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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u>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二島 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u>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3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인용문|<u>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二島 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u>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3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안용복(安龍福) 사건과 그 이후==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008014_004 숙종실록 27권, 숙종 20년 8월 14일 기유 4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울릉도 문제를 왜와 교신하다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008014_004 숙종실록 27권, 숙종 20년 8월 14일 기유 4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울릉도 문제를 왜와 교신하다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수토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수토

2019년 8월 11일 (일) 08:31 판

울릉도와 독도간 거리는 87.4km 이다. 이에 비해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시마네(島根)현 오키섬까지의 거리는 157.5km로 1.8배에 달한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육안으로 독도를 볼 수 있으나, 일본 오키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1]

독도의 영유권을 두고 한일간의 분쟁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영토분쟁에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고, 실효지배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나라간 국경선은 역사상 수도 없이 변해 왔고 오늘날에도 변하고 있다. 실효지배를 지켜낼 힘이 없으면 언젠가 다른 나라에 영토를 빼앗길 수도 있다. 역사 기록이 어떠했는가는 실효지배에 관한 한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소련이 2차대전 말에 점령한 일본의 북방 4개 섬은 일본 영토라는 역사적 기록이 부족할 리는 없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순순히 돌려주겠는가?

역사기록은 분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대외 선전 자료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쓸모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한국의 역대 독도 관련 기록을 정리해 본다.

개요

삼국사기에 나오는 우산국은 독도 아닌 울릉도를 지칭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조선초에 오면 현재의 울릉도는 주로 무릉도로 기록되고, 우산도라는 무릉도와는 다른 별개의 섬이 함께 나온다. 이 우산도를 독도로 볼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 세종실록 지리지이다. 두 섬이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서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울릉도에서 맑은 날에는 독도를 볼 수 있지만 흐린 날에는 보이지 않는다. 맑은 날에도 좀 높이 올라가야 보인다. 울릉도에 바로 붙어있는 죽도나 관음도는 날씨에 관계없이 잘 보이므로 이러한 우산도는 독도일 수 밖에 없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있다. 망원렌즈로는 잘 잡히므로 별 의미가 없고 보통렌즈로 찍은 사진도 있다. 오늘날에는 울릉도에 독도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까지 오르는 케이블카도 있다.[2]

조선왕조실록을 [무릉도, 우산도, 울릉도] 등으로 검색해보면 태종이 울릉도 공도 정책을 시행한 이후로도 울릉도에 사람들이 계속 들락거리고 있었고, 관리도 파견한다.

숙종 때 안용복 사건으로 해서 우산도를 오늘날의 독도로 인식하게 되고, 이후 국정에 참고하기 위해 편찬한 관찬 백과사전 동국문헌비고 (1770년)에 우산도와 울릉도를 기록하고, 우산도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츠시마)라고 명기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독도임에 이견이 없다. 관찬의 동국문헌비고에 이렇게 기록한 것은 당시 우산도(= 일본인들이 말하는 송도 = 오늘날의 독도)를 조선 영토로 명기한 것과 같다.

지도에 나오는 우산도는 위치가 오락가락이고 정확하지 않지만 울릉도와는 별개의 섬으로 인식하는 섬이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1900년 이전 고지도를 보면 섬들 뿐만 아니라 육지의 지도에 나오는 지명의 방향이나 위치도 들쑥날쑥하므로 정보가 많지 않았던 우산도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하여 1908년에 간행한 증보문헌비고에도 우산도(독도)와 울릉도가 나오는데, 신설된 울도군에 속한다고 명기하였다. 증보문헌비고는 범례에 1906년에 편찬완료했고, 1904년까지의 일을 기록한다고 했다. 이로보면 1904년에 독도를 울도군에 속한다고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종이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파견한 1882년 당시 울릉도에 조선인 140명이 조선과 해산물 채취에 종사하고 있었고, 일본인 78명이 잠입하여 주로 벌목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 이후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본토인들의 이주를 권장하여 인구가 상당히 늘어나게 된다. 이 사람들이 독도까지 해산물을 채취하러 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이상하다. 독도는 사람이 상주할 곳은 못되지만, 가서 며칠씩 머물며 해산물을 채취해 돌아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독도는 1800년대말에 상주인구는 없었지만 울릉도 주민들의 경제활동권 내에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있다.

신라·고려 시대 울릉도 관련 기록

신라 지증왕(智證王) 13년 (512년) 6월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였다.[3][4]

고려 태조(太祖) 13년 (930년) 8월에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백길을 정위(正位)로, 토두를 정조(正朝)로 임명하였다.[5]

현종(顯宗) 9년 (1018년) 11월 우산국(于山國)이 동북여진(東北女眞)의 침략을 받아 농사일을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하사하였다.[6] 현종(顯宗) 13년 (1022년) 7월 여진(女眞)에게 노략질 당하여 도망쳐온 우산국(于山國) 피난민들을 예주(禮州)에 거주하게 하고, 관청에서 밑천과 양식을 제공하여 영원히 호적(戶籍)에 편입하도록 했다.[7]

의종(毅宗) 11년 (1157년) 5월에 우릉도(羽陵島)에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거주 가능성을 살펴보게 했으나, 돌아와서 “섬에는 암석이 많아 백성들이 거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논의를 그만 두었다.[8]

공민왕 때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 신돈(辛旽)의 일에 연루되어 무릉도(武陵島)에 유배되었다.[9]

신라나 고려시대 기록에 독도는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울릉도와 관련한 이러한 기록들로 볼 때 신라나 고려시대에 울릉도에 다수의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었고, 이들이 육지로 내왕할 수 있을 정도면 인근 독도까지 어로나 해산물 채취를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울릉도 관련 기록

고려사 권58 > 지(志)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동계(東界) > 울진현(蔚珍縣) 울릉도(鬱陵島)[10] : 【우산도(于山島)】가 나온다. 고려사는 조선 문종 때인 1451년에 편찬되었다.

조선 태종 17년 (1417년) 2월에 김인우(金麟雨)를 안무사(按撫使)로 보내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나와서 살도록 했다.[11] 같은 해 8월에 "왜적이 우산도(于山島)·무릉도(武陵島)에서 도둑질하였다."[12]고 한 것으로 보아 주민들 일부는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세종 때에도 사람들이 울릉도를 들락거리고 관리도 파견한다.[13][14]

세조 때에는 울릉도에 읍(邑)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 논의했으나, 읍은 설치하지 않되 두 섬에 유랑하여 우거(寓居)한 사람은 쇄환(刷還)하지 말게 하였다.[15]

성종 때(1471년)에는 울릉도에 몰래들어가 사는 자들을 색출하여 데려 나오게 하였다.[16]

중종 때(1511년)에는 강원도 관찰사에게 울릉도의 사정을 살펴보게 했다.[17]

임진왜란 후인 광해군 때(1614년)에는 대마도의 왜인들이 울릉도에 와서 살고싶어하는 청원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18]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의 우산도 기록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二島 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3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안용복(安龍福) 사건과 그 이후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수토

비변사(備邊司)에서 안용복(安龍福) 등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안용복이 말하기를,

"저는 본디 동래(東萊)에 사는데, 어미를 보러 울산(蔚山)에 갔다가 마침 중[僧] 뇌헌(雷憲) 등을 만나서 근년에 울릉도(鬱陵島)에 왕래한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섬에 해물(海物)이 많다는 것을 말하였더니, 뇌헌 등이 이롭게 여겼습니다. 드디어 같이 배를 타고 영해(寧海) 사는 뱃사공 유일부(劉日夫) 등과 함께 떠나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主山)인 삼봉(三峯)은 삼각산(三角山)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산에는 잡목(雜木)·매[鷹]·까마귀·고양이가 많았고, 왜선(倭船)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앞장 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마땅히 백기주(伯耆州)에 전보(轉報)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완(憤惋)을 금하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울릉 자산 양도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므로, 저는 푸른 철릭[帖裏]를 입고 검은 포립(布笠)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轎子)를 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타고서 그 고을로 갔습니다. 저는 도주와 청(廳)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계(中階)에 앉았는데, 도주가 묻기를, ‘어찌하여 들어왔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전일 두 섬의 일로 서계를 받아낸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서계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두세 번 차왜(差倭)를 보내는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 하였더니, 도주가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인성(李仁成)으로 하여금 소(疏)를 지어 바치게 하자, 도주의 아비가 백기주에 간청하여 오기를, ‘이 소를 올리면 내 아들이 반드시 중한 죄를 얻어 죽게 될 것이니 바치지 말기 바란다.’ 하였으므로, 관백에게 품정(稟定)하지는 못하였으나, 전일 지경을 침범한 왜인 15인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이어서 저에게 말하기를,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양식을 주고 차왜를 정하여 호송하려 하였으나, 제가 데려가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사양하였습니다."

하였고, 뇌헌 등 여러 사람의 공사(供辭)도 대략 같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우선 뒷날 등대(登對)할 때를 기다려 품처(稟處)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안용복(安龍福)은 법으로 마땅히 주살(誅殺)해야 하는데,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이 모두 가벼이 죽일 수 없다고 하고, 또 도왜(島倭)가 서신을 보내어 죄를 전(前) 도주(島主)에게 돌리고, 울릉도(鬱陵島)에는 왜인의 왕래를 금지시켜 다른 흔단이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자복(自服)하였으니, 까닭이 없지 않을 듯하므로, 안용복은 앞질러 먼저 처단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대체로 왜인의 기를 꺾어 자복시킨 것을 안용복의 공(功)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의 뜻도 그렇게 여겨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여러 번 아뢰면서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 권 18 [vol: 9] / 여지고(輿地考) 13 / 관방(關防) 3 / 해방(海防) 동해(東海)
울진(蔚珍) 【우산도(于山島)】·【울릉도(鬱陵島)】[19]

참고 자료

장한상(張漢相, 1654~1724), 울릉도사적 (鬱陵島事蹟) 원문 전체와 번역
신경준은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연혁에 관해 언급하고, 연혁 말미에는 유형원의 「여지지(輿地志)」의 기사를 인용해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한 섬이라고 하나 여러 도지(圖志)를 상고하면 두 섬이다. 하나는 왜가 말하는 송도(松島)인데, 두 섬은 모두 우산국이다”라고 하였다.
신경준(申景濬, 1712 ∼ 1781), 여암전서(旅菴全書) : 1940 - 국립중앙도서관 원문보기
여암전서(旅菴全書) 권7 강계고(疆界考) 四
欝陵島 p.132 / 安龍福事 p.136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 조선통신사 계미사행록, 성대중 저 / 홍학희 역 , 소명출판, 2006
  • 안용복이 실제로 '두 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안용복 방문 당시의 일본측 기록 두 가지
안용복 관련 일본의 기록
안용복의 배에 달려 있던 깃발 - "울릉도 두 섬은 조선의 땅이다"
1696년 안용복 : 일본의 기록 - 원록9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 (2)
원록9 병자년 조선주 착안 일권지각서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백기주 태수가 안용복에게 말했다는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兩島旣屬爾國之後....
숙종실록에 실려있는 이 표현은 이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이 분명히 울릉도 만이 아닌 울릉도와 독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준다.
태정관 지령문 속에 나타나는 독도 (호사카 유지)
태정관 지령문에서 "外一島"는 독도이다 (3)
일본에서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 독도를 마츠시마(松島)로 불렀다)
1877년에 일본정부는 동해 내 ‘다케시마(竹島) 외일도(外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 즉 조선영토라고 인정한 바 있다.


각주

  1. <日외무성, 독도-오키섬 거리 '슬그머니' 수정> 연합뉴스 2013-10-31
  2. 독도전망대 케이블카
  3.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지증(智證) 마립간(麻立干) > 十三年夏六月 우산국을 정벌하다(0512년 06월 (음))
  4. 三國遺事 卷 第一 > 제1 기이(紀異第一) > 지철로왕(智哲老王) > 박이종이 나무 사자를 만들어 울릉도를 복속시키다
  5. 고려사 권1 > 세가 권제1 > 태조(太祖) 13년 930년 8월 15일(음) 병오(丙午) > 우릉도에서 공물을 바치다
  6. 고려사 > 卷四 > 世家 卷第四 > 顯宗 9年 > 11월 > 우산국에 농기구를 하사하다
  7. 고려사 > 卷四 > 世家 卷第四 > 顯宗 13年 > 7월 > 우산국 피난민을 호적에 편입하다
  8. * 고려사 > 卷十八 > 世家 卷第十八 > 의종(毅宗) 11年 1157년 5월 12일(음) 병자(丙子) > 우릉도에 김유립을 보내 거주 가능성을 살피게 하다
  9. 고려사 > 卷九十一 > 列傳 卷第四 > 宗室 > 신종 왕자 양양공 왕서 > 영흥군 왕환
  10. 네이버 국역 고려사
  11.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8일 을축 1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여러 신하들과 우산·무릉도 주민의 쇄출 문제를 논의하다
  12.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8월 6일 기축 5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 왜적이 우산도 등지에서 도둑질하다
  13.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8일 갑술 1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 전 판장기현사 김인우를 우산도·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다
  14.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20일 을유 3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우산·무릉 등에서 안무사 김인우가 피역 남녀 20인을 잡아오니 3년동안 복호시키다
  15.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4월 16일 기유 3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유수강이 영동을 방어하는 일에 대해 조목을 갖추어 상언하다
  16. 성종실록 11권, 성종 2년 8월 17일 정사 3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강원도 관찰사 성순조에게 무릉도에 관한 일을 하서하다
  17. 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5월 21일 경오 4번째기사 1511년 명 정덕(正德) 6년 강원도 관찰사에게 무릉도를 살피게 하다
  18. 광해군일기[중초본] 82권, 광해 6년 9월 2일 신해 2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비변사가 울릉도에 왜노의 왕래 금지의 뜻을 대마도주에게 알리도록 청하니 따르다
  19.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국립중앙도서관: 권 18 [vol: 9] p.124~ : 울진(蔚珍) 【우산도(于山島)】·【울릉도(鬱陵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