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와 독도간 거리는 87.4km 이다. 이에 비해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시마네(島根)현 오키섬까지의 거리는 157.5km로 1.8배에 달한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육안으로 독도를 볼 수 있으나, 일본 오키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1]

독도의 영유권을 두고 한일간의 분쟁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영토분쟁에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고, 실효지배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나라간 국경선은 역사상 수도 없이 변해 왔고 오늘날에도 변하고 있다. 실효지배를 지켜낼 힘이 없으면 언젠가 다른 나라에 영토를 빼앗길 수도 있다. 역사 기록이 어떠했는가는 실효지배에 관한 한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소련이 2차대전 말에 점령한 일본의 북방 4개 섬은 일본 영토라는 역사적 기록이 부족할 리는 없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순순히 돌려주겠는가?

역사기록은 분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대외 선전 자료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쓸모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한국의 역대 독도 관련 기록을 정리해 본다.

개요

삼국사기에 나오는 우산국은 독도 아닌 울릉도를 지칭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조선초에 오면 현재의 울릉도는 주로 무릉도로 기록되고, 우산도라는 무릉도와는 다른 별개의 섬이 함께 나온다. 이 우산도를 독도로 볼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 세종실록 지리지이다. 두 섬이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서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울릉도에서 맑은 날에는 독도를 볼 수 있지만 흐린 날에는 보이지 않는다. 맑은 날에도 좀 높이 올라가야 보인다. 울릉도에 바로 붙어있는 죽도나 관음도는 날씨에 관계없이 잘 보이므로 이러한 우산도는 독도일 수 밖에 없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있다. 망원렌즈로는 잘 잡히므로 별 의미가 없고 보통렌즈로 찍은 사진도 있다. 오늘날에는 울릉도에 독도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까지 오르는 케이블카도 있다.[2]

조선왕조실록을 [무릉도, 우산도, 울릉도] 등으로 검색해보면 태종이 울릉도 공도 정책을 시행한 이후로도 울릉도에 사람들이 계속 들락거리고 있었고, 관리도 파견한다.

숙종 때 안용복 사건으로 해서 우산도를 오늘날의 독도로 인식하게 되고, 이후 국정에 참고하기 위해 편찬한 관찬 백과사전 동국문헌비고 (1770년)에 우산도와 울릉도를 기록하고, 우산도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츠시마)라고 명기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독도임에 이견이 없다. 관찬의 동국문헌비고에 이렇게 기록한 것은 당시 우산도(= 일본인들이 말하는 송도 = 오늘날의 독도)를 조선 영토로 명기한 것과 같다.

지도에 나오는 우산도는 위치가 오락가락이고 정확하지 않지만 울릉도와는 별개의 섬으로 인식하는 섬이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1900년 이전 고지도를 보면 섬들 뿐만 아니라 육지의 지도에 나오는 지명의 방향이나 위치도 들쑥날쑥하므로 정보가 많지 않았던 우산도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하여 1908년에 간행한 증보문헌비고에도 우산도(독도)와 울릉도가 나오는데, 신설된 울도군에 속한다고 명기하였다. 증보문헌비고는 범례에 1906년에 편찬완료했고, 1904년까지의 일을 기록한다고 했다. 이로보면 1904년에 독도를 울도군에 속한다고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종이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파견한 1882년 당시 울릉도에 조선인 140명이 조선과 해산물 채취에 종사하고 있었고, 일본인 78명이 잠입하여 주로 벌목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 이후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본토인들의 이주를 권장하여 인구가 상당히 늘어나게 된다. 이 사람들이 독도까지 해산물을 채취하러 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이상하다. 독도는 사람이 상주할 곳은 못되지만, 가서 며칠씩 머물며 해산물을 채취해 돌아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독도는 1800년대말에 상주인구는 없었지만 울릉도 주민들의 경제활동권 내에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있다.

역대 독도 관련 기록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육조(六曹)·대간(臺諫)에 명하여, 우산(于山)·무릉도(武陵島)의 주민[居民]을 쇄출(刷出)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武陵)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五穀)과 농기(農器)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主帥)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慰撫)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조 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安置)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저 사람들은 일찍이 요역(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그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김인우(金麟雨)를 그대로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도로 우산(于山)·무릉(武陵) 등지에 들어가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인하여 옷[衣]·갓[笠]과 목화(木靴)를 내려 주고, 또 우산 사람 3명에게도 각기 옷 1습(襲)씩 내려 주었다.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에게 명하여 병선(兵船) 2척(隻)을 주게 하고, 도내의 수군 만호(水軍萬戶)와 천호(千戶) 중 유능한 자를 선간(選揀)하여 김인우와 같이 가도록 하였다.
왜적이 우산도(于山島)·무릉도(武陵島)에서 도둑질하였다.
전 판장기현사(判長鬐縣事) 김인우(金麟雨)를 우산도(于山島)·무릉도(武陵島) 등지의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당초에 강원도 평해(平海) 고을 사람 김을지(金乙之)·이만(李萬)·김울금[金亐乙金] 등이 무릉도에 도망가 살던 것을, 병신년에 국가에서 인우를 보내어 다 데리고 나왔는데, 계묘년에 을지 등 남녀 28명이 다시 본디 섬에 도망가서 살면서, 금년 5월에 을지 등 7인이 아내와 자식은 섬에 두고 작은 배를 타고 몰래 평해군 구미포(仇彌浦)에 왔다가 발각되었다. 감사가 잡아 가두고 본군(本郡)에서 급보(急報)하여 곧 도로 데려 내오기로 하고서, 인우가 군인 50명을 거느리고 군기와 3개월 양식을 갖춘 다음 배를 타고 나섰다. 섬은 동해 가운데 있고, 인우는 삼척(三陟) 사람이었다.
우산(于山)·무릉(茂陵) 등지에서 안무사(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본도(本島)의 피역(避役)한 남녀 20인을 수색해 잡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처음 인우가 병선(兵船) 두 척을 거느리고 무릉도에 들어갔다가 선군(船軍) 46명이 탄 배 한 척이 바람을 만나 간 곳을 몰랐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인우가 20여 인을 잡아왔으나 40여 인을 잃었으니 무엇이 유익하냐. 이 섬에는 별로 다른 산물도 없으니, 도망해 들어간 이유는 단순히 부역(賦役)을 모면하려 한 것이로구나."

하였다. 예조 참판 김자지(金自知)가 계하기를,

"지금 잡아온 도망한 백성을 법대로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몰래 타국을 따른 것이 아니요, 또 사면령(赦免令) 이전에 범한 것이니 새로 죄주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 곧 병조에 명하여 충청도의 깊고 먼 산중 고을로 보내어 다시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3년 동안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二島 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3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강릉(江陵) 사람의 말에,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物産)의 풍부함과 재용(財用)의 넉넉함은, 저목(楮木)·저상(苧桑)·대죽(大竹)·해죽(海竹)·어교목(魚膠木)·동백목(冬栢木)·백자목(栢子木)·이목(梨木)·시목(柹木)과, 아골(鴉鶻)·흑색 산구(黑色山鳩)·해의(海衣)·복어(鰒魚)·문어(文魚)·해달(海獺)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禾穀)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相距)가 각각 50여 리(里)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으며, 사면(四面)이 험조(險阻)하여 절벽(絶壁)이 천 길이나 서 있는데도 또한 배를 정박(停泊)할 곳이 있다. 수로(水路)는 삼척(三陟)에서 섬에 이르는 데 서풍(西風)이 곧바로 불어온다면 축시(丑時)에 배가 출발하여 해시(亥時)에 도착할 수가 있지만, 바람이 살살 불어도 노(櫓)를 사용한다면 하루 낮 하루 밤에 도착할 수가 있으며, 바람이 없어도 노를 사용한다면 또한 두 낮 하루 밤이면 도착할 수가 있다.’고 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현읍(縣邑)을 설치하여 사람을 골라서 이를 지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병조(兵曹)에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제1조. 강원도 도절제사(江原道都節制使)의 본영(本營)과 삼척(三陟)·간성(杆城)·옥원(沃原) 등 여러 진(鎭)의 방어(防禦)하는 일과 시위패(侍衛牌)를 이정(移定)하는 등의 일은, 함길도(咸吉道)의 군사는 본디부터 번상(番上)하지 않으며, 곧 본도(本道)에서 부방(赴防)하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비록 번(番)을 쉴 때를 당하더라도 또한 윤차(輪次)로 부방하도록 하며, 강원도(江原道)의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는 모두 경중(京中)에 번상(番上)하게 되니, 함길도(咸吉道)의 예(例)에 의거하여 번(番)을 쉴 때에도 또한 부방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본도(本道)의 방어(防禦)는 다른 도(道)에 비해서 긴요하지 않으니, 그 부방(赴防)을 자모(自募)하는 사람에게 산관직(散官職)을 제수(除授)하는 것은 지극히 외람된 일이며, 본도(本道)의 시위패(侍衛牌)를 경기(京畿)와 충청도(忠淸道)에 이정(移定)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한 일입니다.

제2조. 모래가 메인 여러 포(浦)의 병선(兵船)을 혁파(革罷)하고, 목책(木柵)과 석보(石堡)를 축조(築造)하고, 초인(草人)을 철거(撤去)하는 등의 일 속에서 초인(草人)은 적군(敵軍)을 물리치는 도구가 아니니 철거(撤去)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그 여러 포(浦)에는 당시에는 비록 변방의 경보(警報)가 없더라도 사변(事變)이 닥쳐 오는 것을 또한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다만 포구(浦口)에 모래가 메인다는 일만을 가지고 갑자기 병선(兵船)을 혁파(革罷)시킬 수는 없습니다.

제3조. 군기(軍器)를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보수(補修)하고,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순행(巡行)하면서 병기(兵器)를 수리하고 정비한다는 등의 일로 말하면, 군기(軍器)를 가지고 군사들에게 흩어 주는 것은 사체(事體)에 적합하지 않으며, 관찰사(觀察使)가 절제사(節制使)를 겸임(兼任)하는 것은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별다른 큰 폐해가 없으니 별도로 설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4조.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 현읍(縣邑)을 설치하는 일은 두 섬이 수로(水路)가 험하고 멀어서 왕래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바다 가운데의 고도(孤島)에 읍(邑)을 설치하면 지키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위의 조건(條件)을 아울러 거행(擧行)하지 마소서. 다만 본도(本道)의 인민(人民)이 두 섬에 방랑하여 우거(寓居)할 폐단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바람이 순할 때를 기다려 조관(朝官)을 보내어 쇄환(刷還)하도록 하고, 그 모래가 메인 여러 포구(浦口)안의 병선(兵船)은 오로지 배가 드나들 수 없는 곳에는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옮겨 정박(停泊)할 곳을 살펴보아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나, 다만 두 섬에 유랑하여 우거(寓居)한 사람은 쇄환하지 말게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성순조(成順祖)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지금 듣건대, 영안도(永安道)에 사는 백성들 가운데 몰래 무릉도(茂陵島)587) 에 들어간 자가 있다고 하니, 사람을 시켜서 가서 그들을 체포하고자 한다. 세종조(世宗朝)에 일찍이 이 섬의 사람들을 찾아내어 토벌(討伐)하였는데, 지금 반드시 그때에 왕래한 자가 있을 것이니, 속히 찾아서 심문하도록 하라. 또 그 곳에 가기를 원(願)하는 자를 모집하고 아울러 선함(船艦)을 준비하여 아뢰라."

하였다.

[註 587]무릉도(茂陵島) : 울릉도(鬱陵島).
강원도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무릉도를 살펴 알아보고 계문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울릉도에 왜노(倭奴)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뜻으로 전일 예조의 서계(書啓) 가운데 이미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回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어 하여 또 서계를 보내었으니 자못 놀랍습니다. 본도(本島)가 우리 나라에 소속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方物)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島民)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가 명확히 있습니다. 이 일을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갖추어 기재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깊이 꾸짖어서 간사하고 교활한 꾀를 막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경상 감사와 부산(釜山)의 변신(邊臣)에게 공문을 보내 온 배에 특별히 유시를 하고 이 글을 전적으로 맡아 싸가지고 속히 돌아가 도주(島主)에게 보고하여 조정의 금약(禁約)을 준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수토

비변사(備邊司)에서 안용복(安龍福) 등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안용복이 말하기를,

"저는 본디 동래(東萊)에 사는데, 어미를 보러 울산(蔚山)에 갔다가 마침 중[僧] 뇌헌(雷憲) 등을 만나서 근년에 울릉도(鬱陵島)에 왕래한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섬에 해물(海物)이 많다는 것을 말하였더니, 뇌헌 등이 이롭게 여겼습니다. 드디어 같이 배를 타고 영해(寧海) 사는 뱃사공 유일부(劉日夫) 등과 함께 떠나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主山)인 삼봉(三峯)은 삼각산(三角山)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산에는 잡목(雜木)·매[鷹]·까마귀·고양이가 많았고, 왜선(倭船)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앞장 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마땅히 백기주(伯耆州)에 전보(轉報)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완(憤惋)을 금하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울릉 자산 양도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므로, 저는 푸른 철릭[帖裏]를 입고 검은 포립(布笠)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轎子)를 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타고서 그 고을로 갔습니다. 저는 도주와 청(廳)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계(中階)에 앉았는데, 도주가 묻기를, ‘어찌하여 들어왔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전일 두 섬의 일로 서계를 받아낸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서계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두세 번 차왜(差倭)를 보내는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 하였더니, 도주가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인성(李仁成)으로 하여금 소(疏)를 지어 바치게 하자, 도주의 아비가 백기주에 간청하여 오기를, ‘이 소를 올리면 내 아들이 반드시 중한 죄를 얻어 죽게 될 것이니 바치지 말기 바란다.’ 하였으므로, 관백에게 품정(稟定)하지는 못하였으나, 전일 지경을 침범한 왜인 15인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이어서 저에게 말하기를,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양식을 주고 차왜를 정하여 호송하려 하였으나, 제가 데려가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사양하였습니다."

하였고, 뇌헌 등 여러 사람의 공사(供辭)도 대략 같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우선 뒷날 등대(登對)할 때를 기다려 품처(稟處)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안용복(安龍福)은 법으로 마땅히 주살(誅殺)해야 하는데,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이 모두 가벼이 죽일 수 없다고 하고, 또 도왜(島倭)가 서신을 보내어 죄를 전(前) 도주(島主)에게 돌리고, 울릉도(鬱陵島)에는 왜인의 왕래를 금지시켜 다른 흔단이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자복(自服)하였으니, 까닭이 없지 않을 듯하므로, 안용복은 앞질러 먼저 처단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대체로 왜인의 기를 꺾어 자복시킨 것을 안용복의 공(功)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의 뜻도 그렇게 여겨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여러 번 아뢰면서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참고 자료

장한상(張漢相, 1654~1724), 울릉도사적 (鬱陵島事蹟) 원문 전체와 번역
  • 이맹휴 춘관지(春官志)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 조선통신사 계미사행록, 성대중 저 / 홍학희 역 , 소명출판, 2006
  • 안용복이 실제로 '두 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안용복 방문 당시의 일본측 기록 두 가지
안용복 관련 일본의 기록
안용복의 배에 달려 있던 깃발 - "울릉도 두 섬은 조선의 땅이다"
1696년 안용복 : 일본의 기록 - 원록9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 (2)
원록9 병자년 조선주 착안 일권지각서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백기주 태수가 안용복에게 말했다는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兩島旣屬爾國之後....
숙종실록에 실려있는 이 표현은 이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이 분명히 울릉도 만이 아닌 울릉도와 독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