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드 준장 납치사건[1]

진행과정

북한은 4월 휴전협정이 진행 중일 때 노동당 부위원장인 박상현을 77포로수용소에 위장 침투시켜 해방동맹의 조직을 인수한 후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을 만들었다. 박상현은 특별결사대와 함께 5월 7일 오후 3시께 76수용소에서 수용소 소장 프랜시스 도드(Francis Dodd)[2] 준장을 납치. 인질극을 벌인 후 5월 10일 풀어주었다[3].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포로수용소장인 도드 장군이 포로들에게 납치당한 사건으로 이 사건을 통해서 전 세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알려지게 되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 등 공산정권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그려 전시하고 있다.[4]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김일성,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려있고,[4] 인민군 군가를 부르고 공산주의를 찬양해도 소극적인 포로수용소 경비병들은 이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도드 장군이 납치되고 포로들은 지들이 마치 점령군인 것처럼 4가지 요구를 했다.

  1. 야만적 행위, 모욕, 고문, 혈서로 반공표어를 쓰도록 강요하는 일과 위협, 감금, 대량학살, 기총사격, 독가스와 세균전 및 원자탄 시험을 즉각 중지할 것. 국제법에 의하여 포로들의 인권과 개인의 생명을 보장할 것.
  2. 북조선 인민군과 중화인민의용군 포로들의 불법적인 소위 자유 송환 정책을 즉각 중지할 것
  3. 수천명의 북조선인민군 및 중화인민 의용군 포로들로 구성된 포로 대표단을 불법적으로 재무장 또는 노예화하기 위한 강제 심사를 즉각 중지할 것
  4. 북조선인민군 및 중화인민 의용군 포로들로 구성된 포로 대표단을 즉각 승인하고 이와 긴밀히 협조할 것.

독가스 세균전 원자탄 실험 같은 것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5] 포로등의 위의 4가지 요구사항은 전형적인 선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북한군의 심리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만 콜슨 장군은 포로들은 국제법에 원칙에 따라서 인도적으로 대우할 것을 약속하고 2번은 자기 능력 밖의 주장이라서 할 수 없음을 명백히 했고, 3,4번 조항을 받아들여서 도드 장군이 5월 10일 9시 30분에 석방된다.

도드장군뿐만 아니라 콜슨 장군도 굴욕적인 대응으로 결국 미국 행정부는 신입 마크 클라크 사령관에게 이들에 대한 처벌, 일부는 파면까지 요구했지만, 마크 클라크 사령관은 이들을 조사할 시간과 권한을 일임해달라고 요청하고, 조사 끝에 기존 보고서가 몇 가지를 은폐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도드 장군과 콜슨 장군을 강등시켜야 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하고 워싱턴에서 이를 승인하게 된다.

마크 클라크 사령관은 후임 포로수용소장에 당시 2사단 부사령관인 헤이든 보트너 준장을 수용소 소장으로 임명했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187 낙하산 전투 연대를 포함한 중원 부대를 거제도로 증파시켰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포로들은 좀 더 작은 단위로 분산 수용하기로 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인도적인 방침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의 일부인 1천5백명이 스크럼을 짜면서 극렬하게 반항했다. 하지만 미군은 최루탄과 진동 수류탄만으로 이들 제압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미군 1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 당했다. 저항하는 포로들이 31명이 피살당하고 13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때 포로들이 죽은 것은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공산주의자 포로들과 반공 포로간의 갈등 때문이었다. 즉 반공 포로는 수용소 분산 수용을 찬성했지만, 친공 포로들은 이를 반대하면서 친공 포로들이 반공포로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러한 폭동이 진압되고 포로들이 이송된 이후에 수용소 내부에서 어머 어마한 것들이 발견되었다.

천막 막대로 만든 3천여 자루의 창, 1천여개의 가솔린 수류탄, 4천 5백 자루의 칼, 망치, 곤봉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제76수용소와 제77 수용소 사이에는 지하로 통하는 지하통로를 뚫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극렬하게 포로의 분산 수용을 방해한 것은 도드 장군의 납치로는 부족해서 아예 거제도를 모두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제 UN군 경비 부대를 점령할 계획을 지시한 지령 문건이 발견돼 진압작전이 늦었더라면 거제도는 피바다가 될 뻔했다.

주동자

이것을 주도한 사람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이학구 총좌(우리나라의 대령에 해당)였으나, 그 내부에는 그 보다. 훨씬 서열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박사현(마크 클라크의 회고록에는 박상현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자료를 참고하면 박사현으로 생각됨)이었다. 그는 당시 포로 명단에 “전문일”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며, 그는 일본 패망후 소련에서 북한에 들어온 거물 공산주의자 36명 (스탈린이 북한 정부를 이끌 주요 공산당 간부로 양성해 놓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참고로 북한으로 들어온 이 36명 중에 남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 후 소련파 공산주의자 200여명이 5번에 걸쳐서 북한으로 들어오는데 위의 증언이 맞다면 그는 제 4번째로 들어온 36명에 속한다. 이들은 대개 기술자 및 간부 그룹이었다.) 남일은 당시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협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박사현을 거제도로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박사현은 그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오게 된 것이 남일의 명령이었음을 실토했다.

그는 포로 수용소 내의 모든 활동을 총지휘하고 있었으며, 도드 장군의 납치 사건도 그가 직접 지휘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포로 수용소 내에서 당의 지시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사형 언도를 내린 자도 바로 그였다. 당시 마크 클라크 장군을 이들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 행정부는 휴전협정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이를 북송시켜 버렸다.

소련 비밀 문서에 1953년 9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재북소련 임시 대리대사 에쓰. 뻬. 라자레프(Лазарев С.П.)의 9월 9일자 일지에 따르면, 대담에서 사법부 부상 김택영은 남조선에서 공화국으로 송환 된 전쟁 포로들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겼던 2명의 소련계 조선인 박사현과 리천송이 귀환하였다고 전하였다- ​

박사현이 소련파임을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박사현은 북으로 돌아가서 영웅 대접을 받고 무임소 장관까지 진급했지만 1960년 그의 인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또한 북한으로 돌아간 이학구 역시 10년 뒤1963년 그 간 쏟아지는 멸시와 냉대를 참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하였다[6].

제6열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친공포로들의 무기에는 흔히 화염병이라고 불리는 가솔린 수류탄이 1000개나 포함되어 있다. 다른 무기야 어떻게 만들 수 있다고 해도, 화염병만큼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이것은 누군가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포로 수용소 옆에는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 중에는 간첩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크 클라크 사령관은 자신의 회고록인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이들을 "제6열"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하고 있는 남일에 의해서 지시를 받았다고 쓰고 있다. 또한 포로들은 군무원을 통해서도 이러한 화염병등의 무기를 만드는 재료를 공급받았을 것이다. 참고로 제5열은 내부의 적인 스파이 혹은 공작원을 의미한다.


trivial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인 문용형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였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