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정의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4]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을 발단으로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하에 벌어진 초토화 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도는 이미 일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한 걸로도 모자라 결7호 작전이 시행되어 섬이 초토화될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고, 1945년 이후부터 종전 전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는 미군정의 폭정과 사상 최악의 지속적 흉년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때,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그 날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를 조직, 경찰서 기습을 감행해,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린다. 사망자 중 10955명(78.1%)가 토벌대에 의해, 1764명(12.6%)가 무장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망자는 대토벌작전이 벌어졌던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의 기간에 발생했다.


개요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정청과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짓고 3.1절 기념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3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해명하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경찰은 3월 15일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3월 17일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또 다시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4월 10일까지 500명 가량을 검거하였는데 검거자 중 66명의 경찰이 파면되었고 그 자리는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충원됨으로써[5]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7]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 사건은 한국 전쟁이 휴전될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는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해 6월말 9월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7월 27일 한국 전쟁이 휴전되고 그후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전개

제주4․3사건의 배경

8․15 광복과 군정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원자탄을 맞고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전쟁이 끝났다. 그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한민족은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으나 그 기쁨은 잠시였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미․소(美蘇)가 합의하여 북위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북위 38도선은 이와 같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설정된 선이었는데 나중에는 민족과 국토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는 선이 되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 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 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쌍방간의 적개심으로 일어났다.

유엔의 총선결정과 남로당의 5․10선거저지투쟁

2차 대전 종전 4개월 후인 1945년 12월에 미․영․소 3개국 외상은 모스크바 회의에서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수립은 미․소 양군 대표로 구성하는 공동위원회에서 논의하며, 미․영․소․중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신탁통치 안은 대다수 국민과 우익진영은 결사반대했지만, 좌익진영은 반대했다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성하였고, 북쪽의 김일성은 열렬히 찬성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며, 미국은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

이런 와중에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수십 차례 개최되었는데, 미․소 양군대표는 통일임시정부 수립방안에 관해 서로 자국에 유리하게 주장함으로써 합의에 실패하고, 결국 한국문제는 1947년 9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의 통일된 독립정부를 수립”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실시된 5월 10일에는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의 선거를 불가능하게 되었다.

3․1사건과 경찰-주민 충돌사건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만 5천~3만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 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이백 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오후 2시 45분 경, 기마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시위를 막기위해 군중들을 헤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가 타던 말의 발굽에 채였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7]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경찰들과 함께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에는 국민학교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아낙네도 있었다. 3․1사건 이후, 남로당 성향의 주민들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3월의 우도사건, 중문리사건, 6월의 종달리사건, 8월의 북촌사건 등이다. 한편 발포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로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파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10].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11]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하였다.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이후의 이념적인 무장봉기나 국가권력 주도의 학살이 연상되기 어려운, 어느 정도 민중항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고,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철저히 이런 요구 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로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들을 좌익으로 몰아갔다[12].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좌익을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만 했다. 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13]에서 온 서북청년회[14]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을 비롯하여 응원경찰들을 제주도로 파견을 보내, 조병옥의 지휘 하에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때문에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때문에 미군 감찰반의 보고에 따르면 약 3평 정도의 방에 35명이 갇혀 있을 지경이었다. 수용자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처럼,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1947년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도지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하였다. 유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발언하기도 하여,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활동을 했다"며 사태가 봉기로 치닫을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에 맞춰 도내 곳곳에서 서북청년회원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남로당의 4․3무장공격과 미군정의 대응

4월 3일의 무장공격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반란은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을 기습 공격한 것이기에 군경은 일동 긴장하였다.

이 날 반란을 일으킨 무장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본군이 결호작전을 위해 갖고왔다 놓고간 일제 99식 소총, 권총, 수류탄 등 소화기와 군도와 대검 등 칼, 죽창, 몽둥이뿐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빨갱이들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이번 무장반란의 최대 피해자였던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더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보다 소극적으로 나왔던 경비대를 의심하여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출동시키려고까지 하며 광적으로 무장대 진압에 집착했다.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벌어지며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았다.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4][5]은 미군정에서 파견 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전단에서 김익렬은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면서 무장대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무장대는 연대장이 직접 올 것과 협상의 장소와 시기는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회담은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둘은 논의 끝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진행하여 귀순자들의 신병을 보장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는 이러한 협상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정말 이렇게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2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에 대형사건이 터지고 만다.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오라리 방화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이게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 무장반란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원들이 마을로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는 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사건을 조사하러 오라리에 온 김익렬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미군정에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5월 3일에는 귀순을 하러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군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는 일이 터졌다. 총격을 가한 자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이것을 안 김익렬은 경찰들이 진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려 급급한다며 분노했다. 한편 미군정의 태도도 이 사건을 전후하여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제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다시 전투가 재발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셈이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에 나타났다. 이들 일행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을 만나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다시 재발한 무장반란과 충돌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경찰 측에서는 줄기차게 이 반란이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은 이 반란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물증까지 내놓자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고,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모함을 해댔다.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다음 날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되고 말았다. 그의 후임은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이던 박진경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엇다.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19]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중산간마을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써놓았고, 또 제헌헌법 제99조에는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계엄령 선포 당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계엄령 선포가 적법했다는 측은 제헌헌법 이전의 법령인 일본의 계엄법이나 미군정 아래에서 계엄령이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점, 제헌헌법 제100조에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 점 등을 들어 계엄령이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양자가 소송을 건 일이 있었는데, 법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계엄령 선포는 제헌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에게 계엄령의 허점을 지적하며 위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했지만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얼버무렸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24] 그런가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26]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27]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높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북촌리에 나타났다. 북촌리에 살고 있던 1천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킨 군인들은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29]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 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옴팡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30] 이 일로 300~40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 현상이었다고 한다.[31]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 수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모슬포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군경의 강압으로 인해 100여 명이 자수하여 학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 이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또 성산포경찰서 서장으로 일하면서 6.25 전쟁 당시의 4.3 관련 예비검속자 학살을 부당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의 구장인 김성홍은 군경의 물음에도 자신은 "모른다"고 일관하여 혹시 모를 마을 주민들의 학살 피해를 막아주어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미리 출신 순경이었던 강계봉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썼고,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고희준도 성산포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경찰이었던 장성순은 귀순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북 출신이었던 방 씨(본명은 미확인)는 상관의 학살 명령에 총기가 미작동한다며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

물론 이 끔찍한 학살 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외치며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 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수는 4.3 사건 총 희생자의 약 10~20%로 추정된다. 쉽게 말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낮시간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빙자한 학살을 하고, 이들이 저녁에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한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