(윤창언)의 세째 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후 본남편 諸葛成祚(제갈성조)의 친형인 시숙 諸葛成福(제갈성복)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金大中(김대중)을 임신, 全南(전남) 新安(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金云式(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갔다. 1924년 11월 16일 全南(전남) 新安(신안)군 荷衣島(하의도)에서 이같은 복잡한 계보속에서 태어난 金大中(김대중)은 金云式(김운식)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木浦(목포)상업을 졸업한 후 어업을 시작했고 그후 해운업에 종사했다.

복잡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심성이 그렇듯이 金(김)도 극히 반항적이고 교활한 성품이 길러졌고 심지어 의부 金云式(김운식)을 부친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1960년에는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있는 의부 金云式(김운식)과 金云式(김운식)의 본처 金順禮(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張(장)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金云式(김운식)의 차남으로 조작해 江原(강원)도 麟蹄(인제)군 北(북)면 元通(원통)리로 분가, 전적했었다.



각주

  1. 1.0 1.1 1.2 1.3 시바타 미노루(柴田穗, 1930-1992), 《金大中の挫折 : 摸索する韓國》 (東京: サンケイ出版, 1981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 정의순, 《김대중 체미 775일 : 前 故 鄭一亨博士 秘書室長의 告白書》 (서울 : 史草, 1987) : 국립중앙도서관과 협약을 맺은 협약도서관에서 온라인으로 열람 가능.
  3. 3.0 3.1 '대한민국 건국사' 강의 원로 언론인 양준용 교우 고려대 미주교우 총연합회12/05/2018
    강연하는 양준용 박사 중앙일보 2014.02.05
  4. 鹵 : 소금 로(노) - 네이버 한자사전 1. 소금 2. 소금밭 3. 개펄(갯가의 개흙이 깔린 벌판) 4. 황무지(荒蕪地) 5. (큰)방패(防牌ㆍ旁牌) 6. 어리석음 7. 우둔하다(愚鈍--) 8. 노략질하다(擄掠---)
  5. 5.0 5.1 5.2 5.3 《한길소식》 (제2호 ~ 제8호) (서울: 한길연구회, 1997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6. [추적] 金大中 대통령 후보 시절 고발한 5건의 명예훼손 사건 그 뒤 : 金대통령이 5:0으로 全勝中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7. [사진] 金大中(김대중) 총재, 히로히토 일왕의 분향소 찾아 조문 1989-01-09 경향신문 2면
  8. [사진] 金庾信(김유신) 장군 추모 金山齋(금산재) 행사에 참석한 金鍾泌(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金大中(김대중)씨 1980.05.09 동아일보 2면
    個人行事(개인행사) 간주, 政治發言(정치발언) 삼가 1980.05.09 경향신문 2면
    金山祭(금산제)가 열린 慶州(경주)시 탑동 金庾信(김유신) 장군 묘소 주변에는「金大中(김대중)은 가짜 金海(김해) 金(김)씨이며 本名(본명)이 尹大中(윤대중)이다」라고 金(김)씨를 비방하는 정체不明(불명)의 벽보들이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
  9. 票(표)밭 24時(시) 1987.11.03 매일경제 2면
    平民(평민) "亂動(난동) 배후는 民主黨(민주당)" 심증굳혀 1987.11.03 경향신문 3면
    金(김)위원장은 이날 首露王陵(수로왕릉)에 들러 백색 제복차림으로 四拜(사배)한 뒤「후손 大中(대중)」이라고 적힌 화환을 바치고 근처에 있는 首露王(수로왕) 부인 許氏(허씨)의 陵(능)도 참배. 金(김)위원장의 王陵(왕릉) 참배 도중 10여명의 청년들이 金(김)위원장의 홍보용 차량을 둘러싸고 "金大中(김대중)이 아니라 尹大中(윤대중)이 왔다" "저사람 金海金氏(김해김씨) 맞느냐"고 소리치며 金(김)위원장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벌여 한때 가벼운 실랑이.
최근 바뀜
자유 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