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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2일 (월) 08:26 판

김학철(1916.11.04 ~ 2001.09.25)의 본명은 홍성걸(洪性杰)이며,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중국공산당 산하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부상당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석방되어 서울에서 좌익 정치 활동을 하다 1946년 11월 월북하여, 북한에서 로동신문사 론설기자, 인민군신문 주필 등을 지냈으나 좌천 당하자 중국으로 갔다. 그는 문필가로서 상당한 작품활동을 했으나 중국에서도 많은 탄압을 받아 오랫동안 집필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1988년 중공이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한국과 교류의 물꼬가 트여 그의 작품들이 한국에서도 출판되었다.

약력

【김학철 략력】[1]

1916년 11월 4일 조선 원산에서 태여남, 본명 홍성걸(洪性杰.)
1934년 서울 보성고등학교 졸업.
1935년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중국 상해로 망명. 상해에서 심운에 포섭되여 의렬단에 가입. 석정의 령도아래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 입당, 김원봉의 부하가 됨. 중앙본부 소재지는 남경 화로강(花露岗).
1937년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 입학.
1938년 중앙륙군학교 졸업, 소위 참모로 국민당군대에 배속. 10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창립,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
1940년 8월 29일 중국공산당에 가입.
1941년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元氏县)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부상,포로됨.
1942년 1~4월 석가장 일본총령사관에서 심문받음. 당시《일본국민》으로 10년 수감판결,
5월 북경~부산~일본 일본나가사끼형무소(长崎刑务所)에 수감.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함.
1945년 수감 3년 6개월만에 좌각절단.
8월 15일 일본 투항.
10월 9일 맥아더사령부(GHQ)의 정치범석방명령으로 송지영 등과 함께 출옥.
11월 1일 조선독립동맹 서울시위원회 위원으로 좌익정치활동, 소설창작.
1946년 11월 좌익탄압으로 월북.
1947년 로동신문사 론설기자, 인민군신문 주필, 창작활동. 김혜원(金惠媛)녀사와 결혼.
1948년 외금강휴양소 소장으로 좌천.
1951년 1월부터 중국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소장은 정령)에서 연구원으로 창작활동.
1952년 10월 주덕해 초청으로 연변에 정착.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주임으로 활동.
1954년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상, 중, 하) 연변교육출판사 출판.
1957년 반동분자로 숙청당해 24년동안 창작권리 박탈.
1967년 12월부터《20세기의 신화》를 쓴 죄로 징역살이 10년. 연길류치소(미결), 추리구(秋梨沟)감옥 복역.
1977년 12월 만기출옥, 향후 3년간 반혁명전과자로 실업.
1980년 12월 복권. 24년만에 65세의 나이로 창작활동 재개.
1983년 전기문학《항전별곡》출판해서부터 장편소설《격정시대》(상,하) 산문집《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자서전《최후의 분대장》, 장편소설《20세기의 신화》, 《김학철문집》 1~2, 3~4권 출판.
1994년 3월 KBS해외동포상(특별상) 수상.
2001년 2001년 9월 25일 연길시에서 타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