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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윌슨 레이건(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 40대, 41대 대통령으로서 1981~1989년에 재임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헐리우드 배우, 노조위원장, 캘리포니아 주지사(1967~1975년)를 지냈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북부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1932년에 유레카대학교(Eureke College)를 졸업한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에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한 뒤에는, 배우가 되어 몇 개의 대작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위원장으로 두 번 선출되었는데,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뿌리뽑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에는 TV로 무대를 옮겼으며, GE(General Electric) 공장에서 '동기 부여를 위한 강사'(motivational speaker)로 활동했다.

그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서 공화당으로 이적한 1962년까지는 민주당원이었다. 1964년 대선에서는 그가 지지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가 민주당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이때부터 새로운 보수의 대변자로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지지 세력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여,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적자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1969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시위대에 대항하여 군을 투입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재선에 성공한다. 1968년과 197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1980년의 세 번째 도전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어,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취임 시의 나이가 69세로서 당시로서는 역사 상 최고령의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 이 기록은 2017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깨졌다. 1984년에는, 재선을 위한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과의 대결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차이로 승리하였다.

취임하자 마자, 레이건은 완전히 새로운 정치 경제적인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공급 부분에 방점을 둔 그의 경제 정책,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세율을 인하하였고, 규제를 완화하였으며, 정부 지출을 줄였다.

첫 번째 재임 기간 중 암살범의 총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만, 긴급 수술을 통해 구사일생을 회복한다. 또, 마약과의 전쟁을 벌였으며, 공공 부문 노동자들과도 싸운다. 두 번째 재임 기간 중에는 인플레이션이 12.5%에서 4.4%로 낮아졌으며, 평균 실질 GDP 성장률이 3.4%에 이른다. 또, 국내 재량 지출을 삭감하고, 감세를 실천했으며, 군사비를 증가시켰다(이 때문에 전반적인 정부 지출은 증가함). 이 기간 중에는 중대한 외교 문제가 많았는데, 냉전 종식, 리비아 폭격,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콘트라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지 4년 뒤인 1987년에는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한 연설에서 소련 총비서인 마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를 향해 "이 벽을 허물라!"고 요구했다. 고르바초프와 대화를 지속하는 가운데 소련과의 무기 경쟁의 강도를 높여감으로써 '데탕트'(détente; 관계 개선)에서 '롤백'(rollback)으로 냉전 정책을 전환하였다. 코르바초프와의 대화를 통해 결국 중거리핵전력조약(INF Teaty)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은 양국 핵무기의 감축에 관한 조약이었다. 그의 임기가 끝난지 불과 10개월 뒤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그 다음 해에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1991년 12월 26일에는 소련이 붕괴하였다.

1989년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 그의 지지율은 68%였는데, 이것은 현대 미국 대통령의 퇴임시 지지율로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지지율과 함께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이후 최초로 임기를 마친 연임 대통령이었다.[1] 대중 설득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위대한 소통자(Great Communicator)'라는 별칭을 얻었다.[2] 퇴임 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1994년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이 발견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2004년 6월 5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초기

로널드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주 Tampico이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Jack Reagan(1883–1941)은 아일랜드 가톨릭 이민자의 자손으로서 세일즈맨이자 작가였고, 어머니 Nelle Clyde(1883–1962)는 영국 이민자의 자손이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백악관 개인 숙소의 2층에 거주했는데, 가끔 "다시 가게 위층에서 살고 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독실한 개신교(Disciples of Church)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God and Ronald Reagan'을 집필한 Paul Kengor은 레이건의 사람의 선함에 대한 믿음은 그의 어머니의 낙천적인 신앙으로부터 온 영향이었다고 말하였다. 레이건 가족은 인권 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인종 차별에 반대했다. 레이건은 '한번은 여관 주인이 흑인들의 숙박을 거절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들을 데려다 집에서 잠자리를 제공하고, 그 다음날 어머니께서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딕슨 중고등학교(Dixson High School)를 다녔는데, 여기에서 연기, 스포츠, 이야기하기(storytelling)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1927년 로웰 파크에서의 인명구조원의 일이었는데, 6년 동안 77명을 구했다고 한다. 유레카대학교에서는 Tau Kappa Epsilon 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응원단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경제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그는 캠퍼스의 정치, 스포츠, 연극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다재다능한 학생"으로 명성이 높았다.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약했고, 수영팀에서는 주장을 맡았으며, 학생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연예계 활동

1932년 유레카대학을 졸업한 후,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었다. 1937년 시카고 컵스팀의 아나운서로서 캘리포니아에 갔다가 카메라 테스트를 받고 워너브라더스(Warner Brothers)와 7년 계약을 맺었다. 처음 몇 년 동안 B급 영화에 출연하다, 1937년의 Love is on the Air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후 꾸준하게 인기를 쌓아서, 1941년에는 영화관 대표들이 뽑은 '신세대 인기 스타 5인'에 들기도 했다. 1942년에는 많은 평론가들의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 Kings Row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로 무비 스타로 부상하여 주급이 세 배로 뛰었지만, 그때 마침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면서 입대를 명령받게 되어 최고의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1941년에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SAG)의 대표단에 선출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다시 복귀하여, 1946년에는 부회장이 되었다. 1947에는 회장에 당선되어 1952년까지 연속해서, 그리고 1959년에 다시 회원의 선택을 받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영화계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FBI이 노력에 협력하기도 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레이건은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출석해서, "저는 미국 시민으로서 이 집단(공산주의 집단)에 대한 두려움이나 분노 때문에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포기하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1950년대 말에는 TV로 진출하여, 인기 주간 드라마 시리즈였던 General Electric Teater의 호스트가 되었다. 이 계약에 따라 GE 공장을 다니면 수없이 많은 강연을 하여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로 레이건은 전국적으로 꽤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결혼 생활

1940년 1월 26일, 레이건은 동료 배우였던 제인 위먼(Jane Wyman)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레이건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대한 이견으로 이 두 사람은 1949년에 이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생 친구 관계를 유지하였고, 레이건의 죽음에 위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은 위대한 대통령이었을 뿐 아니라, 친절하고, 신사적이고, 위대했던 한 남자를 잃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이 될 낸시 데이비스(Nancy Davis; 1921-2016)와는 1949년에 만났다. 당시 배우 협회 회장이었던 레이건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여배우 때문에 공산주의자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은 1952년 3월 4일 결혼했다. 이 두 부분 간의 극진한 사랑은 너무나도 유명한데, 1994년에 레이건이 미국 국민을 상대로 쓴 편지에 잘 드러난다: "나는 최근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의 유일한 소원은 낸시가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1998년에 낸시도 Vanity Fair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관계는 정말 특별합니다. 우리는 정말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그래요. 제 인생이 로니(레이건)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말은 저의 진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초기 정치 경력

그는 헐리우드 민주당원으로 출발했고,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그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우익으로 전향하여 1962년에는 공화당원이 되었다. 자신이 활동하던 다양한 좌익 성향의 단체 뒤에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영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전향의 이유였다.

GE에서 강연자로 활동하던 시절 GE의 고위 경영자였던 Lemuel Boulware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Boulware는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자유 시장, 반공, 감세, 작은 정부. 1964년에, 레이건은 배리 골드워터 대선 캠페인의 대표적인 보수 대변인으로서 활동했다. 이때 발표했던 '선택한 시간'(A Time for Choosing)이라는 유명한 연설 속에 그의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국민을 통제하지 않고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강제와 강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선택의 시간에 와 있습니다 ... 우리는 흔히 좌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좌우와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위와 아래가 있을 뿐입니다. 질서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꿈으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전체주의로 추락하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 1964년 10월 27일

골드워터는 낙선했지만, 이 연설은 레이건의 지명도를 높이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레이건은 현직 재임 주지사였던 팻 브라운(Pat Brown)을 눌렀다. 1968년에는 공화당 대선 예비 경선에 출마하여, 닉슨, 록펠러(Nelson Rockfeller)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1970년에는 Jesse M. Unruh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한다.

재임 기간 동안, 버클리대학교 학생들의 과격 시위에 대항해 결국 군을 투입하는 등 낙태, 사형제도, 이혼 등과 관련된 일을 겪으면서 나중에 대통령으로서 추구하게 될 정책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대선 도전

1976년에 다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지만, 중도 보수인 제럴드 포드(Gerald Ford)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깝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포드는 지미 카터에게 패하여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1980년에는 공화당 후보로 지명이 되어 현직 지미 카터 대통령과 대결하였다. 그는 유세 기간 중 경기 부양을 위함 감세, 국민의 삶에 대한 정부의 개입 축소, 주의 권한 강화, 강력한 국방 등을 기치로 내걸었다. 예비 경선의 경쟁자였던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였고, TV 토론에 비친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이란 미대사관 인질사태로[3] 발목잡힌 지미 카터와의 간격을 넓혀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레이건은 489:49라는 앞도적인 차이로 40번째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현재의 위기 속에서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정부가 그 문제 자체이기 때문입니다.(In this present crisis, government is not the solution to our problem; government is the problem.)[4][5]
- 취임사

1984년 선거에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525개 선거구에서 승리하며 민주당 후보였던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을 압도하였다. 선거 초반에는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점 때문에 약간의 논란도 있었지만, 레이건은 두 번째 토론에서 이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저는 나이가 이 선거의 주요 이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상대 후보의 미숙함이나 무경험을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I want you to know that also I will not make age an issue of this campaign. I am not going to exploit, for political purposes, my opponent's youth and inexperience.)"[4][6]

재임 시 주요 이슈, 사건

학교 기도

1962년에 대법원은 주 공무원이 공식적인 기도문을 만들어서 학교에서 암송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했다. 1981년에 그는 이에 관한 헌법 수정안을 제안했다: "이 헌법의 어느 조항도 공립 학교나 공립 기관에서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기도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또, 누구도 정부나 주에 의해 기도에 참여하라고 요구받지 않을 것입니다." 레이건은 미국의 정신적 기초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의 근간이 제도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이다.

암살 미수

1981년 3월 30일, 레이건은 존 힝클리 주니어(John Hinckley Jr.)라는 암살기도 범인의 총탄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는 불행을 당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인기가 치솟아 지지율이 무려 73%까지 올라갔다. 그가 암살 고비를 극적으로 넘겨 링컨 이래 케네디까지 유지되어 온 0 으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사람은 대통령 재임 중에 반드시 죽는다는 징크스가 깨졌다. 2000년에 당선된 조지 부시도 무사히 임기를 채웠다.

연방 항공 관제사 파업

1981년 8월, 정부 부문 노동조합의 파업을 금지하고 있는 연방법을 위반하고, 연방 항공 관계사 노동조합(PATCO)이 파업을 시작했다. 레이건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48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복귀를 거부했자, 레이건은 11,345명의 관제를 해고하고, 새로운 요원을 채용하고 훈련할 때까지 그 자리에 군 관제사를 투입하였다. 공공 행정에 관한 대표적인 참고 서적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PATCO 직원을 해고한 것은 관료 집단을 통제하려는 대통령의 뚜렷한 의지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민간 무문에게도 더 이상 노동조합에게 겁먹을 필요 없다는 명확한 신호를 보냈다."

레이거노믹스(레이건 경제)

지미 카터의 재임 마지막 해인 1980년과 레이건의 재임 마지막 해인 1988년의 평균 인플레이션은 각각 12.5%와 4.4%였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실업률도 7.5%에서 5.4%로 낮아졌다. 평균 실질 GDP 성장률은 3.4%, 평균 명목 GDP 성장률은 7.4%를 기록했다.

레이건은 자유시장의 철학(laissez-faire)과 이에 근거한 재정 정책을 옹호하고, 대규모 감세로 경기 활성화를 추구하면서, 공급 주도 경제에 기반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아서 라퍼(Arther Laffer)의 경제학 이론을 인용하면서, 레이건은 감세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함으로써 세수를 확대하고, 이를 통해 세율 인하로 인한 손실을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이거노믹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공의 증거로 특정한 주요 경제 지표의 개선을 지적하는 반면, 레이거노믹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연방 예산 적자와 국가 부채의 증가를 지적한다. 그의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 정책은 기록적인 국방비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1981년의 경제 회복 세법(Economic Recovery Tax Act of 1981)을 통해 소득세율이 대폭 인하되어, 최고 세율 구간에서는 70%에서 50%로, 최저 세율 구간에서는 14%에서 11%로 낮아졌다. 1982년에는 직업 교육 파트너쉽 법(Job Training Partnership Act of 1982)으로 최초의 공공과 민간 부문의 파트너쉽이 시작되어, 일자리 창출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6년에는 양당 합의로 세제 개혁법(Tax Reform Act of 1986)가 통과되어, 세법이 매우 단순화되었다. 이 세법 개혁을 통해 600만 명의 가난한 미국인들이 소득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모든 소득세 구간의 소득세가 인하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대로 경기가 살아나면서 연방 소득세가 연평균 8.2%가 증가하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이나 로버트 먼델 같은 경제학자들은 레이건의 세금 정책이 미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그 결과 1990대의 경제 호황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소련과의 마지막 체제 경쟁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괴뢰 정권을 세우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레이건은 군사력 강화와 소

각주

  1. 리처드 닉슨도 대통령 연임에는 성공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여 재선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2. And, Yes, He Was a Great Communicator New York Times JUNE 13, 2004
  3. Iran hostage crisis Wikipedia
  4. 4.0 4.1 Ronald Reagan's 10 best quotes Deseret News Feb. 7, 2011
  5. THE 49th PRESIDENTIAL INAUGURATION Ronald W. Reagan January 20, 1981
  6. Ronald Reagan debate inexperience and youth of his opponent youtube 실황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