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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석
최근 수정 : 2022년 10월 6일 (목) 16:47

고준석(高峻石, 1910.11.15[1] ~ 1994[2])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수학했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38년 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다가 동경형사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1] 1944년 5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 기자를 지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남로당 당원이면서 북로당 노선을 지지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북한을 방문했으나 서울로 돌아왔다. 6.25 전쟁 통에 아내가 사망하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일본에 거주하며 다수의 일본어 저서를 남겼다. 고영민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약력

1939-09-27일자 일본 동경형사지방재판소의 고준석 판결문.[3]
  • 1910년 전라남도 제주도 구좌면 행원리 790번지(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줄생[4]
  • 동경 대성중학을 나왔다고 함.[5]
  • 1935년 4월 제2 와세다(早稻田) 고등학원 입학.[4]
  • 1937년 4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 진학.[4]
  • 1938년 1월 30일 동경 유학생연합이 개최한 졸업생 환송회에서 와세다 대학(早大) 고준석이 감상담을 발표함.[6]
  • 1938년 8월 15일 2학년에 재학중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도쿄 경시청에 체포됨.[2]
  • 1939년 10월 30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받음.[1]
  • 1944년 5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음.[2]
  •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에 입당.[2]
  • 1946년 2월 21일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민전[民戰])[7] 산하 경제대책연구위원회(經濟對策 硏究委員會) 위원으로 선임됨.[8][9]
  • 1946년 산업노동조사연구소(産業勞働調査硏究所) 소장[10]
  • 1947년 5월 서울에서 북로당(北勞黨)을 지지하는 『우리 신문』[11] 정치부장과[12] 주필이 됨.[2][13]
박갑동은 『우리 신문』은 김일성이 직파한 거물 간첩 성시백이 대남공작을 위해 창간한 신문이라 증언했다.[5]
  • 1947년 8월 2일 『우리 신문』 노방환(盧梆煥) 사장과 함께 경무부 수사국에 검거되었다[14] 조사를 마치고 8월 4일 석방됨.[15][12]
  • 1947년 8월 25일 고준석 등의 피검 사례를 들어 조선신문기자회서 언론계의 안전보장을 하지 중장에게 건의함.[16]
  •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 차 방북. 남로당 당원이면서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 북로당 노선에 동조.[2]
  • 1948년 8월 북한 해주에서 열린 남한지역 대의원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비밀리에 다시 월북했다가 서울로 돌아옴.[17]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에 남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공산주의자였던 탓에 좌익 폭동이나 6.25 전쟁을 거치며 자주 구금되기도 하고 어려움도 겪다가 일본으로 밀항했다. 남한이 공산주의자들 생리에 맞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거물 남파간첩 성시백과도 연계되어 있던 그가 왜 북한이 아닌 원수의 나라 일본에 가서 사는 길을 택했는지도 의문이다. 그가 일본어로 남긴 많은 저서들에 자신의 공산주의 운동을 좌절시킨 미군정이나 이승만과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만 가득할 뿐,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북한 주민들과 한국인들이 겪은 엄청난 고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철저히 외면하고있다.

생애

  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 제주일보 2018.08.06

고준석, 日서 ‘혁명사의 증언’ 등 저술.

일본 도쿄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회사정연구회의 항일 활동.

고준석의 가명은 고영민. 구좌읍 행원리<어등-개>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의 아버지와 해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1925년 여름부터 오사카 등지에서 8년 간 노동 생활로 야간에 학업을 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선만경제연구소(鮮滿經濟硏究所)의 기자와 경성일보사 정경부의 기자로 근무했다.

앞서 1937년 교포 학생들이 와세다대학에서 ‘우리 동창회’를 조직했는데 민족주의 계열인 이상돈(李相敦, 전북 출신·훗날 국회의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에 대학 정경학부 2학년 고준석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계열은 세력을 확대, 동년 11월 회장에 취임하고 새로 선출된 위원 권중돈(權仲敦, 경북 출신·훗날 국회의원) 외 11명의 위원을 소개했다.

다음 회장의 안내로 회원 55명을 인솔해 도쿄의 일일(日日)신문[18]과 전기장려관 및 조일(朝日) 신문사를 견학했다.

1938년 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던 중 1938년 8월 15일 도쿄경시청(東京警視廳)에 체포됐다.

1939년 10월 30일 도쿄형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업은 중단되고 오도리<小鳥>경제연구소, 노다<野田>경제연구소의 직원으로 잠시 활동 후 도쿄에서 중외(中外)상업신문(일본 경제신문의 전신)의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고향 친구 임해(任海)와 항일 운동에 투신하기로 맹세,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1944년 5월 서울로 들어와 경성(京城)일보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던 중 조국광복이 되었다.

1945년 9월 이관술(李觀述:울산), 강문석(姜文錫, 제주)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 당 규약의 초안 작성을 의뢰받았다. 제주도 출신 공산주의자는 강창보(姜昌輔), 김문준(金文準), 김시용(金時容) 등 세 사람 정도였다.

강문석의 사위인 김달삼(金達三)에게 바톤을 넘기니 제주 4·3 사건의 주모자로 이어졌다.

고준석은 1947년 5월 서울에서 북로당(北勞黨)을 지지해 ‘우리 신문’ 주필 겸 정치부장이 되어 북로당의 대변을 한 관계로 투옥되고 신문은 1948년 5월 26일 폐간 당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 취재 차 월북, 남조선 노동당원이면서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 북로당 노선에 동조했다. 평양에 가서 고향 친구 임해(任海)의 부부를 만나게 됐는데, 임해는 북로당 간부로 있다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 부장으로 옮겨 있었다.

임해를 통해 북한의 실상과 북한의 지도상 군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집필 활동에 몰두해 ‘조선(1945~1950) 혁명사의 증언’(1972), ‘해방 정국의 증언-어느 혁명가의 수기’(1987) 등 많은 저서를 내놓았으며, 공산주의의 증언적 체험기로 일관되게 서술했다.

※필자의 변 : 고준석의 부인 김사임(金師任, 1923~1951)은 항일운동가다. 본관은 광산이며 강원도 이천군의 갑부 김영석(金永石)의 딸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니홍<日本>여자대학 재학 중 1940년에 결혼했다. 1945년 11월 공산당에 입당, 김철수(金綴洙) 의 당 세포에 소속됐다. 고준석과 함께 1950년 조선노동당 남조선 정치공작위원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출산을 위해 보석됐다. 당시 3남 1녀의 어머니인데 6·25로 전화(戰禍)를 입어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제주일보 2018.08.06

고준석의 김일성에 대한 증언

고준석(高峻石)이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다가, 일본에서부터 친했던 친구 북로당 농민부장 임해(任海, 본명 任吉鳳)를 찾아가서 북한의 지도자들에 관해 문답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기섭(吳琪燮)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문건을 배포했다는 증언

평양에 간 고준석이 임해(任海)에게 이북 지도자들에 관해 알려달라고 하자 오기섭(吳琪燮, 1903-?)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문서를 당 하부 조직에까지 배포했다가 자아비판을 당했다는 말을 했다.[19] 이로보아 해방 직후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은밀히 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박헌영 파인 오기섭이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였던 당시부터 분파주의 활동을 하여 김일성 동지를 가짜라고 하는 문서를 당 하부 조직(당 세포)에까지 유포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요구당했는데, '나는 조선의 트로츠키스트입니다. 이것을 자기비판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오기섭에게 김일성 동지가, '지금의 오기섭 동지의 말은 자기비판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비판이란 것은 자신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쁘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힐책했습니다. 그로부터 황해도 도 당부 책임자 - 이 동지는 김일성 동지와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가 일어나서, 수첩의 페이지를 뒤적이며 김무정 동지가 모월 모일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수많은 구체적 사실을 들어 김의 분파주의 언동을 지적하여 자기비판을 요구했습니다. 김무정이 박헌영 파라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구체적인 분파주의 언동이 폭로되었으므로 이 마음이 약한 장군은 시종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고준석도 임해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고준석 본인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잘 몰라 임해에게 이에 대해 물었으나, 임해도 그의 전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식의 말 밖에 하지 못한다. 고준석이나 임해 모두 김일성이 해방 전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련이 지도자로 내세우니 그냥 맹종하고 있는 수준이다.

임해(任海) 동지, 김일성 동지는 어떤 인물입니까? 우리들은 그가 해방 전에 반일 빨치산 투쟁을 한 것 이외는 모르고, 특히 인간적인 면에 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우리들은 남조선에서 박헌영 일파에 의해서 배제되어 있는 관계로, '물에 빠진 자 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기분으로 김일성 동지를 지지하게 되었지만, 박헌영 일파에 대한 대항 의식만으로 언제까지나 김일성 동지를 지지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김일성 동지는 현재의 북조선 간부들 중에서는 뛰어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 수준도 높고, 특히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나는 당 중앙 농민부장 때에 때때로 회의에서 내가 쓴 원고를 읽어나가곤 했습니다만, 김일성 동지는 나의 잘못된 곳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쓴 것이 다른 동지들로부터 잘못된 곳을 지적당한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그만큼 김일성 동지는 이론적 수준도 높고 판단력도 뛰어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뛰어난 지도자라는 임해의 말과는 달리 해방 직후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재직하며 김일성에게 직접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친 박일(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1911~2001)은 당시 김일성의 지적 수준이 높지 않았고, 한국말도 잘 못해 가르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였다.

저서

다수의 일본어 저서가 있다.

  • 高峻石, 『朝鮮 1945~1950 : 革命史への證言』, 三一書房, 1972
고준석(高峻石)저, 정범구 역,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고준석 저, 유영구 역,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도서출판 글, 1992)[20]

참고 자료

被告人高峻石に対する治安維持法違反事件 予審終結決定 / (東京刑事地方裁判所報告) / (『思想月報』 六十三号昭和十四年九月)
高峻錫(30/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東京市 中野區 高根町 1番地 本領信治郞 方),
高峻石, 李城佑, 宋君瓚, 黃炳仁
p.56 : 李相敦, 高峻石(早稻田大 政經部 2年/早大우리同窓會 委員會 代表), 宋君讚, 全德?, 金景憙, 李成佑(早大生 共産主義者), 徐烟坤, 金大中(早稻田大學 法學部), 韓啓東(早稻田大學 法學部), 趙鐘輝(第一早高 1年),
p.57 : 李相敦, 高峻石(早稻田大學 政經部 2年生/早大우리同窓會 委員代表), 宗君讚, 金德淵, 金景憙, 李成佐, 徐炳坤 등 共産主義 일파
pp.1049~1052 : IV. 국외항쟁 사료 / 1. 일본에서의 항일운동 / 3) 학생운동 / (2) 고준석, 전인택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 동경형사지방재판소 수형인명부 - 국가기록원
  2. 2.0 2.1 2.2 2.3 2.4 2.5 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제주일보 2018.08.06
  3.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4(2)권 治安維持法違反事件判決その他 pp.24~25 고준석 사건 : 被告人高峻石に対する治安維持法違反事件 予審終結決定 / (東京刑事地方裁判所報告) / (『思想月報』 六十三号昭和十四年九月) : 高峻錫(30/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東京市 中野區 高根町 1番地 本領信治郞 方)
  4. 4.0 4.1 4.2 파일:1939-09 고준석 판결문.pdf
  5. 5.0 5.1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05 중앙일보 1990.05.16 :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05월 01일)
  6. 卒業生送別會(졸업생송별회) 盛大(성대)히 擧行(거행) 1938.02.02 조선일보 2면
  7.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斯界의 권위를 총망라, 民戰의 교육, 경제대책위원 자유신문 1946년 02월 26일 1 면 7단 / 斯界의 권위를 총망라, 民戰의 교육, 경제대책위원 자유신문[自由新聞] 1946년 02월 26일 - 국립중앙도서관
  9. 민전, 교육및 문화대책연구회위원과 경제대책위원회위원 선정 서울신문 1946년 02월 26일 : 高鉉錫은 자유신문 기사와 비교하면 高駿石(高峻石)의 착오로 보임.
  10. 産勞調査所被襲, 藏書·什器等奪去破壞, 警察의 私設團體帶同은 不當, 警務責任者談 수산경제신문[水産經濟新聞] 1946년 11월 21일 2면 5단
  11. 「우리신문」은 1947년 2월 10일 노방환(盧梆煥, 盧柳煥은 착오임)이 편집발행 겸 인쇄인으로 창간한 좌익계열 일간지다. 좌익이 미소공동위원회 2차 대회를 앞두고 발간한 신문. 5.10 선거가 종료된 1948년 5월 26일 신문 및 정기간행물 발행법을 위반한 혐의로 폐간됨. 미군정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편집국장 박소붕과 편집인 강노철(姜老轍) 역시 군정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12. 12.0 12.1 『우리신문』 盧社長等 釋放 조선중앙일보(유해붕)[朝鮮中央日報(유해붕)] 1947년 08월 06일 2면 8단
  13. 北韓傀儡(북한괴뢰) 閣僚異動(각료이동)의 黑幕(흑막) 1959.11.08 동아일보 6면
  14. 우리신문 盧社長等 拘束 : 金容鎭, 盧梆煥, 高駿石 독립신보[獨立新報] 1947년 08월 05일 2면 8단
  15. 被檢記者釋放 : 盧梆煥, 高峻石, 金蓉鎭 독립신보[獨立新報] 1947년 08월 06일 2면 9단
  16. 民主言論界의 安全保障을, 朝鮮新聞記者會서 하中將에 建議 민주중보[民主衆報] 1947년 08월 27일 2면 1단
  17. 고준석(高峻石)저, 정범구 역,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 p. 233.
  18. 지금의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이다.
  19. '가짜 김일성' 설은 박헌영이 원조? 프레시안 2012.02.27
  20. 박헌영에 관한 첫 연구서 [중앙일보 1992.03.01 종합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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