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간부 및 대의원 명단. 김달현이 부의장으로 나온다.

김달현(金達鉉, Ким Дар Хен, 1884 ~ 1958)은 북한의 정치인으로 해방후 북한에서 천도교 청우당(天道敎 靑友黨)[1]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장을 맡았다. 1949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개요

РГАСПИ, ф. 495, оп. 228, д. 2, лл. 3-4.

확인서

김달현 ― 청우당註 001 중앙위원장

1884년 (북조선) 함경남도 함주군 고원읍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저명한 정치인이며 1919년 3월 1일 항일인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73회 체포되었으며 2년 가량 수감생활을 하였다. 천도교를 믿는다.
해방 이후 청우당을 설립했으며 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1947~1948년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부터 김달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대표위원의 일인이었다.
김달현은 조선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위해 투쟁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민주주의 제도 수립과 강화를 지지하였으며 이를 위해 적극 협력하였다. 그의 연설에서 그는 조선에 대한 미국 침략자들의 식민주의 정책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1949년 김달현은 정부 대표단 일원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 탄생 7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하자마자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받았던 느낌을 발표하였고 소련 인민의 성공을 진실성 있게 알렸다.
김달현은 청우당 내에서 벌어진 좌우투쟁의 마지막 기간 대체로 중도적 입장을 지켰다. 김달현은 당 내 좌익의 입장을 더 지지하였지만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여 당 내에서 우익을 고립시키지는 않았다.
청우당은 조선에서의 전쟁 전야에 김달현이 조직하였으며 당원은 198,500명이었다. 100만 명이 넘는 천도교 신자들의 종교사회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전쟁 중에 해체되었다. 청우당 당원은 주로 조선의 중농과 부농이었다. 현재 청우당의 당원은 1만 명이며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현저하게 상실했다. 인민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잃은 이유는 미제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많은 청우당 회원들이 옳지 않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북조선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시기, 많은 청우당 당원들은 미국인과 이승만 도당이 노동당원과 인민위원들을 탄압하는 데 협조하였다.
김달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노동당이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청우당의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불만을 표출하였다. 또 1953년 11월 소련 정부로부터 자동차 ‘짐(ЗИМ)’을 선물로 받은 뒤 이는 소련 정부가 자신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라면서 소련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동시에 청우당은 노동당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지만 자신들은 정치적 강령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후 새로운 당원의 입당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노동당 지도부에게 자신의 청우당 기간 조직 건설과 청우당의 열정적 활동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였다.(1953년 11월 25일 수즈달례프 동지의 보고서. № 5794)

1953년 12월 3일

[註 001] 역주: 천도교청우당

약력

약력은 아래와 같다.[2]

РГАСПИ, ф. 495, оп. 228, д. 2, л. 6.

김달현

청우당(천도교청우당) 본부장

  1. 1884년 함경남도 함주군 고원읍에서 출생하였다. 종교는 천도교이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2.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으며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3. 해방 이후 청우당을 조직하였다.
  4. 1947~1948년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적극적 활동가였다.
  5. 1949년부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중 한 명이자 지도부의 성원이었다. 북조선의 민주주의 체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강령을 지지한다.
  6. 1950년부터 청우당 중앙위원장이자 정치국원이었다.註 002
  7. 1950년註 003 김달현은 스탈린 탄생 7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대표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으며 볼쇼이극장에서 열린 축전에 참가하였다. 연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에 대한 정책을 폭로하였다.

1953년 7월 바라키나

[註 002] 역주: 김달현이 청우당 위원장을 맡은 것은 1946년부터이다.

미제 간첩 혐의로 숙청

평양 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의 일지 기록

평양 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3][4]의 일지 1958년 10월 1일자와 24일자에 김원봉의 해임과 체포 및 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대표가 미제 '간첩' 혐의를 받으면서 그와 함께 해임된 것으로 나와있다.

평양 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 일지> 기록... 김광운 교수 "조선노동당 가입 안 해"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서훈 논란이 점화된 가운데, 김원봉의 숙청 시기와 이유, 죄목 등이 나온 러시아 문서가 주목을 받고 있다. 해당 문서에는 김원봉이 체포 전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가려고 했으며, 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대표가 미제 '간첩' 혐의를 받으면서 그와 함께 해임된 것으로 나와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이 발굴해 학계에 보고한 뒤 기자에게 제공한 <푸자노프 일지>(1958년 10월 24일자)에는 "김달현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의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김원봉이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남쪽으로 가려고 온갖 시도를 했다는 진술이 인상적이다. <푸자노프 일지>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드르 푸자노프가 일기 형식으로 북한 정계 동향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평양 주재 당시 당·군·정의 고위 간부들을 자주 만나 북한 내부 사정을 청취하고 이것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일지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푸자노프 일지>는 김원봉의 해임과 죄목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에 참석하였다. (...) 회의에서는 상들의 이동에 대한 정령과 옛 중앙통신사 사장 박무, 옛 강원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문태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옛 남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그들의 대의원 권한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 ( 1958년 10월 1일자 <푸자노프 일지>, 괄호 안은 푸자노프의 기록)
정 소장에 따르면, 위에 언급된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는 1958년 9월 중순에 열린 것이다. 그는 "함께 언급된 박무와 문태화 등이 (연안파를 숙청한) 8월 종파 사건에 직접 연계가 돼있지 않고, 그 비중으로 보아 김원봉에게 적용된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는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해임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푸자노프의 1958년 10월 24일자 일기에 김원봉이 현재 체포되어 있다고 했으므로, 그때까지는 생존해 있은 것으로 보인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북한관계사료집 7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의 일지 3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푸자노프 일지(1958년 9월 29일~10월 17일) > 10월 1일
북한관계사료집 7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의 일지 3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푸자노프 일지(1958년 10월 18일~11월 3일) > 10월 24일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17 : 푸자노프 일지 원문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20 : 푸자노프 일지 번역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