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생년월일의 불확실성

김대중의 생년월일은 기록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3가지 다른 날자가 존재하는데 김대중은 필요에 따라 이 세가지 생연월일을 선택하여 사용해 왔다.

호적상, 김대중의 생년월일은 1925년 12월 3일로 되어있으나 이는 1943년 7월 10일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에 즈음하여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1924년 1월 16일이었던 출생일을 정정한 날자로서 그 정정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1923년 1월 6일 설이 있는데 이는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 선거당시 유세연설 과정에서 “박정희씨는 뱀띠(1917년생, 丁巳生) 이고 나는 돼지띠(1923년 癸亥生) 이므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박정희씨를 잡아 씹어먹어버리겠다” 고 말함으로서 자신을 돼지띠로 주장한데서 유래한다. 한편 김대중의 어린시절 동네 사람들도” 김대중은 돼지띠”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김대중은 1997년 11월 18일, “5.18광주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에서 “호적 이전에,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1924년 1월 6일 생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2. 유년기

복잡한 가정환경

김대중의 복잡한 가정환경을 살피기 전에 공식기록인 호적을 살펴보자.

먼저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의 호적은 다음과 같다. 1893년 6월6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현신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에서 부 장지숙(張之淑), 모 주귀심(朱貴心)의 장녀로 태어 났으며 1911년 3월 10일 제갈성조와 혼인신고하여 부 장지숙의 호적에서 제적되었다가 1925년 12월 8일 호주 장지숙의 신고로 장지숙의 호적에 재입적된다. 1934년 10월 10일 장지숙의 사망으로 호주상속을 하고 1960년 6월 5일 김운식과의 혼인신고로 본 호적에서 제적된다. 세 호적에서 장노도는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1번지, 김운식의 처로 입적되었다.

공식적인 호적에서와 같이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는 1911년 3월 제갈영범의 차남 제갈성조와 혼인하였다. 혼인후 거의10년간 장노도는 제갈 성조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다고 한다. 혹자는 이 사실이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의 호적초본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한다. 병사했다는 설도 있고 바다에 나갔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김대중의 호적에는 본적이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2번지”로 되어있고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 호주 장문숙(張文淑)의 장녀 장노도 (를 어머니로 하여)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서자출생 김대중((金大仲)이란 이름으로 부 신고, 1924년 7월 7일 접수, 입적 한것으로 되어 있다. 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부기(附記)가 있다 “출생년월일의 기재에 착오 있어도 호적정정의 신청을 하지 않이(아니)함으로 단기 4276년 *월 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에 인(因)하여 단기 4276년(1943년) 7월 10일 기(基)의 출생년월일 단기 4257년(1924년) 1월 16일을 단기4258(1925년)년 12월 3일로 정정함”

그렇지만 1925년이라는 김대중의 생년은 불가능하다. 그 결정적이유는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된 날자가 1924년 7월7일로 기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어나기 1년전에 출생신고를 했다는 꼴이니 아무리 국제사기꾼이라도 이것만은 속일 수가 없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이 호적의 기록과는 달리 김대중의 실제 생년(生年)은 1923년으로 그는 돼지띠임이 분명하고 생부 제갈성복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여 임신 수개월이 된 제수 장노도에게 자신이 살고 있던 오림리(五林里)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後廣里), 즉 장노도의 친정 근처에 주막집을 차려주면서 장노도를 친구인 윤창언에게 넘긴것은 역시 1923년 이전 그 어느 때 였을 것이다. 장노도의 나이 30세 혹은 31세 때였을 것이다.

그 후 석달만에 김대중이 태어나고 윤창언이는 그 아이에게 윤성만(혹은 윤대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윤창언의 조카로 경찰관을 하던 윤일만의 증언과 박정희 정권 당시 공화당 조사 팀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윤성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뻘이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윤창언은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보다 20년 연상이었다고 하는데 만일 김대중의 실제 생년월일이 1923년 1월 6일이 맞는다면 당시 50대인 윤창언과 장노도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 것은 이보다 서너달 전인 1922년 9월 말이거나 10월 초였을 것이다. 윤창언 은 1927년에 사망했으니 장노도가 윤창언의 사망전까지 동거했다면 윤창언과 장노도의 동거기간은 적어도 사,오년은 되겠다는 계산이 된다.

윤창언이 장노도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 1922년 말 전후에 장노도와 그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무식하고 게으른 탓도 있을 것이고 이미 세명의 부인들과 사별한 윤창언이 자신의 전처 세명으로부터 얻은 장성한 딸들의 만만치 않은 반대로 장노도와의 혼인신고를 미루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장노도의 부친인 장지숙은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시키는데 이것이 1925년이다. 김대중이 두살 때 였을 것이다.

한편 윤창언과 장노도 사이에서 다시 김대중의 씨다른 동생인 윤대의가 태어난다. 윤대의는 1927년 생이라니, 실제로는 1923년 생인 김대중보다 4살이 아래인 셈이다. 그리고 윤대의는 윤창언의 유복자일 수도 있다 . 이는 윤창언이 사망한 해가 1927년으로 윤대의의 생년과 같은즉 윤대의가 윤창언 사망 후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윤창언의 사망일자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분명하게 알수는 없다. 그리고 윤대의의 어릴적 이름은 윤대의가 아닐 것이나 윤창언이가 붙여주었을 윤대의의 어릴적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대의”란 이름은 김운식가(家)의 돌림자인 큰대(大)자를 따온 이름이니 윤대의의 생부인 윤창언이 지어준 이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만일 윤대의가 유복자였다면 윤대의는 처음부터 김대의로 이름지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별도의 윤아무개란 어릴적 이름은 처음부터 없었을 수 있겠다.

어쨋거나 김대중은 주막집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생활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생부가 아닌 계부의 비호아래서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다.

당시 하의도의 부자이며 난봉꾼인 김운식이 정확히 언제부터 장노도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윤대의가 태어나고 윤창언 이 사망한 1927년 이후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지만 위의 호적기록은 이와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그린다.

김대중의 호적기록을 보면 1924년 7월 7일 김운식의 신고로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김운식의 호적에 입적되었다고 하니 이 기록대로 한다면 장노도는 윤대의가 태어나기 2,3년전부터이미 김운식과 동거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이 기록은 장지숙이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시킨 것이 1925년이라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한편 장노도의 친부의 이름도 장지숙에서 장문숙으로 변조되어 있다.

김운식이 자신과 별 관계도 없는 장노도와 그녀의 아들들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하도록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니 장노도는 윤창언과 동거하면서도 김운식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말이 되거나 아니면 김운식의 첩이 된 후에도 2,3년간은 윤창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말이된다.

윤창언보다 거의 20년 연하로 젊은 김운식이 그의 젊음과 부(富)로서 장노도로부터 윤창언을 밀어낸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장노도에게 가장 마음쓰이는 일이 자신의 아들들을 호적에 입적시키는 것인 바 김운식은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장본인이 아닌가?

따라서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장노도는 윤창언과 동거 1,2년 이후에, 즉 1924년 중반이후부터 이미 김운식의 첩이 되었고 사실혼 관계에 있던 윤창언은 젊은 부자 김운식에게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정부(情婦)를 빼앗긴 꼴이 되었다는 말이고 그래도 이미 남의 첩이된 과거의 정부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아들을 얻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는 당시 관습에 비추어 너무 무리한 생각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김운식과 장노도가 동거를 시작한 것은 장노도가 윤창언의 아들을 잉태한 이후의 일 것이다. 장노도는 1927년 윤창언이 병사하기전 무능력한 윤창언이를 내 쫓아버렸을 가능성은 많다. 그러나 그 시점은 1926년 7월 이후일 것이다. 장노도가 김운식과 동거를 시작한 것은 1926년 7월 이후일 것이고 장노도가 김운식과 동거를 시작했을 때는 장노도에게 이미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니 더 확실한 것은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한 것이 김(윤)대의가 태어난 1927년 5월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러면 호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김대중이 호적을 엉망으로 고쳐놓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또 이 가정은 장지숙이 1925년에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 시켰다는 사실도 설명이 된다. 혹자는 김운식이 김대중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준 것은 김대중이 7살 때쯤으로 이때 자신의 자신의 庶子로 호적에 올려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하는 바 아마 이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김대중은 자신의 출생비밀을 가리기 위하여 호적에 적지 않은 손질을 해 놓았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모를 갈보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날조와 변조로 누더기가 된 김대중의 호적

앞서 지적한 대로 김운식이 김대중을 자신의 서자로 입적시킨 날자가 1924년 7월 7일이라하니 김대중의 생년은 그 이전일 수밖에 없다. 한편 김대중의 어린시절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돼지띠였다고 하니 그의 생년은 1923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운식이 김대중을 서자로 입적시킨 날자는 1924년 7월 7일이 될 수 없다. 이는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할 당시 이미 장노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니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28일)이후일 것이다. 이는 장노도의 두째아들 김(윤)대의가 태어난 것이 1927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대중의 서자 입적 날자 1924년 7월 7일은 소급해서 기록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의 호적등본이 완전날조라는 객관적 물증은 기재란의 내용들이 1924년 7월7일 서자 입적신고 부터 1960년 6월 6일 김운식의 2남으로 분가신고를 했을 때까지 무려 36년간의 기록이 한사람의 필적으로 되어 있으며 동일한 날인을 11회에 걸쳐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누가보아도 1960년 6월경에 김대중의 호적등본이 광범위하게 개작, 개편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하의면 면장은 장모씨였고 이 호적을 기록, 날인한 호적계 이모씨는 후에 면장으로 승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중의 호적중 가장 황당한 것은 김대중이 자신의 생부 제갈성복의 동생이며 자신의 생모인 장노도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의 호적을 완전히 말살시켜버렸다는 점이다.

장노도는 1911년 3월 10일 제갈성조와 결혼으로 친정아버지인 장지숙의 호적에서 제적되었다가 1925년 12월 8일 장지숙의 호적에 재입적된다. 약 15년간 제갈가의 며느리로 살다가 남편의 사망으로 친정 호적에 복귀한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장노도가 결혼해 간 무안군하의면 대리 204의 제갈영범의 차남 제갈성조의 호적이 멸실되었다는 점이다. 장노도는 제갈성조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 딸들의 행방도 찾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김대중의 호적에서는 많은 이름들이 변조되어 있다. 김대중의 와할아버지는 張之淑, 張文淑 두개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고 김대중의 첫 부인이름도 車容秀, 車容愛 들이 있다. 김대중의 씨다른 여동생 이름도 김찬진, 김진찬 김대중의 양부(養父)이름도 한자가 두가지가 존재한다. 金云式, 金云植으로. 김대중 자신의 이름도 끝의 한자가 두가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은 자신의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용례를 1960년 6월에 위장이혼시고 자신의 생모를 김운식과 위장결혼시키므로서 자신의 서자딱지를 떼어버린 바 있다.

김운식의 서자로 살다.

하여튼 하의도 실력자 김운식이 장노도의 주막에서 살다싶이 한 연유로 주막집은 손님이 들지 않아 장사가 되지않으니 문을 닫게된 모양인데 김운식은 장노도와 그 녀의 아이들을 위해 삼칸집을 지어준 모양이다.

이 후에 장노도와 그녀의 아이들은 김운식이 지어준 후광리의 삼칸집에서 살았다는데 김운식은 그의 본처와 함께 하의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대리(大里)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김운식 영감은 본처와 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이 당시 장노도는 자신의 아이들을(딸 둘, 아들 둘) 엄격히 통제하여 대리에 있는 큰집 (김운식의 본처가 사는집)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니까 김대중의 계부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김대중은 서당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해진다. 1934년, 김대중은 하의 공립 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고 1936년 김대중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장노도가는 하의도를 떠나 목포로 이사를 가게된다. 김대중의 나이 13살 때였을 것이다. 그 한해 전 장노도는 김운식의 아이를 낳는다. 이가 김대중의 씨다른 동생 김대현으로 1935년생이다. 이렇게 보면 김대현은 하의도 출생인 셈이다. 장노도 일가는 1936년 목포로 이주하였고 장노도는 여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장노도는 여기서 김운식의 딸 김진찬을 낳는다. 김진찬이는 1938년 생이라고 하는데 1963년 1월 25일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호적상 김대의로 되어 있는 윤대의는 동네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자랄 수록 윤창언이를 닮아갔다니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윤창언의 자식임이 분명한 것 같고 김대중은 제갈성복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장노도가 낳은 세 아들들은 모두 씨가 다르다. 첫째는 제갈씨요 둘째는 윤씨요 셋째는 김씨다. 이 중1927년 5월 3일에 출생한 윤대의 (호적상 이름 김대의)는 1997년 12월 17일에 사망하였다.

1939년 3월 24일 김대중은 목포소재 북교(北橋)국민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같은해 목포 상업중학교(이하 목포 상고)로 진학했다. 졸업식에서 김대중은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한다.

목포 상고에 입학해서 김대중은1학년때 성적은 111명중 1등을 하였으나 2학년때는 119명중 4등, 3학년때는 155명중 2등, 4학년 때는 149명중 8등 5학년때는 150명중 39등으로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김대중은 1,2학년에서 급장, 2,4학년때는 품행단정상 수상, 5학년때에는 수양위원 겸 문화반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학창시절부터 김대중은 웅변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고 하며 고교 학적부에는 “언변이 늘 정확하고 명료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한다.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연도에 대하여는 1943년이란 말도 있고 김대중 연보에는 1944년이라는 주장도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이 5학년에 진급할 당시 전쟁의 막바지에 있던 일제는 이들 졸업반을 서둘러 졸업시켰다 한다. 따라서 김대중은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된 모양인데 정상적으로는 1944년 3월에 졸업예정이었으나 당해에 한하여 졸업반으로 올라가자마자 졸업을 한 모양이다.

이런 연유로 김대중은 1943년에 목포상고를 졸업한다. 그의 실제나이 20세 때이다. 그는 유년기에 매우 영리하여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중학교 5년(지금의 고등학교 졸업반)시의 졸업성적은 중상정도 였다. 심리학자라면 김대중의 가정환경으로부터 그의 성격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유추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후일 모 외국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학력콤풀렉스가 있다는 고백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의 극심한 명예욕, 그의 극심한 집요함,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모함, 그의 동물적 생존본능, 그의 끝을 모르는 돈 욕심 등등의 성향은 아마도 어릴적 복잡한 가족 및 생활 환경에서 빚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던 그의 졸업성적도 그의 명예에의 욕구를 좌절시킨 한 작은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