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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1979년 10.26이후 1980년 5월 17일 전국계엄까지의 시기를 좌익들은 서울의 봄이라고 말한다.


과도정부였던 최규하가 박정희 때 시국사범들이나 긴급조치로 구속된 정치인들이 죄다 사면복권 해 주면서, 좌익들이 마치 자기들 세상인냥 활개치던 시기를 말한다.


좌익 입장에서는 재세상 맞난듯 서울의 봄이었겠지만, 당시 정부 입장에서는 봄이 아니었다. 도리어 국가위기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권력은 무주공산 사태였고 김대중 김영삼이 배후로 학생소요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고, 북한의 남침위협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최규하를 완전히 핫바지로 보고 밀면 밀리는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유신잔당으로 규정 즉각 물러나라고 극한으로 몰아갔다. 최규하는 유신헌법에 의해 취임한 정부였기에 합법정부였다. 도리어 유신잔당 물러나라 라는 김대중 김영삼 등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이었다.


공화당의 김종필은 유신을 부정하였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최규하 정부를 극한으로 몰고가지만 않았다면 최규하는 1년 과도기 정부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기에 1년만 참으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셋 중 한명이 거의 무조건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김대중 김영삼이 조급함 나라보다는 집권욕심에 사로잡혀서 최규하를 극한으로 몰고 소요사태를 부추기는 바람에 518광주사태도 일어나고


( 김영삼 김대중 둘 중에는 김영삼이 신민당의 당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김대중은 매우 과격한 길바닥 정치를 가동한다. 언제까지 최규하 신현학 내각이 사퇴 안하면 5월 20일쯤에 총궐기를 하겠다고 당시 최규하 정부를 상대로 최후통첩을 한다. 이 최후통첩 준비가 518 광주사태다. 학생소요 사태가 도저히 경찰로는 치안유지가 안됀다고 판단. 만장일치로 군이 치안유지에 나서고, 제주도 뺀 계엄에서 전국계엄으로 확대되고 정부상대로 최후통첩까지한 김대중을 잡아들인 게 5.17 비상 전국 계엄조치다 여기에 반발해서 김대중이 준비한 최후통첩 이후 들고 일어난 게 518 광주사태)

,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게 된 것이다.


좌익 주장은 이게 통설이 되었는데, 12.12이후 전두환이 다 장악해서 최규하는 핫바지 바지사상 처럼 되었다는 건데.

좌익이 말하는 서울의 봄이라는 게 된 것이.

박정희 때 시국사범들 정치활동 금지되거나 긴급조치로 구금된 사람들을 12.12 이후 80년 초반에 사면복권을 해줘서 그렇게 된건데. 그래서 서울의 봄이라는 게 온 건데 박정희 때 정치활동이 금지된 사람들을 사면복권 시켜줬으니 이들이 제 세상 만났듯 활게 친 것 그것이 좌익들이 말하는 서울의봄이다.

좌익 주장 대로 라면, 12.12이후 최규하는 핫바지 되고 전두환이 다 했으니 12.12이후 시국사범들 사면복권 해줘서 서울의 봄이 오게 해 준게 전두환이 만들어준 것이 됌. 역사를 왜곡하니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

실제는 12.12 이후 최규하는 무력화 되지 않았고, 시국사범들 사면 복권 해 준 건 최규하임. 전두환이 다했다 하려면 최규하가 무력화 되었다고 해야 하니 역사를 실제와 다르게 왜곡을 하니 주장에 모순이 생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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