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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1911~2001)은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으로 와서  1946년 9월부터 1948년 2월까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재직한 후 소련으로 귀환했다. 당시 북한에서 최고위 조선인 권력자들인 [[김일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91%90%EB%B4%89 김두봉(金枓奉, 1889~1961 ?)]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습하였다. 1990년대에 두 차례 방한하여 해방 직후의 [[김일성]]과 북한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박일(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1911~2001)은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으로 와서  1946년 9월부터 1948년 2월까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재직한 후 소련으로 귀환했다. 당시 북한에서 최고위 조선인 권력자들인 [[김일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91%90%EB%B4%89 김두봉(金枓奉, 1889~1961 ?)]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1990년대에 두 차례 방한하여 해방 직후의 [[김일성]]과 북한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 그의 한국식 이름은 박일(朴一)이나 소련 이름은 박-일(Пaк-Ир)을 성처럼 사용하여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박일(Пaк-Ир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Park Il Peter Alexandrovich)로 표기했다.
* 그의 한국식 이름은 박일(朴一)이나 소련 이름은 박-일(Пaк-Ир)을 성처럼 사용하여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박일(Пaк-Ир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Park Il Peter Alexandrovich)로 표기했다.

2021년 5월 7일 (금) 11:57 판

박일(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1911~2001)은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으로 와서 1946년 9월부터 1948년 2월까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재직한 후 소련으로 귀환했다. 당시 북한에서 최고위 조선인 권력자들인 김일성김두봉(金枓奉, 1889~1961 ?)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1990년대에 두 차례 방한하여 해방 직후의 김일성과 북한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 그의 한국식 이름은 박일(朴一)이나 소련 이름은 박-일(Пaк-Ир)을 성처럼 사용하여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박일(Пaк-Ир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Park Il Peter Alexandrovich)로 표기했다.

생애

한국 방문

그는 1991년 8월 서울에서 열린 한민족철학자대회에 참석하러 처음 방한하여 해방 직후의 북한 실정과 김일성에 대한 증언을 했고, 1999년 6월 서울대학교 대학기록관리실의 초청으로 재차 방한하여 19일부터 22일까지 강연과 구술증언 채록에 응했다.

오는 21일부터 서울서 열리는 한민족철학자대회에 참석할 예정인 朴씨는 당시 5-6명의 무장군인이 엄중 경계를 한 모란봉 기슭 한 비밀가옥에서 46년11월부터 47년12월까지 1주일에 5회, 하루 2시간씩 이들 두 金씨에게 교육을 실시했으며 당시 이같은 사실은 극비에 부쳐졌다고 말했다.

교육내용은 주로 '변증법적 유물론', '볼세비키사상과 활동','레닌의 세계관','소련공산당사'등이었는데 특히 사회주의 이론지식이 부족한 김일성에 대해 소련군측은 집중교육을 시키도록 주문했다는 것이다.

朴씨는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金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北韓(북한) 진주한 蘇軍(소군)사령부서 특별 지시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참고 자료

p.354 김일성은 소련어는 전혀 못했고, 조선말도 몹시 서툴렀다. 그는 중국말로 생각한 뒤 이를 조선어로 번역하여 말하느라 말이 몹시 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