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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의 토지수탈설 논박하기
최근 수정 : 2019년 8월 19일 (월) 10:17

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 TV의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강연.


앞으로 보여줄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이영훈,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3~43쪽을 기반으로 작성한 것이다.

(2) 그런데 이 글에서는 국사 교과서와 신용하 등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지만, 대중 독자들을 상대로 한 글이라 사례를 종합하여 설명하는 데 그친 감이 있다.

(3) 이에 집필자는 국사교과서나 신용하의 주장, 또는 이를 그대로 반복하는 특정 세력의 입장을 보여줄 만한 증거들을 수집하였다. 이영훈의 위의 글을 기초로 하되, 이들 증거들을 활용하여 토지 수탈설이 근거 없다는 점을 밝히려고 한다.

(4) 다소 전문적이지만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려는 학술 세미나 자료로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기를 권한다. 세미나 자료 후반에는 프리젠테이션 자료도 함께 제시되어 있으니 충분한 논박 증거로 활용 가능하다. 조석곤,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제도의 변화”, 한국개발연구원(KDI), 제3차 KDI-제도학회 공동 월례세미나 자료, 2010. 5. 27. http://kdi.re.kr/seminar/seminar_view.jsp?pp=10&pg=8&mseq=216

연관 검색어

토지수탈설, 동양척식주식회사, 산미증식계획, 조선토지조사사업, 토지조사사업,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인의 풍수 문화, 쇠말뚝 논란

국사 교과서의 40% 수탈설은 어디서 왔나

조선토지조사사업의 목적

1910년 ~ 1918년 사이 일제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때 전국 모든 토지의 면적과 지목, 등급, 지가(地價)가 조사되었는데, 총 면적은 2,300만 헥타르였다. 이 가운데 487만 헥타르가 생활 공간에 속하는 논, 밭, 대지, 하천, 제방, 도로, 분묘지 등이었고, 나머지인 1813만 헥타르가 산지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의 조선 병합은 위와 같이 산지가 대부분인 조선의 토지 중에서 그나마 쓸모 있다고 보이는 얼마 안 되는 토지를 빼앗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반도 전체를 그 부속 영토로 영구히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즉 ‘동화’ 정책의 하나로 한반도는 일본의 지역 일부가 되는 것이었고, 이와 같은 사정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 한반도에 부여된 국제법적 지위로도 확인되고 있다.

동시에 이 때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이루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地籍圖)는 현대 대한민국의 행정 기초 자료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지금은 도로명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함께 쓰이고 있는 동과 번지는 바로 이 때 만들어진 것이고, 여전히 이 번지제가 각종 공문서 처리나 행정 처리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초 주장자의 실체도 없이 반복되는 40% 토지 수탈설

붉게 표시된 부분에서, 1960년대 이래로 국사 교과서에 실린 40% 수탈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1990년 국정 교과서.



그런데 196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이 사업의 목적이 조선 농민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왔다. 1960년 역사교육학회가 만든 교과서에서는 농지의 절반이 수탈되었다고 했고, 1967년에는 전국 토지의 40%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다고 했다.


이런 서술은 1974년 국사교과서가 국정 교과서로 바뀌고, 다시 검인정 교과서로 변화한 2010년까지도 이어졌다.


기존의 40% 수탈설의 골자를 그대로 이어 받은 금성출판사의 검인정 교과서(2010). 파랗게 표시된 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수치는 어떤 연구자로 증명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누군지 모를 최초의 작성자가 이런 수치를 내세우자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역사의 진실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국사교과서의 서술은 2019년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의 홈페이지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 설명하는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의 해당 부분. 기존 교과서 서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지주들은 큰 혜택을 보아 식민지지주제가 정착하게 된 반면 실질적으로 토지를 경작해 왔던 다수의 농민들은 영세 소작민 또는 화전민·임금노동자로 전락하였고,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는 유랑 행렬이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게 되어 한국 내 최대의 지주로 자리매김했으며 재정수입 또한 크게 늘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라이브러리인 ‘우리역사넷’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입장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나, 우리역사넷은 수탈설 자체가 아예 검색 항목으로 메뉴화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소유권을 잘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토지의 소유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구별하지 못했으며, 당시의 농민들은 대부분 신고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신고 기간 또한 짧았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감정도 섞여 신고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렇게 신고되지 않은 토지가 (... 중략 ...) 국유지로 처리되어 조선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그 결과 1930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 총독부가 소유한 전답과 임야의 면적이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888만 정보나 되었다고 한다. (... 중략...)

한편 조선 총독부는 이렇게 획득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 회사나 일본인 지주에게 헐값으로 넘겨 주었다. (...중략...)

이처럼 조선 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은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의 확립이라는 일제의 선전과는 달리, 침략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자본의 축적과 쌀을 비롯한 각종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토지조사사업’ 항목의 집필자는 바로 신용하다. 이 글은 신용하가 주장하는 수탈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참고 문헌은 오직 집필자 그 자신의 집필 내용 이외에는 없다. 이 글에서 신용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고문헌도 없이 오직 신용하 개인의 연구 성과만을 담고 있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토지조사사업' 항목.


일제는 이러한 농민들의 민유지인 투탁지와 혼탈입지를 그들의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켜버렸다. 이 또한 일제가 농민들의 사유지를 무력에 의거해 빼앗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1910년 9월까지 일제가 강제 창출한 국유 농경지는 12만 8800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 중에서 국유지로 될 수 있는 제1종 유토역둔토가 약 3만 2100정보였다. 민유지를 무력으로 빼앗아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킨 면적은 약 9만 6700정보에 달하였다. 일제가 강제 창출한 국유 농경지면적은 국유지에 대한 토지조사가 완전히 끝난 1919년 2월에는 더욱 증가해 13만 7224. 6정보에 달하였다. 또 국유 농경지의 소작농은 무려 30만 7800여 호에 달하였다. 이것은 총농가호수의 약 10.7%, 순소작농호수의 약 28.7%에 해당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강제 창출을 통해 국내 최대지주가 되었고 동시에 가장 조직적으로, 무력적으로 소작농을 착취하는 지주가 된 것이다.


어지러운 숫자의 문제는 전문가들의 검증에 맡긴다 치더라도, 숫자 이외의 각종 사료로 객관화되어야 하는 부분이 기정사실인 듯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바로 ‘일제가 농민들의 사유지를 무력에 의거에 빼앗’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국정 교과서 또는 검인정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무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신고 절차가 까다로워 이를 놓쳐서’ 땅을 빼앗기는 결과가 야기되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그랬더니 총독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런 땅을 총독부의 소유로 하고 이를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 이민들에게 불하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수탈설의 신화를 벗겨내기

철저한 호적 신고 사회에 속한 조선 농민이 토지 신고를 몰랐다고?

중국 명나라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호적을 신고했다. 청나라에서도 호적을 신고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에 반하여, 조선왕조는 500년간 3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호적 조사를 놓친 적이 없다. 거꾸로 말하면 일반 백성들은 철저하게 신고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뜻이다.

‘땅 = 나’라는 인식을 가진 조선 농민이 해방 이후에도 땅을 빼앗긴 채 가만히 있었다?

한국인들에게는 땅이 곧 사람의 목숨줄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고, 이는 (그것이 사실에 입각하든 아니든) 많은 역사 소설 등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정신적 지향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인식은 구한말 조선땅을 밟은 선교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약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인식의 차원에 있어서는 땅에 대해 어떤 이 자신 또는 집안과 동일시하는 일종의 사유재산에 대한 인정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문화에서, 누군가 자기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농민은 없다. 조정래의 《아리랑》 4권의 한 부분에는 농민이 너무 화가 나 지주 대표를 밀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작품은 ‘수탈설(수탈론)’을 전제로 이런 사건을 삽입했지만, 이 농민의 행동 자체는 바로 사유 재산 내지는 자기 목숨과도 같은 땅을 빼앗기게 되는 처지에서 누구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 역설적이다.

게다가 만약 전 국민이 숨죽인 채로 자기 땅을 빼앗겼다고 치더라도, 해방 이후에 그 누구도 내 토지를 돌려달라고 소를 제기한다거나 관공서에 항의하는 등의 행동을 취했다는 사례가 보고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1945년이면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지 한 세대 즉 30년도 채 안 된 시점이다. 토지를 빼앗겼다 해도, 그 빼앗긴 사람들 또는 그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는 자녀 세대가 멀쩡히 살아 있을 만큼의 기간이다.

전국 토지의 40%나 빼앗겼는데도 해방 이후 누구도 나서서 수탈된 토지를 돌려달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은, 애당초 빼앗긴 게 없다는 뜻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다.

피스톨을 찬 토지조사원을 농민들은 오히려 반겼다는데?

위에서 본 것처럼, 신용하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사유지를 무력으로 빼앗았다고 하였다. 사실 이런 그의 주장은 오래된 것으로, 1979년에 나온 그의 책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한국연구원)에서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토지조사국 직원들이 실지조사를 나갈 때 권총(피스톨)을 찬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당시 조선을 방문한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증언과 같이, 조선은 산짐승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매우 큰 곳이었다. 그 뿐 아니라 많은 개인 문집 등에서 서울에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사는 수도 없이 발견되고 있고, 지금까지도 약 75세 이상의 노인들은 서울의 인왕산이나 북한산을 호랑이가 무서워 건너지 못했다고들 말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아무리 낮이라도 산속은 도적이나 건달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호신용으로 총을 차고 다녔던 것이다.

오히려 농민들은 처음에는 비록 이들을 경계했더라도 나중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토지에서 이름을 쓴 팻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앞서 말했듯 토지에 대한 소유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제3자의 정리와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토지조사는 임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장과 이웃 사람이 입회해서 땅의 주인을 확인해 준 뒤에야 이루어졌다. 또한 토지조사국은 조사를 마치면 토지대장 초본을 공개했다. 이미 호적 신고에 익숙해져 있던 농민들이라, 오히려 신고된 토지대장 초본을 보면 안심했다. 자기 이름이 적힌 초본을 누차 확인하고,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신용하는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책을 쓰면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선 군청이나 법원의 토지대장이나 지적도를 열람한 적도, 농민들이 제출한 신고서를 발굴하거나 정리한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수탈설은 우리 조상을 아무런 의식도 감각도 없는 존재로 만들 뿐

결국 수탈설의 논리적 구조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서로 뺏고 뺏기는, 죽이고 죽는 미개한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의식 구조에서 우리 조상들은 목숨과 다를 바 없는 땅을 빼앗기고도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있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어 버릴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의식 구조는 다른 한편 우리 조상들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풍수 감각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땅과 나를 하나로 연결되는 유기체로 인식하고, 이런 인식의 틀이 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보는 믿음이 독특한 윤리 의식으로 확대되어 간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쇠말뚝 신화다. 수탈설의 기저와 쇠말뚝 신화는 서로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문헌

  • 이영훈,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3~43쪽
  • 조석곤,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제도의 변화”, 한국개발연구원(KDI), 제3차 KDI-제도학회 공동 월례세미나 자료, 2010. 5. 27. [1]
  • 신용하, “토지조사사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 신용하,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한국연구원, 1979; 1982(제2판)
  • 민족문제연구소,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2018. 7. 16. [3]
  • 우리역사넷, “토지 조사 사업”, 국사편찬위원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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