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장환
기본 정보
출생
1896년 9월 24일 
출생지
경상북도 장기군 내남면 전동리
(현 경주시 감포읍 전동리)
사망
1946년 5월 20일
경상북도 경주군
묘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학력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학 졸업
부모
부친 허정(許梃, 1858. 5. 22 ~ ?. 2. 25)

모친  김경룡(金慶龍, 1857. 4. 9 ~ ?. 7. 4)

4남 1녀 중 넷째 아들
상훈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

허장환씨는 파로호에 수장된 중공군 유해를 발굴하여 중국으로 송환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이다. 5.18 광주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헬기로 광주에 와서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을 하였다.

파로호 수장된 유해발굴 및 중국으로 송환 추진

  • 중공군 전사자 2만4천141명·포로 7천905명…수많은 시신 중장비로 수장시켜

美 전사자 유해 68년 만에 송환 속 중공군 유해발굴·위령탑 건립 주장 관심[1]

' 6·25 전쟁 당시 파로호에 수장된 중공군의 유해를 발굴·송환하자고 주장하는 허장환(70)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 그는 "중공군 유해를 이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13억 중국인의 마음을 위로해야 할 때"라며 "이들의 영혼을 달래줄 위령탑을 건립하는 것이 냉전체제의 마지막 매듭을 푸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

' 파로호에 수장된 중공군의 유해발굴·송환 주장은 허장환(70)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허씨는 1988년 12월 6일 서울 여의도 옛 평화민주당사에서 광주사태의 사전 조작 및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라는 양심선언을 한 인물이다.그는 5·18 당시 광주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전남·북 계엄분소 합동수사단 광주사태 처리수사국 국보위 특명단장'이었다. '

' 허씨는 "형의 증언에 따르면 파로호 전투가 끝난 뒤 산과 들에 흩어진 중공군 시신을 불도저 등 중장비로 실어와 파로호 절벽에 수도 없이 밀어 넣었다"며 "막대한 전사자 시신 처리가 곤란하자 말 그대로 '시신 처리반'이 투입돼 시신을 대거 파로호에 수장한 것인데 이는 제네바 협약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파로호에 수장된 중공군 유해를 이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13억 중국인의 마음을 위로해야 할 때"라며 "아울러 이들의 영혼을 달래줄 위령탑을 건립하는 것이 냉전체제의 마지막 매듭을 푸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50m에 달하는 파로호 수심과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퇴적층, 막대한 발굴 비용, 파로호를 근간으로 살아가는 어민들의 생계 등은 유해발굴에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허씨는 "공짜로 하자는 것이 아니고 유해발굴에 대한 막대한 대가를 받아 내야 한다"며 "중국 측으로부터 80억원의 초기 사업비 지원 약속도 제안받은 상태인 만큼 정부 의지만 확고하다면 파로호의 새 역사를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더 나아가 냉전 산물인 155마일 비무장지대(DMZ) 유엔군 전사자 유해발굴과 함께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를 안치해 국제적인 국립묘지로 조성하는 방안도 냉전 종식의 상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중장비 동원해 중국군 주검 파로호에 밀어넣어[2]

' 허장환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번에 중국군 유해를 발굴해서 이 문제를 깨끗이 털어버리는 것이 낫다. 파로호는 팔당호의 상류 가운데 하나인데, 2만명 이상의 중국군 유해가 가라앉아 있는 그 물을 수도권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사용한다면 기막힌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3]


  • 중국군 2만4천여명 파로호 수장’ 확인…“유해 송환” 목소리[4]

' 한-중 우호단체에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수장된 중국군의 유해를 발굴·송환하고 위령탑을 세우는 등 중국군 전사자 추모 사업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허장환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는 “남의 나라 전쟁에 보낸 남편과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중국군 가족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비록 한때 적국이었지만, 이제라도 서로 쌓은 원한을 풀고 상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 중국군 유해 송환은 2013년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안해 추진됐다. '


518 광주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헬기 타고 내려와 주장

허장환씨는 518 광주에 대하여 전두환 보안 사령관 헬기 타고 내려와 , 그리고 시나리오라는 주장을 하였다. 한 시점에서 핫한 이슈로 나온 뉴스 2개가 전혀 다른 색션의 뉴스일때 그 두 뉴스의 중심에 한 인물이 공통분모로 존재한다는 점에 유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 보안사 전 수사관 “집단 발포, ‘전두환이 책임진다’고 들었다”[5]

' 그는 발포 결정의 책임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허씨는 “ㅅ과장한테 ‘자유당 때 최인규처럼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더니, ㅅ과장이 ‘야, 이 사람아, 그때하고 지금은 세태가 달라. 지금은 사령관님(전두환)이 책임을 져’라고 답하더라”고 전했다. 최인규는 이승만 정부 말기의 내무장관으로 시위 시민들에게 발포하도록 경찰에 명령해 4·19혁명 뒤 1961년 사형당했다. '

' 허씨는 5·18 광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유엔 인권위원회 등 국제사회에 광주항쟁을 제소해 신군부의 학살 범죄를 역사에 명확히 ‘낙인’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아무 무장도 하지 않는 아녀자, 어린애까지 살상할 수 있느냐? 천만명 유엔 인권위 제소 촉구 서명운동을 펼치는 시민운동을 하고 싶다”며 “한 때는 죄인이었지만 유엔에 제소하는 것을 잘 추진해 조금이라도 공을 인정받게 되면 5·18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아 망월동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


  • 전두환은 폭동을 유도했으나 광주는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6]

' 허장환씨는 오늘 5월 14일 518기념재단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편의대는 유언비어 유포, 장갑차 등 무기 탈취를 벌였다. 당시 아세아자동차는 방산업체로서 '보안목표'로 지정, 특별 방호시설을 갖췄다. 아무런 제지 없이 시민들이 장갑차를 탈취할 수 없다. 또 시제품이었던 APC(병력수송) 장갑차를 몰 수 있는 시민은 아무도 없다. 북한군도 못한다. 장갑차를 몰 수 있는 것은 헬기·전차 등 각종 장비의 운용능력을 훈련한 특전부대, 편의대 뿐이다." '

  • 전 美정보요원 “전두환 광주 왔었다, 직후 집단발포…美에 보고”

김용장 “요청시 협조”…허장환 “지만원 ‘광수 사진들’ 내가 보안사에 보고했던 것”[7]

  • 허장환 “5.18 당시 계엄군 시신소각...바다에 버리기도”[8]
  • 美 정보요원 김용장, 보안부대원 허장환씨 39년만의 증언[9]

' "(허 씨) 5·18이 끝난 뒤 '광주에 간첩이 침투했는지 엄중 색출하라'는 지시가 있어 당시 경찰과 함께 매장됐던 희생자의 지문을 모두 채취한 뒤 주민등록과 대조했다. 이후 다시 재매장할 곳이 없어 국군통합병원에서 처리했다. 한계가 있으니 화장을 한 유골은 비닐에 포장해 광주 인근의 모처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동료들이 한창 사체 처리의 고충을 이야기 했었다. 5·18 이후 훈·포장을 수여하는데 통합병원장이 서열이 4번째로 높은 훈장을 받았다. 또 통합병원 보일러실이 보안 목표로 지정돼 있다. 지정 이유가 없다. 굴뚝 높이나 규격 등을 볼 때 건물 난방 용량을 초과하고 주변에 3중으로 철조망과 각종 방호시설이 있다. 굴뚝을 변조해 시신을 소각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


518주장에 대한 반론

5.18 유혈진압 "굿아이디어"는 전두환 아냐! _190516이슈_5.18 유혈진압 전두환 개입했다는 연합뉴스 보도의 문제점_도태우 변호사

도태우 변호사의 518 최근 주장들에 대한 반론


5.18 전두환 광주방문설은 허위! _190515 이슈_1.광주방문 증언한 전 미군 정보원, 제2의 김대업인가?


허화평은 말한다! 5.18 진실을 가리자!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