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런승만은 run(도망치다)와 이승만의 합성어로 이승만이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도망갔다며 조롱하는 단어이다.

이승만은 정말로 런했는가?

보통 좌익들이 제기하는 이승만에 대한 왜곡이, '런승만'이라며 조롱하는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다. 우남 이승만이 '직접'서울을 사수하란 방송을 틀어 시민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고, 그러면서 대통령 자신만 몰래 빠져나가려 한강다리를 폭파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건 결코 사실이 아니다. 우남 이승만은 결코 한강인도교 폭파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 그건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결정에 의한 폭파인 것이었다.

  • 한강교 폭파 타임라인
한강교 폭파.png


방송 내용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비판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이승만 정부이승만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을 포함해서 이를 재구성하고 각색한 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틀은 방송. 정작 이 방송이 들릴 시점에서 이미 이승만은 국군과 피난민들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 다리마저 끊고 서울에서 도망친 후였다. >------->그러나 이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무고한 시민들을 서울에 가둔채, '자신만 살려고' 일부러 방송했다는 것은 황당한 주장이다. 27일 당시 이승만 동정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 동정.png

보면 알겠지만, 참모진들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겨우 서울을 탈출시킬 정도로 이승만 자신은 서울을 사수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의 본심.png

외부링크

법원의 판결

한강인도교 폭파는 "정부와 국군, 의회가 서울 사수에 대해 통일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며 "현재의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 해도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한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한 데에 대해서도 "서울 시민의동요를 방지하기 위한것"이라고 봤다.[1]

진실은? - 6.25전쟁 개전 타임라인

  • 1950년 6월 25일 04:00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
  • 1950년 6월 25일 09:30 아직 북한의 공격을 몰랐던 이승만은 식사 후 경회루로 낚시를 하러 감
  • 1950년 6월 25일 09:30 같은 시각 프란체스카 여사는 치과에 치료를 받으로 감
  • 1950년 6월 25일 09:40 이승만이 남침에 대한 보고를 받음
  • 1950년 6월 25일 10:30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와 개성이 함락되었고 춘천 근교에 인민군이 도달했다고 보고
  • 1950년 6월 25일 10:30 이승만은 '국가수호를 위한 전쟁목표 4원칙' 설정
  1.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2. 한국민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친다.
  3. 북한의 불법 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해방 후 미-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38선은 북한이 먼저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없어졌다.
  4.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
  • 1950년 6월 26일 03:00 서울 상공에 인민군 공습경보가 울리는 등 전황이 악회되는 것을 확인한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을 구하라고' 항의. 맥아더는 긴급지원을 약속함.
  • 1950년 6월 26일 03:00 이승만은 워싱턴에 있던 장면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에게 무기지원 약속을 이행할것을 전하라고 지시.
  • 1950년 6월 26일 14:00 이승만은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로 나가 상홍을 보고받음. 이때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고받음.
  • 1950년 6월 26일 14:40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함.
  • 1950년 6월 26일 오후 서울 상공에 인민군의 야크기가 계속 돌아다녔고 이때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방공호에 들어갈 정도로 상황이 긴박해짐.
  • 1950년 6월 26일 밤 각료들이 이승만의 피난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
  • 1950년 6월 26일 21:00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이 경무대로 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분자들이 탈옥하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올 것임으로 일시 피난을 해서 전쟁 전반을 지도해야 된다"고 보고.
  • 1950년 6월 27일 02:00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등이 경무대로 찾아와 피난을 간곡하게 건의하지만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주장하며 거절. 프란체스카 여사도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한민국 존속이 어려워진다"고 피난을 설득하지만 이승만은 거절.
  • 1950년 6월 27일 02:00 인민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에 피난을 결정함. 이때 이 보고는 피난을 위한 참모들의 거짓말이라고 밝혀짐.
  • 1950년 6월 27일 03:30 이승만은 열차에 탑승하여 남하하기 시작.
  • 1950년 6월 27일 11:40 대구에 도착하지만 이승만은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을 명령.
  • 1950년 6월 27일 12:30 기차는 서울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감.
  • 1950년 6월 27일 오후 기차가 대전에 도착했으니 신성모 국방장관이 서울이 함락되었다고 전화함. 이는 이후 대통령이 서울에 오지 못하게 할 의도로 한 신성모 국방장관의 거짓말로 밝혀짐.
  • 1950년 6월 27일 오후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유엔의 대북 군사제재 결의와 트루먼의 무기원조 명령 결의를 전달함.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정부를 옮기기로 결정.
  • 1950년 6월 27일 밤 무초 미국 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와 미국의 참전을 전함. 이 말을 듣고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방송을 해야겠다고 상의.
  • 1950년 6월 27일 22:00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해 "유엔과 미국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의 방송을 하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