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 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년 ~ 1992년 5월 10일)는 소련의 군인이다.[1]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평양 소련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당시 계급은 소장이었다. 소련군이 교육시켜 데려 온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워 북한 정권을 수립해 가는 전 과정을 지휘하였다. 평양 소련군정을 총지휘한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다.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김일성 왼편은 강 미하일 소좌,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레베데프는 후일 찾아온 한국 기자들에게 당시 한국인들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무명의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정애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 발라사노프 소련군정 정치고문.

생애

Lebedev, Nikolai Georgievich 구글 영역


그는 소련군정 기간에 소련측 대표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러 몇 차례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1967년부터 1980년까지 김일성의 초대를 받아 해마다 국가명절이 된 김일성의 생일(4월 15일)에 북한을 방문했다. 1980년 방북한 레베데프 소장은 김일성을 만나고 평양을 관광한다. 김일성과 과거를 회상하며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무심코 그의 어깨를 툭쳤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는 초청받지 못했다 한다.[2][3]

레베데프의 김일성 가짜 증언

그는 상당히 장수하여 1990년 10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할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1991년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찾아간 한국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여 소련 군정 당시의 일에 대해 많은 중요한 증언을 하였다.[4][5][6]

소련군정은 당시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레베데프는 증언했다. 당시 일에 대한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은 1991년 가을에 있었으며, 아래와 같다.[7]

김일성이 나의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극동사령부의 스티코프 중장(후에 대장)으로부터 암호 전문이 날아왔다.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특수선동부장 코비첸코(V.V. Kovyzhenko)에게 김일성의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적기 훈장도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일부 북조선 인민들의 반소감정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박정애와 김용범은 두 벌의 신사복을 구해 오는 등 붉은 군대 사령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박길용, 김국후 저, 『김일성 외교비사』 (중앙일보사, 1994) pp.24~25.

그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던 날 있었던 일에 대헤서도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8][9] 이 대회의 막후 지휘자였던 레베데프의 증언은 당시 소련의 속생각을 드러내주고 있다.

『숨김없이 말한다면 김일센의 본명이 김성주였음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북한 인민들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반전설의 애국 영웅 김일센 장군을 상징하기 위해 김일센과 그의 부하,그리고 당시 북한내 공산주의자들과 상의해 「김일센장군」으로 소개했던 것지요.

대회전날인 13일 밤 김일센이 양복차림으로 왼쪽 가슴에 소련훈장을 달고 찾아와 「사령관님,이 복장으로 내일 대회장에 나가 인민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명연설을 하겠습니다」면서 으쓱거리더군요. 나는 소련훈장을 달고 나가면 군중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으니 떼고 나가라고 지적했지요. 그러나 연설장에서 보니 훈장을 달고 나왔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김일센의 연설원고는 우리 사령부에서 작성해 준 것입니다. 소련장교가 소련어로 작성해 고려인이 한글로 번역(외무성부상 박길용 박사는 시인 전동혁이 번역한 것이라고 증언)한 것이지요. 이날 연설에서 조만식은 조선해방에 대한 감사와 민주조선 건설을 위해 투쟁해 나가자고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김일센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센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듯 했습니다.』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종합 5면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권 (중앙일보사, 1992년 05월 05일) pp.88~89

장준익(張浚翼, 1935~ )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의 레베데프 소장을 찾아가서 나눈 대담 중에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환영집회에 대한 증언도 있다.[6]

『金日成 동지의 발언이 있겠다고 소개하니까 그곳에 모인 군중은 열화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는 金日成장군에 대한 국민들의 대단한 인기를 알 수 있었고, 연설이 끝난 후 金日成(김성주)은 진짜 金日成 장군이 아니다 라는 여론이 비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군정당국은 우익단체의 사람들을 만경대(김성주의 生家가 있는 곳)로 데려가서 항일투쟁에 참가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 했습니다.』

레베데프의 증언대로 10월 14일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 가짜 소동이 벌어지자 기자들을 김일성의 고향 만경대로 데려가 친지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할 당시의 사진도 남아 있다. 김일성강 미하일 소좌,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의 복장이 김일성이 연설하던 날의 복장과 동일하여 같은 날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종북화된 한국 학계에서는 소련군정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총지휘한 장본인인 레베데프 소장의 이러한 후일 증언은 철저히 외면하고,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1946년 7월 스탈린김일성박헌영 면접시험에 관한 증언

소련 군정 장성들과 김일성. 뒷쪽 오른 편에 김일성, 그 왼편으로 김책이 보인다. 김일성 바로 앞에서 정면을 보는 사람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가운데서 정면을 보는 사람이 안드레이 로마넨코(1906~1979) 소장, 그 왼쪽에서 정면을 향한 사람이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1900~1979) 상장이다. 레베데프 오른 쪽으로 얼굴 윗부분만 보이는 사람은 게라심 발라사노프이다. 치스차코프는 1947년 3월 소련으로 귀국했으므로 그 이전의 사진이다.

소련 군정이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며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앉혀 사실상 그를 북한 지도자로 표면에 내세우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박헌영은 소련 측에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순 김일성박헌영을 같이 모스크바로 불러 재차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게된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재확인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주었다. 이 면접은 사실상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당시 사정에 대한 레베데프의 증언이 아래에 나온다.

◎스탈린이 면접 지명 / 46년 7월 크렘린서 극비리에 / 당시 군부·외무성 다투자 / 스탈린,김에 공산화 지시
스탈린/김일성 오른쪽 앉혀 낙점암시 / 45년만에 밝혀진 북한 비사 중앙일보 1991.11.30 종합 3면
◎평양에 군용기 보내 김·박헌영 불러 / “박은 지명도 낮다” 판단 탈락 / “차기후보” 주위 위로에 박 불만없이 소에 수긍 / 면접뒤 연안파 합당등 김 체제 확립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2), pp. 326-330.

김일성 수령 만들기 공작에 대한 증언

레베데프는 또한 소련군이 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1945년 8월 9일부터 대일전을 개시해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 제25군 군사위원(소군정 정치사령부 사령관)으로 사실상 오늘의 김일성을 만들어낸 레베데프 소련 육군소장(92년 5월 사망)은 91년 봄 가을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모두 9차례에 걸쳐 특별 인터뷰를 통해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로 양성 된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그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은 북조선 역사에 대한 양심선언”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역사를 창출했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레베데프 장군의 회고를 요약한다.
북조선 인민의 '위대한 수령'은 북조선 인민의 의사에 의해 추대된 것이 아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소련공산당 정치국과 스탈린의 직접적 구상에 따라 평양주둔 붉은 군대가 교육시켜 창조한 것이다. 일개 소련군 정찰부대의 대위를 일약 '김일성 장군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가로 추켜세운 작업은 특정 장교의 특수임무가 아닌 평양주둔 소련군정 체제의 전반적 기구가 동원됐다. 이 작업의 총책임자는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주 당비서를 지냈고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특명을 받은 육군 중장(후에 대장 진급) 스티코프였다. 그의 지휘 아래 25 야전군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인 나와 소련 야전군 특수선동부장 중좌 코브젠코, 민정을 담당했던 소련군 육군소장 로마넨코, 그의 정치담당 보좌관 대좌 이그나치예프, 25 야전군 첩보국 책임자 육군소장 아노힌, 소련군 극동사령부 7호정치국 정치담당관 중좌 메크레르 등이 특명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소군정이 주관했던 조선신문과 라디오평양 등 선전매체를 동원했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세운 김일성대학에 소련학자 박일(朴一· 현재 카자흐 수도 알마아타 거주)을 부총장으로 앉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소련출생 조선인 2세 장교 15명 정도를 모스크바에서 급파해 오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한반도에 민주기지를 창설하라'는 특명수행을 위해 때로는 거칠게, 양심의 가책도 없이 철면피하게 거의 ‘무(無)’에서 지도자 김일성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붉은 군대는 3년여 동안(정확히 말하면 3년 4개월 동안) 김일성이 '위대한 수령'이 되기 위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
박길용, 김국후 저, 『김일성 외교비사』 (중앙일보사, 1994) pp.17~19.

레베데프 비망록

그가 남긴 비망록이 1994년 말 발굴되어 국내 언론에 공개되었는데[10], 1948년 김구, 김규식 등 남측 인사들이 방북하여 남북협상을 할 당시 일의 내막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지금까지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측의 의도와 역할, 소(蘇)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문건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 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 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소(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 『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 5월 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김두봉은 4월25일 밤 레베데프 소장에게 『김규식을 5월10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도록 하자』고 건의,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 그를 북한에 묶어 두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비망록의 전체 내용은 아래 책들에 나온다.

  •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기초학문자료센터 (KRM)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3 레베제프 일기 러시아어 원문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11 레베제프 일기 번역문


레베데프 비망록.pdf (전 제주경찰서장 김영중)
쉬띄꼬프 일기.pdf

레베데프 비망록 발굴 당시 부산일보도 전문을 기사로 연재하였으며, 인터넷 검색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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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고》

그의 회고록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고》라는 글이 있고, 1976년 소련과학아카데미에서 출판한 『조선의 해방』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

pp.65 ~ 100 : 제2장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면 : N.G.레베데프 소장

참고 자료

  •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상] 1992년 05월 05일, [하] 1993년) : 중앙일보 취재반이 1991년 레베데프 소장과 인터뷰한 내용이 들어있음
  • 김국후 저, 『평양의 소련군정 :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한울아카데미 2008년 06월 21일
  •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서문당, 1991년 11월 1일) :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레베데프 소장과 저자(전 육군사관학교 교장)가 대담한 내용 나옴.
  • 레베데프의 북한 정권 요인에 대한 평정서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 포털

함께 보기

각주

  1. Лебедев,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러시아어 wikipedia)  : Lebedev, Nikolai Georgievich 구글 영역
  2. 김일성 고향이 만경대로 알고 계시죠? 사실은요 DailyNK - 2013.12.26
  3. Сделан в СССР :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 Сделан в СССР softmixer 전재
  4.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 중앙일보 취재반이 1991년 레베데프 소장과 인터뷰한 내용이 들어있음.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증언 / 미소공위 소 대표 레베데프 사망 [중앙일보] 입력 1992.05.14
  6. 6.0 6.1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서문당, 1991년 11월 1일) :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레베데프 소장과 저자(전 육군사관학교 교장)가 대담한 내용 나옴.
  7. 박길용, 김국후 저, 『김일성 외교비사』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8.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4~90
  9.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종합 5면
  10. 송광호 칼럼 <47> 모스크바 특파원(초대-2대)시절 회고 2012-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