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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단군의 묘인 [[단군릉|단군릉(檀君陵)]]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군릉은 조선왕조 실록 등에도 나오며, 이 능이 위치한 대박산은 고종실록(1900년)에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나온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1029_00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 의관 백호섭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다]</ref> 그렇게 전해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단군의 릉일 가능성은 희박하며, 고구려 시대 고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 북한은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단군의 묘인 [[단군릉|단군릉(檀君陵)]]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군묘(檀君墓) 또는 단군릉은 조선왕조 실록 등에도 나오며, 이 능이 위치한 대박산은 고종실록(1900년)에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나온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1029_00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 의관 백호섭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다]</ref> 그렇게 전해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단군의 릉일 가능성은 희박하며, 고구려 시대 고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 ||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
2019년 10월 7일 (월) 13:07 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기록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무대 태백산(太伯山)이 묘향산(妙香山)이라 하고,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다 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백두산(白頭山)과 어떤 관련도 찾아보기 어렵다.[1]
- 三國遺事 卷 第一 > 제1 기이(紀異第一)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 기록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태백산(太白山)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여러 주장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1]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기록하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2] 최남선이[3]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4][5][6]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북한은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단군의 묘인 단군릉(檀君陵)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군묘(檀君墓) 또는 단군릉은 조선왕조 실록 등에도 나오며, 이 능이 위치한 대박산은 고종실록(1900년)에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나온다.[7] 그렇게 전해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단군의 릉일 가능성은 희박하며, 고구려 시대 고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참고 자료
- 사료로 본 한국사 > 시대별 > 삼국 이전 > 정치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 단군에 대한 인식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D-Story 73 : 민족의 뿌리 찾아(1) 단군 영정 공모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 2월 - 28 - 2011)
- D-Story 74 : 민족의 뿌리 찾아(2) 단군 유적 보존운동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3월 - 10 - 2011)
- D-Story 75 : 민족의 뿌리 찾아(3) 백두산을 가다 – 민태원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1 - 2011)
- D-Story 76 : 민족의 뿌리 찾아(4) 백두산을 가다 – 최남선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4 - 2011)
- 백두산근참기 문화컨텐츠닷컴 (단군신화 무대를 백두산으로 추정)
- 단군론 위키백과
- 백두산천지와 단군신화 - 문화콘텐츠닷컴
- 백두산 신화
각주
- ↑ 1.0 1.1 백두산에 얽힌 전설·신화 중앙일보 1985.03.04
- ↑ 민태원(閔泰瑗),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 - ↑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 - ↑ 단군론 위키백과
- ↑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 의관 백호섭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