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반론의 여지가 없는 항공전 역사상 최고의 공격기 스페셜리스트이며, 인류 역사상 최고의 파일럿을 꼽으라면 반드시 후보로 올라가는 사람이다.

융커스 Ju 87 급강하폭격기 일명 '슈투카'를 조종하여 총 합계 2개 소련 전차사단과 1개 소련 함대를 섬멸한 전설적인 전적을 세워 그 어떤 독일 국방군의 최고 계급인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도 받지 못한 최고의 무공훈장인 황금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의 유일한 수훈자가 된 나치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 소속 공격기 슈퍼 에이스 파일럿이다. 나치 독일의 숙명의 적인 소비에트 연방의 독재자 스탈린에게는 '소련 인민 최대의 적'으로 지정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격기 조종사이자 독일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군인으로서 최고의 찬사를 들은 전쟁영웅이자 최후까지 조국과 총통에게 충성한 독일 제3제국의 애국자한스 울리히 루델 대령.

제2차세계대전에서 세운 대전적

  • 519대의 전차 격파
  • 700대의 트럭 격파
  • 150대의 대공포와 포대 격파
  • 100개 이상의 다리, 철도, 벙커 파괴
  • 4량의 장갑열차 격파
  • 소련 해군 강구트급 전함 10월 혁명(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 반파
  • 소련 해군 전함 마라(Marat) 1t짜리 특제 폭탄 단 1발로 격침
  • 소련 해군 중순양함 페트로파블롭스크 격침
  • 소련 해군 민스크급 구축함 민스크 격침
  • 70여척의 상륙함 격침
  • 적 항공기 11기 격추 - 소련 공군 LaGG-3 2기, Il-2 등 격추
  • 비상착륙 등의 방법을 사용해 적진에서 고립된 12명의 아군과 6명의 슈투카 조종사들을 구출


그의 전적은 그가 혼자서 2개 전차사단과 1개 함대를 섬멸했음을 말해준다. 총 출격횟수는 무려 2,530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불사의 투혼

루델과 자주 만났던 루프트바페 전투기 에이스 파일럿인 귄터 랄의 인터뷰에 따르면 루델의 성격은 자기중심적이었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단점일 수도 있지만 장점일 수도 있다. 또한 루델은 술과 담배를 절대 하지 않는 금주가이자 금연가였으며, 취미는 등산과 운동 뿐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다고 한다. 이것은 총통 히틀러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나 추구한 신념이며 밀어붙인 정책과도 동일하다. 루델은 어쩌면 태생적으로도 개인적 면에서까지 히틀러와 닮았던 것이고, 이를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전쟁 말기 한번은 아군을 구출하려고 불시착했다가 포위됐었는데 후방 기관총사수 에르빈 헨첼 상사와 함께 우크라이나 서남부 국경의 드네스트르 강에 입수하여 포위망을 탈출했다. 안타깝게도 헨첼은 수영 도중 익사하고 루델만 혼자 살아남아 도보로 탈출을 이어갔는데, 운 나쁘게도 소련군에게 발각되어 호신용 권총을 빼앗긴 나마지 어깨에 총을 맞고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호송되던 도중 탈출에 성공했는데 어깨에 총상을 입었고 피를 흘리며 맨발로 15 km를 달려 아군 진영에 도달해 본대로 복귀한 적도 있다.

엄청난 전과를 올렸지만, 25회 정도 격추당했고 5회 정도 부상당했다. 그가 베를린 공방전 직전 오데르 강을 넘어 베를린으로 진격하려는 소련군을 막기 위해 12대의 소련군 전차를 격파했을 때 소련군의 40 mm 대공포탄에 피격되어 오른쪽 무릎 아래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의사 면허를 가진 가더만이라는 후방 기관총사수 덕분에 신속히 응급처치를 받고 베를린 동물원 대공포탑 내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의료진 모두 그가 더이상 비행할 수 없다며 비행을 만류했으나 그는 몰래 출격하여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때로부터 겨우 6주만에 전선에 복귀하는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었다. 이 때 그가 몰래 출격해서 거두어 제대로 집계되지 않은 전공들까지 미루어볼 때 루델이 실제로 거둔 전공은 지금 알려진 전공마저도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집계된 공식적인 전차 격파 수만 봐도 쿠르스크 전투 당시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소련군의 주력인 제5근위전차군의 T-34 중형전차의 수량보다 많다.

그의 좌우명은 "스스로 포기하기 전까지는 패배한 것이 아니다."로 그의 철저한 성격과 엄청난 투혼을 잘 나타낸다.

전후의 활동

루델은 종전 이후에도 끝까지 소련에게 잡히지 않고 남미 각국 군대의 자문 사업을 하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잘 살다가 1953년에 서독으로 귀국해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가 소속된 정당은 독일 국가당(Deutsche Reichspartei)이었는데, 이 정당은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가 1952년에 강제 해산시킨 극우 성향을 띈 독일 국가주의적 사회주의당 SRD에서 주요 지도자와 대부분의 당원들을 동원하여 재결집한 당이었다. 루델은 독일 국가당 소속 후보로 1953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당선은 되지 못했다. 성격이 워낙 독선적이어서 같은 극우세력 내에서도 인심을 얻기 어려웠다는 소문이 있지만 추정일 뿐이고 실제 내부에서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정치 연설을 할 때마다 자신이 과거 대전기 전우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소련을 쳐부수는데 독일을 돕지 않았다고 서방 국가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는 등 소신대로 바른 말만을 전혀 눈치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하는 화법을 여전히 구사하는 인사들 중 하나였는데 이는 독일의 강성 우파 진영의 마음의 마음 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고 통쾌하게 해 주었으나 무지성 좌파들은 여전히 그를 맹렬히 비난하기만 했고, 이 글을 읽는 현 시대에도 좌파들의 행동은 늘 비슷하다.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루델은 나치를 옹호하는 극우 인사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보니 서독 내 좌파 진영들은 그가 서독 정부나 연방군이 주최하는 공식 행사에 초대받은 사실만으로도 큰 논란화를 시키고자 많은 시도를 했다.

루델은 스탈린이 그의 목에 내건 10만 루블의 현상금을 비웃으며 1982년 12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서독의 작은 도시 로젠하임(Rosenheim)에서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 날 극우 성향의 조문객들이 운집하여 나치식 경례를 했는데, 당시 서독 공군 소속 F-4 팬텀 전투기 2대가 장례식장 위를 통과하며 추모비행을 했다. 서독 연방군 공군 당국은 이것이 훈련비행 중 벌어진 우발적인 일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루델에게 적대적인 좌파 진영에서는 서독 연방군이 나치 독일군의 유산을 단절하지 못했다는 둥 맹비난만 퍼부어댔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