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포로, 평화를 말하다 포스터.jpg

전시정보

정전65주년기념 6·25 전쟁 포로 아카이브자료 공개전시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

PRISONER OF WAR, YEARNING FOR PEACE

전시정보
기간 2018.12.05 [수] ~ 2019.01.17 [목]
장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관람료 무료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관람문의 02-3703-9200

수요일 및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전시를 열며 (Opening Special Exhibition)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엔군(연합군)에 속한 강대국들은 전후 세계 냉전冷戰의 소용돌이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앞세워 대립 하기 시작했다. 세계 냉전은 신생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하던 남북한 모두에 또 다른 ‘열전熱戰’을 강요했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참혹한 전쟁을 빨리 종결시키지 못하고 2년 가까이 지연된 데는 바로 ‘전쟁 포로’를 둘러싼 여러 쟁점 때문이었다.6·25전쟁은 1949년 발효된 전쟁 포로의 대우待遇에 대한 ‘제네바제3협약’이 처음으로 적용된 전쟁이였다. 포로의 성격에 따른 분류와 재분류, 심문審問과 재심문, 교육과 선택이 이루어졌고, 수용소 내에서는 잇따라 참혹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정전停戰 협정 체결 후, 마침내 포로들은 돌아간[송환送還] 자, 돌아가기를 거부한[미송환未送還]자, 중립국中立國을 선택한 자로 나뉘어졌지만, 이미 많은 포로들은 극단적인 이념 대결, 폭력과 차별 속에 고통 받은 뒤였다. 생존이 불확실한 전쟁터에서 삶의 희망을 갈구했던 전쟁 포로. 이번 전시를 통해, 마지막 남은 냉전의 땅,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 평화를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1]

전시내용

누가 포로가 되었나? (Who were the POWs?)

6·25전쟁 전 기간 동안 유엔군 관할에만 약 18만 명의 전쟁 포로들이 있었다. 3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많은 포로가 발생했다. 전쟁 포로의 대부분은 정규 군인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그들에게 끌려간 ‘의용군’과 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빨치산들도 포로가 됐다. 참전參戰과 포로가 되는 과정의 여러 이유를 불문하고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취급되었다.


포로들은 어디로 갔는가? (To Where POWs were transported?)

전쟁터에서 붙잡힌 포로들은 근처에 설치된 집결 수용소라는 임시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집결 수용소는 간단한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시설이었다. 임시 수용소를 거쳐 포로들은 정식 수용소로 옮겨졌다. 또한 거제와 통영에서는 전시戰時 법에 의거 주민들을 분산시키고 부지敷地를 징발徵發하여 수용소를 건설했다.


포로들은 어떻게 관리됐는가? (How POWs were managed?)

언어 장벽과 관리 인원의 부족으로 포로들의 기초 정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 단계부터 심문審問, 지문指紋 채취, 사진 촬영을 통해 포로 관리에 필요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했지만, 포로를 송환할 때까지도 완전한 파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로들은 여러 차례의 심문과 함께 이발, 신체검사 등의 과정을 거쳐 각 수용동收容棟에 배치되었다.


포로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What kind of Education were given to POWs?)

유엔군은 포로 재교육을 위해 미 육군 심리전 본부 산하에 민간정보교육국(CIE)을 설치하고, 1951년 6월부터 정치 교육(혹은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비롯해 한글, 목공, 양철공 등 기술 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정치 교육의 목적은 본국으로 송환될 포로들을 ‘미국식 자유주의’ 질서의 전파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포로 곁에 누가 있었나? (Who were there next to POWs?)

수용소에는 포로들 외에도 감시를 위한 경비병들이 가장 많았고, 심문과 의사소통 등을 위한 통역 요원, 수용소 사령부에 근무한 지역민과 피난민으로 구성된 민간 요원, 의사 및 간호사, 포로나 근무자들을 위한 신부, 목사 등도 있었다. 그리고 흥남철수로 거제도에 온 피난민도 포로 곁에 있었다.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What happened in POW Camp?)

참전과 포로가 되는 여러 사연만큼 수용소 내 포로(북한군, 중국군, 남한측 민간인 억류자 등)의 구성도 다양했다. 따라서 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의 송환 여부를 심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을 지닌 포로들 사이에 극심한 폭력적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포로들은 어디로 갔는가? (To Where POWs were sent at the end?)

1953년 4월부터 포로들은 다양한 곳으로 송환되기 시작했다. 거제도 등 한국 여러 수용소에 분산 배치된 포로들의 최종 목적지는 모두 다섯 곳이었다. 중국군 포로는 중국 혹은 대만, 북한군 포로는 한국이나 북한 또는 중립국으로 갔다. 북한 포로수용소의 유엔군 포로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으로 귀환한 국군 포로는 8,000여명에 불과하여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비판

본 전시는 북한 인민군의 입장만을 대변했을 뿐, 국군과 유엔군 포로에 대한 내용은 축소되거나 전지되지 않았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전시사진과 설명, 주제별 안내글을 보면 마치 6.25전쟁을 미국이 주도한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미군이 북한 및 중공군 포로에 대한 사상교육을 철저히 시킨 것과 같은 날조가 게시되어 있다.


북한인권단체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의 규탄대회

북한인권단체인 물망초박선영 이사장은 2018년 12월 18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왜곡날조규탄대회'를 개최했다.[2]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급하게 전시내용을 수정하는것으로 대응했다.[3]

박 이사장이 뽑은 전시의 문제점은

  • 국군포로에 대해서'8천여 명의 국군 등 1만 2천명의 유엔군은 대부분 다 돌아왔다'라고 적어놓았지만 이건 북한 주장이며, 국군 포로는 12만 명 중, 겨우 8천여 명이 송환되었고 나머지 10만여 명의 포로들은 아오지탄광에서 노예 같은 광부생활을 했다는 것.
  • 국군과 미군이 마치 인민군 소년병과 빨치산 여성들까지 마구잡이로 포로로 잡아가두며, 온갖 차별과 억압 속에 심리전 목적의 교육을 했다고 왜곡한 것.
  • 미군이 포로들을 상대로 심리전 교육을 치밀하게 수행했다고 강조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강제로 주입시켰다고 왜곡한 것.[4]
  • 포로수용소를 짓기 위해 '민간인의 재산권을 침해했다' 고 왜곡한 것. [5]

등이 있다.


박선영 이사장의 반박전문

<역사 왜곡 날조하는 역사박물관은 대오 각성하고'전쟁포로, 평화를 말하다' 전시를 당장 중지하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현재 전시 중인 <전쟁포로, 평화를 말하다>는 역사를 날조,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전시 내용만 보면 평양 박물관으로 착각할 정도다. 국군 포로에 대해서는 딱 반 줄 '8천여 명의 국군 등 1만 2천 명의 유엔군은 대부분 다 돌아왔다'라고 적어놓았지만 이건 북한 주장이다. 국군 포로는 12만 명이다. 이 가운데 송환된 포로는 8천여 명! 나머지 10만여 명의 포로들은 아오지탄광에서 노예 같은 광부였고 지금도 수백 명이 생존해있다.


게다가 이 전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북한 인민군의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다.


1. 인민군 소년병과 빨치산 여성들까지 국군과 미군이 마구잡이로 포로로 잡아 가두고 온갖 차별과 억압 속에 심리전 목적의 교육을 했단다. 적군으로 싸우다 잡힌 자는 전부 포로 아닌가?


2. 미군이 그 심리전 교육을 치밀하게 수행했다고 강조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매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는 음악이 <아리랑, 도라지타령, 경복궁타령, 천안삼거리, 노들강변 등 5개 민요와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비창>이란다. 우리 민요와 클래식 음악이 이념곡인가? 날조와 왜곡도 이정도면 '챔피언'감이다. 촛불 혁명정권은 곧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리랑'을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주입시키는 이념곡이라며 금지시킬 태세다.


3. 게다가 포로수용소를 짓기 위해 '민간인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니 평시에도 '공공필요에 따라 국민의 재산권을 수용 사용할 수 있다'고 헌법이 지금도 명문으로 규정(23조3항)하고 있는데 하물며 전쟁통에 이게 무슨 말인가? 전쟁 포로를 아예 잡지 말라는 말 아닌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박물관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이렇게 역사를 날조 왜곡하며 반전반미 사상과 가짜 평화를 국민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물망초 이사장 박선영


박선영,역사박물관비판.png

상세 비판

'전시를 열며' 란에 실린 왜곡

전시를 열며.jpg

글을 내용을 보면 외세의 개입 때문에 남과 북이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전쟁이 길어진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만, 6.25는 명백히 소련의 명령을 받은 김일성의 기습 남침이었다. 특히 남한과 북한 포로 모두 냉전체제에 휩쓸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것 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남한과 유엔군은 포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하였다.

또한 1948년 2월, 이미 북에는 김일성을 내세우는 사실상의 북한정권이 들어서있는 상태였다. 6.25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스탈린의 허락을 받은 북한의 기습남침이 명백한데, 그저 냉전체제에 휩쓸려 버렸다는 식으로 전쟁책임자를 가리운다.

'미송환포로' 라는 용어 선택에 관하여

미송환포로 관련.jpg

'미송환포로'는 결국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마음을 가진 포로이다. 포로송환 문제를 두고, "모든 북한 포로를 다 내놔라" 라는 북한과 "포로들에게 선택권을 주고나서, 본인이 가지않겠다는 포로는 줄 수 없다"는 입장의 유엔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결국 미송환포로는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자유진영을 선택한 사람들 이었다.

포로들의 교육에 관하여

포로교육.jpg

포로들을 '미국식 자유주의'의 전파자로 만들었다는 대목도 이상하다. 북한이야 정통 공산주의도 아니고, 모택동의 마오니즘도 아닌 기형적인 '김가' 전체주의가 되었지만, 자유진영에 '미국식' 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자유진영에는 기형적인 특색을 내는곳이 없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시행했다고 했어야 적당하다.

포로 심문에 관하여

포로심문.jpg

포로의 심문과 관련된 사진들이 대게는 미국에 의한 강압적 정치심문인듯한 인상을 주고, 국군은 통역만 담당한것 처럼 표현을 하여 결국 전시내용 전체적으로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한것과 같은 구도로 흘러간다.

'전시를 마치며'에 실린 글에 관하여

전시를 마치며.jpg

북한포로들만이 억울한 대접과 혹독한 강제교육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들 또한 많은 강제노역을 한것과 같은 뉘앙스를 담고있다. 또한 '자발적이지만 강요된 선택'은 또 무엇인가? 공산전체주의와 자유주의진영의 이데올로기 전쟁중인 와중에, 포로들의 선택이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마치 양쪽의 진영이 모두 "상식적이고 선택할만 한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휴전 이후 60년이 넘은 지금, 북한이 과연 정상국가인가?

외부 링크

국군포로 12만인데…대부분 귀환했다는 역사박물관, 뉴데일리

국군포로들, 역사박물관 왜곡 전시 분노...“냉전 잔재 해체는 국군포로·납북자 해결 우선”, VOA

세상에 이런 일이..."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역사 날조' 박물관인가?", 데일리즈

각주

  1.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
  2. 관련기사, 펜앤드마이크
  3. 관련기사, 조선일보
  4. 수용소 내에서 '아리랑, 도라지타령, 경복궁타령 등 5개 민요와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비창을 틀었다는데, 이러한 음악이 어째서 이념곡인가!?
  5. '공공필요에 따라 국민의 재산권을 수용, 사용할 수 있다'고 헌법이 지금도 명문으로 규정(23조3항)하고 있는데 하물며 전쟁통에 이게 무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