崇儒抑佛
개요
숭유억불은 조선에서 실시한 불교 억압 정책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한다."라는 의미이다. 억불 정책, 배불 정책 또는 숭유배불으로도 표기한다.
숭유억불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에 활동한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있다.
왕이 좀 불교적인 뭐를 할라 치면, 유생들이 반대상소를 엄청 냈다.
유생들이 절에 가서 횡포를 부리고 불을 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성계의 사실상 행궁 비슷했던 회암사도 유생들의 오랫 타겟이었는데(왕실과 관련된 사찰임에도 목표 대상이었다는 게 얼마나 유생들이 사찰들을 괴롭혔는 지 알 수 있다. 왕들도 제아무리 숭유억불이라도 여기는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고, 선대왕들 제사를 들이는 곳이라 유생들의 상소를 씹었다), 이곳도 결국에는 아마 유생들이 불질러서 없애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승려들은 궁궐 공사 등에 동원 됐고, 사대부들이 유랑을 가면 그 산에 속한 승려들이 나와서 사대부의 가마를 들어주기도 했다.
여기서 예외적이었던 경우가 불교를 좋아했던 세조와 명종 때 문경왕후 정도(승려시험인 승과를 부활 시키기도 했다. 유생들이 하도 절에 가서 부리는 횡포가 많아서 유생이 절에 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이때 문경왕후에 총애를 받던 승려 보우도 유생들이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엄청 올렸다 문경왕후가 죽자 보우는 제주목사에게 죽임을 당한다. 보우는 현재 불교계에서 순교자 대우를 받고 있다. )가 있다.
불교가 숭유억불 때문에 숭유억불 때문에 쪼그라 들어서 일제시대 때 쉽게 일본불교에 접수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때는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살생을 엄하게 금지함에도) 승병으로 많이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조선조 내내 숭유억불 기조가 이어졌고 덕분에 교세가 쪼그라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교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조선왕조도 불교를 억제할 생각이었지, 말살 할 생각은 없었다. 봉은사 등 왕실의 무덤을 관리하는 사찰들은 보호를 받았다.
성리학이 불교적인 요소를 받아들인 유교지만, 성리학만으로는 종교적인 기복이나 사후세계 등의 종교적 요소는 불교 보다는 약하기 때문.
불교적인 전통이 오래됐기 때문에 신앙의 전통은 어느정도 계속 유지됐다. 특히 남자 사대부 보다는 (불교 옹호적인 이야기를 하면 이단을 믿는 다고 지탄 받았다)여성들이 불교를 많이 신앙했고,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가족이 병이 들면 불공을 들이거나 그런식으로) 또 왕족이나 여성들도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많이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