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호머 헐버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최근 수정 : 2019년 10월 12일 (토) 21:16
 
1번째 줄: 1번째 줄:
[[파일:호머헐버트1.jpg|700픽셀|섬네일|가운데|호머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
[[파일:호머헐버트1.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호머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 class="wikitable"
 
{| class="wikitable"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font-weight:bold; background-color:#34cef9;" | 신상정보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font-weight:bold; background-color:#34cef9;" | 신상정보

2019년 10월 12일 (토) 21:16 기준 최신판

호머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신상정보
출생일 1863년 1월 26일
출생지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
사망일 1949년 8월 5일 (86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노환으로 병사
학력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대학원
경력 前 육영공원 교수, 前 연희대학교 특임교수(1946년), 前 한독당 국제외교행정특임고문(1947년)
정당 무소속
부모 캘빈 헐버트(아버지), 메리 우드워드 헐버트(어머니)
배우자 메이 헐버트
자녀 슬하 3남 2녀
종교 개신교 감리회
관련사이트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 양화진선교회 // SURE KOREA WILL FIGHT. H.B. Hulbert Says the People Are Being Made Desperate // '파란눈의 항일 투사' //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의 약력 // 한글 사랑한 미국인…'한글학자' 헐버트 재조명 //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 헐버트 // 헐버트 박사


개요

비방이 극에 달하고 정의가 빛을 잃은 이 때에 나의 큰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 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들에 이 책을 바친다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의 헌사, 1906년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호머 헐버트의 유언에서


호머 헐버트는 우남 이승만의 평생동지이자, 한글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정립하고 언더우드와의 치열한 논쟁끝에 여호와를 하나님(하느님)이라고 번역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교사 중 한명이다.

미국 버몬트 주 출신의 선교사였으며,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 1891년 12월에 귀국하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 하였다. 이 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특히, 1905년에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조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또한 대한민국의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 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관련내용).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받아갔다. 한글 학회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우남 이승만, 서재필 등의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생애

초년기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메리 우드워드이다. 1884년, 다트머스 대학교를 학사 학위하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하였다.


육영공원에서의 공직생활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는데,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1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헐버트는 1891년 여름 당나귀를 타고 아펜젤러, 모펫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 근교의 석탄 광산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아펜젤러와 모펫은 선교 정보를 얻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선교사로 재입국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방문하기 전까지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를 발행하였다. 헐버트 부인도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년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금서조치되어 일본 경찰에 의하여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한국독립운동 지원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 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 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분리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성을 호소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말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그에게는 두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첫번째는 통일된 한국을 보는 것이고 두번째는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것이었다.


사후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2014년, 한글날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 문화 훈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저서〈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저서

그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한글로 된 교과서 외에도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The History of Korea)'와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 편찬하여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

  • 대한제국멸망사 (1905)
  • The History of Korea (1905)
  • A Comparative Gramma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Languages of India (1906)
  • In Search of a Siberian Klondike
  • The Japanese in Korea: Extracts From The Korea Review (1907)
  • Omjee the Wizard(Korean Folk Stories) (1925)
  • The Face in the Mist (1926)
  •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 (57편의 각종 기고문, 논문 모음)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 (2016)-


상훈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같이 보기

이승만

언더우드

육영공원

사민필지

헤이그 밀사 사건

한글

참고 자료

'파란눈의 항일 투사'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의 약력

한글 사랑한 미국인…'한글학자' 헐버트 재조명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 헐버트

헐버트 박사


외부 링크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양화진선교회

SURE KOREA WILL FIGHT. H.B. Hulbert Says the People Are Being Made Desperate

최근 바뀜
자유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