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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세우기]], [[민족 정기 회복]], [[친일청산]], [[한일 청구권 협정]],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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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표제어의 내용을 참고하고, 내용이 없는 표제어에는 이 문서와 내용상 일관성을 갖추어 설명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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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러일전쟁]], [[고종]], [[아관파천]],


[[을사오적]], [[러일전쟁]], [[고종]], [[아관파천]],


== 개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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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6일 (화) 10: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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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TV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강연.


작성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김용삼,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04~212쪽을 기반으로 작성으로 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 민족 정기 회복, 친일청산, 한일 청구권 협정, 역사왜곡


다음 표제어의 내용을 참고하고, 내용이 없는 표제어에는 이 문서와 내용상 일관성을 갖추어 설명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을사오적, 러일전쟁, 고종, 아관파천,

개념

1905년(고종 42)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주한 일본 공사이자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였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에 따르면 ‘곤노스께’)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한다. 제2차 한일협약(전문)을 참고할 것.

역사적 배경

이 협정의 역사적 맥락은 대한제국의 성립 과정 및 러일전쟁과 그 이후에 일본이 당시의 패권국들과 맺은 각종 조약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해를 위하여 연대순으로 관련된 주요 사건을 열거한다.

대한제국의 정치적 성격

이 당시 대한제국갑오경장을 통하여 겨우 마련한 근대적 개혁의 발판을 뒤엎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종의 황제로서의 전제권이 강화되어 모든 정사가 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러일전쟁부터 한일의정서 조인까지

러일전쟁 발발 2주 뒤에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한일의정서>가 실린, <고종실록>의 해당 부분. 번역은 한일의정서(전문)을 참고할 것.


특히 이 때에는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이 한창이었는데, 일본과 러시아는 국운을 걸 정도로 크게 격돌하였다. 세계 (현대) 전쟁사에 남을 여러 건의 전투가 이 때 벌어졌다.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러시아와 일본이 모두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단순히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이렇게까지 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은 잘 맞지 않는다.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를 이해해야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이었고, 그 가운데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러일전쟁에 정확한 내용이 기술되기를 바란다.

어쨌든 이 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


전쟁이 발발한 뒤 2주 뒤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 조인(調印)한다.

이는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이루어진 일종의 군사동맹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한국 영토의 어느 곳이나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일의정서(전문)의 ‘제4조’를 참고할 것.)

제1차 한일협약 체결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뒤 6개월이 지난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다.

총 3개 항으로 이루어진 이 협약의 1항과 2항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고문과 외교 고문에 임명하여 이들이 각각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를 일본 정부와 협의,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의 외무대신서리가 바로 윤치호였다.

이로 인하여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은 이름만 남게 되었고,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러일전쟁의 종료 후

1905년 3월 10일, 일본은 봉천(奉天) 전투(또는 펑텐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어 5월 29일에는 쓰시마(對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쓰시마 해전은 지금도 세계 전쟁사(해전사) 또는 국제 관계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크게 무찔렀고, 이로써 사실상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태프트-가쓰라 협약(Taft-Katsura 協約, 또는 가쓰라-태프트 협약) 및 제2차 영일동맹 체결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협약을,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미국과 체결한 협약이 대한제국과 가지는 관련성은 이러하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통치상의 안전을 보장하고, 반대로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국력이 피폐해진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위하여 당대 패권국가였던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였다.

1902년 영국과 1차 동맹(6개 조항)을 체결한 뒤에 새롭게 체결한 2차 영일 동맹은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강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1차 영일동맹의 전문에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완전한 유지를 보장한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새로운 동맹을 맺으면서 이 구절이 삭제되었다. 제2차 영일동맹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가,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지고, 영국은 이 권리를 승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 체결

1904년 9월 5일,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전쟁 배상금과 사할린의 양여, 만주와 청나라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정치, 경제적 이해 관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한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난항을 겪기는 했지만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조약이었다.

이 가운데 2조가 한국과 관련된 것으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에서의 특수한 이익이 있다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指導)와 보호 및 감리의 저치에 대해서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명시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가게 되었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