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회고록의 김혁 사진.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는 김혁(金赫)의 묘지 앞에 세워진 반신상. 하단에 새겨진 그의 사망일자는 틀린 것이다. 조선혁명군 지휘관이라거나 1930년 7월 조선혁명군 입대라 한 것도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김혁(金赫, 1907.10.11 ~ 1930.08.25)[1]은 1930년 무렵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사령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의 부하로 활동하던 북한 김일성의 선배였다. 북한은 김혁이 김일성보다 5세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일성에게 충직했던 부하처럼 선전하고 있는데 김일성 미화를 위한 조작이다.

본명은 김근혁(金根赫)이고, 당시 기록에도 모두 본명 김근혁(金根赫)으로 나오나, 북한에서는 혁명시인 김혁(金赫)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는데, 김혁이란 이름을 실제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은 그가 김일성에게 지어준 "한별"이란 이름을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이를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로 보기 어렵다.

개요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석간 2면의 최여정(崔汝貞) 체포 기사[2]에 김근혁(金僅赫)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爾濱)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실제 사건은 같은 해 11월 2일 새벽 5시경에 일어났다.

기록에 나오는 김근혁(金根赫)의 행적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정의부(正義府) 또는 그 후신 국민부(國民府)의 부원으로 활동하다 1930년 여름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당시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도 이종락의 부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잘 알던 사이는 맞을 것이다. 이종락은 원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제5중대장이었으나, 그가 국민부를 탈퇴한 후 만든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원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주적으로 삼아 타도를 주요 목표로 했다.

김근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11월 2일 새벽 5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나온다.[2] 기사에는 김근혁의 이름 한자가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나 僅은 根의 착오일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김광렬(金光烈), 계영춘(桂永春) 등은 당시 김근혁과 김성주(김일성)의 상관 또는 동료들이고, 특히 유봉화(劉奉華)는 1931년 3월 북한 김일성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4][5][6] 체포된 후 김근혁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알려진 행적도 없으므로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김근혁은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행적도 없고,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인물도 못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별을 칭송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해 동지들 사이에 보급했다며 찬양하고 있다. 한별을 한자로 처음에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동료들이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부르고 적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이 일을 소재로 1980년대에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했다.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김혁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반신상도 세웠으나 시신없는 가묘로 보인다. 반신상 아래에 새겨진 사망일자 1930년 8월 25일은 그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으므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또 그가 1930년 7월 조선혁명군에 입대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유사한 이름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이다.

이처럼 북한은 실제로는 없던 일을 꾸며내어 별 대단한 행적도 없이 일찍 죽은 김혁(김근혁), 최창걸(崔昌傑, 1902~1931)[7], 차광수(車光洙, 1905~1932)[8]김일성의 과거 선배들을 김일성에 충직했던 부하로 둔갑시키고, 혁명열사릉에 묘지와 흉상까지 조성하며 이들에 관한 영화도 만들어 김일성 미화 찬양에 악용하고 있다.

김혁의 아들 김환(金煥, 1929~2009)은 북한 부총리를 지냈다.[9][10][11][12][13]

당시 기록에 나오는 실제의 김혁

북한 혁명열사릉 김혁(김근혁) 묘지 앞의 흉상 아래에는 그가 1930년 8월 25일 전사했다고 새겨놓았으나, 김일성 회고록에는 체포되어 여순감옥[14]에서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고 주장하는 등 그의 최후에 대한 북한의 주장도 오락가락한다. 실제로는 1930년 11월 2일 하얼빈 복덕루(福德樓) 습격 사건 때 체포된 것으로 확인되며 이것이 그에 대한 알려진 마지막 기록이다. 북한은 일찍 죽은 김일성의 혁명선배들에 대한 사실 조작을 통해 김일성 미화에 이용만 할 뿐이고, 사실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으므로 그들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믿을게 못 된다.

김혁(김근혁)에 대한 당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아래와 같은 몇 건이 발견된다.

  • 국민부 산하 청년 단체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의 간부로 있었다.
  • 1930년 여름 이종락 등 국민부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부와 그 산하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탈퇴하고 나와서 동아혁명군(東亞革命軍) 김광렬(金光烈)과 함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를 창설할 때 그도 동참하였다. 그들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타도를 목표로 하였다.
  • 재만(在満) 조선인공산주의 ML파 간부 진공목(陳公木, 張国三、本名李炳熙)과 오성륜(吳成崙) 등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의 중요 인물들이 이종락 일파 김근혁(金根赫) 등과 비밀리에 만나 신속히 적군특무대(赤軍特務隊)를 조직하여 주구기관(走狗機關)을 파괴하고 주구배(走狗輩)를 암살, 박멸할 것을 결의함.
在吉林 総領事 石射猪太郎이 外務大臣 幣原喜重郎에 올린 1930년 9월 19일자 보고서 「조선인공산당원의 행동에 관한 건(鮮人共産党員ノ行動ニ関スル件)」  : 「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 1.昭和五年八月ヨリ九月マデ 分割3」 p.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32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I-4-5-2-3_10_008)(外務省外交史料館)

하얼빈 복덕루(福德樓) 습격 사건

김근혁(金根赫)등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의 이종락(李鐘洛, 1907~1940) 부하 3명은 권총을 휴대하고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에 있던 일본인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에서 1박하고, 다음날인 1930년 11월 2일 새벽 5시경 금품을 털어 도주하려다 놀라 깨어난 종업원들에게 들키자 조선인 여종업원 기금성(奇金星, 21세)과 장차절(張且節, 18세) 등 2명을 사살하고 김언년(金言年, 22세)과 중국인 뽀이 손왕해(孫王海, 40세) 등 2명을 부상시켰다. 출입문이 잠겨있자 김근혁은 유리창을 발로차서 깨고 도주하려다 자신도 발에 부상을 당하고 출동한 경찰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국내신문에도 사건이 보도되었으나, 체포된 범인의 이름이 김근혁(金根赫)으로 밝혀지는 것은 1933년 8월 공범 최여정(崔汝貞)이 체포되었을 때의 기사에서이다. 그는 체포된 후 대련(大連)으로 압송되어 간 것으로 보이며, 재판도 그곳에서 이루어진 탓인지 국내 신문에 재판과 처벌에 대한 후속보도는 없다.

북한은 김혁이 하얼빈에서 혁명활동을 하다 그의 근거지로 들이닥친 경찰의 체포를 피해 투신자살하려고 3층 건물에서 뛰어내렸으나 죽지 못하고 부상만 당한채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기사에 의하면 김혁은 하얼빈의 복덕루에서 1박하고 다음날 새벽 여종업원 2명을 사살하고 잠긴 문을 열지 못해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고 달아나려다 발을 크게 다치고 체포된 것이다. 체포된 사람의 이름이 표리삼(表利三)이라 했으나 이는 체포된 김근혁이 임의로 댄 가명으로 보인다.
복덕루를 습격하고 달아났던 사람들이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압송된다는 기사. 사건 당일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김근혁도 대련(大連)으로 압송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8월 복덕루 사건의 공범이었던 최여정(崔汝貞)이 체포되었다는 기사에 사건 당일인 1930년 11월 2일 체포된 범인의 이름이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는데 주변 인물들의 이름으로 보아 김근혁(金根赫)이 틀림없다. 이 기사에는 사건이 일어난 일시도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라 했으나, 사건 당시 보도에 나오는 11월 2일 새벽 5시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

김근혁의 상관이었던 이종락과 김광렬(金光烈) 등이 1931년 1월 28일 체포되었을 당시 기사에도 하얼빈의 복덕루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김근혁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軍資募集(군자모집) 數回(수회) 巡査(순사)까지 射殺(사살) 1931.02.04 조선일보 7면

기타 이종락 부하들의 군자금 강제 모집 사건

위에 나오는 1931년 1월 체포된 이종락에 대한 조사 기사에는 하얼빈 복덕루 사건 외에도 아래와 같은 군자금 강제 징수 사건이 나온다.[15][16]

백신한(白信漢)과 김이갑(金利甲)

1929년 11월 30일 오전 9시경 조선혁명군 백신한(白信漢)과 김이갑(金利甲)이 장춘(長春) 삼립정(三笠町) 3정목(丁目) 6번지 조선요리집 대성관(大成館)에서 군자금을 강모하려다 종업원의 신고로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져 백신한(白信漢)과 산안(山岸) 순사가 사망한 사건이다. 달아난 김이갑(金利甲)의 신원은 1931년 1월 체포된 이종락의 위 진술 기사에 나온다.

拳銃(권총)을 亂發(난발) 巡查(순사)를 殺害(살해) 1929.12.03 동아일보 2면
現塲(현장)에는 鮮血 淋漓(선혈 임리)! 1929.12.03 조선일보 2면
長春 全市(장춘 전시)에 警察(경찰)은 非常線(비상선) 1929.12.03 조선일보 2면

현대홍(玄大洪)

여러 곳에서 군자금을 강모하던 조선혁명군 이종락 부하 현대홍은 1930년 6월 29일 장춘의 조선 요리점 금강관에서 현금 50원을 징수하고 매지정 김동만(金東晩)의 집에서 군자금 4백원을 요구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북한은 김일성 미화를 위해 김혁을 이용

1930년에 김혁은 23세였으나 북한 김일성은 18세에 불과했는데도 북한은 마치 김혁이 김일성을 엄청나게 흠모하고 떠받들던 충직한 부하였던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6절 ‘혁명 시인 김혁’ (2권 pp.64~73)에 나오는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김일성 미화를 위해 심하게 조작되어 있으며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북한의 주장대로 그가 정말 시적(詩的)인 소양과 작곡까지 할 정도의 음악 실력도 갖추었는지 의심스럽다.

또 김혁이나 김일성 본인도 실제로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소속으로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의 부하였지만, 이종락이 1931년 1월 체포되어 6년 징역형을 받고 출소한 후 변절하여 일제에 협력하였으므로, 그와의 관계는 극구 숨기고 있다.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 가담했던 일도 숨기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 있었던 것처럼 조작했다.

김혁이 김일성에게 "한별"이란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은 사실인가?

북한은 김혁(金赫)이 김성주(김일성)를 흠모하여 1928년 10월에 "한별"이라는 이름과 함께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를 지었으며, 이후 동지들이 김성주를 "한별" 또는 이를 한자로 적은 "一星"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17]

그는 늘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좋은 동지들을 찾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인생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김혁은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까지 지어가지고 혁명조직들에 보급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신안툰에 내려가니 그곳 청년들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김혁은 우리 몰래 차광수, 최창걸 동무들과 의논해가지고 길림일대에 그 노래를 보급하였다. 그때 나는 우리를 별에 비기고 노래까지 지어부르는데 대해 아주 엄하게 꾸짖었다.
≪조선의 별≫이 보급되던 그 무렵부터 우리 동무들은 내 이름도 한별이라고 고쳐불렀다. 저희들끼리 이름을 지어가지고는 내 의향에는 관계없이 ≪한별이, 한별 이≫하고 불렀다. 한문자로 표기하면 일성(一星), 즉 한별이라는 뜻이었다.
우리 동무들과 함께 내 이름을 김일성(金日成)으로 고치자고 발기한 것은 변태우를 비롯한 오가자의 유지들과 최일천과 같은 청년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성주≫, ≪한별≫, ≪일성≫이라는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김성주는 아버지가 지어준 나의 본명이었다.
유년시절에는 증손이라고 불렀다. 증조할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나를 증손이라 고 불렀기 때문에 우리 집안 사람들이 그 본을 따서 ≪증손이, 증손이≫하고 불렀 다. 나는 아버지가 지어준 본명을 무척 귀중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이름을 다르게 지어 부르는데 대하여 달가와하지 않았다. 더구나 나를 별이나 태양에 비기면서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추대하는데 대하여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단속하고 설복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동무들은 내가 달가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6절 ‘혁명 시인 김혁’ (2권 pp.71~72)

1980년대에는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이런 일을 사실인 것처럼 선전했다.[18][13]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김혁이 나이도 한참 아래인 김일성을 흠모했을 리도 없다.[19][20] 또 1970년대 이전까지는 "한별"이라는 이름이나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21] 언급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주장은 후일에 지어낸 것이다.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와 영화는 실제로는 김정일이 지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13]

하얼빈은 김일성의 동지인 김혁이 빨치산 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사망한 곳으로, 생전에 김일성도 들렀던 곳이다. 김정일은 이곳에 살고 있는 김혁의 자손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연변의 조선족 사회에서 "한별"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김인묵(金仁默)이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22][23] 그도 생전에 김일성과 관련을 맺은 적도 있다고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에 그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다. 한별(김인묵)은 동만의 연변에서 공산주의 항일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32년 서울의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24] 그는 연변 여성운동의 선구자 김영신(金英信, 1905~1932)의 남편이라고 한다.[25] 바이두백과(百度百科)의 김영신(金英信) 항에는 그녀의 남편을" 韩星(金仁默)"이라 했는데 "한별"을 한자로 "韓星"이라 쓴 것이다.[26] 참고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배우 박한별의 이름을 朴韩星이라 적고 있다.[27]

북한 김일성이 한별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말은 1970년 이전에는 나온 적이 없으므로 사실로 볼 수 없으며,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신이 일성(一星)이라는 이름을 쓰게된 유래를 그럴듯하게 조작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혁은 1928년 10월 김일성을 위한 시를 짓고 여기에 곡조까지 붙인 북한 혁명가요 '동지애의 노래'도 작곡했다고 하나[28][29] 후대에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는 혁명시인(?) 김혁과 동명이인인 1921년생 작곡가 김혁도 있다.[30]

김혁의 최후 미화

위에서 본대로 군자금 강제모금애 나섰던 김혁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의 복덕루에서 여종업원 2명을 살해하고 출입문이 잠긴 현장을 탈출하기 위해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다 발을 다쳐 체포된 후 대련(大連)의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의 체포와 죽음을 전혀 다르게 미화하고 있다.

하얼빈의 혁명조직들에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 지금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사업하고 있는 서철동무도 그때 하얼빈의 공청지부에서 일하였다.

김혁을 책임자로 한 조선혁명군 소조가 도착하였을 때 하얼빈의 공기는 매우 살벌하였다. 학우친목회나 독서회같은 합법적 조직들까지도 지하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었다. 공청을 비롯한 비합법적 조직들은 철저히 자기를 위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김혁은 하얼빈동무들과 함께 조직을 지켜내고 조직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였다. 그의 제의에 의하여 이 도시의 모든 혁명조직들은 여러 개의 조로 분산되어 지하로 더 깊숙히 들어갔다.
김혁은 무장소조원들과 함께 부두노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카륜회의 방침을 정력적으로 해설하였다. 그는 능숙한 조직적 수완과 담력을 가지고 청년들을 교양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기층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도 힘있게 밀고 나갔다. 적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가며 국제당연락소와의 연계도 지어놓았다.
하얼빈의 일을 추켜세우는데서 김혁의 공로가 컸다. 그는 혁명의 한 개 지역을 담당한 책임자답게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가 하얼빈도시의 비밀연락소에서 불의에 달려드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이던 끝에 최후를 결심하고 3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데 강철같은 육체가 그의 뜻을 배신하였다. 김혁은 자결에 성공하지 못한 채 적들에게 붙잡혀 여순감옥으로 끌려갔다.[14] 그리고 그 감옥에선 모진 고문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옥사하였다고 한다.

김혁은 우리 혁명대오에서 백신한[31]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삶과 젊음을 바친 첫세대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6절 ‘혁명 시인 김혁’ (2권 p.70)

김혁이 체포를 피해 자결하려고 3층에서 뛰어내렸으나 실패해서 붙잡혀가 고문을 당하다 옥사했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상황설정이며, 사실이 아니다. 설사 체포되어간다고해도 살인 강도 등의 흉악범죄도 아닌 공산주의 지하조직을 만들고 운영했다는 죄목으로는 기껏해야 1~2년 정도 옥살이 하다 나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체포를 피해 자결을 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는 김혁이 하얼빈의 복덕루를 습격하고 여종업원 2명을 사살한 후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고 탈출하다 발을 다쳐 체포된 상황을 그대로 기술하기가 어렵다보니 이런 말을 지어낸 것이다.

김혁이 작사, 작곡했다는 노래

영화 "조선의 별"

김혁이 작사, 작곡했다는 노래 "조선의 별"에서 제목을 따와 리종순(1921∼1997)이 시나리오를 쓴 김일성을 미화 찬양하는 10부작 영화로 1980년 ~ 1987년간에 제작했다.

참고 자료

북에서 ‘김혁 혁명투사 생일 100돌 기념 중앙보고회’ 열려 <조선신보>


각주

  1. 그의 생몰년월일은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는 김혁(金赫)의 묘지 앞에 세워진 반신상 하단에 새겨진 것이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의 사망일자는 명백히 틀렸다.
  2. 2.0 2.1 前正義府員(전정의부원) 崔汝貞(최여정) 被捉(피착) 1933.08.19 동아일보 2면 /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
  3. 3.0 3.1 하얼빈(哈尔滨, 哈爾濱) 부가전(傅家甸) 구글지도
  4. 朝鮮(조선)○○軍(군) 男女 三名 被捉(남여 삼명 피착), 길림성 이통현에서 잡혀 武器(무기)도 押收(압수)되엇다 1931.03.26 동아일보 2면
  5. 이종락 부하(李鍾洛 部下) 삼명 우피검(三名 又被檢) 조선일보 1931.03.26 석간2 2 면
  6. 李鍾洛部下(이종락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이통현 공안국에 잡히어서 吉林省政府(길림성정부)로 護送(호송) 1931.05.04 동아일보 2면
  7. 北, 김일성 친구이자 공산주의자 '최창걸' 조명…"충성 독려·내부 결속" : 노동신문 "화성의숙 시절 가장 가깝고 미더운 동지" 뉴스1, 2019-12-26
  8. 北 신문, 김일성 혁명동지 차광수 조명…주민들에 '충성' 독려 노동신문 "충성 발걸음,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어" 뉴스1, 2019-12-19
  9. 김환(金煥, 1929~2009) 북한 정보넷
  10. 인물 - 북한을 움직이는 사람들(3) : 김환(金煥) 현대경제연구원 월간 「통일경제」 1995년 9월호 p.93
  11. 김환(북한) 나무위키
  12. 남북경제회담(南北經濟會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 13.0 13.1 13.2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한은 왜 김혁의 아들 김환을 감추었나 RFA 2024.03.13
  14. 14.0 14.1 뤼순감옥(旅顺监狱) 위키백과 / 여순(旅順)은 대련시(大連市)의 한 구역이다.
  15. 多數部下(다수부하)를 派遣(파견) 領警(영경)과 交火(교화)도 數次(수차) 1931.02.03 동아일보 2면
  16. 軍資募集(군자모집) 數回(수회) 巡査(순사)까지 射殺(사살) 1931.02.04 조선일보 7면
  1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6절 ‘혁명 시인 김혁’ : 2권 pp.64~73
  18. 조선의 별 위키백과
  19. 남만한인청년총동맹 - 위키백과
  20. 또 하나의 조작된 「神話(신화)」 1992.11.06 조선일보 23면
  21. "조선의 별" 노래
  22.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진짜 ‘한별’은 김인묵 RFA 2023.10.04
  23. 김일성의 이름은 어떻게 신화가 됐을까 rfa 2017. 2. 24
  24. [하루하나 연변항일사] 빛나는 그 이름 한별 연변통보 자유게시판 2008.12.12 :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간행한 자료라 함
  25. [우리 민족 항일투사] 김영신-중공동만특별위원회 부녀위원 길림신문 2023-08-23
    이 시기 잇달아 불행이 덮쳐들었는데 귀여운 딸애가 병에 걸려 죽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남편 한별이 희생되였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26. 金英信(1905-1932) 百度百科
  27. 朴韩星 维基百科
  28. 28.0 28.1 [전문] 이석기 체포동의안 범죄사실-6(끝) 뉴스1 2013-09-02
  29. 29.0 29.1 동지애의 노래 YouTube · urinore1
  30. 작곡가 김혁(1921~?) : 북한지역정보넷
  31. 백신한(白信漢, 1908~1929.11.30)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