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여단의 정식 명칭은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Rifle Brigade)이다. 일본군의 토벌에 쫓긴 만주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 잔존 세력이 소련 극동지방으로 도피하여 오자 이들을 수용하여 1942년 7월에 만들어진 중국인, 조선인, 소련인, 나나이족 등 다민족의 혼성부대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의 뱌츠코예(Вятское) 마을에 있었으며, 일본이 항복한 후인 1945년 9월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해체되었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북한 김일성도 창설 당시부터 이 부대에 소속되어 100여명 정도를 통솔하는 1대대 영장(대대장)으로 있었다.

88여단 소속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은 60여명이었으며, 해방 후 이들은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권력을 자손들에게까지 세습한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만주서 출생했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한 탓에 중국에 거의 동화된 의식 구조를 가졌고, 자신들끼리 대화도 중국말로 할 정도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박했다.[1] 한자로 된 이름도 러시아어로 적을 때 모두 조선 발음 아닌 중국 발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김일성은 한자 金日成의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2][3][4][5] 해방 당시 김일성도 중국말에는 능했지만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는 증언이 많다.[6][7]

이들은 만주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당원으로서 만주 적화를 위해서 투쟁했을 뿐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소련에서는 해방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한 바 없으며, 소련인들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 소련이 이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운 이유이다. 독자적 생존력이 있는 집단은 소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가능성이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주

  1. 해방후 귀국길에 오른 김일성 일행을 만주 무단장역에서 만났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四十(사십)명가량이 몰려있어요.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있었는데 그어투로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2.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3.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4.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179~185
  5.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6.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7.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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