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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43-10-05-제88여단 대원.jpg|300픽셀|섬네일|왼쪽|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88여단 대원 사진. 제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達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제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제2열:장광적(張光迪, 중국), 풍중운(馮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貴, 중국), 팽시로(彭施魯, 중국)。제3열:양청해(楊淸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俠, 조선), 수장청(隋長靑, 중국)。제4열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進,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
[[파일:1943-10-05-제88여단 대원.jpg|300픽셀|섬네일|왼쪽|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88여단 대원 사진. 제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達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제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제2열:장광적(張光迪, 중국), 풍중운(馮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貴, 중국), 팽시로(彭施魯, 중국)。제3열:양청해(楊淸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俠, 조선), 수장청(隋長靑, 중국)。제4열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進,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
[[파일:김일성 최현 안길.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소련군 88여단 시절의 김일성과 동료들. 왼쪽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靑, 중국인), 최현(崔賢), 안길(安吉). 북한은 이 사진을 연속 조작하는데, 처음에는 중국인 계청만 삭제했다가 다음에는 김일성을 가운데로 이동시키고 오른 쪽으로 기울어진 자세도 바로세웠다. 계청은 1943년 9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받게 되므로 그 이전의 사진이다. 김일성은 88여단에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였으므로<ref>[https://www.unamwiki.org/w/index.php/%EA%B9%80%EC%9D%BC%EC%84%B1#.EB.B9.A8.EC.B9.98.EC.82.B0_.EB.8F.99.EB.A3.8C.EB.93.A4.EC.9D.84_.EA.B0.90.EC.8B.9C.ED.95.98.EC.97.AC_.EB.B3.B4.EA.B3.A0.ED.95.98.EB.8A.94_NKVD_.EB.B9.84.EB.B0.80_.EC.9A.94.EC.9B.90.EC.9D.B4_.EB.90.98.EB.8B.A4.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하여 보고하는 NKVD 비밀 요원이 되다.] : 우남위키 [[김일성]]</ref>, 계청의 시베리아 유형과, 4대대 영장 시세영(柴世榮)이 스파이 혐의를 받고 실종된 사건도<ref>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810 하단 주석 : 1943년 가을</ref> 그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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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여단을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으며, 여단장은 중국인 [https://zh.wikipedia.org/wiki/周保中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다. 그러나 부대의 운영을 실제로 관할하는 사람은 주보중의 상관인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 불리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https://ko.wikipedia.org/wiki/나움_소르킨 나움 소르킨(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이었다.
88여단을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으며, 여단장은 중국인 [https://zh.wikipedia.org/wiki/周保中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다. 그러나 부대의 운영을 실제로 관할하는 사람은 주보중의 상관인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 불리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https://ko.wikipedia.org/wiki/나움_소르킨 나움 소르킨(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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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는 극동전선군 사령부가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의 [https://ko.wikipedia.org/wiki/뱌츠코예 뱌츠코예(Вятское)] 마을에 있었으며, 일본이 항복한 후인 1945년 9월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해체되었다.
부대는 극동전선군 사령부가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의 [https://ko.wikipedia.org/wiki/뱌츠코예 뱌츠코예(Вятское)] 마을에 있었으며, 일본이 항복한 후인 1945년 9월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해체되었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북한 [[김일성]]도 창설 당시부터 이 부대에 소속되어 100여명 정도를 통솔하는 1대대 영장(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였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북한 [[김일성]]도 창설 당시부터 이 부대에 소속되어 100여명 정도를 통솔하는 1대대 영장(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였다. 한편 그는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https://ko.wikipedia.org/wiki/%EB%A7%89%EC%8B%AC_%ED%91%B8%EB%A5%B4%EC%B9%B4%EC%98%88%ED%94%84 푸르카예프] 대장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비밀 요원이었다. 이로 인해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1945년 9월초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한 배경이다.<ref name="agent"/>





2018년 8월 29일 (수) 21:26 판

88여단의 정식 명칭은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Rifle Brigade)이다. 일본군의 토벌에 쫓긴 만주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 잔존 세력이 소련 극동지방으로 도피하여 오자 이들을 수용하여 1942년 7월에 만들어진 중국인, 조선인, 소련인, 나나이족 등 다민족의 혼성부대이다.

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88여단 대원 사진. 제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達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제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제2열:장광적(張光迪, 중국), 풍중운(馮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貴, 중국), 팽시로(彭施魯, 중국)。제3열:양청해(楊淸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俠, 조선), 수장청(隋長靑, 중국)。제4열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進,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
소련군 88여단 시절의 김일성과 동료들. 왼쪽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靑, 중국인), 최현(崔賢), 안길(安吉). 북한은 이 사진을 연속 조작하는데, 처음에는 중국인 계청만 삭제했다가 다음에는 김일성을 가운데로 이동시키고 오른 쪽으로 기울어진 자세도 바로세웠다. 계청은 1943년 9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받게 되므로 그 이전의 사진이다. 김일성은 88여단에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였으므로[1], 계청의 시베리아 유형과, 4대대 영장 시세영(柴世榮)이 스파이 혐의를 받고 실종된 사건도[2] 그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88여단을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으며, 여단장은 중국인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다. 그러나 부대의 운영을 실제로 관할하는 사람은 주보중의 상관인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 불리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이었다.

부대는 극동전선군 사령부가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의 뱌츠코예(Вятское) 마을에 있었으며, 일본이 항복한 후인 1945년 9월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해체되었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북한 김일성도 창설 당시부터 이 부대에 소속되어 100여명 정도를 통솔하는 1대대 영장(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였다. 한편 그는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비밀 요원이었다. 이로 인해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1945년 9월초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한 배경이다.[1]


88여단 소속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은 60여명이었으며, 이들은 해방 당시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권력을 자손들에게까지 세습한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만주서 출생했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한 탓에 중국에 거의 동화된 의식 구조를 가졌고, 자신들끼리 대화도 중국말로 할 정도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박했다.[3] 한자로 된 이름도 러시아어로 적을 때 모두 조선 발음 아닌 중국 발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김일성은 한자 金日成의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4][5][6][7] 해방 당시 김일성도 중국말에는 능했지만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는 증언이 많다.[8][9]


이들은 만주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당원으로서 만주 적화를 위해서 투쟁했을 뿐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소련에서는 해방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한 바 없으며, 소련인들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 소련이 이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운 이유이다. 독자적 생존력이 있는 집단은 소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중등교육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중학 중퇴자인 대위 김일성 외에 대위 최용건,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 상조 임춘추 등의 6인 뿐이고, 그 외 54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5] 최현(崔賢, 1907 ~ 1982)은 한글도 쓸줄 모르는 무학자였다. 이런 저학력자들이 공산주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시 만주의 분위기에 휩쓸려 산야를 숨어다니며 게릴라전을 벌인 경력 밖에 없어 성격도 거칠었기 때문에 국가를 통치할만한 자질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꼴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각주

  1. 1.0 1.1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하여 보고하는 NKVD 비밀 요원이 되다. : 우남위키 김일성
  2.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810 하단 주석 : 1943년 가을
  3. 해방후 귀국길에 오른 김일성 일행을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서 만났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의 증언 : 역구내(驛構內)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중국(中國)말로 얘기들을 하고있었는데 그 어투로봐서 한국인(韓國人)임이 틀림없었읍니다.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4.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5. 5.0 5.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179~185
  7.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8.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9.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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