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놀(លន់ ណុល, 1913년 11월 13일 ~ 1985년 11월 17일)은 크메르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이자 캄보디아의 전 수상, 전 국방상, 전 군참모총장으로, 군부를 이끌고 궐기하여 왕자 시하누크의 섭정을 종식시키고 캄보디아 왕정을 공화정으로 변환시킨 장본인이다.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후 캄보디아 왕실에서 오랫동안 권신이자 역적으로 매도당했지만, 최근 캄보디아 보수층에서는 그가 재임기간에 세운 업적들을 재평가하고 있다. 군인으로써의 최종 계급은 원수이다.

출생

1913년 11월 13일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한창이던 캄보디아의 쁘레이웽도에서 화교와 크메르족의 혼혈로 태어났다. 다만 자신의 집권기에는 캄보디아의 민족 정기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화교 혼혈로써의 정체성을 단절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사이공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고, 왕실육군사관학교로 들어가서 군사적 재능을 키웠다. 1937년부터는 식민 정부에서 행정 업무를 맡다가 훗날 자신의 주군이자 정적인 시하누크 왕자와의 우애를 다지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50년대에는 프랑스군과 월맹군의 접전이 치열해지면서 월맹군의 진압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지나전쟁의 종전으로 캄보디아가 해방되자 보수정당에 들어가서 시하누크 왕자를 정치적으로 보좌했고, 이 공으로 60년대에 수상으로 임명되어 장기간동안 재임했다. 또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상으로도 임명되어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했다.

다만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중국과 월맹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추구하는 시하누크의 의견에 반대했다. 론놀 자신은 왕실과 국가의 존립을 위해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고, 실제로 미국의 대 캄보디아 지원이 감소하면서 월맹은 캄보디아에 대한 야욕을 차츰차츰 드러냈다.

이에 1970년, 론놀은 군부를 이끌고 궐기하여 1970년 시하누크 왕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공화정을 세워 크메르공화국을 건국했다. 집권한 뒤에도 시하누크 왕자의 어머니인 꼬싸막 왕후의 신발에 입맞춤을 하여 사과를 하였으며, 외교 노선을 철저한 친미 정책으로 변환시키고 미국의 원조를 경제 성장에 투자하였다. 덕분에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캄보디아는 상당한 부흥을 맞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신크메르주의를 국시로 삼아 캄보디아의 전통을 보존하고 월남으로부터 빼앗긴 메콩강 삼각지대의 수복을 부르짖었다.

허나 1975년 월남전에서 자유월남이 월맹에게 패망하여 캄보디아 또한 월맹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 루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고, 그해 크메르 루주에 의해 대통령궁까지 함락되면서 론놀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 거기서 여생을 보낸다. 완전히 적화된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주의 수장인 뽈뽓이 집권하였고, 그렇게 킬링필드가 펼쳐지게 되었다.

기타

반공 자유 민주주의 정권을 표방했던 만큼 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던 대한민국 제3공화국과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군의 캄보디아 파병을 고려하자 이를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