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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8004_001 세종실록 152권 |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8004_001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 황해도(黃海道) / 풍천군(豐川郡) / 문화현(文化縣)] | ||
{{인용문|...장장평(庄庄坪)이 현의 동쪽에 있고, 【세속에서 전하기를, "조선(朝鮮)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이라." 하나 곧 당장경(唐莊京)의 잘못 이름이다. 】 삼성사(三聖祠)가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 【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 | {{인용문|...장장평(庄庄坪)이 현의 동쪽에 있고, 【세속에서 전하기를, "조선(朝鮮)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이라." 하나 곧 당장경(唐莊京)의 잘못 이름이다. 】 삼성사(三聖祠)가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 【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 | ||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4005_001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富平都護府) / 강화 도호부(江華都護府)] | |||
{{인용문|진산(鎭山)은 고려 마리산(摩利山)이다. 【부(府) 남쪽에 있다.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는데, 예로부터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어 초제(醮祭)를 지내었다.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비로소 2품 이상의 관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재궁 벽 위에 ‘동(東)’자 운(韻)의 시(詩)가 있으니, 태종(太宗)이 잠룡(潛龍) 때에, 일찍이 대언(代言)이 되어서 이곳에서 재숙(齋宿)할 때 이 시를 지은 것인데, 지금 널에 새기고 금으로 메웠다. 】 전등산(傳燈山) 【일명(一名)은 삼랑성(三郞城)이니, 참성(塹城)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한다. 】 }} |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단군 기록==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단군 기록== |
2021년 10월 17일 (일) 20:09 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기록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무대 태백산(太伯山)이 묘향산(妙香山)이라 하고,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다 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백두산(白頭山)과 어떤 관련도 찾아보기 어렵다.[1]
- 三國遺事 卷 第一 > 제1 기이(紀異第一)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 기록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태백산(太白山)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지리지의 단군 기록
- 고려사 권58 > 지(志)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서해도(西海道) > 풍주(豐州) > 유주(儒州) :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현 신천군(信川郡)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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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주몽까지 이어짐]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단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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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명】 왕검성(王儉城)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사묘】단군사(檀君祠) 『신증』 당고의 시에, “아득한 옛날에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에 이 분이 비조(鼻祖)라네. 가시덩굴을 베지 않았던들, 뉘라서 동국을 낙토(樂土)로 만들었으리.” 하였다.
○ 사도의 시에, “단군이 언제 비롯했던고, 말 들으니 요(堯) 때에 비롯했다고. 지금부터 4천년 전이나, 유묘(遺廟)가 산마루에 있네.” 하였다. 동명왕사(東明王祠) 기자사(箕子祠) 곁에 있다. 두 사(祠)가 같은 집에 있는데 단군이 서쪽에 있고 동명이 동쪽에 있으며 모두 남향(南向)이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향(香)과 축문을 내려 중사(中祀)로 제사 지낸다. 본조(本朝) 세종(世宗) 11년(1429)에 처음 설치했다.
○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말 들으니 옛날 태고 적에, 단군이 나무 가에 내려왔다고. 동국 땅에 군림하니, 때는 제요(帝堯)의 시절. 세대를 전함이 몇인지 모르고, 세월을 지남이 천 년을 넘었네. 그 뒤에 기자(箕子)의 대에도, 마찬가지로 조선이라 이름했네.” 하였다. 『신증』 당고의 시에, “동명이 삼한(三韓)의 웅주(雄主)로, 선서(仙逝)한 지 세대가 오래되었건만, 사당이 서경(西京)에 있어, 사람들이 닭과 술로 제사 드리네.” 하였다.
○ 사도의 시에, “고구려가 처음 나라를 이룩했을 때, 왕의 호는 동명이었네. 그의 덕이 두터웠던 줄 알리니, 전사(專祠)가 서경에 있도다.” 하였다.
기자사(箕子祠) 성안에 있다. ○ 고려 숙종(肅宗) 10년(1105)에 왕이 서경에 행행하였을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사(祠)를 세우기를 건의하여 중사로 제사 지내 왔고, 본조 세종 12년 경술에 비(碑)를 세웠다. 변계량(卞季良)이 그 비문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 묘향산(妙香山)이 곧 단군과 관련된 태백산(太伯山)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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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 삼성사(三聖祠) 구월산 성당리(聖堂里)에 있으니 바로 환인(桓因)ㆍ환웅(桓雄) 단군의 사당이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 제사드리며, 또 비가 심한 때와 가물 때 기도하면 문득 감응한다.
【고적】 장장평(莊莊坪) 고을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장장평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당장경(唐藏京)의 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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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大東地志)》
여러 주장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1]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기록하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2] 최남선이[3]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4][5][6]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북한은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단군의 묘인 단군릉(檀君陵)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군릉은 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에 단군묘(檀君墓)로 나온다.[7]
안정복(安鼎福, 1712 ~ 1791)의 《동사강목 (東史綱目)》 부록 하권 "태백산고(太伯山考)"의 주석에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8]
고종실록(1900년)에도 대박산은 태백산(太白山)으로 나온다.[9]
단군릉으로 전해오는 무덤이 실제로 단군의 릉일 가능성은 희박하며, 고구려 시대 고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참고 자료
- 사료로 본 한국사 > 시대별 > 삼국 이전 > 정치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 단군에 대한 인식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D-Story 73 : 민족의 뿌리 찾아(1) 단군 영정 공모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 2월 - 28 - 2011)
- D-Story 74 : 민족의 뿌리 찾아(2) 단군 유적 보존운동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3월 - 10 - 2011)
- D-Story 75 : 민족의 뿌리 찾아(3) 백두산을 가다 – 민태원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1 - 2011)
- D-Story 76 : 민족의 뿌리 찾아(4) 백두산을 가다 – 최남선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4 - 2011)
- 백두산근참기 문화컨텐츠닷컴 (단군신화 무대를 백두산으로 추정)
- 단군론 위키백과
- 백두산천지와 단군신화 - 문화콘텐츠닷컴
- 백두산 신화
각주
- ↑ 1.0 1.1 백두산에 얽힌 전설·신화 중앙일보 1985.03.04
- ↑ 민태원(閔泰瑗),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 - ↑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 - ↑ 단군론 위키백과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5권 평안도(平安道) 강동현(江東縣) 한국고전번역원
- ↑ 고전번역서 > 동사강목 부록 하권 > 태백산고(太伯山考)
- ↑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 의관 백호섭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