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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4&cp_code=cp0431&index_id=cp04310017&content_id=cp043100170001&search_left_menu=2 백두산 주변국 건국신화] 문화콘텐츠닷컴</ref><ref>[https://news.joins.com/article/1982625 백두산에 얽힌 전설·신화] 중앙일보 1985.03.04</ref> 이것은 사실일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553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280 일연(一然, 1206~1289)]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6482 삼국유사(三國遺事)]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965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343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https://ko.wikipedia.org/wiki/%ED%83%9C%EB%B0%B1%EC%82%B0_(%EA%B3%A0%EC%A1%B0%EC%84%A0)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br>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553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280 일연(一然, 1206~1289)]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6482 삼국유사(三國遺事)]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965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343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https://ko.wikipedia.org/wiki/%ED%83%9C%EB%B0%B1%EC%82%B0_(%EA%B3%A0%EC%A1%B0%EC%84%A0)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br>



2019년 8월 6일 (화) 05:17 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삼국유사(三國遺事)이승휴(李承休, 1224~1300)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북한도 평양 인근 강동군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재단장했다고 주장하므로 백두산을 단군의 연고지로 보지는 않는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적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1] 최남선이[2]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3][4]

  1. 민태원(閔泰瑗),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
  2. 최남선(崔南善),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
  3.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
  4.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