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柔然, 蠕蠕(연연)[1], 芮芮(예예)[2], 茹茹(여여)[3], 蝚蠕(유연)[4]
사료에 따라 위와 같이 유연을 지칭했다.

개요

유연은 5세기부터 6세기까지 몽골 고원을 지배했던 가한국이다. 민족의 정확한 분류는 알 수 없지만 황인종 유목민족이 건국한것으로 보인다.

유연의 시조는 목골려로 알려져있고 그 왕족은 욱구려씨(郁久閭氏)가 계승했다. 3세기경에는 선비의 일족인 탁발부에 예속되어있었으나 선비족들이 화북지역으로 이주한 다음엔 몽골고원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5세기 초 욱구려 사륜(社崙)의 시기에 철륵을 복속시키고 타림 분지 일대를 지배하고 탁발부에 의해 건국된 북위(北魏)와 대립했다. 사륜은 북위의 명원제의 군대에서 패주할때 사망했다. 그는 가한(可汗、Qaγ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유연은 북위의 적수였는데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 남송, 하나라(오호십육국), 북량, 북연, 토욕혼과 북위포위망(北魏包圍網)을 형성했다. 다만 하나라, 북량, 북연은 북위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연은 세력을 불려서 토욕혼을 통해 남송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견제한다.[5]

이에 반발한 북위는 태무제때 429년과 449년에 두 차례 친정군을 이끌고 유연을 정벌한다. 유연은 본거지를 버리고 가한은 패주중(敗走中)에 사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강한 기세를 유지했고 북위는 남송과도 대립했기에 북벌만 계속하기에는 무리였다.

유연이 본격적으로 약화한것은 485년경에 지배하에 있던 철륵이 독립하면서 부터다. 철륵의 반란은 유연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지방에도 영향을 미쳐서 철을 생산하던 노예들이 있던 돌궐이 융성하기 시작했고 552년 돌궐의 이리가한(伊利可汗)과 유연과의 전투에서 유연이 패하고 가한 욱구려 아나괴는 자살한다. 유연의 잔당들은 탁발부계의 회석진(懐朔鎮) 군벌의 산하에 있는 화북동부의 북제에 원조를 요구했지만 돌궐이 먼저 요청하여 이를 듣고 유연의 잔당들까지 살해당한다. 이로인해 유연은 완전히 멸망한다.

후손

각주

  1. 『위서(魏書)』『북사(北史)』『남사(南史)』
  2. 『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양서(梁書)』
  3. 『주서(周書)』『수서(隋書)』
  4. 『진서(晋書)』
  5. 적의 적은 나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