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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 ==
== 3.1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ref><3.1운동과 한미 민간동맹의 기원>, 3.1운동을 보는 새로운 관점, 조성환, 2019, pp 13-17</ref> ==
=== 비교사적 관점 ===
=== 비교사적 관점 ===
3.1 운동은 구미국가들이 주도한 문명적 대전환기의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전하지 못하고 일제의 강점에 국권을 잃은 상태에서 [[우드로 윌슨|윌슨]]의 [[민족자결주의|민족(인민)자결주의]]를 수용한 지식∙종교계 민족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전국(全國), 만민(萬民)이 결집하여 일으킨 항일 만세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구미국가들이 주도한 문명적 대전환기의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전하지 못하고 일제의 강점에 국권을 잃은 상태에서 [[우드로 윌슨|윌슨]]의 [[민족자결주의|민족(인민)자결주의]]를 수용한 지식∙종교계 민족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전국(全國), 만민(萬民)이 결집하여 일으킨 항일 만세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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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 운동 ====
==== 민족주의 운동 ====
3.1 운동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조선 독립의 요구를 결집한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 [[독립협회]] 운동 이후 계몽되고 확산되어 간 개인의 독립과 자유 의식, 입헌주의의 도입 여론의 확산 등으로 3.1 운동 이전부터 [[현대문명]]의 사상적 각성이 전개되어 왔다. 1919년 [[임시정부]]의 성립, 1948년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은 바로 3.1운동의 자유 의식을 근본으로 하는 현대문명의 각성, 민주공화국의 정치의식을 이어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3.1 운동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조선 독립의 요구를 결집한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 [[독립협회]] 운동 이후 계몽되고 확산되어 간 개인의 독립과 자유 의식, 입헌주의의 도입 여론의 확산 등으로 3.1 운동 이전부터 [[현대문명]]의 사상적 각성이 전개되어 왔다. 1919년 [[임시정부]]의 성립, 1948년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은 바로 3.1운동의 자유 의식을 근본으로 하는 현대문명의 각성, 민주공화국의 정치의식을 이어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각주==
==각주==


[[분류:독립운동]]
[[분류:독립운동]]

2019년 3월 26일 (화) 11:32 판

3.1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부터 연말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한국독립을 외친 시위운동을 말한다.

1919년 3월 1일 아침 민족대표들은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100장을 탁상에 펴놓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열람하게 하였으며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이를 낭독한 다음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날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탑골(파고다) 공원에서는 각급 학교 학생·시민 약 5,000명이 모였고 정재용(鄭在鎔)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1] 이것이 3.1운동의 시발점이다.

관련 링크

3.1운동 DB 안내 국사편찬위원회

시위 참여자 및 희생자 수

3.1운동의 시위 참여자 수와 희생자 수는 문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종전에는 박은식이 1920년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나오는 수치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정확성에 의문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구축하여 2019년 2월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는 상당한 연구인력을 투입하여 조사한 결과가 나와 있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년)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인원은 약 200여만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집계한 수치인지 명확하지 않아 신뢰도에 의문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 (201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3.1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구축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는 시위 건수는 1692회이고, 자료에 나타난 시위참여 인원 총합은 최소 799,017명, 최대 1,030,073명, 사망자 수는 최소 725 명, 최대 934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2]

많은 연구 인력을 투입하여 당시 문헌들을 조사하여 얻은 결론이므로 실제에 상당히 가까울 것으로 맏어진다. 사망자 수는 최대 934 명 추정으로, 박은식의 저서에 나오는 7,509 명은 상당히 부풀려진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계속해서 자료를 발굴하고 추가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 하므로 위의 수치는 앞으로 다소 변경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르던 대규모의 사건이 새로 발견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다소간 변동이 있더라도 큰 차이가 나게 변할 여지는 없을 것같다.

희생자 수 때문에 벌어진 논란

국사편찬위원회가 2019년 2월 20일 공개한 연구결과를 청와대도 보고를 받았거나 사전에 알 수 있었을 것이나, 이를 무시하고, 3.1운동 100주년 대통령 기념사에서 당시의 시위로 인한 사망자 수를 검증되지 않은 박은식의 수치를 인용하여 일본이 크게 유감을 표하였다. 일본이 국사편찬위원회의 연구결과를 알고 이를 근거로 반격하면 정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충분한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주장들을 함부로 내놓고 우기는 것은 한국인들의 고질병으로, 국내의 대중선동에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해 왔으나, 국제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3.1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3]

비교사적 관점

3.1 운동은 구미국가들이 주도한 문명적 대전환기의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전하지 못하고 일제의 강점에 국권을 잃은 상태에서 윌슨민족(인민)자결주의를 수용한 지식∙종교계 민족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전국(全國), 만민(萬民)이 결집하여 일으킨 항일 만세 운동이었다.

3.1 기미독립선언서의 3대 테마는 △ 문명 속의 국가의 독립과 번영, △ 개인의 자율과 자유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의 비전, △ (조선∙중국∙일본) 삼국의 정립과 아시아평화의 핵심으로서의 조선의 독립이었다. 따라서 정치사로서의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을 주창한 항일운동이지만, 시대사적으로는 한국이 세계사에 합류하는 대사건이었으며, 문명사적으로는 우리가 현대문명(Modernity)의 정신세계(Geist)에 입문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 독립의 의지는 상해임시정부의 결성으로 항일 독립의 조직체를 결성하게 했고, 자주민의 선언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현대 정치체제를 선택하게 했으며, 인도(人道)와 평화의 원칙 천명은 현대문명국가의 보편적, 호혜적 비전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3.1 운동은 제국주의 시대 여타의 다른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과는 다른 문명사적, 비교사적 특성을 갖는다. 3.1 운동이 조직되고, 전국∙만민의 운동으로 확산되어 독립∙자주∙자유의 자유민주공화국의 건설의 정신적, 정치적 원천이 된 것은 일국사(민족사)나 사건사의 차원을 넘어선 문명사적, 세계사적 의미가 부여되고 비교사적 특성이 나타난다.

민족자결주의

윌슨민족자결주의는 동유럽, 발칸지역의 ‘민족 자결’(self-determination of people)에 국한되는 것으로서 4개 제국(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투르크)을 겨냥했다. 그 결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체를 겨냥한 일부 중동 지역의 국가가 독립되었다. 이러한 맥락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계몽엘리트와 종교지도자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세계사적 의미를 간파하고 독립∙자주∙인도의 원칙에 입각하여 항일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조선인의 전국적이고 지속적인 참여를 이끌었다.

중국의 5.4 운동 촉발

조선의 3.1 독립운동은 주변국, 특히 중국 5.4운동을 시켰다. 1911년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중화민국을 건국했으나 남북으로 분열되어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조선의 3.1 운동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격분한 신지식인과 학생들이 일으킨 5.4 반일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5.4 운동은 일부 도시지역의 대학생 그룹에 국한되었고, 단기간에 종료된 사건이었다. 5.4 운동의 좌절은 다른 한편으로 중국 신지식인의 급진화를 촉진하여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의 계기를 만든다. 중국의 5.4 반일운동의 주역인 신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반제국주의적 신문명의 서광을 자각했다. 5.4 운동은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이 점은 3.1 운동과 크게 다르다.

민족주의 운동

3.1 운동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조선 독립의 요구를 결집한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 독립협회 운동 이후 계몽되고 확산되어 간 개인의 독립과 자유 의식, 입헌주의의 도입 여론의 확산 등으로 3.1 운동 이전부터 현대문명의 사상적 각성이 전개되어 왔다. 1919년 임시정부의 성립, 1948년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은 바로 3.1운동의 자유 의식을 근본으로 하는 현대문명의 각성, 민주공화국의 정치의식을 이어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각주

  1.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2. 3.1운동 DB 안내 국사편찬위원회
  3. <3.1운동과 한미 민간동맹의 기원>, 3.1운동을 보는 새로운 관점, 조성환, 2019, pp 1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