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부터 연말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한국독립을 외친 시위운동을 말한다.

1919년 3월 1일 아침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 100장을 탁상에 펴놓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열람하게 하였으며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이를 낭독한 다음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날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탑동(파고다) 공원에서는 각급 학교 학생·시민 약 5,000명이 모여 정재용(鄭在鎔)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1] 이것이 3.1운동의 시발점이다.

관련 링크

3.1운동 DB 안내 국사편찬위원회

시위 참여자 및 희생자 수

3.1운동의 시위 참여자 수와 희생자 수는 문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종전에는 박은식이 1920년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나오는 수치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정확성에 의문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구축하여 2019년 2월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는 상당한 연구인력을 투입하여 조사한 결과가 나와 있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년)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인원은 약 200여만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집계한 수치인지 명확하지 않아 신뢰도에 의문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 (201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3.1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구축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는 시위 건수는 1692회이고, 자료에 나타난 시위참여 인원 총합은 최소 799,017명, 최대 1,030,073명, 사망자 수는 최소 725 명, 최대 934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2]

많은 연구 인력을 투입하여 당시 문헌들을 조사하여 얻은 결론이므로 실제에 상당히 가까울 것으로 맏어진다. 사망자 수는 최대 934 명 추정으로, 박은식의 저서에 나오는 7,509 명은 상당히 부풀려진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계속해서 자료를 발굴하고 추가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 하므로 위의 수치는 앞으로 다소 변경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르던 대규모의 사건이 새로 발견될 가능성은 없으므로 다소간 변동이 있더라도 많은 차이가 나게 변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희생자 수 때문에 벌어진 논란

국사편찬위원회가 2019년 2월 20일 공개한 연구결과를 청와대도 보고를 받았거나 사전에 알 수 있었을 것이나, 이를 무시하고, 3.1운동 100주년 대통령 기념사에서 당시의 시위로 인한 사망자 수를 검증되지 않은 박은식의 수치를 인용하여 일본이 크게 유감을 표하였다.

충분한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주장들을 함부로 내놓고 우기는 것은 한국인들의 고질병으로, 국내의 대중선동에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해 왔으나, 국제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