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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런 혁명의 결과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런 혁명의 결과이다.  
쿠데타는 수단이고 결과는 혁명이었다. 전자(前者)는 법률적 평가, 후자(後者)는 전자(前者)를 포괄한 더 넓은 의미의 역사적 평가이다.'
쿠데타는 수단이고 결과는 혁명이었다. 전자(前者)는 법률적 평가, 후자(後者)는 전자(前者)를 포괄한 더 넓은 의미의 역사적 평가이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守舊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 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盲信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 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 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적(守舊的)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 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 저서 ==
== 저서 ==
한강의 새벽-조갑제
한강의 새벽-조갑제

2018년 9월 1일 (토) 00:03 판

5.16 군사 혁명이라고도 한다.

||<-3><tablealign=right><#C0C0FF><:> 5.16 군사정변 || ||<:><#C0C0FF> 시기 ||<-2> 1961년 5월 16일 || ||<:><#C0C0FF> 장소 ||<-2> 대한민국 전역 || ||<:><#C0C0FF> 원인 ||<-2> 박정희를 필두로한 군부의 봉기 || ||<:><#C0C0FF> 교전세력|| 대한민국 국군(진압군) || 혁명군 || ||<:><#C0C0FF> 지휘관 ||<^|1> 윤보선 대통령 [br] 장면 총리 [br] 국방장관 현석호 [br]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br] 경찰총장 이태희 [br] 카터 매그루더 미군 사령관 [br] 제1군 사령관 중장 이한림 [br] || 박정희 육군 소장 [br] 김종필 대령 [br] 차지철 중령 [br] 정봉옥 준장 [br] 김신 공군군등 || ||<#C0C0FF><:> 동원부대 ||<^|1> 육군본부 [br] 제3야전군사령부 [br] 육군특수전사령부 [br] 미군8군단 [br] 헌병대 [br] 수도기계화보병사단 [br] 해공군 || 6관구사령부 [br] 33사단 [br] 30사단 [br] 6군단 포병대 5개 대대 [br] 제1공수특전단 [br] 해병대 제1여단 || ||<#C0C0FF><:> 결과 ||<-2> 쿠데타 진압 실패 || ||<:><#C0C0FF> 영향 ||<-2> 제 2공화국의 몰락과 군사 정권의 등장 ||


[youtube(XSFgb1mUAVI)] https://www.youtube.com/watch?v=XSFgb1mUAVI

5.16은 군부가 물리력으로 합헌(合憲)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점에서 쿠데타이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뒤 박정희 세력이 이 나라에서 한 일은 근대화 혁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런 혁명의 결과이다. 쿠데타는 수단이고 결과는 혁명이었다. 전자(前者)는 법률적 평가, 후자(後者)는 전자(前者)를 포괄한 더 넓은 의미의 역사적 평가이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守舊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 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盲信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 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 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적(守舊的)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 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저서

한강의 새벽-조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