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p.79의 한영애(韓英愛, 1915~1951) 사진.

한영애(韓英愛, 1915[1]~1951.08.24[2])는 1930년 무렵 북한 김일성(1912~1994)의 첫 애인이었다. 결혼해서 서울에서 살던 한영애는 김일성이 일으킨 6.25 남침 전쟁의 와중에 남편이 죽자 김일성을 찾아 평양으로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폭격을 맞아 자녀들과 함께 1951년 8월 사망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첫 애인 한영애(韓英愛)

1930년 무렵에 김일성의 첫 애인으로 한영애(韓英愛, 1915~1951)가 있었다.[3][4][5]

김일성은 1930년 5.30 간도폭동 후의 검거를 피해 1930년 여름 한영애와 함께 하얼빈(哈爾濱, 哈尔滨)으로 도피해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김일성은 한영애만 남겨두고 하얼빈을 떠났고,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한영애는 별로 주목할만한 활동을 한 것도 없고, 김일성과의 관계도 소시(少時) 적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북한은 한영애와의 이런 조그만한 인연까지 끌어와 그녀를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혁명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은 대단한 여성으로 부풀리며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고 있다. 실제로는 한영애는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된 후 신의주 경찰서로 이송되어와 며칠 조사만 받고 곧 풀려났으며, 그 이후 조선 내에 머물렀고 이렇다할 활동을 한 것도 없다.

    한창 성숙한 나이의 김일성과 한영애의 동거 생활은 1930년 여름까지 지속되었고 하얼빈 생활에 싫증을 느낀 김일성이 한영애만 남기고 홀로 돈화 지방으로 떠나면서 이것이 둘 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해 가을, 한영애가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는 소식을 1938년에야 김일성은 이종락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옥 후 한영애는 신의주 맞은편 중국 단동시에 있는 고무공장에서 일했고 서울에도 나가 몇 년 동안 살았습니다.
    한영애와 헤어진 김일성은 본명인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고치고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하다가 1940년에는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공산당 산하 붉은군대 88저격여단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였으니 한영애가 아무리 찾아 헤맸어도 찾을 리 만무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을 찾을 수 없었던 한영애는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남조선 노동당 당원이었던 그의 남편이 김일성이 일으킨 6.25남침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한영애도 평양에 왔다가 1951년 8월 14일 밤에 폭격으로 두 아이와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영애가 남편이 피살된 후에는 나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왔으나 나를 만나지 못하고 1951년 8월 14일 밤 적들의 폭격에 두 아이와 함께 애석하게도 희생되었다”고 한 내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김일성은 한영애를 회고하면서 “그가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폭격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청춘 시절에 큰 자국을 남긴 한영애의 아름다운 넋을 사진에서 찾으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곤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김일성 회고록의 한영애(韓英愛) 기록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의 "7절 1930년 여름"에 한영애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내용으로 보이나 정확한 구분은 어렵다. 하지만 명백히 거짓으로 확인되는 것들도 다수 있다.

[2권 p.79] 나는 중국동무와 함께 해룡에서 기차를 타고 길림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기차 를 타고 교하라는 곳으로 떠났다. 교하에는 우리의 영향하에 있는 조직들이 많았다. 길림시절부터 나와 친교를 맺어온 한영애와 그의 삼촌 한광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당분간 군벌의 추격을 모면할 수 있는 은신처도 꾸리고 조직을 복구정비하는 사업도 벌일 작정이었다. 한영애를 만나면 하얼빈에 있는 국제공산당산하 상급조직과의 연계도 지으려고 생각하였다.
한영애는 1929년 초에 가정사정으로 길림에서 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교하에 들어와서 계속 우리와의 연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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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pp.81~82] 나는 어두워진 다음 그 주인의 안내로 교하시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외 딴 초막으로 갔다. 이 집 노인부처가 또한 매우 친절한 분들이었다.
이날밤 나는 우리 혁명가들이 언제나 믿고 의지할 곳은 인민들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절실히 느끼었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니 잠은 오지 않고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만나야 할 사람은 한 명도 찾지 못하고 며칠째 줄곧 헛물만 켜고 있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꼴인가. 이런 때일수록 피동에 빠지지 말고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 수세에 빠지면 끝장이다. 그래도 활동을 해야지 이런데 숨어다니기만 해서야 무슨 일이 되겠는가. 어떤 방법을 써서든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동만에 나가 혁명을 추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날이 밝은 다음 뜻밖에도 한영애가 그 집에 나타났다. 내가 동만지방으로 나온다는 통보를 받은 한영애는 은신처를 찾아 집을 나설 때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있는 분이 오면 자기가 숨어있는 곳에 연락해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1년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고생 끝에 그를 만나고보니 어떻게 반가왔든지 한동안은 말도 못하고 서로 얼굴 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한번 웃기 시작하면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통쾌하게 깔깔거리군 하던 그의 얼굴이 한해 사이에 살이 빠져 몰라보게 되었다.
한영애의 말을 들어보면 간도도 살풍경이라 하였다.
나는 한영애에게 ≪이렇게 숨어있어야 무골충이지. 그래도 어떻게 운동을 해야 되지 않겠소. 일제놈들이 당장 쳐들어오겠는데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그 놈들과 싸울 준비를 해야 하겠소. 조직들을 빨리 수습하고 인민들을 각성시켜야 하오. 그저 무섭다고 숨어서 떨기만 할 수야 없지 않소≫라고 하였다.
한영애는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어려운 때에 그런 말을 들으니 용기가 난다고 하였다.
≪아무도 없는 여기에 앉아있어서는 방법이 없소. 조직과의 연계를 지어줄 터이니 하얼빈으로 가기요.≫
한영애는 조직과의 연계가 끊어져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헤덤비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국제당[6]과의 연계를 짓기 위하여 김혁을 하얼빈에 파견하였지만 나는 그가 돌아 와서 활동결과를 보고하기 전에 내 자신이 하얼빈에 빨리 가서 국제당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폭동[7]으로 여지없이 파괴된 조직들과 계엄상태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짓눌린 도시와 농촌마을의 풍경은 나로 하여금 좌경 모험주의자들이 혁명에 끼친 해독이 얼마나 엄중한가하는 것을 다시 한번 통절히 느끼게 하였으며 그것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1930년대의 첫 출발에서부터 우리 혁명이 불가피하게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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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p.83] 김혁이 3층집에서 떨어져 감옥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우리는 국제당연락소를 통하여 입수하였다.
김혁의 체포 때문에 나와 한영애는 하얼빈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침통한 기분으로 지냈다. 김혁이 철쇄에 묶인 것이 너무도 애석하여 한번은 그가 떨어졌다는 도리의 3층집앞에 가보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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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pp.84~85] 나는 한영애에게 과업을 주고 흩어진 조직성원들을 찾도록 하였다.
한영애는 길림시절부터 연계를 가지고 있던 하얼빈공청지부의 한 아무개라는 사람과 연계를 가지고 그를 통하여 지하에 숨어있는 조직성원들을 한명두명 찾아내 어 카륜회의 방침을 해설하였다.
나도 김혁이 공작하던 철도와 항만에 들어가서 혁명조직의 영향밑에 있는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렇게 하얼빈에서 지하조직들을 수습하고 동지들 사이에 서로 연계를 지어준 다음 한영애를 그곳에 남겨두고 혼자서 돈화로 나왔다. 분초를 다투는 때여서 한영애하고는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떠날 때 한영애는 함께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얼빈 동무들이 자꾸 남겨두고 가라고 해서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동만에 나온 후 그것이 늘 속에 걸려 내려 가지 않았지만 지하공작규율상 편지연락을 못하게 되어 있어 서로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
한영애의 그 후 운명에 대해서는 당역사연구소동무들이 수집한 자료를 보고 휠 씬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돈화로 나올 때 하얼빈의 혁명조직들에 서한을 남긴 것이 있는데 한영애는 그 서한을 통해 내가 하얼빈 동무들에게 준 과업을 실행하느라고 뛰어다니다가 1930년 가을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어지간한 여성들 같으면 집이 그리워서라도 교하로 돌아갔겠지만 한영애는 하얼빈에 그냥 남아서 밤잠도 자지 않고 내가 준 과업을 수행하였다. 말이 적고 양순한 처녀였지만 일단 혁명사업에 들어가면 이악하고 과감 하게 활동하였다.
한영애는 붙잡히자마자 신의주감옥으로 끌려가 거기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그것은 이종락[8], 박차석[9]을 비롯한 ≪ㅌ.ㄷ≫ 시절의 연고자들이 무리로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가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는 이종락이와도 한 감옥에 있게 되었다.
그 후 이종락이 한영애를 만난 자리에서 《나도 김성주와는 잘 아는 사이이고 너 도 김성주의 지도를 받던 여자이니 우리 다같이 힘을 합쳐 그를 귀순시켜보지 않겠 는가. 생각이 있으면 우리 ≪귀순공작대≫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한영애는 즉석에서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는 이종락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 못 쓴다. 우리가 김성주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따위 너절한 배신행위를 하 겠는가. 출두한 다음 혁명을 못하면 말았지 그따위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1938년 겨울 우리가 남패자에서 회의를 할 때 나를 ≪귀순≫ 시켜보라고 회의장소에 들어왔던 이종락이 이런 사연을 다 고백하였다.
그렇게 되어 나는 그 동안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한영애의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그가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혁명가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종락이나 박차석같은 사내들은 감옥맛을 보기 바쁘게 다 전향문에 도장을 찍었지만 한영애는 여성의 몸으로 그 고초를 용감하게 이겨냈다.

≪해산사건≫[10] 이후 도처에서 혁명가들이 무리로 잡혀가고 투쟁의 길을 걷던 사람 들 가운데서 배신자들이 생겨 혁명에 엄중한 손실을 주고 있던 때에 그런 소식을 들 은 것만큼 나로서는 무척 감동도 되고 고무도 받았다.
한영애는 중국 단동시에 있는 고무공장에서 제화노동도 하였다. 그는 노동을 하면서도 동포들에게 길림시절에 부르던 혁명가요를 보급하였으며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켜 여러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도 사람들을 힘 있게 불러일으켰다.
한영애는 그 후 서울에 나가 몇 해 동안 홍명희 선생의 아들집에서 처녀시절을 보 냈다.
그는 조직선을 찾아 다시 만주로 들어가려고 여러 해 동안 모대기다가 늦게야 결 혼하였다. 비록 머리를 쪽지고 가정에 묻히는 몸이 되기는 하였으나 우리와 함께 혁명을 하느라고 뛰어다니던 그 시절의 양심과 지조는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무장을 들고 백두산일대에서 적들을 한창 답새기고 있을 때 한영애는 서울에서 그 소식을 듣고 길림시절의 동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다가 마음속으로 우리의 승리를 빌었다고 한다.
그의 남편은 해방 후 남로당원으로 지하활동을 하였는데 후퇴시기 적들에게 피살되었다.
한영애도 전쟁시기 서울근처에서 여맹조직을 책임지고 전선원호사업을 잘하였다. 남편이 피살된 후에는 나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왔 다. 그러나 나를 만나지 못하고 1951년 8월 14일밤 적들의 폭격에 두 아이와 함께 애석하게도 희생되었다.
나는 한영애가 일생을 깨끗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길림시절의 호흡과 발 걸음으로 전생애를 살아왔다. 노래를 불러도 길림시절의 노래를 불렀다.
혁명을 하는 사람들은 한영애와 같이 절해고도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양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나의 일생에서는 한영애도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그는 어려운 때에 나를 찾아 와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고마운 여성이었다.
해방 전에는 항일전쟁을 하느라고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의 변장에 필요한 중국옷을 얻느라고 땀을 흘리며 무더위속을 뛰어다니던 일과 열차 에서 군벌들의 조사를 받을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위험한 순간순간을 모면하면서 내 신변을 보호해주던 일, 한점의 지짐떡을 먹으면서도 매번 그것을 절반으로 갈라 서는 그 중 한쪽을 내앞에 조용히 밀어놓군하던 일들은 나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가 나를 위해 한 모든 봉사는 사랑이나 연정과 같은 감정을 훨씬 초월한 깨끗하 고 사심없는 동지애의 산물이었다.
그가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폭격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다행히도 젊은 시절의 그의 사진이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내 손에까지 들어왔다. 이 세상에 없는 은인들 생각이 가슴에 차오를 때면 나는 나의 청춘시절에 큰 자국을 남긴 한영애의 아름다운 넋을 사진에서 찾으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군 한다.

한영애에 관한 서술의 거짓

위에서 김일성은 1930년 가을 하얼빈에서 한영애와 헤어진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지만, 김일성 회고록의 한영애에 관한 서술은 지나치게 자세하여 마치 한영애의 당시 속마음까지 잘 알고 있는 듯한데 거의 모두 김일성과 한영애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로 보인다. 밑줄친 부분을 중심으로 사실관계를 검토해 본다.

  1. 김혁(金赫, 1907~1930?)은 김일성보다 5세 연상의 선배이므로 당시 김일성이 그에게 과업을 주어 하얼빈에 파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2. 김혁은 김일성이 하얼빈에 갔을 당시 3층집에서 떨어져 체포되었다고 하면서, 그가 뛰어내렸다는 3층집까지 가보기도 했다고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김혁은 김일성이 하얼빈을 떠난 후인 1930년 11월 2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하얼빈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종업원들이 소리치자 조선인 여종업원 2명을 총살하고, 다른 2명을 부상시킨 후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고 탈출하려다 발을 다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3. 한영애가 김일성이 하얼빈을 떠난 후 그가 준 과업을 수행하다 1930년 가을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징역을 산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아래에 보는대로 한영애는 2년뒤인 1932년 5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서로 이송되었지만 며칠 조사만 받고 풀려났으며 검찰로 송치되지도 않았고, 아무런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별로 대단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녀가 쉽게 석방된 것으로 보아 다시는 공산주의 혁명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나 전향서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석방 후 이렇다할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4. 한영애는 1932년 5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에서 며칠 조사를 받긴 했지만 곧 풀려나 신의주 형무소에는 가지도 않았으므로 1931년 1월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당시 1심재판 중이던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 1907~1940)과 같은 감옥에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즉 한영애는 신의주 경찰서 유치장에 며칠간 구금되었을 뿐이고, 당시 1심 재판중이던 이종락은 미결수를 수용하는 신의주 형무소 구치감(拘置監)에 있었다.
  5. 나중에 이종락이 한영애를 만나 김일성 귀순 공작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으나 한영애가 단호히 거절했다는 말도 사실로 볼 수 없다. 이종락은 6년형을 선고받고 형기 만료가 가깝던 1936년 7월 가출옥했는데, 그가 잘 알지도 못하던 한영애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찾아가서 만나 이런 권유를 했겠는가? 이런 말은 한영애가 감옥에 갇혀서도 이종락처럼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념을 지켰다고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 수 밖에 없다. 1936년 7월 출옥한 이종락은 만주로 갔지만, 한영애는 재류금지(在留禁止)[11] 조치를 받아 만주로 갈 수 없어 조선에 머물렀으므로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이종락은 신의주 감옥에서 출소한 후에 전향하여 만주국 치안부(治安部) 독찰관(督察官)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이 주도하는 김일성 귀순공작에 중재자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한영애가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잠간 조사를 받은 것을 빌미로 신의주 감옥에 있었던 이종락과 억지로 엮어 대비시킨 것이다.
  6. 한영애는 신의주경찰서에서 며칠간 조사 후 곧 석방되었고 감옥에 수감되지도 않았으므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혁명가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7. 한영애가 서울에서 아무 관계도 없어보이는 홍명희의 아들 집에서 몇년을 지냈다는 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1932년 5월 하얼빈에서 한영애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신의주에서 석방된 인물들 중 홍태식(洪台植, 1900~?)이 홍명희의 연하(年下) 삼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홍태식이 한영애을 홍명희의 아들집에 머물도록 주선했다면 그녀는 아마도 가사일을 도우는 가정부(식모)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는 여자들이 취업할만한 마땅한 직장도 별로 없을 때이다.
  8. 김일성은 1930년 가을 하얼빈에서 한영애와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만난 적이 없다는데, 어떻게 그녀가 김일성 부대의 소식을 듣고 승리를 빌었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이런 말들은 그녀가 김일성에게 충직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 것이다.
  9. 한영애와 그녀의 가족들이 6.25 때 사망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임은 남침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본인에게 있다. 그런데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사진을 보며 감사드리곤 한다니 정신나간 인간이나 할 소리로 보인다. 전쟁 일으켜 일가족 모두가 죽게 한 일에 대한 사죄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1932년 한영애와 홍태식의 체포 및 석방 기사

김일성 회고록에는 한영애가 1930년 가을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30년에 한영애는 불과 16세에 지나지 않는데다 대단한 활동을 한 것도 없으니 체포될만한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한영애가 하얼빈에서 체포된 것은 2년뒤의 일이며, 신의주로 압송되어 경찰조사까지 받은 것은 맞으나, 검찰로 송치되지도 수감되지도 않고 곧 풀려난 것이 확인된다.

1932년 5월 7일 만주 하얼빈(哈爾濱, 哈尔滨)에서 중국공산당원 임무심(林筮心, 22세), 오춘성(吳春成, 20세), 홍태식(洪台植, 33세), 조철구(趙喆九, 24세), 이대우(李大雨, 24세), 한영극(韓永極, 25세)과 여자 한영애(韓英愛, 18세) 등 7명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6월 27일 안동현(安東縣)[12]을 경유하여 신의주서(新義州署)에 인도되었다. 이들은 이(李) 사법주임의 엄중한 취조를 받아오다 조철구, 이대우, 한영극 및 한영애등 4명은 7월 4일 석방되었고, 임무심, 오춘성 및 홍태식 등 3명은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모리우라(森浦) 사상검사의 심문을 받았으나 이들도 기소되지 않고 7월 12일까지 전후하여 모두 석방되었다. 이들 7명은 모두 징역등 형사처벌은 면했으나 만주에서 이미 재류금지(在留禁止)의 선고를 받았으므로[11] 갈데가 없어 관서여관(關西旅館)에 유숙(留宿) 중이라 하였다.

이런 사실은 아래와 같은 1932년 7월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사에 나온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하얼빈에서 체포된 한영애(韓英愛, 18세)와 홍태식(洪台植, 33세)이다.

한영애(韓英愛)는 당시 하얼빈에 조선 여자로 다른 사람이 또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김일성의 애인과 동일인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1932년에 18세(한국식 나이)라니 1915년생으로 김일성보다 세살 아래이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녀가 1930년 여름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징역형을 살면서, 당시 같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과도 만나서 대화가 있었던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영애는 하얼빈에서 1932년 5월 체포되어 신의주서까지 압송되어 오기는 했으나 검찰로 넘어가지는 않고 경찰 조사 후 바로 석방되었다. 신의주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한 적도 없는 한영애가 1931년 1월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아직도 1심 재판 중이던 이종락과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홍태식(洪台植, 1900~?)은 2019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는데,[13] 그는 충청북도 괴산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홍명희(洪命熹)가 주도하는 괴산의 시위에 참가했다가 검거되었으나 학생신분이라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14] 홍명희의 가까운 친척이다.(아래 참고)

홍태식과 홍명희 및 홍기문과의 관계

아래 1933년 간행 풍산 홍씨(豊山 洪氏) 족보에 홍태식(洪台植, 1900~?)은 홍승목(洪承穆, 1847~1925)의 막내 아들이자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막내 삼촌으로 나오는데, 나이는 조카 홍명희보다 12살 아래이다. 그는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의 이복 동생이다. 홍태식의 부인은 조선말의 척족 여흥 민씨(驪興 閔氏) 집안으로 민정식(閔正植, 1848~1914)의 딸이다.[15]

홍명희의 삼촌으로 충북 괴산 출신 1900년생(高宗 庚辰生) 홍태식과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된 33세의 홍태식이 동일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름 한자가 같고, 나이가 일치하므로 맞을 것이다. 홍태식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3.1운동 때의 괴산의 홍태식과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된 홍태식을 같은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추가적인 근거가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회고록에 신의주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나온 한영애가 서울의 홍명희 아들 집에 한동안 머물렀다고 했다. 이는 뜬금없는 말로 보이기도 하나, 같이 체포되었다 풀려난 홍태식이 홍명희의 삼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한영애나 홍태식은 신의주에서 기소되지는 않고 풀려났으나 만주에서 이미 재류금지(在留禁止)[11] 처분을 받았으므로 만주로는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로 가서 한동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洪起文, 1903~1992)의 집에 신세를 졌을 가능성은 있는 것같다. 홍태식에게는 이런 일을 12살이나 위인 조카 홍명희보다는 3살 아래인 종손자 홍기문에게 부탁하는게 더 편했을 것같다.

김일성은 1930년 여름 한영애와 하얼빈으로 도피했다가 한영애만 하얼빈에 남겨둔 채 떠난 이후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신의주 감옥에 있다 석방된 후 서울에서 홍명희의 아들 집에 머물렀고, 남로당 인물과 결혼했으며, 6.25 전쟁중 자녀들을 데리고 김일성을 만나러 가다 1951년 8월 24일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는데, 이런 말들이 사실이라면 한영애의 후일 소식을 홍기문(洪起文)으로부터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됐다 재류금지 처분을 받고, 신의주에서 석방된 이후 홍태식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풍산홍씨 족보나 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그 후의 그의 행적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홍명희와 아들들은 해방 후 모두 북한으로 갔으므로, 공산주의자였던 홍태식도 생존해 있었다면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1933년에 간행된 풍산 홍씨(豊山 洪氏) 족보에 나오는 홍태식(洪台植)의 가계. 홍태식은 홍승목(洪承穆)의 막내 아들로 홍명희(洪命憙)의 삼촌이자 홍기문(洪起文)의 종조부(조부의 형제)이며, 1900년생(高宗 庚辰生)이다. 1985년 간행 풍산홍씨대동보에도 홍태식(洪台植)에 대해서는 위 1933년 족보의 내용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16]

한영애를 주제로 한 김일성 미화 영화

한영애를 주제로 한 김일성 미화 예술영화 《고귀한 이름》 제1,2부가 2003년 제작되었다.[17] 이 영화는 리주호와 리주민 형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맡았는데 이들은 김일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영화 '조선의 별'(10부작)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 리종순(1921∼1997)의 아들이라고 한다.

주목받는 북 형제 영화인 (사진) 연합뉴스 2004.11.18. 오전 8:33
    18일 입수된 북한 예술잡지 '조선예술' 9월호에 따르면 이들 형제는 지난해 말 제작된 영화 '고귀한 이름'(2부작)의 시나리오와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말 고(故)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반일지하투쟁을 했던 한영애(여)라는 실제 인물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한영애는 김 주석과 함께 반일투쟁을 했던 일부 사람들이 김 주석을 배신하고 일제의 귀순공작에 참여했지만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며 광복 이후에도 김 주석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참고 자료


각주

  1. 1932년 체포될 당시 18세였다.
  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7절 1930년 여름"
  3.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종합) 연합뉴스 2010-08-29 23:32
  4.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 : 첫 애인 한영애와 함께 도피..코민테른 접촉 연합뉴스 2010-08-29 23:03
  5. 하얼빈은 김일성이 첫 애인과 도주한 곳 조선일보 2010.08.30
  6. 코민테른을 말한다.
  7. 1930년 5.30 간도폭동
  8. 이종락(李鐘洛, 1907~1940) 위키백과
  9. 박차석(朴且石, 1909 ~ ?) 위키백과
  10. 혜산사건(惠山事件)의 오기이다.
  11. 11.0 11.1 11.2 일본 ‘재류금지’로 독립운동 탄압 : 간도지역 거주 조선인 사상과 행동 통제 수단으로 사용 2010.10.19 위클리경향 896호
  12. 1965년에 지금의 명칭 단동시(丹東市)로 개칭하였다 : 단동(丹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 홍태식(洪台植)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14. 홍태식(洪台植)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청주지검 1919.03.31(불기소)
  15. 민정식(閔正植, 1848~1914) 문과방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16. 풍산홍씨 대동보 문경공계 추만공파 (풍산홍씨대동보간행위원회, 1985) 3권 pp.593~595
  17. [항일연재28] 1930년 《5·30폭동》 《8·1폭동》의 후과로 파괴된 조직복구 자주시보 2016/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