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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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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1940년 02월 29일 (83세)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
주소지대한민국 서울
본관밀양
정당무소속
경력한신대학교 겸임교수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겸임교수
학력일본 릿쿄 대학교 대학원
종교개신교(퀘이커)
배우자한명숙
자녀박한길(아들)

박성준(朴聖焌, 1940~ )은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한 사회운동가 겸 대학 교수이다(한명숙의 남편인 그의 아명박중순, 박진우이다.).


1967년 한명숙과 결혼했으나, 이듬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刑이 확정됐다. 검찰은 박성준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 내란음모죄,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그 후 실형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복역하다가 1981년 전두환 대통령 때 출소해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고있다.


[추적] 韓明淑과 남편 朴聖焌은 통혁당 당원이었나?, 월간조선, 2006년 5월호

[지금까지의 해명]
  • 박성준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 없다』
  • 한명숙 :『남편 옥바라지만 했을 뿐 (통혁당 사건을) 알지 못한다』
통혁당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金鍾泰·金瓆洛·`李文奎는 越北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22일 越北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金鍾泰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金日成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을 167회 수신했다.
그동안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공판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별다른 고문·조작 시비가 없었다. 이 사건은 2005년 2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우선 조사대상 사건으로 선정한 7개 사건(KAL858기 폭파,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金大中 납치 사건, 정수장학회, 중부지역당 사건)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朴聖焌은 비밀 지하당 소조 조직책」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朴聖焌(당시 서울大경제학과 4년. 25세)씨는 1967년 6월 申榮福에게 포섭된 「黨 小組責(당 소조책)」으로서 妻 韓明淑 및 朴璟鎬(박경호), 金國柱(김국주) 등을 黨 小組로 포섭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서울 商大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資本主義(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朴聖焌씨가 주도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 등 8개 서클을 통혁당의 「민족해방전선」 산하 조직 가운데 하나라고 발표했다.

당시 수사발표에 따르면,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黨首(당수)로 하여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의 양대 조직으로 지도부가 구성됐었다. 「민족해방전선」은 金瓆洛(김질락)이 책임비서, 申榮福이 조직책임비서, 이진영이 교양책임비서를 맡았고,「조국해방전선」은 李文奎(이문규)가 책임비서, 尹相煥(윤상환)·吳炳哲(오병철)이 교양책임비서를 맡았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