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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6.25 전쟁(한국전쟁)은 북한 괴뢰 정권의 김일성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선전포고 없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흔히 6.25 전쟁, 한국전쟁(Korean War)등을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외국에서 한국전쟁(Korean War)으로 사용한다. 한국방송공사에서도 이 같은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보통 전쟁의 주체, 발생한 장소, 날짜등을 전쟁의 명칭으로 사용하는데, 6.25 전쟁이란 용어는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기습 남침한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어 옳바른 명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전쟁(Korean War)이란 용어는 외국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단순히 한국이란 나라에서 남과 북이 어떤 이유에선지 모른지만 서로 전쟁을 했다는 의미로 밖에 읽혀지지 않는다. 이 말에는 전쟁을 일으킨 주체도 없고 책임 소재도 알 수 없다. 이 처럼 좌파들의 물타기 전략으로 6.25 전쟁이란 용어를 책임 소재를 흐리게 하기 위해서 한국전쟁이란 말로 바꿔 사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용어다.

원인

김일성과 박헌영의 동상이몽 적화통일 야욕

1949년 3월 초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 일행.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가 보인다. 3월 5일에 스탈린과 만나는데, 이때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말하며 소련의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스탈린은 1950년 초에 남침계획을 승인하고,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1950년 3월 31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여 1개월여 머물렀는데, 이때 남침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있었다.[1]

김일성은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사에서 이미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었다.[2] 이는 그가 인민의 선택과 무관하게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으로 발탁된 시기부터 전쟁으로 남한을 적화통일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후 1948년의 김구김규식 등이 참석한 남북협상 따위는 진심이 결여된 남한 정국을 혼란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지도자가 될만한 경력이나 식견이 없었음에도 스탈린에 의해 꼭두각시 지도자로 발탁된 컴플렉스 때문에 남한 적화 성공으로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를 원했고, 부수상 박헌영도 북한에서 김일성의 식객에 지나지 않는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남침시에 '20만 남로당원 봉기'를 호언장담하며 자신의 지지 세력이 많다고 믿은 남한 적화를 간절히 원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튿날 9월 10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 8개조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남한 적화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후 김일성은 박헌영, 홍명희 등 각료들을 대동하고 1949년 2월 22일부터 소련을 방문하여 한달 가까이 모스크바에 머물며 스탈린에게 북한에 대한 지원과 남침 전쟁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침 승인을 거절했다. 당시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화록이 윌슨 센터에 올라 있다.

1949년 3월 김일성 일행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 영상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 방문 당시 스탈린에게 막대한 선물을 가져다 바쳤고, 전쟁 중인 1952년 11월에도 스탈린의 건강을 위해 인삼 뿌리 15 상자 등 다량의 선물을 보냈다.

They were going to treat the leader with alternative medicine methods, but they did not have time by the spring of 1953.
On November 1, 1952, Deputy Foreign Minister Yakov Malik informed the head of Stalin's secretariat, Alexander Poskrebyshev, about the arrival of Korean gifts, in the isothermal car there were "five tons of rice, five tons of apples and pears, two tons of chestnuts and fifteen boxes of ginseng root."14
14. См. публикацию этих документов 2008 г.: Вождь и культура. Переписка И. Сталина с деятелями литературы и искусства, 1924-1952, 1953-1956 / сост. В.Т. Кабанов. М., 2008.
(14. See the 2008 publication of these documents: Leadership and Culture. Correspondence of I. Stalin with figures of literature and art, 1924-1952, 1953-1956 / comp. V.T. Kabanov. M., 2008.)

소련, 중국과의 결탁

6.25 전쟁(외국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은 북조선의 야욕으로 발발하였으며, 구 소련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남침 개시 이튿날인 6.26일 조직된 북한의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 정령 △위원장 김일성, 위원 박헌영·홍명희·김책·최용건·박일우·정준택.[3] 6.25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건으로, 남한의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공식화 하고 있다. 미군의 정보에 의하면 군사위원회는 실제로는 1950년 2월~3월에 구성되었고[4], 6월 26일 대외적으로 공식화한 것이라 한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거짓말로 밝혀졌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폭파한 대동강 다리를 건너 남하하는 피난민들 : Max Desfor (1913 ~ 2018) AP 통신 기자가 1950년 12월 4일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처럼 북한 주민 다수가 김일성의 공산 학정을 피해 월남하였다.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5][6][7]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50년 초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을 승인한 배경에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최종 승리하여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반도 유사시 중공군이 개입할 여건이 마련된 것과, 소련이 미국에 이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등의 상황변화가 있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1950년 3월 31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여 1개월여 머물렀는데, 이때 남침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

1950년 4월 방소기간 대화록

아래는 소련군 장성 출신으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이자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드미트리 볼코고노프(Dmitri Volkogonov, 1928~1995)의 증언이다.[9][10]

러 볼코고노프 장관, 김일성이 소련에 남침 지원 요청 시사 [고대석] MBC 뉴스데스크 1992-06-25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인 볼코고노프 장관은 MBC와의 회견에서 지난 1950년 초 김일성이 모스크바와 북경에 각각 전쟁에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왔다고 증언했습니다.

모스크바 고대석 특파원의 보도입니다.

기자 : 볼코고노프 장군은 스탈린이 중국군과 북한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직후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서 미국이 패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핵폭탄을 사용할 것이며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고 밝혔습니다.

볼코고노프 장군 (옐친대통령 군사보좌관): 당시 미국은 핵무기에서 소련보다 우위였다.

스탈린에겐 대응무기가 없었다.

당시 소련은 몇 개의 핵무기 밖에 없었다.

기자 : 그는 또 한국전이 6월 말에 시작된 것은 우연히 아니라 당시 소련 지도부가 6월 말에는 비 때문에 미국이 비행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볼코고노프 장군 (옐친대통령 군사보좌관): 한국전은 소련의 잘못이었다.

한국전은 무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거짓으로 밝혀진 음모론들(남침유도설)

남침 유도설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아래의 두 가지를 소개한다. 남침 유도설은 미국 시카고 대학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그 외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나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순한 의도에서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6·25남침 못믿는 사람들 있다니 안타깝다”
미 하바드대 아담 울람 교수 인터뷰 MBC 뉴스데스크 1992-06-25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애치슨 라인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어선이었던 애치슨 라인이 6.25 전쟁의 원인으로 이야기되는 경향이 최근까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은 분단 직후부터 꾸준히 남침을 원했으며 스탈린과 김일성이 공모하여 남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애치슨 라인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남침전쟁의 주도자는 김일성 아닌 스탈린

브루스 커밍스는 또한 남침전쟁을 주도한 사람은 김일성이며, 일제시대에 일본군 지휘관으로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와 전투한 김석원 같은 사람을 이승만이 국군의 요인으로 기용하여, 김일성이 이를 응징하려한 것이 남침의 주요 요인이었던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11]

나는 그런(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는대로 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침공한 첫번째 주동자는 스탈린이 아닌, 김일성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에게 제한된 지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면적 침략을 감행했다. 나의 가장 심한 비평가들, 캐서린 위더스비[12]와 같은 사람도 지금은 (나의 견해를) 인정한다. 캐서린은 늘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탈린의 전쟁이다. 스탈린이 단추를 눌렀다’라고. 나는 그런 주장에 내 귀를 닫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일 리가 없기에. 그리고 지금 판명됐다. 게릴라 전쟁이 아닌,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 전쟁을 치르기로 한 결정은 김일성이 내린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김석원은 그 일과 아무 관련도 없을 뿐더러, 김혜순김석원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 커밍스의 주장과 달리 일제시대에 김석원김일성이나 김혜순과 아무 관계도 없었으므로 김석원 같은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억지이다. 김일성이 남침을 주장한 목적도 남한적화를 자신의 공로로 만들어 여러 파의 연립으로 취약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 고작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김석원 같은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서일 리가 없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될 때부터 남침적화를 공언하고 있었지만[13] 자신의 힘으로는 실현 불가능했다.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모택동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 공산화에 성공하자 스탈린이 남침을 허용해준 것이다.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인 것이나, UN 안보리의 UN군 참전 결의안에 소련이 기권한 것이나, 휴전협상 타결을 계속 지연시킨 것 등도 스탈린의 결정이니 6.25 전쟁은 큰 틀에서 스탈린의 세계전략일 뿐 김일성의 전쟁이라는 것도 무리한 주장이다. 스탈린이 일개 소련군 대위에 불과했던 김일성 같은 자를 믿고 그의 주장대로 끌려 다녔을 가능성도 없다.

6.25 남침 이틀전 스탈린이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내린 지령문이 발굴되어 전쟁이 스탈린의 승인하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재차 명백히 확인된다.

전개

남침 준비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인 3만 7천명을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

1949년 7월 20일, 중공은 국공내전이 끝나자마자 바로 중국 인민해방군 164, 166사단 소속 조선족 병사들을 지니고 있던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들려 북한으로 보냈다. 그리고 1950년 4월 18일,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156사단의 조선족 병사 전원 또한 모든 무기와 장비를 들고 북한 원산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중공이 북한에 3개 사단 37,000여 병력을 이송하고 바로 조선인민군으로 편성하였다. 164사단을 조선인민군 제2군단 제5사단으로 재편하고, 166사단은 신의주로 돌아와 제1군 제6사단으로 편성했으며 156사단은 제1군 제12사단으로 재편했다. 그때 조선인민군에서 사단, 여단장 이상의 간부는 모두 중국 동북 항일연합군과 중국인민군 화베이 의용군 출신이었다. 그리고 조선족 병사들에게 중국공산당 당원에서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 불만도 많았지만 사상교육으로 전향시켰다. 6월 25일, 기습 남침에서 중국 국공내전에서 장기간 전투경험을 쌓은 조선족 병사들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민군으로 둔갑하여 파죽지세로 남한을 초토화하였다. 그중 166사단은 한국 남단의 전라도까지 밀고 내려갔다. 하지만 연합군의 인천 상륙으로 북으로 퇴각해 올라갔고 절반만이 겨우 살아 돌아갔다.

휴전 후 조선족 병사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37,000명 중 30%는 죽고 20%가 포로로 잡혔으며, 30%는 조선에 정착했고 나머지 20%는 중국으로 돌아가 정착했다. 북한에 남은 조선족 장병들의 운명은 더욱 비참했다. 제2군 군단장 김무정은 1950년 12월에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면됐고 제5사단장 김창덕은 조선총참모부 국장으로 승진했으나 “연안파” 숙청 운동 때 숙청됐고, 제6사단장 방호산은 전쟁 후 조선인민군 육군대학 총장으로 재직했으나 박일우와 함께 1955년 12월 “반당종파활동”을 이유로 체포, 면직되었으며 또 많은 이들이 반혁명으로 몰려 생을 마감했다.

북한의 기습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하여 전쟁이 발발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

UN군 참전

UN의 한국전 참전 여부를 결정하는 안보리 회의에 소련이 불참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므로서 참전안이 가결되었다. 소련의 불참 배경을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많았으나, 스탈린이 직접 쓴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 대통령에게 보내는 1950년 8월 27일자 메세지에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한국전(韓國戰)에 미군(美軍)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싸움을 붙이기 위해 유엔 안보리(安保理) 불참’

스탈린은 고의로 소련이 안보리 회의에 불참하게 하여 미국의 참전이 용이하도록 길을 터주고, 중공을 개입시켜 한국전을 미국과 중국의 전쟁으로 만들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으로서는 미국과 중공 관계가 가까워지면 공산권 내에서도 중공이 라이벌로 부상하여 소련이 독점적 주도권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한 정황이 많다.

옐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이었던 볼코고노프의 증언에서도 스탈린모택동에게 미군이 패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고하므로,[14] 스탈린은 애초에 한국전 승리를 원하지 않았고, 중국과 미국이 싸우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스탈린에게 남침전쟁의 승인을 여러 차례 간청한 것 때문에 한국전은 김일성이 주도해서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실제로 전쟁 개시에 대한 결정권은 스탈린이 가지고 있었고, 이후의 전쟁 양상도 김일성 아닌 스탈린의 의도대로 진행되어 간 것을 볼 때 전쟁에 대한 주요 결정권과 책임은 스탈린에게 있었다고 보여진다.

낙동강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 전투(洛東江 防禦線 戰鬪, 영어: Battle of the Naktong River Defense Line), 미군 전사에는 Battle of the Pusan Perimeter(직역: 부산 주변부 전투, 의역: 부산 교두보 전투)로 기록되어 있는 이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1950년 8월 4일부터 같은 해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이 전역은 6.25 전쟁 사상 주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투입된 유엔군 병력 14만 명이 북한군 98,000명의 마지막 침공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지속적인 공세에 계속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났는데, 이 방어선은 한반도 남쪽에 구축된 140 km의 방어선이었다. 미군 주도의 유엔군은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6주 동안 막아냈다. 주요 전투는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 직전에 1950년 7월에 당시 6사단 2연대를 지휘하는 함병선 대령이 지연전을 펼쳤고 문경 이화령 전투에서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을 육탄공격으로 막아내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된 채병덕 소장이 경상남도 서부에서 벌어진 하동 전투에서 전사하여 육군참모총장 겸 국군 총사령관인 정일권 소장이 대한민국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 총지휘하였다.

당시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활약으로 대구 북쪽 근방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국군 1군단장 김홍일 소장이 9월 1일까지 방어전에서 활약했으나 퇴임했고 2대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인천상륙작전과 연계한 반격 작전을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총참모장 강건 중장이 전사하고 막심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고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따라서 국군과 UN군의 반격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김일성박헌영이 9월 29일자로 스탈린에게 보낸 소련의 원조와 파병을 구걸하는 서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자 다급해진 김일성박헌영은 9월 29일 소련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불리해진 전황을 설명하고 소련의 긴급한 원조와 국군과 UN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할 경우 소련군의 참전까지 요청하고 있다.

방한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해준 6.25 관련 문건에 포함된 김일성박헌영이 9월 29일자로 긴급히 스탈린에게 보낸 지원요청 편지(한국어본)가 뉴스 말미에 나옴.

중공군의 불법개입

6.25 당시 김일성박헌영이 1950년 10월 1일자로 모택동에게 보낸 중공의 파병을 구걸하는 서신. 중국어(p.1)와 한국어(p.2) 두 가지로 보냈다.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이어 북진할 것으로 예상되자 다급해진 김일성박헌영은 10월 1일자로 모택동에게 약속한대로 중공군을 파병해달라는 요청편지를 보낸다.

1950년 10월 2일 중국의 모택동스탈린에게 보낸 한국전 참전 결정 전문도 공개되었다.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개시한 10월 1일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로 정했다.

중공군은 이 전쟁에 개입할 명문이 없었다. 즉 불법개입이다. 자기네들도 이것을 의식해서 의용군 명목으로 불법개입을 한다.

모택동 입장에서는 유엔군이 북한 뿐만 아니라 만주에 까지 들이 닥칠 것을 염려했다. 신생국이었던 중공은 차라리 한반도에서 미군을 막아내자고 해서 참전을 결심한다.

중공군의 상당수는 국공내전 때 항복한 국민당군이었다. 이래서 모택동이나 중공입장에서는 못 미더운 것들을 한국에 보내 잘 싸우면 좋고, 죽으면 처리되서 좋고 해서 무기도 제대로 안주고 내몬 것이다.

이승만이 휴전협장에 몽니식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을 때 이들 상당수는 중국대륙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자유중국인 대만으로 가기를 원했다. 이승만은 포로 수용소에 있었던 이들을 석방하고1만 4천명 가량 대만으로 보낸다.

휴전협상에서 포로 처리 문제가 엄청 큰 쟁점 사항이었기에, 정전을 희망하던 나라들 미국이나 영국 등에는 거의 빅엿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대만에서는 이들을 반공의사라며 환영하고 반공선전 교육에 써먹는다. 이러한 비슷한 일이 중1980년대 중공에 비행기를 하이재킹해서 한국에 불시착해 대만으로 가기를 요구했던 사건에서도 또 비슷하게 대만에서는 반공의사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6.25때 중공군으로 참전해 반공포로로 대만에 간 사람은 1만명이 넘어가고 그들 2세가 성장하여 대만방송의 아나운서가 되고 지방의 시장이 되기도 했다.

소련군의 참전

소련군도 6.25 전쟁에 직접 참전했다는 것이 근래에야 밝혀졌다. 당시에 미국은 소련군 참전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확전을 두려워하여 이를 비밀에 부쳤으므로 소련군의 참전 사실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전에 참전한 소련군인으로 알렉산드르 이그나티에프,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 가브릴 코로트코프 등이 알려져 있다. 소련 정부가 소련군의 한국전 참전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탓에 이들은 참전용사로서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한국전 당시 미 해군 조종사 Royce Williams 대위는 1952년 11월 18일에 동해상의 미 항모 Oriskany에서 미해군 최초의 제트 전투기 F9F Panther를 발진하여 소련 공군기와의 공중전에서 30분간 미그-15기 4대를 격추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소련군 참전을 비밀에 부치려는 미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의 공은 인정받지 못한 채 50년간 비밀에 부쳐졌다.

미 상원서도 한국전 ‘잊힌 영웅’ 윌리엄스 대령에 명예훈장 수여 추진 VOA 2022.11.1
US pilot shot down four Soviet MiGs in 30 minutes – and kept it a secret for 50 years CNN January 20, 2023
“톰 크루즈보다 10년 앞섰다” 원조 ‘탑건’, 해군십자훈장 받았다 매일경제 2023-01-22
2014년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푸틴의 소련 공군 참전 인정

2024년 6월 북한을 방문한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소련 공군의 6.25 참전을 인정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번 방북을 계기로 소련군의 6·25 참전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고 정부가 평가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이 확대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1950~1953년 (조국)해방전쟁에서 소련 조종사들이 수만번 전투비행을 했다고 말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1950~1953년 조국해방전쟁이란 북한이 6·25 전쟁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당국자는 "소련 공군 조종사들이 6·25 전쟁에 투입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소련과 러시아는 현재까지 6·25 전쟁에 참전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는데 푸틴 대통령이 이번 방북에서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26일 이재훈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 있던 소련 공군의 전투보고서에 6·25 전쟁에 참전한 소련 공군의 활동이 기록됐다.

    이 보고서는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활동을 기록한 것으로 500여페이지에 달한다.

    보고서에는 6·25 전쟁에 투입됐던 소련 공군 64전투비행단의 탄생 과정과 당시 활동 상황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1953년 3월 3일 오전 9시 7분 기록에는 미그 15 전투기 18대가 출격해 연합군과 교전했다는 내용까지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전투기에서 촬영한 항공사진과 판독 결과도 포함됐다.

    보고서에서 소련 공군은 6·25 전쟁 당시 6만3229회의 전투비행을 했고 연합군 전투기 1309대를 격추했다고 썼다.

    소련과 러시아는 그동안 소련 공군의 6·25 전쟁 투입 사실을 공식 확인해주지 않았는데, 최근 북한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이 언급하면서 주목받았다.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1.4 후퇴

교착상태

제공권 제해권을 모두 가졌지만, 전쟁을 끝내려면 역시 육군전력이 필요했고 대규모 희생이 따랐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여 무차별 폭격을 당했는데 그러자 휴전선 인근에 거대한 지하 갱도 벙커 만리장성을 쌓았다.

유엔군 즉 미군 입장에서는 작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미군의 희생이 있었고, 다시는 이러한 전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스탈린의 본 의도= 별로 가치도 없는 한반도에서 미국이 묶여 정작 중요한 유럽전선에서 소련이 영향력을 확대한 다는 것을 이때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제한전(완전히 희생을 감수해서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 제한된 전쟁)을 방침으로 삼는다.

이후에도 지리한 고지쟁탈전 한뼘의 땅이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1차세계대전의 참호전 비슷한 양상이 이어진다. 중국이나 미국 모두 휴전을 너무 하고 싶어했다. 미국은 아이젠하워가 아예 대선공약으로 전쟁을 끝내겠다고 했고, 실제 한국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이미 38선이 무효화 되었고 이번 기회에 북쪽영토를 다 수복해서 통일하기를 원했다. 또 스탈린 입장에서는 미국을 별 가치없는 한반도에 묶어 놓고, 유럽에서 동구권등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중국도 소련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중국이 한반도에서 희생을 치루는 것도 스탈린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이승만과 스탈린만 휴전을 반대한 것.

김일성은 서울을 어떻게든 빼앗고 싶었지만(실제로 서울을 여러번 뺏겼다 한 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전쟁기간동안), 중국 입장에서는 후반쯤 되면 서울을 탈환하는 게 불가능하고 엄청난 희생이 따를 거라 김일성의 말을 무시한다.

중국입장에서도 지하 갱도를 팠어도, 중공군이 유엔군의 폭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고, 중공군에 인해전술에 맞선 유엔군은 화력을 엄청 보강하는 식으로 나왔기에 피해가 누적되서 휴전하고 싶어서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은 신생국이라서 국력도 아직 많이 미흡했다. 실제 사상자는 중공군이 제일 많았다.

스탈린이 네들 잘 싸우고 있는데 계속 하라고 했을 때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종주국 국가였으니 진짜 속이 터졌을 것이다. 물론 중공이나 모택동이 소련에 말을 항상 잘 들은 건 아니었다. 국공내전 때도 소련은 양자강 이남으로 진격하지 말라고 했는데, 모택동은 스탈린의 말을 씹고 양자강 이남으로 진격해서 대륙을 다 먹었다. (모택동이 스탈린 말을 들었다면, 중국이 양자강 이북 이남으로 분단 되었을 지도 모른다. 스탈린은 아마 중공이 중국대륙을 다 먹는 것도 원하지 않은 것 같다.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 사이가 좋기 힘든 나라다. 지정학적으로 봐도)



휴전 성립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남한 적화의 희망이 사라지자 김일성은 휴전을 원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유럽 쪽에 신경쓸 여력이 없도록 한국 전선에 붙잡아두기 위해 휴전을 반대하여 협상이 지리하게 계속되며 지연된다. 그러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돌연 사망하자 휴전협상은 급물살을 타 넉달 후인 7월 27일에 타결된다.(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정유재란이 끝난 거랑 비슷하다)

국제법적으로 한국전은 종전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휴전 상태에 있다.

명칭

해외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우리는 그렇다면 독립 전쟁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1차 중동전쟁을 독립전쟁으로 부르듯이

일본에서는 조선전쟁이라고 한다. 쵸우세이센소우.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 즉.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또 항일원조전쟁이라고도 부르는 모양.

전쟁의 피해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기습 공격, 남침(南侵)전쟁을 일으켰다. 1953년 7월 27일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한국군 62만여명(전사 17만8569명, 부상 55만5022명, 실종·포로 4만2769명), 유엔군 16만명(전사 4만670명, 부상 10만4280명), 북한군 60만~80여만명(전사 약 52만명, 실종·포로 약 9만8000~12만명, 비전투 손실 17만7000명 등), 중공군 36만~100만명(전사 11만~15만명, 부상 22만~80만명, 실종·포로 2만5000~2만9000명), 남한 민간인 피해 99만명(사망·학살 37만3599명, 부상 22만9625명, 납치·행방불명 38만7744명 등), 북한 민간인 피해 15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등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명의 절반이 넘는 1800여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 아시아·태평양전쟁사의 권위자 존 다우어(John W. Dower)가 추정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 사망자(징병·징용 사망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등) 수가 약 7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韓國戰爭被害統計集) (國防軍史硏究所, 1996) 국립중앙도서관

전쟁의 영향

6.25전쟁이 부정적인 영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숙군과정에서 완전히 골로 갈뻔한 박정희가 6.25때 다시 발탁이 된다. 박정희 개인과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구사일생 같은 것이었고, 6.25 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안보상으로 번영의 기초를 쌓게 된다.

국민들의 반공의식도 고취되었고,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수는 12만 9천명

김일성은 6·25전쟁 기간 중 남북한 지역에서 계획적인 숙청 및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전쟁 전후 북한군 등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연구보고서: 민간인 학살을 중심으로》에 의하면 북한 정권 및 인민군, 빨치산 등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12만8936명에 달한다.
6·25 사흘 만인 1950년 6월28일… 인민군 제9땅크여단 서울대병원 점령
국군·환자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사살… 훗날 수습된 유골만 1000여 구
한변 "6·25 당시 북한군, 서울대병원 난입해 900여명 학살" 연합뉴스 2022-06-28

잊혀진 국군포로 6만명

  •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온 국군포로 자녀들은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에 특히 분개한다. "국군 포로 자식으로 딸로 살아내느라고 수고했다고 와서 잔등이라도 한번 쓸어주면 덧나나요." 최 씨는 말했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탈북민만 보면… 온 대한민국이 어쩔 줄 모르는데, 북한에서 자기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그 불쌍한 병사의 딸은 들여다도 안본다는…." 이때부터 최 씨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 여기 군인들 보면 말해요. 너희 군대 절대 가지마라고… 전쟁 일어나면, 포로되면, 우리 아버지처럼 또 아오지 탄광 간다고. 너희 젊은 사람들은 도망치라고, 전쟁나면." 최 씨는 최근 다시 논란이 된 위안부 문제에 빗대 이렇게 덧붙였다. "종군위안부 문제요, 나라가 없을 때 가장 연약한 여인들이 겪은 문제에요… 그 상처에는 지금 다치면 피고름이 나오고, 나라가 있으면서 북한 땅에 가서 이 나라 젊은이들(국군포로)이 당한 그 상처에는 지금도 다치면 선지피가 콸콸 쏟아진다고."[15][16][17]
올해도 국군포로에 관심 없이 6·25 행사

6.25 전후의 남북한 인구 변동

6.25 전쟁 기간에 전사자 및 민간인 사망자 수는 남북한이 엇비슷할 것으로 보이나, 전후 북한 인구는 크게 감소한 데 비해, 남한 인구는 거의 줄지 않았다. 이는 다수의 월남자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1961년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북한의 총인구는 1949년 말 962만2000명에서 1953년 12월 849만1000명으로 113만1000명(8.8%) 감소했다. 북조선중앙통계국자료에 의하면 이 수치보다 더 많은 179만8000명이 감소했다.
  • 전쟁 중인 1952년 12월말 월남 피난민 총 수는 685,316명이라는 국방부 통계가 있다. (아래 책 D7쪽)
韓國戰亂三年誌 : 自檀紀4285年7月1日 至檀紀4286年7月27日, 서울 : 國防部政訓部, 檀紀4287[1954년]: D7쪽

해방직후부터 건국이전까지 월남민 수는 150만 가량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6.25 때의 월남 피난민 약 70만명까지 합하면 해방 후 총 220만명 가량이 월남한 셈인데, 1949년 북한 총인구가 962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총인구의 20% 이상되는 엄청난 인원이 월남한 것이다. 6.25 때 남북한 공히 수십만의 전사자와 민간인 피살자가 발생했지만, 휴전 후 남한 인구는 월남 피난민 때문에 오히려 증가한 반면에, 북한 인구는 1백만명 이상 감소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49년 5월1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회 인구조사’였다.이 때 인구는 2천18만8천641명으로 파악됐다.

한국전쟁 중인 50년과 51년에는 보건사회부의 발표가 남아있다.50년 2천35만6천명,51년 2천44만1천명이었다.그런데 이 인구조사 발표는 실제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49년의 조사를 토대로 각도 도지사의 보고에 의한 추계였다.

52년과 53년에는 내무부의 추계가 남아있다.52년 2천52만6천명과 53년 2천1백54만6천248명이었다.53년의 인구가 전년도보다 1백만명 이상 급증한 것은 배급을 늘리기 위한 유령인구 때문으로 추측된다.54년 보건사회부의 인구통계는 2천1백91만3천명이었지만 이도 실제조사가 아니라 전년도에 기준한 추계이다.결국 정부가 발표한 50년부터 54년 사이의 인구 수는 정확하지 못하다.

55년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상주인구가 2천20만2천256명이었다. 이는 현역 군인과 형무소 수형자 등을 뺀 숫자이다.한국전쟁 시기의 인구 증가율은 1.1%였다.그러나 한국전쟁후 베이비 붐이 일어 55년 이후 66년까지 인구 증가율은 2.8%를 기록했다.그러다가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된 66년부터 85년까지는 1.7%로 떨어졌다.

.......

○45만∼72만명 월남 추정

전쟁으로 인한 인구변동의 또다른 충격은 인구의 대규모 이동현상이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월남인구의 추정치는 45만∼72만명에 이르고 있다.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강제로 납치되거나 그 밖의 이유로 넘어간 이들의 수도 대략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 북한 정권 수립 후 총 월남민 수는 514만이라는 정부 기록도 있는데 상당히 부풀려진 것 같다.
(1949년말 북한인구가 962만이므로 북한정권 수립이후 6.25 전쟁 기간에 월남한 숫자가 500만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拉北(납북) 8萬(만) 5千(천) 여명 北傀政權(북괴정권) 수립 이후 5百(백)14萬(만)명이 越南(월남) 경향신문 1983.07.04
피난민 240만 명 월남가족 514만 명 전쟁미망인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 국가기록원 영상 (1989년)

미국의 세균전 논란

[일부 反美측 주장 반박… 6·25 연구의 대가 웨더스비 교수]
한국전 교착상태 빠진 中이 反美여론 만들려고 기획하고 北이 동조해서 만든 선전전
스탈린 死後 새 지도부 '세균전 관련 거짓주장이 소련 위상에 해 끼쳐' 판단
천젠 , 캐스린 웨더스비 , 션즈화 , 밀턴 라이텐버그 지음
오일환 , 이연식 , 방일권 (편역) 옮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세균무기를 실제로 사용했을까?
4장에서는 전술핵무기와 생화학 무기 통제에 관한 전문가 밀턴 라이텐버그의 글과 함께 부록으로 소련공산당 내부 문서와 중국 측 공문서를 포함해 30건이 넘는 기밀문서와 기록을 소개하였다. 그 중에 압권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던 헝가리의 티버 머레이(Tibor Meray) 기자의 회고와 분석이다. 과연 이 기자는 세균전설이 왜 날조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까. 또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위생부장으로서 이 사건 날조의 주역이었던 우쯔리(吳之理)의 회고와 뒤늦은 고백은 그 내막을 여과 없이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구소련 기밀문서와 中 군고위층 증언으로 이미 허위 판명된 주장

소련과 북한의 ‘6·25 북침설’ 조작 책자 간행 유포

6·25전쟁 와중에 북한과 구소련이 전쟁 발발 책임을 남한과 미국 측에 떠넘기기 위해 ‘북침(北侵)설’의 근거를 모아 국제사회에 배포한 자료집이 발견됐다. 북한 문화선전성 대외문화연락부 산하 신조선출판사가 1951년 12월 출간한 ‘조선 동란을 일으킨 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자료’라는 제목의 259쪽 분량의 책이다. 발간사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수로 북한 정권 수립 직후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을 맡았던 박헌영이 썼고, 책은 러시아어와 영어는 물론 독일어와 체코어로까지 번역 출간돼 국제사회에 배포된 것으로 확인됐다.
책의 내용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내어준 이승만 정부와 국군이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경무대와 용산 육군본부 등에 남기고 간 외교전문과 군사문서 등 문서 29편을 취합해 ‘6·25전쟁은 북침’이란 논리를 알리는 데 집중돼 있다.

남침유도, 북침 설 등등 좌파학자들 사이에서 수정주의 판을 쳤는데, 소련의 기밀문서가 해제되면서 이런 수정주의들을 싹다 들어갔다.


외부 링크

한국전쟁 북침설 잠재운 볼코고노프 장군...남침입증 비밀문건 공개
"한국전쟁은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 3인이 공모한 해방전쟁" 단언
스탈린 남친전쟁 승인-중공군 참전문건 등 극비전문 첫 공개 '충격'
전쟁발발시 극동군총사령관 직속 특별정보팀장 코로트코프 박사
소련·북한군 공동작성 '선제타격작전계획' 모사본 전격 공개 파문
전투명령서-부대 이동계획-침공방향-서울일대 부대 섬멸계획 등 담겨
“6·25 전쟁은 북한 남침” 구소련 기밀문서 공개 조선일보 2020.06.28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김영호,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2] 자유세계 지켜낸 트루먼과 맥아더 조선일보 2010. 6. 22
오규열,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3] 전쟁을 부추기고 이용한 모택동 조선일보 2010. 6. 23
김기철 기자,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중공軍, 휴전후에도 北 잔류… "점령군처럼 행동" 비판받아 조선일보 2010. 6. 23
이지수,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4]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조선일보 2010. 6. 24 종합 A08면
차상철,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5] "유엔군 철수하면 北進" 압박하자 美, '비상시 이승만 감금' 검토 조선일보 2010. 6. 25

6.25 관련 참고 서적

6∙25전쟁이란?
6∙25전쟁 통계
존 톨랜드의 6·25전쟁 (전 2권) 존 톨랜드 지음 | 김익희 옮김 | (바움, 2010.06.10) | 1권 436쪽, 2권 468쪽
토르쿠노프 저, 구종서 역,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서울 : 에디터, 2003) 중앙일보 2003.06.27 5면
  •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
South to the Naktong - North to the Yalu (PDF Version)

6.25 관련 원천 사료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2년 11월 방한시에[18] 6.25 관련 구 소련 극비 문서들을 한국에 전달해 주기로 약속하고,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방러시에 넘겨받은 문서들임.[19]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1. 전쟁발발과 휴전 중앙일보 1994.07.21 종합 4면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2. 김일성 전쟁준비 보고 중앙일보 1994.07.22 종합 35면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3. 蘇.中비밀방문,병력배치 중앙일보 1994.07.23 종합 30면
<러시아 외무부 한국전관련문서 요약> 4. 끝 중앙일보 1994.07.24 종합 30면
마오쩌둥에게 “우리 자체 힘으로 (패전) 위기 극복 가능성 없다”고 매달려
마오쩌둥의 파병 초안, 형식은 지원군이지만 정규군 파견 드러나
정전협정에 “중국 인민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 주장
6·25전쟁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중국, 미국에 함께 맞선 북-중 혈맹 강조
  1. KOREAN WAR ORIGINS, 1945-1950 This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sheds light on the question of "who started the Korean War?"
  2. KOREAN WAR, 1950-1953 A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related to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3. KOREAN WAR ARMISTICE On July 27, 1953,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ceasing hostilities and bringing an end to the Korean War.
  4. KOREAN WAR BIOLOGICAL WARFARE ALLEGATIONS In 1951 and again in 1952, China,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alleged that the United States conducted biological warfare (BW) in areas of the PRC and in the DPRK.
  5. CHINA AND THE KOREAN WAR A collection of materials documenting China's involvement in all stages of the Korean War : Wilson Center

사진 자료

영상 자료

해방 직후 북한 정권 수립 및 남침 준비 과정에 대한 영상

한국전쟁 지도자와 주요 군사령관

6.25 전쟁 4대 영웅[20]
미국 국기.jpg
맥아더
미국 국기.jpg
리지웨이
태극기.jpg
백선엽
태극기.jpg
김동석


각주

  1. 1.0 1.1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2. 민주조선 자주독립의 길, 김일성 장군 중요 논문집, (북조선로동당중앙본부 선전선동부, 1947) :八.一五 一週年을 記念하면서 朝鮮同胞에게 告함 : p.28
  3. Regarding the organization of the military committee .군사위원회 조직에 관하여(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자료센터)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4. RG 319,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Intelligence Document File Publication 1947-62, Entry # 1004H (UD), ID 950054 : ATIS-FEC Interrogation Report, Box No. 334, 950054 KG 1121, etc. (NARA문서,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p.79
  5.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6. Kathryn Weathersby, The Korean War Revisited Wilson Quarterly Summer 1999
  7.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
  8. [뉴스 속의 한국사] 김일성, 스탈린과 회담서 "3일내 전쟁 끝날 것" 장담했대요 조선미디어 / 신문은 선생님 2020.06.23
  9. 러 역사학자 볼코고노프 장군 영면 - 조선일보 1995. 12. 7
  10. [격동의 모스크바 이야기]...(5-1) 한국전쟁 진실 밝힌 두 러시아인 뉴스핌 2019년 02월 15일
  11. [전쟁 60년 화해 10년] 브루스 커밍스 인터뷰 :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 2009-12-31
  12. Kathryn Weathersby ICAS (Institute for Corean-American Studies)
  13.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김일성의 해방 1주년 기념사에서 남한 적화통일 의지 표명 우남위키
  14. 러 볼코고노프 장관, 김일성이 소련에 남침 지원 요청 시사 [고대석] MBC 뉴스데스크 1992-06-25
  15. https://www.bbc.com/korean/features-53174047 6.25: 잊혀진 국군포로의 잊혀진 딸들… 그들은 최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16.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1&aid=0000544599 6·25 참전용사 기리는 묵념하는 통합당
  17. 2020년 총선후, 여당 민주당의 518 기념식과 노무현 기념식에는 상갓집 개처럼 참석을 하였다. 6.25 기념일에는 국회 회의에 앞서 묵념으로 갈음하였다.
  18. 대한뉴스 제 1933호-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방한 - YouTube
  19. [한러정상회담] 옐친 대통령, 6.25관련 문서 우리 측에 반환 MBC 뉴스데스크 199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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