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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최근 수정 : 2020년 2월 3일 (월) 11:05
Ronald reagan.jpg

로널드 윌슨 레이건(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 40대 대통령으로서 1981~1989년에 재임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헐리우드 배우, 노조위원장, 캘리포니아 주지사(1967~1975년)를 지냈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북부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1932년에 유레카대학교(Eureke College)를 졸업한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에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한 뒤에는, 배우가 되어 몇 개의 대작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위원장으로 두 번 선출되었는데,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뿌리뽑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에는 TV로 무대를 옮겼으며, GE(General Electric) 공장에서 '동기 부여를 위한 강사'(motivational speaker)로 활동했다.

그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서 공화당으로 이적한 1962년까지는 민주당원이었다. 1964년 대선에서는 그가 지지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가 민주당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이때부터 새로운 보수의 대변자로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지지 세력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여,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적자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1969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시위대에 대항하여 군을 투입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재선에 성공한다. 1968년과 197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1980년의 세 번째 도전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어,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종전까지는 이혼 전력은 대통령 결격 사유로 인식되었으나, 그는 이혼 전력자로 처음 당선되었고, 취임 시의 나이가 69세로서 당시로서는 역사상 최고령의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 이 기록은 2017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깨졌는데, 그도 이혼 전력이 있다. 1984년에는, 재선을 위한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과의 대결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차이로 승리하였다.

취임하자 마자, 레이건은 완전히 새로운 정치 경제적인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공급 부분에 방점을 둔 그의 경제 정책,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세율을 인하하였고, 규제를 완화하였으며, 정부 지출을 줄였다.

첫 번째 재임 기간 중 암살범의 총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만, 긴급 수술을 통해 구사일생을 회복한다. 또, 마약과의 전쟁을 벌였으며, 공공 부문 노동자들과도 싸운다. 두 번째 재임 기간 중에는 인플레이션이 12.5%에서 4.4%로 낮아졌으며, 평균 실질 GDP 성장률이 3.4%에 이른다. 또, 국내 재량 지출을 삭감하고, 감세를 실천했으며, 군사비를 증가시켰다(이 때문에 전반적인 정부 지출은 증가함). 이 기간 중에는 중대한 외교 문제가 많았는데, 냉전 종식, 리비아 폭격,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콘트라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지 4년 뒤인 1987년에는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한 연설에서 소련 총비서인 마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를 향해 "이 벽을 허물라!"고 요구했다. 고르바초프와 대화를 지속하는 가운데 소련과의 무기 경쟁의 강도를 높여감으로써 '데탕트'(détente; 긴장 완화)에서 '롤백'(rollback)으로 냉전 정책을 전환하였다. 코르바초프와의 대화를 통해 결국 중거리핵전력조약(INF Teaty)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은 양국 핵무기의 감축에 관한 조약이었다. 그의 임기가 끝난지 불과 10개월 뒤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그 다음 해에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1991년 12월 26일에는 소련이 붕괴하였다.

1989년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 그의 지지율은 68%였는데, 이것은 현대 미국 대통령의 퇴임시 지지율로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지지율과 함께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이후 최초로 임기를 마친 연임 대통령이었다.[1] 대중 설득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위대한 소통자(Great Communicator)'라는 별칭을 얻었다.[2] 퇴임 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1994년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이 발견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2004년 6월 5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초기

로널드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주 Tampico이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Jack Reagan(1883–1941)은 아일랜드 가톨릭 이민자의 자손으로서 세일즈맨이자 작가였고, 어머니 Nelle Clyde(1883–1962)는 영국 이민자의 자손이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백악관 개인 숙소의 2층에 거주했는데, 가끔 "다시 가게 위층에서 살고 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독실한 개신교(Disciples of Church)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God and Ronald Reagan'을 집필한 Paul Kengor은 레이건의 사람의 선함에 대한 믿음은 그의 어머니의 낙천적인 신앙으로부터 온 영향이었다고 말하였다. 레이건 가족은 인권 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인종 차별에 반대했다. 레이건은 '한번은 여관 주인이 흑인들의 숙박을 거절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들을 데려다 집에서 잠자리를 제공하고, 그 다음날 어머니께서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딕슨 중고등학교(Dixson High School)를 다녔는데, 여기에서 연기, 스포츠, 이야기하기(storytelling)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1927년 로웰 파크에서의 인명구조원의 일이었는데, 6년 동안 77명을 구했다고 한다. 유레카대학교에서는 Tau Kappa Epsilon 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응원단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경제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그는 캠퍼스의 정치, 스포츠, 연극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다재다능한 학생"으로 명성이 높았다.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약했고, 수영팀에서는 주장을 맡았으며, 학생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연예계 활동

1932년 유레카대학을 졸업한 후,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었다. 1937년 시카고 컵스팀의 아나운서로서 캘리포니아에 갔다가 카메라 테스트를 받고 워너브라더스(Warner Brothers)와 7년 계약을 맺었다. 처음 몇 년 동안 B급 영화에 출연하다, 1937년의 Love is on the Air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후 꾸준하게 인기를 쌓아서, 1941년에는 영화관 대표들이 뽑은 '신세대 인기 스타 5인'에 들기도 했다. 1942년에는 많은 평론가들의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 Kings Row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로 무비 스타로 부상하여 주급이 세 배로 뛰었지만, 그때 마침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면서 입대를 명령받게 되어 최고의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1941년에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SAG)의 대표단에 선출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다시 복귀하여, 1946년에는 부회장이 되었다. 1947에는 회장에 당선되어 1952년까지 연속해서, 그리고 1959년에 다시 회원의 선택을 받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영화계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FBI이 노력에 협력하기도 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레이건은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출석해서, "저는 미국 시민으로서 이 집단(공산주의 집단)에 대한 두려움이나 분노 때문에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포기하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1950년대 말에는 TV로 진출하여, 인기 주간 드라마 시리즈였던 General Electric Teater의 호스트가 되었다. 이 계약에 따라 GE 공장을 다니면 수없이 많은 강연을 하여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로 레이건은 전국적으로 꽤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결혼 생활

1940년 1월 26일, 레이건은 동료 배우였던 제인 위먼(Jane Wyman)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레이건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대한 이견으로 이 두 사람은 1949년에 이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생 친구 관계를 유지하였고, 레이건의 죽음에 위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은 위대한 대통령이었을 뿐 아니라, 친절하고, 신사적이고, 위대했던 한 남자를 잃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이 될 낸시 데이비스(Nancy Davis; 1921-2016)와는 1949년에 만났다. 당시 배우 협회 회장이었던 레이건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여배우 때문에 공산주의자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은 1952년 3월 4일 결혼했다. 이 두 부분 간의 극진한 사랑은 너무나도 유명한데, 1994년에 레이건이 미국 국민을 상대로 쓴 편지에 잘 드러난다: "나는 최근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의 유일한 소원은 낸시가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1998년에 낸시도 Vanity Fair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관계는 정말 특별합니다. 우리는 정말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그래요. 제 인생이 로니(레이건)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말은 저의 진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초기 정치 경력

그는 헐리우드 민주당원으로 출발했고,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그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우익으로 전향하여 1962년에는 공화당원이 되었다. 자신이 활동하던 다양한 좌익 성향의 단체 뒤에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영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전향의 이유였다.

GE에서 강연자로 활동하던 시절 GE의 고위 경영자였던 Lemuel Boulware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Boulware는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자유 시장, 반공, 감세, 작은 정부. 1964년에, 레이건은 배리 골드워터 대선 캠페인의 대표적인 보수 대변인으로서 활동했다. 이때 발표했던 '선택한 시간'(A Time for Choosing)이라는 유명한 연설 속에 그의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국민을 통제하지 않고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강제와 강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선택의 시간에 와 있습니다 ... 우리는 흔히 좌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좌우와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위와 아래가 있을 뿐입니다. 질서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꿈으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전체주의로 추락하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 1964년 10월 27일

골드워터는 낙선했지만, 이 연설은 레이건의 지명도를 높이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레이건은 현직 재임 주지사였던 팻 브라운(Pat Brown)을 눌렀다. 1968년에는 공화당 대선 예비 경선에 출마하여, 닉슨, 록펠러(Nelson Rockfeller)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1970년에는 Jesse M. Unruh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한다.

재임 기간 동안, 버클리대학교 학생들의 과격 시위에 대항해 결국 군을 투입하는 등 낙태, 사형제도, 이혼 등과 관련된 일을 겪으면서 나중에 대통령으로서 추구하게 될 정책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대선 도전

1976년에 다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지만, 중도 보수인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Gerald Ford)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깝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포드는 지미 카터에게 패하여 연임에 실패했다.

1980년에는 공화당 후보로 지명이 되어 현직 지미 카터 대통령과 대결하였다. 그는 유세 기간 중 경기 부양을 위함 감세, 국민의 삶에 대한 정부의 개입 축소, 주의 권한 강화, 강력한 국방 등을 기치로 내걸었다. 예비 경선의 경쟁자였던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였고, TV 토론에 비친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이란 미대사관 인질사태로[3] 발목잡힌 지미 카터와의 간격을 넓혀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레이건은 489:49라는 앞도적인 차이로 40번째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4]:

현재의 위기 속에서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정부가 그 문제 자체이기 때문입니다.(In this present crisis, government is not the solution to our problem; government is the problem.)[5][6]
- 취임사

1984년 선거에서는 DC와 상대후보 출신주 미네소타를 제외한 49개주에서 승리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선거인단 수 525명을 확보하여 13명에 그친 민주당 후보였던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을 압도하였다.[7] 선거 초반에는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점 때문에 약간의 논란도 있었지만, 레이건은 두 번째 토론에서 이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저는 나이가 이 선거의 주요 이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상대 후보의 미숙함이나 무경험을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I want you to know that also I will not make age an issue of this campaign. I am not going to exploit, for political purposes, my opponent's youth and inexperience.)"[5][8]

  • 레이건 대통령 취임연설, 1981년 1월 20일

재임 시 주요 이슈, 사건

학교 기도

1962년에 대법원은 주 공무원이 공식적인 기도문을 만들어서 학교에서 암송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했다. 1981년에 그는 이에 관한 헌법 수정안을 제안했다: "이 헌법의 어느 조항도 공립 학교나 공립 기관에서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기도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또, 누구도 정부나 주에 의해 기도에 참여하라고 요구받지 않을 것입니다." 레이건은 미국의 정신적 기초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의 근간이 제도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이다.

암살 미수

1981년 3월 30일, 레이건은 존 힝클리 주니어(John Hinckley Jr.)라는 암살기도 범인의 총탄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는 불행을 당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인기가 치솟아 지지율이 무려 73%까지 올라갔다. 그가 암살 고비를 극적으로 넘겨 링컨 이래 케네디까지 유지되어 온 0 으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사람은 대통령 재임 중에 반드시 죽는다는 징크스가 깨졌다. 2000년에 당선된 조지 부시도 무사히 임기를 채웠다.

연방 항공 관제사 파업

1981년 8월, 정부 부문 노동조합의 파업을 금지하고 있는 연방법을 위반하고, 연방 항공 관계사 노동조합(PATCO)이 파업을 시작했다. 레이건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48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복귀를 거부했자, 레이건은 11,345명의 관제를 해고하고, 새로운 요원을 채용하고 훈련할 때까지 그 자리에 군 관제사를 투입하였다. 공공 행정에 관한 대표적인 참고 서적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PATCO 직원을 해고한 것은 관료 집단을 통제하려는 대통령의 뚜렷한 의지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민간 무문에게도 더 이상 노동조합에게 겁먹을 필요 없다는 명확한 신호를 보냈다."

레이거노믹스(레이건 경제)

지미 카터의 재임 마지막 해인 1980년과 레이건의 재임 마지막 해인 1988년의 평균 인플레이션은 각각 12.5%와 4.4%였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실업률도 7.5%에서 5.4%로 낮아졌다. 평균 실질 GDP 성장률은 3.4%, 평균 명목 GDP 성장률은 7.4%를 기록했다.

레이건은 자유시장의 철학(laissez-faire)과 이에 근거한 재정 정책을 옹호하고, 대규모 감세로 경기 활성화를 추구하면서, 공급 주도 경제에 기반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아서 라퍼(Arther Laffer)의 경제학 이론을 인용하면서, 레이건은 감세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함으로써 세수를 확대하고, 이를 통해 세율 인하로 인한 손실을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이거노믹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공의 증거로 특정한 주요 경제 지표의 개선을 지적하는 반면, 레이거노믹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연방 예산 적자와 국가 부채의 증가를 지적한다. 그의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 정책은 기록적인 국방비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1981년의 경제 회복 세법(Economic Recovery Tax Act of 1981)을 통해 소득세율이 대폭 인하되어, 최고 세율 구간에서는 70%에서 50%로, 최저 세율 구간에서는 14%에서 11%로 낮아졌다. 1982년에는 직업 교육 파트너쉽 법(Job Training Partnership Act of 1982)으로 최초의 공공과 민간 부문의 파트너쉽이 시작되어, 일자리 창출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6년에는 양당 합의로 세제 개혁법(Tax Reform Act of 1986)가 통과되어, 세법이 매우 단순화되었다. 이 세법 개혁을 통해 600만 명의 가난한 미국인들이 소득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모든 소득세 구간의 소득세가 인하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대로 경기가 살아나면서 연방 소득세가 연평균 8.2%가 증가하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이나 로버트 먼델 같은 경제학자들은 레이건의 세금 정책이 미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그 결과 1990대의 경제 호황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소련과의 마지막 체제 경쟁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괴뢰 정권을 세우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상황 속에서, 레이건은 군사력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소련을 겨냥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였다. 카터 행정부에서 중단되었던 B-1 랜서 프로그램을 재개하였고, MX 미사일을 생산하는 한편, 소련의 SS-20 배치에 대응하여 서독에 퍼슁(Pershing) 미사일을 배치하였다. 1982년에는 서유럽으로 가는 소련 가스관 건설을 막아, 돈줄을 차단하고 소련 경제에 타격을 가했다.

1984년, 니콜라스 레먼이라는 언론인이 캐스퍼 와인버거(Caspar Weinberger) 국방장관을 인터뷰한 뒤에, 레이건 행정부의 대소 전략을 요약하였다:

그 사회는 경제적으로 허약하고, 정보화 사회로 가기에는 부와 교육 그리고 기술이 부족하다. 모든 자원을 군비에 쏟아붓다 보니, 그 결과, 사회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과 같은 방식의 군비 생산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그들을 파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안전한 세상이 올 것이고, 그 속에 단 하나의 초강대국만이 남을 것이다. 단, 우리가 지금의 지출을 유지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2016년에 레먼은 "'1984년에는 레이건주의자들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뒤에 '이 꿈이 고스란히 현실히 되었다'"고 말했다.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은 소련에 대한 이념 공세에 있어서 보조를 함께 했다. 1982년 영국 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레이건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전진에 맑스-레닌주의는 역사의 잿더미 위에 남겨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83년에는 "공산주의라는 슬프고 기괴한 인류의 역사가 이제 마지막 페이지를 써 내려가고 있다."고 말하며,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언했다. 같은 해, 미국 복음주의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에서 한 연설에서,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다.

1983년 소련 전투기가 대한항공 007편을 떨어뜨려서 탑승객 전원(269명)이 사망하였는데, 사망자 중에 조지아주 국회의원인 래리 맥도널드(Larry McDonald)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레이건은 이 사건을 "대학살"이라 규정하고, 소련이 세계와 세상 사람들의 도덕 규범에 등을 돌렸다고 선언했다. 또, 모든 소련 민항의 미국 취항을 중지시키고, 진행 중이던 협상 중 몇 개를 중단시켰다. 한편, 항법 장치 이상으로 항로를 이탈한 것이 또 하나의 원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유사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글로벌 위치 추적 시스템'(Global Positional System)이 개발되는 대로 바로 민간에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레이건 독트린으로 알려진 정책 하에,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공산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반공산주의 저항 운동을 지원하였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CIA 특수 활동 부서를 파견하여 소련에 대항한 무자히딘(Mujahideen) 군을 지원함으로써 소련군을 몰아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미국이 지원한 군비가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미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한편, CIA는 은밀히 이란 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란 정부는 이 지원에 힘입어 1982년에 정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친소련적인 인 기초를 제거할 수 있었다.

1983년 3월에는 '전략 방어 정책'(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을 도입하여, 전략 핵탄두 미사일에 대한 방어 체계 구축에 나섰다. 레이건은 이 방어망이 핵전쟁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반대자들은 이를 "Star Wars"라고 부르며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당시 대통령 보좌관을 지낸 데이비드 거겐(David Gergen)은 당시를 회상하며 SDI가 냉전의 종식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 로널드 레이건, 힘을 통한 평화 (Peace through Strength)
  • 레이건 대통령, "악의 제국(Evil Empire)" @ 전미 복음주의 협회 연례회의, 1983년 3월 8일

리비아 폭격

1982년, CIA는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가다피(Muammar Gaddafi)를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사악한 3총사"(unholy trinity)라고 불렀다. 1986년 4월 초, 베를린의 한 디스코 무도회장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미군 1명이 죽고, 63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배후에 리비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레이건은 군사 공격을 승인하여 4월 15일부터 리비아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UN 헌장 51조에 근거하여 미국의 자기 방어권을 지지한다는 명분으로 영국 공군 기지의 사용을 허가하였다. 공격이 시작된 후, 레이건은 국민을 상대로 백악관에서 연설을 하였다: "세계 어디에서든 적대 정권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우리 국민이 공격받거나 학대당한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우리는 결단코 대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UN 총회는 이 공격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79:28로 채택하였다.

이민자 문제

1986년에는 이민 개혁 및 통제법(Immigration Reform and Control Act)에 서명하여, 고의적으로 불법 이민자를 고용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한편, 1982년 1월 1일 이전에 미국에 들어와서 계속 거주한 약 200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사면하였다.

이란-콘트라 스캔들

1986년,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이란에 판매한 무기의 판매 대금을 니카라과의 콘트라(Contra) 반군을 지원하는데 사용한 소위 이란-콘트라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미국 법을 위반한 행위였을 뿐 아니라, 국제재판소도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판결하였다. 이에, 레이건은 이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수사를 자청하였다. 이 사건을 수사한 특별 위원회는 레이건이 이 프로그램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레이건의 인기가 한 주만에 67%에서 46%로 급락하였다. 중앙 아메리카 사람들 중에는 레이건의 콘트라 지원을 비판하며 그를 공산주의를 때려잡는 데 미친 사람(anti-communist zealot)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 "레이건이야말로 중앙 아메리카를 구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냉전의 종식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은 질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미국 군사력과의 차이를 상당히 좁혀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집단 농장과 비능률적인 계획 경제로는 이 거대한 군사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특히, 1985년에 소련의 주요 수출품인 석유의 국제 가격이 1/3로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고르바초프 재임 기의 소련은 심각한 경제 문제를 겪게 되었다.

레이건의 첫 번째 목표는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표는 핵무기 방어체계(전략 방어 계획; SDI)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이 새로운 전략이 소련의 핵 미사일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고, 결국 소련은 무기 감축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이건은 1984년과 1988년 사이에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 회담을 열었다. 그는 소련이 더 많은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면, 결국 공산주의를 끝장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회담 중 가장 중요한 회담은 1986년 10월 Reykjavik에서 열린 회담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 고르바초프는 SDI의 중단을 요청했지만, 레이건은 SDI는 방어 체제이며 차후에 이와 관련된 군사 비밀을 공유하겠다고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1987년 6월, 베를린 장벽 앞에서 한 연설에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 총비서, 만약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만약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만약 당신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 문으로 오세요! 그리고 이 문을 여세요! 그리고 이 벽을 부숴버리세요!"라고 말했다. 1987년 12월에는 두 사람이 백악관에서 만나 INF 협정(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서명하여, 육지에 있는 중거리 탄도미사일, 크루즈미사일, 발사대를 모두 제거하기로 합여하였다. 네 번째 정상회담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레이건은 이미 소련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아직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레이건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과는 다른 시간, 다른 시대에 대해서 말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고르바초프의 요청으로, 레이건은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자유 시장에 대해 연설하였다.

유산

1989년 레이건이 퇴임하자, 학자, 역사가, 일반 대중 사이에 그의 유산을 둘러싸고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지지자들은 경제 번영, 냉전 종식, 미국의 자부심과 사기의 회복에 주목했다. 반대자들은 재정 적자, 빈부 격차의 확대, 이란-콘트라 사건을 통한 미국에 대한 신뢰의 추락을 지적했다.

그의 유산에 대한 계속적인 논쟁에도 불구하고, 많은 보수적인 자유주의 학자들은 레이건이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후 모든 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대통령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영국 역사가인 M. J. 힐(Heale)은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말한다: (1) 레이건이 보수주의를 복원시켰다. (2) 국가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3) 상당히 실용적인 보수주의를 실행했다. (4) 대통령과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에 대한 믿음을 다시 살려냈다. (5) 냉전에서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무엇보다, 레이건의 가장 큰 업적은 소련과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를 통해 미국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40년 동안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소련은 2기 레이건 정권 때 물러서기 시작했다. 1989년에 동구권 위성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1991년 12월에 마침내 소련이 해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레이건의 안보 정책, 경제 정책, 군사 정책,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항한 강경 노선이 냉전 종식을 이끌었다고 믿는다.

그는 봉쇄정책(detainment)과 데탕트정책(détente)을 거부하고 소련을 무릎꿇릴 수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고르바초프 정권의 외교부 대변인을 지낸 Gennadi Gerasimov는 "전략 방어 계획(SDI)이 대단한 위협이 되었다. ... 소련 경제는 그런 경쟁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마가렛 대처는 "냉전 시대를 자유 진영의 승리로 끝낼 수 있었던 데에는 레이건의 공이 가장 컸다. 그는 총알 한 발 쏘지 않고 이 일을 해냈다."고 말한 바 있다. Lech Wałęsa 전 폴란드 대통령도 "레이건이 공산주의 붕괴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세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 로널드 레이건, 전사의 서약 (Warrior's Pledge)

어록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은 사람이고, 반공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How do you tell a Communist? Well, it’s someone who reads Marx and Lenin. And how do you tell an anti-Communist? It’s someone who understands Marx and Lenin.”[9]
  • 로널드 레이건 - 믿음의 남자 (Man of Faith)

한국 관련 영상들

  • 레이건 대통령 대한민국국회방문연설, 1983년 11월 12일
  • 레이건 대통령 KAL007기 참사 연설[10]
  • 로널드 레이건, 비무장지대(DMZ) 방문 (1983. 11.13)
  • 대한 뉘우스

각주

  1. 리처드 닉슨도 대통령 연임에는 성공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여 재선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2. And, Yes, He Was a Great Communicator New York Times JUNE 13, 2004
  3. Iran hostage crisis Wikipedia
  4. 198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Wikipedia
  5. 5.0 5.1 Ronald Reagan's 10 best quotes Deseret News Feb. 7, 2011
  6. THE 49th PRESIDENTIAL INAUGURATION Ronald W. Reagan January 20, 1981
  7. 198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Wikipedia
  8. Ronald Reagan debate inexperience and youth of his opponent youtube 실황 동영상
  9. Ronald Reagan > Quotes
  10. https://youtu.be/hA7O27h46A0 레이건 대통령 KAL007기 참사 연설, 1983년 9월 5일 (자막, 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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