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옹정제(擁正帝, 1678년~1735년)는 청나라의 5대 황제다.

휘는 아이시기오르 인전 한자로는 애신각라 윤진이다. 묘호는 세종이다. 옹정은 그의 치세 때 연호다.

(명나라 때 1황제 1연호가 정착되면서 명나라 청나라 황제는 다 연호제라고 불린다.

명 영종만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복위를 해서 복위시에 연호를 바꿨기에(포로 당시 즉위했던 이봉형재 경태제를 쫓아 냈다.) 연호가 두개다.

정통, 천순 보통 정통제라고 많이 부른다. 명나라 전에는 연호가 여러개에 제위기간에도 자주 바꾸는 황제도 많았다.)



2. 상세

강희제의 4남으로 태어나 수많은 강희제 형제들과 경쟁[1]에서 최종승리하여 황제로 등극했다.


(강희제의 유조를 위조했다는 설이 있었는데 14왕자로 뒤를 잇겠다는 것을 위조해서 4왕자로 했다는 것인데.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는 한자 뿐만 아니라 만주문자 몽골문자 세가지 문자를 공식문서에서 썼다 14를 4로 위조하는 것은 한자 하나만이면 모를까

만주나 몽골문자까지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옹정제의 즉위에는 여러가지 의문스러운 정황이 많다. 그래서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강희제의 유조는 융과다라는 신하 혼자 들었는데, 강희제는 후계를 이야기 하기 전에 죽었고,

융과다 멋대로 강희제가 4황자에게 후계를 잇게 하겠다는 유조를 발표했다는 설도 있는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융과다는 즉위 초반에 옹정제에게 굉장히 이례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지만, 결국 숙청당한다.)

당시에는 수양제 처럼 (수양제도 진짜 그랬는지 의문이 많이 간다) 아버지인 강희제를 옹정제가 시해하고 찬탈하여 황제가 됐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설을 채택한 사극 드라마도 있다.

강희제 까지는 청 동릉(베이징 동쪽에 있는 무덤)에 청나라 황제들이 묻혔는데 (청이 중원에 들어오기 전 황제 청태조 누르하치, 청태종 홍타이지는 빼고)

옹정제는 새로운 청 서릉(베이징 서쪽)을 만들어서 거기에 묻혔는데 아버지(강희제)를 시해 했기 때문에 차마 아버지 옆에 묻힐 수 없어서 아버지 볼 낯이 없어서 청서릉에 묻혔다나 그런 이야기도 있다.)

강희제는 자식들이 많았고 이들 중 몇명은 후계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기 때문에,

옹정제는 황제가 되고 나서 자신에게 대항한 형제들을 탄압했다.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자기가 즉위한 이후 그때까지 살아 남은 삼촌들은 지위를 복원해 주고 다시 우대해 주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즉위했고(강희제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과로를 했기에 제위기간(14년)은 그리 길지 않다.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형제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위협이 가는 공신 등을 잔인하게 탄압한 측면도 있고,

황제로서 매우 근면성실했던 두가지 측면 모두 있다.


청나라에서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3대 성군으로 뽑는다. 이때를 청나라 전성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때를 보통 강건성세라고 부른다.

옹정제는 앞뒤 황제에 비교해 제위기간이 짧고 주로 내치에 신경 쓴 편 전쟁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지만,

변방에서 전쟁에 실패한 이후부터는 재정에 무리가 가는 전쟁을 앞뒤 황제에 비해 거의 하지 않았다.

황제가 직접 전쟁터가 나가는 친정은 아예 하지 않았다. 강희제 건륭제는 강남에 놀러가기도 했는데, 옹정제는 이것 또한 하지 않았다.


재정에 부담이 가는 것은 가급적 하지 않았고 빡세게 관료들을 조였던 게 옹정제다.

강희제 말년에 여러 관료들의 비리나 폐단등을 빡세개 관리해서 해결 했던 게 옹정제다.

앞 뒤황제가 좀 말년에 특히 느슨했던 게 많았는데 그래서 앞뒤 황제는 서로 기록을 쓸 정도로 오래 살았고 재위기간도 길었다.

(건륭제는 강희제를 존경해서 강희제의 재위기간의 기록을 넘기지 않게 아들에게 선양을 했다.

하지만 선양 이후에도 실권은 건륭제가 가지고 있었기에 건륭제가 실권을 행사한 실질적인 재위기간은 강희제보다 길다.

하여간 두 황제다 중국역사를 통틀어도 정말 긴 재위기간을 가졌다.)

그에 비해 워크홀릭이라고 할 정도로 옹정제는 밤낮 일을 했고, 관료들은 아주 빡세개 기강이 잡혔지만 옹정제 개인은 오래 살지 못했다.

옹정제 스스로 본인을 위해 천하를 희생할 수 없다 뭐 그런주의 였으니.



독재자는 과로로 죽는다 라는 말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국가에 크고 작은 대소사를 거의 모두 황제나 독재자 개인에게 보고 되고 독재자 개인이 가부 등을 결정해야지 일이 진행이 된다.

권력이 집중될 수록 개인의 업무량이 막대해 지는 것이다.)


이렇게 빡세개 관료들의 기강을 잡고 부패에 대해 엄단을 했으며, 재정또한 무리하지 않았기에 옹정제 때 청나라는 내실이 튼튼해 졌다. 하지만 그에 아들 대에 다시 관료들이 부패하게 된다.


옹정제가 청나라에 전성기에 꼽히는 시대이기도 하고, 황제 개인사도 흥미로운 면(형제들간의 왕위쟁탈전, 의문스러운 즉위 과정, 근면성실, 의문스러운 죽음


3. 여담

갑자기 사인도 알 수 없이 죽었다. 여사낭이 암살했다는 설을 채택하는 미디어 물들도 더러 있는편.

여사낭은 여유량의 딸로 여유량은 증정의 모반사건 때 반청사상에 베이스가 됐던 사람으로,

지방의 명망있는 사대부였는데 여러번 청나라에 벼슬 권유를 받았지만 거부했고 이후 승려가 되었다.

옹정제는 증정의 모반사건을 심문하던 중 이러한 반청사상에 토대에 여유량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이미 죽은 여유량은 부관참시하고,

그의 가족들은 연좌하였다.


여사낭은 여유량의 딸로 여사낭이 아비의 원수인 옹정제를 암살했다는 것인데, 딸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등 드라마틱해서 홍콩 무협물 등에서 이 설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물론 기록에는 없는 야사이다.

여사낭의 암삼설은 야사지만, 증정의 모반사건이나 여유량 등은 실제 기록에도 있는 사건이다. 대의각미록에도 자세하게 나온다.


혈적자라는 옹정제 때 ( 이 도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메카니즘이었는지는 미스테리인데,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묘사는 주로 손으로 던져서 암살 하려는 사람에 머리에 씌우면 그 목이 잘린다.)

암살 도구로 옹정제가 정적들을 제거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옹정제는 무협영화에도 자주 나온다. (주로 악역 보스로)



4. 각주

  1. 구자탈적 아홉명의 왕자들이 황위를 두고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