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 ~ 2010년 12월 5일)는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며 1970,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에게 북한과 중공, 베트남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퍼뜨렸던 주역이다. 노무현, 문재인[1]386 친중 종북 세력의 사상적 대부이다.

생애

모택동(毛澤東)과 문화혁명 일방 미화(美化)
反美·대한민국 현대사 왜곡
386을 사상적 혼돈으로 인도
리영희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實在가 아니라 선전 문구였다.

성 李는 "이"로 표기하는 것이 국어 어법의 원칙이고, 대부분 이씨들도 이를 따른다. 그가 자기 성씨를 굳이 "리"로 표기한 것은 북한의 관례를 따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보는 《8억인과의 대화》

리영희는 중공문화혁명이 끝나고 그 피해 실상이 서방 언론에 이미 많이 보도되어 알려진지 한참 후에 한 일본 지식인이 오래 전 문화혁명에 대해 잘못 쓴 글을 굳이 번역, 소개하여 국내의 젊은이들이 중공에 관한 환상을 가지게 만들었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전 조선일보 베이징 특파원
리영희 선생은 ‘8억인과의 대화’의 머리말인 ‘읽는 이를 위하여’에서 “이 책은 현대중국을 <있는 사실 그대로> 알고 싶어하는 이를 위해서, 서방세계 저명인사들의 현지 체험과 기행문을 모아 번역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썼다. 선생은 이 책의 핵심 부분인 문화혁명에 대해 당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신문들에 유혈 참상이 소개된 마당에 왜 한 일본 지식인이 문혁 초기에 중국을 돌아보고, 문혁을 잘못 판단한 글을, 문혁이 종결된 뒤에 한국의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보여주겠다”면서 굳이 번역해서 소개했는지 모르겠다. 선생은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많은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이 소개한 문화혁명의 참상이 진실이 아니라고 본 듯하다. 그는 또 우리와는 오갈 수 없는 장벽 뒤에 있던 중국의 실상에 대해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8억인과의 대화’를 읽고 시각을 전환하기를 기대한 듯하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자신의 시각이 중국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끝내 고백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해서 여행이 자유로워진 뒤에도 ‘8억인과의 대화’ 수정판을 내지 않았다.

'소중화(小中華)'를 완성한 리영희의 제자들

친중의식화의 은사 리영희 : 김용삼 기자의 강연을 텍스트화 편집
노무현 대통령은 모택동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좌파들이 가장 존경하는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를 보면 그들 모두는 모택동주의자였다. 중국인이 직면했던 노예와 같은 삶과 집단처형과 학살 같은 사실은 보지 않고 존경을 표하고 모델로 삼겠다는 것이 바로 시대착오의 전형이자 대한민국 미래에 대한 위협이다.
⊙ 대학 시절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읽고 큰 감화, 운동권의 길로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발간되기 전에, 그 속에 담긴 〈베트남 전쟁〉 논문을 《창작과 비평》 잡지에서 먼저 읽었다. 대학교 1, 2학년 무렵 잡지에 먼저 논문 1, 2부가 연재되고 3학년 때 책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접한 리영희 선생 논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과 제국주의적 전쟁의 성격, 미국 내 반전운동 등을 다뤘다. 결국은 초강대국 미국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가 제시돼 있었고 명쾌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을 무조건 정의로 받아들이고 미국의 주장을 진실로 여기며 상대편은 무찔러 버려야 할 악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겨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논문과 책을 통해 본받아야 할 지식인의 추상(秋霜)같은 자세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진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여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것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진실을 억누르려는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노 변호사(노무현)도 리영희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다. 노 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 투신한 계기가 되었던 ‘부림사건’은 청년과 학생들이 수십 권의 기초 사회과학 서적 또는 현실비판 서적을 교재로 공부한 것이 빌미가 됐다. 기소 내용엔 ‘그 책들을 읽으면서 북한 또는 국외 공산 계열의 활동을 찬양·고무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노 변호사는 변론을 위해, 수십 권의 서적을 깡그리 독파했다. 그 가운데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도 있었다. 변호사로서 변론을 위해 읽은 책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은 셈이다. 이후 노 변호사는 더욱 폭넓은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게 됐고 그것을 통해 이른바 ‘의식화’됐다. 리영희 선생 책이 그 출발이었다.”

“그 후 우리가 부민협을 할 때 리영희 선생 초청 강연회를 두세 번 한 적이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리영희 선생에게 질문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 오류가 아니었는지’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오류였다. 글을 쓸 때마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는데, 그 시절은 역시 자료 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 그때는 정신주의에 과도하게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솔직함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이런 류의 책을 읽고 감동받아 그 노선을 따라 운동하던 유치한 수준의 젊은 시절 사고를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니, 복잡해진 세상사를 이해할 수 없어 외국 정상들을 만나서도 A4 용지 없이는 대화를 못하는 것이다.

저서

  • 《전환시대의 논리》 (1974년)
  • 《우상과 이성》 (1977년)
  • 《8억인과의 대화 :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 (1977년, 번역서)[3] : 모택동문화혁명을 미화

서평

평가

학자적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전직 국정원 직원 김평삼이 말하길 황장엽과 대담을 하게 자리를 주선했는데 황장엽이 북한 현실을 설명해도 전혀 듣지 않았다고 한다.

나무위키에서도 문혁을 찬양한 것을 당시 죽의 장막을 친 중국의 현실을 몰라서라고 했는데.

글쎄 인간이니까 실수를 할 수 있다. 틀릴 수도 있고, 근데 그 이후 진실이 밝혀지면 오류를 인정하고 생각을 교정해야 하는 게 학자적 양심인데 근데 끝끝내 자신이 사상이 잘못되어서 수많은 젊은이의 세계관을 오염 시킨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추구하는 건 오로지 진실이라는 둥 요딴 소리나 해댔다.


함께 보기

각주

  1. [다가온 대선(大選)] 문재인 傳奇 (2/4)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월간조선 2017년 2월호
  2. [한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뉴데일리 2010-12-07
  3. 3.0 3.1 《8억인과의 대화 :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 창비 1977년 09월 01일