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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열(Lê Văn Duyệt, 1763년 ~ 1832년 8월 2일)은 월남 완조의 무장으로, 완황덕(Nguyễn Huỳnh Đức), 완문인(Nguyễn Văn Nhơn), 완문장(Nguyễn Văn Trương), 장진보(Trương Tấn Bửu)와 더불어 가정오호장(Ngũ hổ tướng Gia Định)으로 대표되는 완조 창건의 일등공신 중 하나이다.

생애

18세기 월남 후여조 현종 치세에 지금의 띠엔장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인 띠엔장은 남월지역을 지배하던 완씨정권의 남진정책으로 얻은 영토였기 때문에 월남인보다는 캄보디아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는 후에 그가 가정성의 행정을 책임질 때 이점이 되었다.

완복영의 가신이 되다

1781년 완복영의 완씨정권과 완문혜의 서산군이 충돌할 때 그는 17세의 나이에 완씨정권의 환관이 되었고, 이때부터 완복영을 섬겨 시내전투 등의 굵직한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둔 덕분에 완씨정권은 서산군을 무너뜨리고 월남을 통일하여 완조를 창건하는데 성공하였고, 완복영은 초대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가륭으로 정했다.

가정성의 총진이 되다

그리하여 그는 가륭~명명황제 치세에 월남 남방지역의 중심지인 가정성의 총진이 되어 그 지역의 통치할 뿐만 아니라 월남의 조공국인 캄보디아의 내정에도 월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총진으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가정성 내외의 캄보디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그들의 민심을 얻었다. 그때문에 무력으로 복종을 얻어 중앙집권을 꾀했던 중앙조정의 목적과 상충되어 명명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가 1832년 8월 2일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후

성대한 무덤이 건설되고 그의 아들인 여문회가 총진직을 이어받았다. 명명황제는 여문회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군대를 보내어 그와 그의 측근인 프랑스 선교사 조제프 마샹(Joseph Marchand)을 극형에 처한 뒤 죽은 여문열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부관참시하고, 가정성을 조정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였다.

1841년 명명황제의 아들 소치황제가 죽은 여문열 부자를 복권시키고 1966년 자유월남 응우옌 반 티에우 대통령 집권 때 100동 지폐에 그의 얼굴이 새겨지는 것으로 여문열의 명예는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