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平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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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남녀의 경향적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자는 주장. 한국에 만연한 래디컬 페미니즘성대결과 반대되는 사상이다

성평등에 대한 입장

기본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나서 겪는 삶의 굴곡과 부당함, 불리함, 어려움, 난처한 상황 등과 여성으로 태어나서 겪는 삶의 굴곡과 부당함, 불리함, 어려움, 난처한 상황 등이 다르다. 흔히 “여성차별” 의 영역으로 끌고와지는 ‘성범죄’, ‘임금격차’ ‘유리천장’ 등이 사실은 그러한 예이다. 보통 성범죄를 여성들이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차별의 영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가는데 있어서 겪을 수 있는 매우 불리하고 부당한 부분인 것이다. 만약에 여성이 남성보다 성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서, “차별”의 영역으로 끌고온다면, “평등”해지기 위해서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성범죄에 노출되어야 한다. 이것은 올바른 해답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성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것은,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매우 불리하고 부당한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여성의 삶에 대한 부당하고 불리하다는 영역들을 “개선”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격차 또한 마찬가지로, 단순하게 임금이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라고 한다면 굉장히 잘못된 진단을 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선택을 하는 기준과 과정들의 경향성이 다름으로써, 그것이 전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딱 나눠서 봤을 때 임금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진단은 어떠어떠한 기준으로 선택을 해나가는지, 그래서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어떠한 임금을 불러오는지를 진단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단순하게 임금을 남성과 여성으로 딱 나누어서 봤을 때, 차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이라고 한다면, 삶의 선택의 일련의 과정들을 전부 무시하고 왜곡된 진단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평등해지기 위해서, 또 기계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임금을 맞춰야 한다는 논리로 흐르게 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과 기준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시장원리에도 간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리천장과 여성할당제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성과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선택을 하는 기준이나 그러한 과정들의 경향성이 다름으로써, 어떤 사회를 가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바로 사회의 최상위 계층에 남성들이 많이 분포함과 동시에, 최하위 계층에도 남성들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 극단이 아닌, 사회적 계층의 평균값 주변에 분포는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어떠한 통제도 없이, 가장 자유롭게 두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최상위 계층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어떠한 ‘천장’을 설치해서 막고 있다고 진단을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오는 진단이라고 본다. 물론 실제로 최상위 계층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막고있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되었고 ‘제도적인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천장”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여성들로 하여금 본인들의 선택과 행복추구에 대해서 스스로 의문을 품게 하며,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서 불행하게 여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할당제”라는 방식으로 “할당”할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주체적인 선택들과 행복추구를 위한 기준에 대한 사회적인 보장과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성으로 태어나서 겪는 혹은 겪을 수 있는 불리함과 부당함 또한 선뜻 차별의 영역으로 끌고가면 정확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렵다. 가령 산업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산업재해라던가, 가정의 보호에서도 배제되어 죽는 고독사 라던가, 치열한 경쟁시장에서 실패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살 등 남성들이 산업재해나 고독사, 자살 등의 영역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서 “남성차별”이 아닌 것이다. 만약에 이것을 “차별” 내지는 “불평등”의 영역으로 끌고간다면, 평등해지기 위해서 산업재해나 고독사 자살의 영역에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노출되어 있는 사회여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성평등한 세상이다. 이러한 해결방식은 제대로 된 진단이 아니라, 오진단을 통해서, 잘못된 약을 환자에게 투여한 것이다. 제대로 된 진단은 “차별”의 영역으로 끌고가서 해결을 할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 태어나 살아가며 겪는 혹은 겪을 수 있는 매우 부당하고 불리한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개선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훨씬 더 제대로 된 진단이며, 제대로 된 약을 투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주장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해는 오로지 페미니즘 뿐인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해를 할 때에, 페미니즘이 아니면 여성혐오/백래시/2차가해 등의 용어로 낙인 찍혀 왔습니다. 하지만 지성이 있고, 미래가 있으며, 꿈 꿀 수 있는 학생이라면 우리는 되돌아봐야 합니다.

정녕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서 화합과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는지, 정녕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을 행복하게 하는지, 정녕 페미니즘이 발전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되려 퇴행적이며, 극단으로 치닫는지.

남성과 여성은 적이 아니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같이 살아가며, 화합하는 존재라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이 나라의 미래이자 주역인 여러분들은, 남성과 여성 서로가 화합할 수 있는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감히 “서로에 대한 올바른 이해” 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에 대해서 왜곡된 이해를 하고 있는 상태로는 절대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올바른 이해가 기반이 되었을 때에 화합을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남성과 여성의 화합을 추구함에 있어서, 페미니즘의 사상이 화합의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 이퀄리즘, 남성학 등 수많은 성담론들이 남성과 여성의 화합을 추구함에 있어서 적절한 도구로서 사용된다면, 언제든지 그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페미니즘은 서로에 대한 화합의 도구로서 사용되는지, 아니면 되려 분노와 갈등을 조장하여 화합이 아닌 파괴로 흐르게 하는지 우리는 되돌아보고 진단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페미니즘은 남성은 폭력적이고 강간을 일삼는 존재로 묘사하고, 여성은 할당받는 존재이며 피해자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이러한 묘사가 정녕 남성과 여성의 화합을 추구하는지 갈등을 추구하는지를 물어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아니”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대답을 “백래시” “여성혐오” “2차가해” “성인지감수성 부족” “젠더감수성 결여” 라는 그들만의 용어로 입막음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곡된 인식을 조장하는 페미니즘을 지적하며, 남성과 여성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토대로 하는 성평화를 추구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화합의 도구로서 적절치 못하다면,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비판을 입막음하려한다면, 입막음하려하는 그 주체가 바로 성왜곡과 성갈등을 먹고 사는 성파괴세력입니다. - 한국성평화연대

과거의 여성차별에 대한 입장

과거에 여성이 받았던 차별을 인정하지만 그거는 실제 차별을 했던 586세대 남성들이 해결하라는 입장이다

반의어

성대결

연관 링크

한국성평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