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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최근 수정 : 2021년 1월 16일 (토) 00:13
해리 트루먼.jpg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직책 미국 제33대 대통령
(1945.4 ~ 1949.1)
←전임후임→

미국 제33대 대통령
(1949.1 ~ 1953.1)
←전임후임→

정당 민주당
생몰기간 1884년 5월 8일 - 1972년 12월 26일
출생지 미주리 주
학력

인디펜던스 고등학교 (졸업)

경력 영화배우
배우자 베스 트루먼
자녀

마거릿 트루먼

종교 개신교

개요

해리 트루먼은 미국의 제34대 부통령(1945년), 33번째 대통령(1945년 4월 12일~1953년)이었다.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천황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6.25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 원수이다.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 요청과 그 후유증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유럽전선에서 협력하던 관계였으므로 트루먼은 1945년 5월 독일 항복 후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을 극구 요청하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인명 손실이 컸기 때문에 극동에서도 소련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항복을 조기에 받아내어 미군의 인명 손실을 최대한 줄이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에 응한 소련의 만주와 조선 침공은 한반도 분단 및 북한의 공산화로 이어졌다. 이어 중국 본토의 국공내전에서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은 중공군의 승리로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 공산화에 자신감을 얻은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을 설득하여 1950년 6.25 남침 전쟁을 벌이고, 미군이 참전하면서 수만명의 미군이 희생되었다. 소련의 일본전 참전 요구로 미군의 인명손실을 줄여보겠다는 애초의 희망은 끝내 또 다른 미군의 대규모 희생을 초래하여 빛이 바랬다. 미군의 희생이 컸던 월남전도 중국이 적화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미군의 피해는 최소화한 채 승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공산화 된 중국에서 공산당의 폭정은 전시 아닌 평화시에 국민 7천만명이 죽는 인류사 미증유의 참상을 빚어내었고, 오늘날에도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망상으로 도처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 요청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당시에 예상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오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일본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지만 항복을 미루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추가로 원폭이 투하되면서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소련이 8월 9일 새벽에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 침공을 단행한 것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미리 알고 최소의 희생으로 큰 실리를 챙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소련 참전이 없었어도 미국의 두 차례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항복의 지연은 추가적인 원폭 투하만 초래할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당시 미국은 실제로는 추가로 투하할 원폭은 없었다고 하지만 일본은 알 수 없었다.)

냉전

트루먼의 재임 기간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이념 상 자본주의 체제에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유주의 체제인 미국은 냉전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재임 기간에 재무장관의 보좌관이자 IMF설립을 위한 브레턴 우즈 회담의 미국 대표였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마저도 소련의 간첩으로 밝혀졌을 정도로 서방 국가의 곳곳에 소련 간첩과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있었다. 트루먼은 비록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서유럽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 노력했다.

트루먼 독트린과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정책(냉전)은 조지 케넌(1904~2005)의 글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한국과의 관계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한국에 미군을 파견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전쟁 당시 중국 영토인 만주로의 진격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고 확전을 자제하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클레멘트 애틀리의 영향이 매우 컸다.

원래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 격퇴를 위한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해 꺼리지 않는 입장이었다. 6.25 전쟁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대한민국과 유엔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던 1950년 11월 30일, 미국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서 유엔군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원자폭탄 사용도 배제하지 않는다[1]고도 말했다.

그런데 이때 영국 총리였던 클레멘트 애틀리가 미국으로 날아와 원자폭탄 사용 등으로 인해 발생할 확전을 막아야 된다며 트루먼 대통령을 적극 만류했고, 영국도 유엔군임을 내세워 영국 동의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도 이야기했는데[1] 이 이야기에 설득당한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해임하고 이하 유엔군에게 확전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애틀리가 이토록 6.25 전쟁의 확전을 막은 데에는 중국과 인접한 자국 영토 홍콩을 잃기 싫었고, 확전으로 미국이 동아시아에 전력을 쏟으면 서유럽이 소련의 위협에 노출된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70여년이 흐린 지금 상황에서 보면 애틀리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홍콩은 결국 중국에 반환되었고, 서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지긴 했어도 경제선진국으로서 자국의 방어를 위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애틀리의 확전자제요청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정말 근시안적 판단이었다.

참고 자료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시민들을 향해 6.25 전쟁에 참전한 것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영상
  • TRUMAN, 1969 유형: 문화영화 / 수집처: NARA 수집자료 / 제작일: 1969년
트루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영상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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