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6월 21일 중공 방문 당시 박금철과 모택동

박금철(朴金喆, 1911년 7월 1일[1]~1967년?)은 북한의 정치인으로 부수상을 지냈으며, 갑산파(甲山派)의 수장이었다.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남았던 파벌 갑산파는 1967년 숙청되었는데, 이후 그의 행방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생애

주요 행적

1937년 10월 혜산사건 당시 체포된 박금철.
  • 1911년 7월 1일 함경남도 단천군 북두일면 대흥리(北斗日面 大興里) 출생.[1]
본적 및 거주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운흥면 오산리(雲興面 五山里) 4.[1]
  •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당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에게 보천보 지역 지도를 그려 줌.
  • 1937년 10월 혜산사건으로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음.
  • 8.15 해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됨.
  • 1946년 강계군 당조직부장[2][3]
  • 1948년 3월 30일 박금철이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됨. (67명중 서열 66위)[4]
  • 1950년 10월 31일자 인민군 포로 소좌(소령) 박창일(朴昌一) 신문 기록에 "PAK, Kum Col (朴金喆) Sr Col, Cultural Commander 4th Div [총좌, 4사단 문화사령관]"으로로 나옴.[5][6][7][8]
  • 박금철은 4사단 문화사령관 재임시인 1950년 8월 25일경 낙동강 부근 신반리(新反里) 산속에서 자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던 4사단 5연대 1대대 대위 KIM, Tong Muk (金東黙)을 총살했고, 8월 중순에서 9월 사이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17명의 하급장교(상사 포함)를 처형했다.[9]
  • 6.25 전쟁박헌영이 초대 군총정치국장이 되면서 김재욱과 박금철이 부국장을 맡음.[10] 김재욱은 박헌영 후임 군총정치국장이 됨.
  • 1953년 노동당조직부장(勞動黨組織部長)[11]
  • 1962년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부위원장(最高人民會議常任委員會副委員長)[11]
  • 1966년 노동당중앙위원회비서국비서(勞動黨中央委員會祕書局祕書)[11]
  • 1967년 갑산파 숙청 당시 이효순(李孝淳), 김도만(金道滿) 등과 함께 숙청됨.
  • 숙청후 농촌의 한 공장 책임자로 임명됨.[12]
이밖에 같은해 8월 3일자 외교전문에는 박금철이 농촌의 한 공장 책임자로 임명됐다고 전했다.
TELEGRAM FROM PYONGYANG TO BUCHAREST, NO. 76.279, TOP SECRET, AUGUST 3, 1967 Wilson Center
G. Chubotarenko pointed out that they knew that Pak Geum-cheol [Pak Kum Chol], the former member of the Politburo Presidium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was guilty of not understanding the political line of the party, for which he was removed from his function and appointed the head of a factory in the countryside. All the other former party cadres were guilty of even more serious mistakes, which plighted the revolutionary movement in South Korea.
  • 함경북도 온성.회령.경성군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12곳서 15만명 중노동에 신음-인권死角 北정치범수용소 중앙일보 1994.08.01
증언에 따르면 함경북도 온성.회령.경성군에 있는 정치범수용소에는 前 부수상 朴金喆, 前 당비서 金道滿. 柳章植등이 수용돼 있고 ....

박금철은 북한 김일성보천보 사건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 증언

박금철은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아니나,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6사장 김일성에게 보천보 일대의 지도를 그려주고 길 안내도 한 전력 때문에 학계에는 북한 김일성 직계 빨치산파에 준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천보 사건의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므로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박금철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8.15에 석방된 직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조직한 혁명가구원회(革命家救援會)에서 병 치료와 휴양을 했다. 이때 잠시나마 박헌영에게 신세를 진 셈이고, 박헌영을 만나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기자였던 박갑동은 박금철에게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보여주니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 했다고 증언한다.

박갑동의 박금철 관련 증언

박갑동은 해방 후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박금철이 김일성을 찾아가서 만났으나,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김일성은 화를 내며 박금철을 내쫓았다고 한다. 그후 박금철은 강계로 내려가 거기의 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박헌영이 그를 발탁해 올렸다고 주장한다. 박금철이 6.25 전쟁 때 군총정치국장이 된 박헌영 아래에서 부국장을 맡은 것은 확인이 되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박금철은 남로당은 아니지만 박갑동의 말대로 박헌영이 발탁한 것이 사실이라면 김일성이 박헌영은 숙청하면서 그를 중용한 이유가 모호하다. 박금철은 외부에는 보천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자신의 항일 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박금철을 박헌영 일파로 몰아 숙청하기는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다. 보천보 사건6사장 김일성 부대에 협력했던 박금철 등 갑산파는 1950년대 다른 종파들이 모두 숙청 된 한참 뒤인 1967년에 숙청된다.

이후 김일성 유일체제가 완성되고, 김정일 후계구도가 정립되면서 북한은 세습전제왕조 체제로 변모해 간다.

이기건의 박금철 관련 증언

해방 직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 ~ 2001)[13]은 1945년 10월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해방 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朴金喆)과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게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11][14][15]

아래 증언도 북한 김일성과 박금철은 해방 전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과 관계없는 인물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11][14]

하루는 여운형(呂運亨) 선생이 김일성(金日成)에게 보내는 밀서(密書)를 전하고 오라는 부탁을 했읍니다. 아마 十(십)월 초순경이 아닐까요. 그때 三八(삼팔)선을 넘으면서 밤을 따먹고 감이 빨갛게 익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편지 내용은 모르지요. .... 부탁을 받고 서울역(驛)앞「세브란스」병원 앞길에 서있었더니 이미 귀띔을 받은대로 三(삼)명의 남자가 나타나길래 합류(合流)해서 서울역(驛)으로 갔지요. 개성행 열차(開城行列車)를 함께 타고 가면서도 서로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잡담(雜談)만 했읍니다.

그날 낮 개성(開城)서 내려 토성까지 걸어 가는데 그중 한 사람이 걸음을 잘 걷지 못하고 절룩거려요. 그러면서 자꾸 자동차가 없으니 달구지라도 얻어서 타고 가자고해요. 그러더니 그 남자는 바지를 걷어 통통 부은 다리를 내보이면서 그때 비로소"내가 박달(朴達)[16]이하고 같이 활동했던 박금철(朴金喆)이요. 해방이 될때까지 형무소(刑務所)에 오래 있어 이렇소"라고 자기 신분을 밝혀요. . 우리 일행 사(四)명은 그때 비로소 인사를 나누게 됐읍니다. 다른 두사람은 이극(李克)(후에 북한(北韓) 괴뢰군 소장(少將))과 심운(沈雲)이었읍니다.

이극(李克)은 연안파(延安派)로 청진(清津)서 잡혀 신의주에서 감옥에있다 三(삼)년만에 해방으로풀려나와 서울에왔다가 무정(武亭)이를 만나려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이었고 심운(沈雲)은 남한(南韓)의 노동단체에 관계하던중 박헌영(朴憲永)의 지령(指令)을 김일성(金日成)에게 전하러 역시 평양으로 가는 길이었읍니다. 박금철(朴金喆)은 김일성(金日成)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박금철(朴金喆)은 갑산파(甲山派)로서 그가 일경(日警)에 잡히기 전까지는 김일성(金日成)의 첩자로 갑산(甲山)에 있었다 합디다.

그무렵 삼팔선 월경(三八線 越境)은 소련군(蘇聯軍)과 이북(以北)에서만 막았지 미군(美軍)측은 조금도 제한하지 아니했지요. 또 소련군도 물건만 좀주면 묵인했었고 삼팔선(三八線)부근의 주민들이 돈을 받고 길안내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넘어 다니기가 수월했읍니다.

우리 일행은 평양(平壤)에 도착해서 당시 공산당평양시당위원장(共産黨平壤市黨委員長)이던 현칠종(玄七鍾)을 만났더니 그는 김일성(金日成) 앞에서는 김단야(金丹冶)[17]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읍니다. 김일성(金日成)이는 이 단야(丹冶) 얘기만 꺼내면 몹시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날 나와 박금철(朴金喆)은 현(玄)의 안내로 김일성(金日成)이가 묵고있던 제四(사)호 집인가로 찾아갔읍니다. 응접실에는 다갈색 양복을 입은 청년을 중심으로 四(사),五(오)명이 앉아있읍디다. 누가 덧니가 났나 우선 살폈지요. 가운데 있는 청년이 덧니가 나있어 그가 김일성(金日成)인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소개를 하더군요.

그때 응접실에는 소련군 소좌 계급장을단 소련군복을 입은 최용건(崔庸健)과 소련 군복은 입고 있었으나 계급장을 달고 있지 않던 김책(金策)이 서 있었는데 김일성(金日成)이가 내가 준 편지를 뜯어 읽어보더니 곧장 김책(金策)에게로 넘겨주었읍니다.

김일성(金日成)은 나에게 시선을 돌려 "여운형(呂運亨)이가 조직(組織)이 얼마나 되오"라고 고압적(高壓的)인 어투로 물어요. 나는 불쾌해서 모른다고 대답했지요.

나와 김일성(金日成)이의 대면이 끝나자 박금철(朴金喆)이가 김일성(金日成)이 손목을 붙잡고 울면서 "동무! 나 모르겠읍니까"고 물으니까 金日成(김일성)이는 일언지하에 "모른다"고 비정하게 딱 잡아떼더군요. 그걸 보고 나는 누가 가짜일까 하는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읍니다.

사흘 후엔가 박금철(朴金喆)이와 같이 또다시 김일성(金日成)이를 만났는데 박금철(朴金喆)에게 "동무는 배반자(背反者)요. 그동안 동무에 대한 보천보 사건 재판 기록을 모두 뒤져보았소. 동무가 오늘까지 살아있는 것은 일본(日本) 놈과 협력했기 때문이요"라고 힐책하니까 흐느끼기만 합디다. 그때 공산당(共産黨)이 얼마나 냉철하고 무자비하다는 걸 피부로 느꼈지요.

아래 글에도 해방 직후 이기건이 북한으로 가서 살 당시에 찾아보기도 했던 박금철의 활동과 그의 숙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pp.74~77 박금철(朴金喆)의 비극(悲劇)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두 사람 증언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장 김일성이 바로 북한 김일성이라는 잘못된 주장이 오늘날 학계의 대세로 자리잡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박금철이 해방 당시 평양에 온 김일성과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는 위 박갑동이기건의 증언을 믿기 어렵다고 배척한다. 그러나 와다의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pp.166~167 : 혜산사건]

이 사건의 취조와 재판과정에서 김일성의 신원도 분명해졌다.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 (1939년 9월)에 실린 혜산사건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본명 김성주(金成柱), 당 29세이며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출신으로 어렸을 때 친부모를 따라 간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이 지방에서 성인이 되어 비적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현재 그 어머니는 살아 있다는 소식이다.126)

어머니 생존이라는 것이 틀릴 뿐 김일성의 경력은 거의 완전히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사망했기 때문에, 현재의 김일성과 는 다르다는 주장이 현재까지 여러가지로 나돌고 있지만 이 39년의 관헌보 고의 기술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명확한 반론이 되고 있다.127)

126) 『思想彙報』 第20號, 8~9면.
127) 그러한 주장의 근거 중의 하나는 6사의 여성대원으로 장백현 공작에 파견된 박녹금(朴祿金)을 비롯한 당시 혜산사건 피고들이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이고 36세로 모스끄바공산대학을 나와 만주사변 후에 만주로 온 인물'이라고 말했 다는 당시 사건을 담당한 함경남도 경찰부 경부 이찌하라 간이찌(市原感一)의 1971년의 이야기다. 李命英, 『四人の金日成』,成甲書房 1976, 185~87면. 만약 이 얘기가 진실이었다 해도 함경남도 경찰부가 작성한 사건의 보고에도 그것은 채택되어 있지 않다.[19] 39년에 본문의 인용문에서와 같은 인식이 확립된 것이 41년의 판결문에 '日成 곧 金成柱'라는 표현으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惠山事件判決書」, 595면. 따라서 박녹금 등이 정말 그렇게 자백했다면 그것은 유격대 대원에게 사령관의 경력이 신비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경찰 상층에 의해서 배척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20]
제시되는 제2의 근거는 해방 후 출옥한 박금철이 김일성의 사진을 보았다거나 만났다고 하여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 출처의 하나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는 이기건(李奇建, 당시 내외문제연구소 소장)의 증언이라고 한다. 이명영, 같은 책, 192면. 또 하나의 출처는 남로당간부라고 일컬어지는 박갑동(變名)이다. 그는 그의 저서 [탄식의 조선혁명](「歎きの朝鮮革命」, 三一書房, 1975), 197면에도 간단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허동찬(許東粲)에게 80년대 전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출옥한 박금철을 자기들이 서울에서 간호하였다. 그는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확인하기 위해서 평양으로 급행하였다. 그는 평양에 머물 수 없게 되어 강계로 가서 평당원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그를 중앙에 발탁한 것은 박헌영이었다. 그것은 1950년이었다."(許東粲, 『金日成 虛像と實像』, 287~88면.) 이 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제7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박금철은 1948년에 열린 북조선노동당 제2차대회에서부터 이송운과 함께 중앙위원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20년간 그는 북조선정치의 정상권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면이 사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와다는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 (1939년 9월)에 실린 혜산사건의 보고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거의 같다는 것을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거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래 참고)

지금은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근거자료들이 워낙 많이 발굴되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와다의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또 와다는 해방 후 박금철이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 했다는 박갑동의 증언을 배척하는 근거로 박금철은 강계로 쫓겨갔다 1950년 박헌영이 그를 발탁해올렸다는 말이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박헌영이 박금철을 발탁했다는 말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박금철이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는 말까지 틀렸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박갑동의 말대로 박금철이 김일성을 만났다 비판과 질책만 받고 강계(江界)로 쫓겨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이기건의 증언에도 동일하게 나오는 말이다.[21] 다만 이기건은 강계로 쫓겨간 박금철을 발탁한 사람은 박헌영 아닌 김일성의 측근인 김일(金一, 1910~1984)이라고 했다. 박금철이 박헌영이 발탁한 인물이라면 김일성이 그를 중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므로, 이기건의 말대로 김일이 발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p.75] 처음 나와 같이 서울에서 平壤에 가서 金日成을 만나서도 옛날 普天堡에서 九死一生으로 逮捕되어 服役하다가 天命으로 多幸히 解放되어 釋放되었는데, 무슨 큰 罪나 진 것처럼 고양이 앞 쥐새끼 模樣으로 풀이 죽어서 悔改와 批判을 받고 겨우 平安道 山골짜기 江界로 定配 模樣으로 가 있었다.

傀儡軍 創設時 겨우 햇빛을 보아 第一師團에서 金一의 部下로 勤務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乘勝長驅 出世의 「코-스」를 달렸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延安派와의 對決속에서 宿命의 꽃이 피기 始作한 것이다.

그리하여 金日成一派의 그늘밑에서 顯官大職을 맞이하다가 6.25 南侵時는 서울 侵攻部隊의 政治總責으로 最前方에서 指揮하였다. 그때 階級은 少將이라고 한다.

해방 후 박금철이 김일성을 찾아갔다 배척당하고 강계(江界)로 쫓겨갔다는 것은 박갑동이기건의 증언이 일치한다. 처음에 박금철이 배척당한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가 아닌 것이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금철을 발탁해 올린 사람은 김일성의 최대 정적이었던 박헌영이 아니라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김일(金一, 1910~1984)이 맞을 것이다.

참고 자료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연합뉴스 2013-12-17 07:02
북한 부수상 박금철의 숙청(2) - Radio Free Asia 2018. 7. 24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박금철(朴金喆)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李奇建, 내가 아는 北傀政權 裏面史 제6회 : 詐欺꾼 巢窟이 된 北傀集團 『時事』 7권 10호 (1968.10) 內外問題硏究所, pp.74-77
  3.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1972.01.27 동아일보 4면
  4. 책제목 :Item #130 북조선 로동당 제2차 전당대회 회의록, 로동당 중앙위원회/북조선 로동당 강령, 규약 (북한노획문서, 국립중앙도서관) pp. 265~268 (267~270)
  5. PAK, Chang Il (朴昌一) (박창일) : ISSUE NO. 16 NO. 2137 1950-10-17 (포로신문보고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 CH’OE, Chu Yong (崔珠英) (최주영) : ISSUE NO. 10 NO. 1598, 29 September 1950 (포로신문보고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PAK, Kum Ch’ol (朴金喆) (박금철) Sr Col, 45 Cultural Officer, 4th Div
  7. CH’ON, Ch’o Hong (田處洪) (전처홍) : ISSUE NO. 13 NO. 1824 1950-10-01 (포로신문보고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8. Sr Col = Senior colonel 은 대령과 준장 사이의 계급이며, 당시 인민군은 총좌[總佐)라 했다.
  9. LEE, Yon Guk (李然國) (이연국) : ISSUE NO. 18 NO. 2337 1950-11-10 (포로신문보고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0. 고명균, 박헌영의 북한군 초대 총정치국장 임명 배경 연구 현대북한연구 제17권 제2호, 2014.08, 200-259 (60 pages)
  11. 11.0 11.1 11.2 11.3 11.4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12.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연합뉴스 2013-12-17 07:02
  13. 이기건(李奇建, 1919 ~ 2001)
  14. 14.0 14.1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pp.154~156 ; (고려원, 1987)
  15.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38)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16. 박달(朴達, 1910~196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김단야(金丹冶, 1899~19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 (平凡社, 1992年)
  19. 中國共産黨の朝鮮內抗日人民戰線結成おすび日支事變後方攪亂事件 조선총독부함경남도경찰부 편(朝鮮總督府咸鏡南道警察部 編) (京城 1940 소화 15년)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257-306 수록.
  20. 함경남도경찰부의 혜산사건보고서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나와 있지 않다. 김일성은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재판의 피고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수사 책임자 이찌하라 간이찌의 증언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으므로 이는 경찰 상층부에 의해 배척되었다는 주장은 근거없다. 이찌하라는 자신의 증언 내용이 당시 혜산사건 심문조서에 들어 있다고 했으나 심문조서는 북한이 소유하고 있지만 공개하지 않고 있다.
  21. 이기건의 박금철 관련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