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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단군 기록==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단군 기록== | ||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550_010_0010_2000_006_XML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4권 평안도(平安道)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 |||
:묘향산(妙香山)이 곧 단군과 관련된 태백산(太伯山)이라 함. | |||
{{인용문|【산천】'''묘향산(妙香山)''' 부의 동쪽 1백 30리에 있다.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하며, 옛 기록에, “그 산에 3백 60채의 암자가 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향산(香山)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의 북쪽에 있어 요양(遼陽)과 경계하고 있으니 산의 크기가 비길 것이 없으며 장백산에서 갈라진 것이다. 그곳에 향나무와 사철나무가 많으며, 선불(仙佛)의 옛 자취가 남아 있다.” 하였다. ○ 고려 고종 3년에 금산(金山)의 군사가 이 산에 뛰어들어 보현사(普賢寺)를 불질렀는데 관군이 추격하여 2천 4백여 급의 목을 베었고, 적장 지노(只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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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 태백산(太伯山)''' 옛 기록에, “옛날 천신(天神)의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서자(庶子) 웅(雄)에게 명하여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밑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3백 60여 가지의 일들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때에 한 곰이 있어 늘 사람의 몸이 되기를 신에게 축원하거늘, 신이 영약을 주어 먹게 하였더니, 곰이 그것을 먹고 여자로 변하였다. 신이 임시 사람으로 변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것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며,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夫婁)하고 한다. 우(禹) 임금이 도산(塗山)에서 제후(諸侯)를 모을 제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공을 드리게 하였다. 뒤에 부루가 북부여(北扶餘) 왕이 되었으나, 늙도록 아들이 없어 곤연(鯤淵)에 가서 아들을 빌어, 어린아이를 얻어서 기르니 이것이 금와(金蛙)다. 금와의 후손이 전해 오다가 대소(帶素)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신무왕(大神武王)에게 멸망되었다.” 하였다. 우발수(憂渤水) 못의 이름인데, 태백산 남쪽에 있다. ○ 《삼국사(三國史)》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가엽원(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기었는데, 그 옛 도읍에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을 하였다. 부루가 죽고 금와가 뒤를 이었는데, 우발수에서 여자를 만나 물었더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하고 하는데, 해모수라고 자칭하는 사나이가 나를 꾀어 웅심산(熊心山) 밑 압록강가 어떤 집 안에서 나를 욕보이고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부모는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랐다고 나를 꾸짖어 마침내 여기에 귀양와서 살게 되었다.’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안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그를 비추는데, 몸을 옮기어 햇빛을 피하니 햇빛이 따라가서 비추었다. 그로 말미암아 임신을 하여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가 그것을 내다 버렸으나 개와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그것을 품었다. 이에 그 어미에게 돌려 주어 따뜻한 곳에 싸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골격과 얼굴이 영특하게 생겼었다. 나이가 일곱 살이 되니, 제 손으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아 백발백중하였는데, 부여 사람들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하였다.}} | |||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430_010_0080_2000_005_XML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2권 황해도(黃海道) 문화현(文化縣)] |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B001A_0430_010_0080_2000_005_XML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2권 황해도(黃海道) 문화현(文化縣)] |
2021년 10월 16일 (토) 14:01 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기록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무대 태백산(太伯山)이 묘향산(妙香山)이라 하고,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다 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백두산(白頭山)과 어떤 관련도 찾아보기 어렵다.[1]
- 三國遺事 卷 第一 > 제1 기이(紀異第一)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 기록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태백산(太白山)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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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주몽까지 이어짐]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단군 기록
- 묘향산(妙香山)이 곧 단군과 관련된 태백산(太伯山)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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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 삼성사(三聖祠) 구월산 성당리(聖堂里)에 있으니 바로 환인(桓因)ㆍ환웅(桓雄) 단군의 사당이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 제사드리며, 또 비가 심한 때와 가물 때 기도하면 문득 감응한다.
여러 주장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1]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기록하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2] 최남선이[3]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4][5][6]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북한은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단군의 묘인 단군릉(檀君陵)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군릉은 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에 단군묘(檀君墓)로 나온다.[7]
안정복(安鼎福, 1712 ~ 1791)의 《동사강목 (東史綱目)》 부록 하권 "태백산고(太伯山考)"의 주석에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8]
고종실록(1900년)에도 대박산은 태백산(太白山)으로 나온다.[9]
단군릉으로 전해오는 무덤이 실제로 단군의 릉일 가능성은 희박하며, 고구려 시대 고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참고 자료
- 사료로 본 한국사 > 시대별 > 삼국 이전 > 정치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 단군에 대한 인식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D-Story 73 : 민족의 뿌리 찾아(1) 단군 영정 공모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 2월 - 28 - 2011)
- D-Story 74 : 민족의 뿌리 찾아(2) 단군 유적 보존운동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3월 - 10 - 2011)
- D-Story 75 : 민족의 뿌리 찾아(3) 백두산을 가다 – 민태원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1 - 2011)
- D-Story 76 : 민족의 뿌리 찾아(4) 백두산을 가다 – 최남선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4 - 2011)
- 백두산근참기 문화컨텐츠닷컴 (단군신화 무대를 백두산으로 추정)
- 단군론 위키백과
- 백두산천지와 단군신화 - 문화콘텐츠닷컴
- 백두산 신화
각주
- ↑ 1.0 1.1 백두산에 얽힌 전설·신화 중앙일보 1985.03.04
- ↑ 민태원(閔泰瑗),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 - ↑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 - ↑ 단군론 위키백과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5권 평안도(平安道) 강동현(江東縣) 한국고전번역원
- ↑ 고전번역서 > 동사강목 부록 하권 > 태백산고(太伯山考)
- ↑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 의관 백호섭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